12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을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00:00-05:00)
오늘은 요한복음 2장 마지막 부분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12절을 보시면 이런 표현을 해요. 본문 12절.
12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그 후에 라는 말은 앞의 기록된 사건을 받는 표현이죠.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앞에? 가나 혼인잔치. 다른내용은 다 접어두더라도 한가지 질문으로 확인을 하고 오늘 내용으로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의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은 기적이었나요? 표적이었나요? 표적이라고말씀을 드렸어요. 표적은 어떤 개념 차이가 있는가 하면 하나의 사인판과 같은 의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디를 향한 말씀이죠? 십자가를 향하는 죽음의 길을 향하는 사인판과같은 것이다. 그 후에 그 후에. 자 13절을 한번 보십시다.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여기 왜 하필 그냥 유월절이라고 해도 이해도 되고 못알아먹을 리 없을 텐데 유대인의 유월절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을까요? 요한이 이 글을 쓸 때는 조금 저의가담겨 있습니다. 요한의 인식에서 유대인이라는 의도적 표현은 긍정적인 뉘앙스보다는 사실 부정적인 뉘앙스가사실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유월절이라는 표현으로 시작된 이 이후의 이야기는 유대인들의 어떤부정적인 내면을 그려내고자 하는 시도를 했다 이것을 여기서 설명하고자 하는 거죠. 자 그러면 유월절은머냐? 유월절은 유대인들의 모든 절기의 절정입니다. 이 당시예루살렘의 평상 인구가 10만에서 많이 잡아야 15만을 잡습니다. 그런데 유월절 같은 대절기만 되면 50만명 가까이가 이곳으로 몰려들어요. 거의 네 배, 다섯 배 인구가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늘어나는 거에요. 그만큼 이 절기는 특별히 그 중에서 유월절이라는 절기는 유대인의 모든 삶이 녹아지고 중심의 절기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자 그런데 그 절기가 지금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올라가셨다고 표현되어 있죠? 여러분 올라갔다라는 말은 단순히 높낮이를 가리키는 지형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물론 예루살렘이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높낮이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사실은 이것은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삶의 중심으로 생각하는지를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거에요. 예루살렘을중심으로 그곳을 향할 때는 올라간다 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른 지형을 표현할 때는 내려간다는표현을 써요. 그래서 이것은 높낮이의 개념보다는 사실상 그들의 가치관을 담아낸 특별히 예루살렘을 얼마나전체의 삶 속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지를 잘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당연히 예수님도 유대인이니까 올라갔겠죠? 그런데 14절을 한번 보실까요?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두 집단을 봤어요. 희생제물로 쓰일 짐승을 파는 집단,장사꾼들을 보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 환전상인들을 봤어요.그래서 15절에 보시며 예수님이 채찍을 만드십니다. 그리고휘둘러 그것들을 다 몰아내시고 상을 엎죠. 자 우선 오늘 내용으로 들어가기에 앞서서 이 사건의 위치를좀 먼저 염두 해 두었어도 좋을 것 같아요. 성경에는 성전 보통 청결사건, 정화사건 그러는데 그건 좀 표현이 틀립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게하기 위해서 일으킨 퍼포먼스가 아니에요.
(5:00-10:00)
이것은 성전 청결이나 정화사건이 아니고 성전 척결사건입니다. 척결이라는 말은 제거하다파멸하다 없애버리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이런 껍데기만 남은 종교는 이제 종막을 고해야된다는 선언을 하는 사건이지 이걸 뭐 어떻게 깨끗하게 해가지고 다시 개선을 시키자 그런 의도가 여기 전혀 녹아져 있지가 않아요. 그래서 성전 척결이 맞지 성전 청결은 옳은 표현이 아니죠. 그런데성경에는 사복음서가 있어요. 마태, 마가, 누가 이거를 공간복음이라고 하죠. 여기에도 이 사건이 고대로 기록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과의 차이가 있어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중에 마태, 마가, 누가 공간복음 기자는 이 사건을 십자가죽기 전에 직전의 사건으로 시간대를 배열해 놨어요. 그런데 요한만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일어났던 사건으로이렇게 초기에 배치를 해놨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학자들이 아 예수님이 성전 척결사건을 두 번 하셨나보다 이렇게 이해를 가졌던 적도 있어요. 저도 그런 글 들을 많이 봤고. 왜냐하면 시간대가 너무 다르니까.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서 학자들의합의된 대체적인 견해가 뭐냐 하면 이거는 한번 있었던 사건이다. 그러면 둘 중의 하나는 오류가 있고틀리다 는 얘기에요. 그런데 다 맞아요. 왜냐하면; 기술의 관점이 다른 거에요. 시간대로는 세 공간복음 기자의 기록이예수님 십자가 직전에 일으켰던 사건으로서 맞아요. 시간대는 그게 맞아요. 그럼 문제는 무엇 때문에 요한 기자만은 마치 그 사건이 예수님 사역 초기에 있던 사건처럼 기록을 했을까? 이 기록을 시간적 배열이라기 보다는 의미적 배열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의도를 가지고 앞에다 배치를 해 놓은 거에요. 그 의도가 뭘까요? 자, 아까 오늘 이야기가 그 후에라는 말로 시작이 되었다 그랬죠? 다시말해서 첫 번째 표적은 행복해야 될 혼인잔치가 포도주가 떨어짐으로 끝났어요. 중단이 된 거에요. 비통과 슬픔과 죄악이 들어오고 행복이 중단이 된 겁니다. 그 잔치에예수님이 초대되어서 그 회복을 위해서 이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이 첫 번째 사건이에요. 그러니까첫 번째 사건에서 강조했던 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참된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에 대한 목적 진술이라면 두 번째 표적인이 성전척결사건은 그래서 그분이 어떤 방법으로 그 행복을 회복 하실 건가 어떤 수단으로 그 중단된 인류의 행복을 고쳐낼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이두 번째 표적인 성전 척결사건입니다. 그래서 저 뒤쪽에 있어야 될 시간대를 무시하고 의미적 나열을 위해서어디다 끓어 놓은 거에요? 이 앞부분에다 끌어 놓은 겁니다. 여기까지이해가 되죠? 반응이 왜이래요? 어렵나요? 예, 어려울 꺼 없어요. 혹시이해가 안되면 이 4부 예배 설교를 인터넷에 올릴 테니까 그걸 다시 한번 들어보시면 정확하게 이해가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정리를 합시다. 공간복음세 기자는 시간대별로 기록을 한 것이고 요한은 이것을 표적의 연속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의미적으로 배열을 한 것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되요. 자 이제 내용으로 들어가십시다. 14절. 그 안에서 예수님이 어떤 광경을 만났는데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자 앞을 보십시다.
(10:00-15:00)
여러분 소, 양, 비둘기는 무슨 용도죠? 여기서 적어도? 그렇죠. 제물용도에요. 그런데 제물을 사고 파는 게 뭐 잘못됐나요? 왜냐하면 근처에 사는사람들은 집에서 준비해가지고 오기가 쉬워요 수월해요. 그런데 이 때는 각 해외에서 다 몰려옵니다. 그러면 제물을 준비한다고 집에서 출발할 때는 싱싱하고 건강했는데 그때 모든 교통수단이 뭐 있었어요? 며칠씩 걸려서 도착을 하게 되다 보면 제물이 상해요. 어떤 건 눈이충혈되고 어떤 건 다리가 상해서 제물로 가치가 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항상 성전 입구에는 제물을 검사하는검시관이 있어요. 그래서 눈알을 먼저 봐요. 이건 제물로서온전하지가 않아. 돌려보냅니다. 그러면 이들이 어디서 그제물을 다시 갑자기 구합니까? 그래서 바깥에는 그런 제물을 준비토록 하기 위해서 사고 파는 장사가 진행되고있었고 시장이 형성되고 있었어요. 그러면 그 장사와 그 시장은 잘못된 겁니까? 사실상 정당한 겁니까? 정당한 거죠. 장사 자체가 나쁜 건 아니죠.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왜 문제가 됐냐하면 그 시장이 지금 어디 안에 들어와 있는 게 문제에요? 그렇죠. 성전안으로 들어와 있는 게 문제에요. 자 그러면 이게 왜 갑자기 성전 안에 들어와 있지? 시장이? 여기에는 기막힌 그 시대의 종교기득권층들의 이권이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자 제사장들이 이러다 보니까 이 시장을 안에다 설치하면 훨씬 수익의 문제에 있어서낫겠다 싶어서 입구에서 검시관들이 별별 핑계 다 대서 제물에 대해서 꼬투리를 잡는 겁니다. 이 털 색깔이왜이래? 다리가 좀 이상한데? 그러면 일단 제물로서 가치가떨어지는 거에요. 그러면 갑자기 그들이 평소 때 같으면 바깥에서 마켓에서 시장에서 제물을 구입했을 텐데그것이 안에 들어와서 안에 형성된 시장에서 준비하다 보면 그 고스란히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갈까요? 성전기득권층들에게 돌아가는 겁니다. 성전 안에는 당시 제사장, 레위인합해서 한 2만명이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다 먹고살아야 되요. 그래서 이들은 또 환전상을 안에다 설치합니다. 웬돈 바꾸는 사람이 여기 있을까? 자 이 시대가 로마시대에요. 그러면통상화폐가 어디 화폐일까요? 로마화폐입니다. 그러면 로마화폐안에는 누구의 형상이 그려져 있죠? 가이사의 형상이 그려져 있어요. 그러면그 로마주화에는 뭐라고 쓰여져 있는가 하면 가이사는 주님이십니다. 자 이 화폐를 유대인들이 쓴다는 것은누구에게 배역하는 일이 됩니까? 하나님께 배역하는 일이 되요. 그래서로마정부가 이 까탈스러운 유대인들을 위해서 다른 화폐를 만들어요. 그래서 가이사의 형상을 지우고 거기다가갈대를 그려 넣습니다. 요한이 세례 받고 회개하러 오는 백성들을 향해서 이야기하는 내용 중에 너희가무엇을 보러 나왔더냐 갈대를 보러 나왔더냐?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러 나왔더냐? 거기서 말하는 갈대가 뭐 저 들판에 휘청거리는 갈대를 얘기하는 게 아니고 돈을 얘기하는 거에요. 너희가 돈 때문에 나온 거야? 그 질문을 하는 거에요.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러 나오느냐? 왕궁에 있느니라. 권력자들을 향해 하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요한의 이야기는 이런 거에요. 너희 왜 나왔냐? 뭘 보러 나왔냐?돈 때문에 나왔냐? 권력을 탐하러 나왔냐? 이지적을 하고 있는 거죠.
(15:00-20:00)
자 그런데 하물며 성전에 나와서 드려지는 헌금을 하는데 로마의 주화를 사용할 수는 없어요. 유대인들의철칙이에요. 그래서 성전 안에서 통용되는 화폐를 다시 만들어요. 그게세겔입니다. 세겔은 성전 화폐에요. 그걸 로마 당시 통상화폐와바꾸면서 소위 환전을 하는 거죠. 그러면 환전을 하다 보면 뭐가 떨어질까요? 수수료가 있고 환 차이가 생깁니다. 그러면 거기서 잉여 되는 재정규모가장난이 아니에요. 이런 기득권을 중심으로 한 이익 메커니즘이 여기 안에 이미 광범위하게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걸 누가 본 거에요? 예수님이 본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광경을 보고 우리말처럼 뚜껑이 열려가지고 갑자기 소동을 피운 게 아니에요. 유독 요한 기자만 그걸 섬세하게 어떻게 묘사를 했는가 하면 15절을볼까요? 이렇게 돼있어요.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앞을 보세요. 그럼이게 갑자기 일어난 우발적 분통입니까? 의도적 계획적 사건입니까? 계획적사건이에요. 이거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작정을 하고 일으킨 일입니다. 자 그런데 15절을 다시 보세요. 노끈으로 뭘 만드셨다고 되어 있죠? 채찍을 만드셨다고 되어 있어요. 마가복음 15장 한번 띄워주세요.읽습니다. 시작.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소름 끼치게도 여기 예수님이 만들어 내쫓을 때 쓰던 짐승들을 내몰 때 쓰던 채찍이라는 단어와 여기 예수님이 스스로 희생 제물이되어 십자가에 죽을 때 빌라도가 손에 든 채찍과 단어가 정확하게 같은 단어에요. 여기에는 두 가지의시각이 깔려 있습니다. 첫째는 첫째는, 자 이 장소가 지금어디죠? 성전이에요. 성전의 핵심가치는 뭡니까? 제사에요. 제사의 핵심가치는 뭡니까? 제물이에요. 맞죠? 그런데그 제물로 쓰여질 짐승들을 예수님이 채찍을 만들어서 내쫓아요. 그러면 제사의 가장 핵심가치인 희생제물이내쫓기는 겁니다. 그럼 그 제사는 뭐 없는 제사죠? 제물없는 제사. 제물 없는 제사는 성전을 어떻게 묘사하고 싶었던 거죠? 우리애들 말로 앙꼬 없는 찐빵, 속 빈 강정. 같은 얘기입니다. 그 당시 유대종교가 얼마나 껍데기만 붙들고 있고 껍데기만 남았는가를 예수님이 채찍을 휘둘러 희생제물을 내몰면서설명하고 싶었던 거죠. 동시에 이 퍼포먼스 속에는 진짜 제물이신 참된 제물이신 자신이 마지막 인류의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어떤 죽음으로 죽을 것인가를 이런 방식으로 설명을 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첫 번째 표적은 행복이 중단된 인류를 위해서 내가 참된 신랑으로 이 중단된 혼인을 회복하기 위해서 왔다. 그거를그러면 어떻게 회복하게 하실 건가를 설명하는 게 바로 이 두 번째 표적입니다. 성전을 척결하신 사건이에요. 십자가에 죽는 방식으로 나는 죽으러 왔다 그 말이에요. 그래야만이인류가 중단된 행복이 회복 케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거죠. 자 그 다음 성경을 보십시다. 16절 다같이 읽을까요? 시작.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자 예수님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드러나요. 내 아버지의 집으로 뭐 하는 집으로만들지 말라? 다시 여쭤볼게요.
(20:00-25:00)
아까 제가 장사자체는 정당한 거라 그랬습니까? 정당치 않은 거라 그랬습니까? 정당한 거라 그랬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가 문제죠? 이 장사의 위치가 문제에요. 지금 장사의 본질은 뭡니까? 장사의 본질은 이윤을 남기고 이득을 남기는 거에요. 세상에 몇 가지거짓말이 있죠? 연세 드신 분들이 빨리 죽어야 된다는 말하고 처녀들이 시집 안 간다는 말하고 또 하나장사하는 분들이 남는 게 없다는 말, 눈물의 바겐세일. 그런건 없어요. 장사의 본질은 이윤창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뭐냐 하면 그것이 지금 어디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애기에요? 성전 안에서. 하나님만 순전히 바라고 예배해야 하는 장소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중심으로 이윤추구가 벌어지고 있어요. 과연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물을게요. 이 일은 2천년전 이 성전에서 일어난 일로만 국한된 사건일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오늘도 이 예배의 공간에서 내 심령의 공간에서 계속 반복적으로 벌어지고 일어나는 일이에요. 심지어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해야 하는 기도의 순간에도 이 거래는 이루어지고 있어요. 장사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요. 2천년이 지났지만 이 일은 끊임없이반복되고 있어요. 이거 중단해야 된다는 이야기에요. 장사가중단이 되야 되요. 적어도 우리의 참된 신랑을 향하여 참된 아버지를 향해서 우리가 예배자로 서는 순간에는이 장사가 중단돼야 되요. 이 거래가 멈추어져야 되요. 그런데우리는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기도라는 허울로 계속 끊임없이 자기의 이윤추구에만 바쁜,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집으로 만들고 마는 이런 행위를 우리는 지금도 일관되게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을볼까요? 그 이야기를 어떻게 종합하냐 하면 17절, 오늘 모든 설교의 가장 중심부에 이르렀습니다. 다같이 읽어봅시다. 시작.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자 이 본문 쉽지 않아요. 두 가지를 먼저 설명을 듣고 이해를 가져야 되는데 이 말은툴이 어떤 툴을 갖고 있느냐를 이해해야 되고, 그 내용이 뭘 말하는가를 이해해야 되는데 우선 이 말은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에요. 이 말씀은 제자들이 뭘 기억한 거에요.그렇게 돼 있죠? 17절 다시 보세요. 제자들이그리고 끝에 기억하더라. 제자들이 뭘 기억했을까요? 마저읽어봅시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자 앞을 잠깐 보십시다. 여기 성경이라는 표현이 등장을 해요. 그런데 여기 단수로 썼어요. 그러면 성경을 말할 때 이 당시 성경은 신약이 있었나요? 없었나요? 없었죠. 기록되기 전이에요. 구약성경을얘기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얘기 할 때 복수로 써야 되요. 그런데여긴 단수로 썼어요. 그러면 어떤 구절을 얘기합니다. 그구절이 뭐냐 하면 나오죠?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제자들이 뭐한 거죠? 기억한 거에요. 자 앞을 보십시다.이렇게 된 거에요.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시자마자 어떤 모습을 보시고 분노하셔서 채찍을만들어가지고 상을 둘러 엎으시고 그 채찍으로 장차 자기가 겪을 퍼포먼스를 희생제물을 채찍질하여 쫓음으로 분노를 표현하셨어요. 제자들이 그걸 보고서 구약의 성경 한 구절을 기억한 거에요.
(25:00-30:00)
아 그렇구나 그 시편에 기록된 그 성경이 바로 이 순간 저분을 통해서 완성되고 있구나 그러니 얼마나 경이로운 일이었겠어요? 그래서 우리는 원문을 좀 한번 보자 고요. 시편 69편 8,9절을 한번 띄워주세요.
8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어떤 사람이 되었나이다? 자이거 누굴 가리키는 걸까요? 예수님 자신이에요. 자 우리요한복음 2장 앞부분에서 첫 표적에서 가나혼인잔치에 초대된 예수님이 어머니에게 뭐라 그랬죠? 뜬금없이? 귀나이. 여자여. 낯선 사람이 된 거에요. 여기서 내가 라는 말은 오실 그리스도를가리키는 말이면서 그렇게 역사 속에 실제로 찾아오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낯선 사람이 되었어요. 그러면서 9절에 이런 표현을 씁니다. 9절.
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제자들이 기억한 본문이 이 본문이에요. 그 말이 요한복음에 오늘 인용되어 있죠? 제자들이 기억한 본문이 이 본문이에요. 그 말이 요한복음에 오늘인용되어 있죠? 제자들이 이 말씀을 기억했어요. 아 시편에다윗의 글에 기록된 그 그 일이 지금 여기서 실현되고 있구나. 깜짝 놀란 거에요.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이건 예수님이 지금 아버지의 집인 성전을너무 흠모하고 사모하고 그 사모함이 뭘로 나타났죠? 열정으로 나타났어요. 그 열정이 뭘 삼킨 거에요? 자신을 삼켜버린 거에요. 그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아버지의 참된 집인 성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기가 이렇게 하면 이 유대인들에게공분을 사고 목숨이 위험할 것을 아셨을까요? 몰랐을까요? 당연히알았죠. 앎에도, 자기가 무너지는 걸 알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열심이 그것을 넘어섰다 그 말이에요. 자기가 죽음의 길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뻔한대도 그걸 덮어버리고 말았다, 삼켰다그 말이에요. 제가 작년에 우리 청년들하고 중동에 R국가를갔었어요. 시리아 난민들이 수십만 명 넘어와 있어요. 그산맥 밑에 어마어마한 텐트 촌이 펼쳐져 있습니다. 딱 갔더니 선교사 한 분이 난민 소녀 둘을 제가 오면세례를 베풀겠다고 준비를 하고 있더라고요. 예배를 드리고 그 소녀를 앞에 나오게 해서 세례를 주는데잠시 세례가 잠깐이긴 하지만 중단이 되었었어요. 왜냐하면 거긴 다 침례를 합니다. 저도 침례라는걸 처음 해 봤는데 이렇게 딱 뉘어가지고 물에 담그려 그러니까 이 여자아이 몸이 딱 경직이 되면서너무 바들바들 떠는 거에요. 이걸 진정 시킨 다음에 해야 되겠다 싶어서 잠시 멈췄다가 결국 침례를 하고모두가 기도해주고 축복해주었던 잊지 못할 기억이 있어요. 거기서 제가 참 감동을 받았던 것은 이 여자어린아이의 두려움이에요. 여러분 걔네들이 신앙을 바꾼다는 것은 어떤 일인지 아십니까? 그냥 우리처럼 절 나가다가 교회 나가는 정도가 아니에요. 목숨을걸어야 되는 일이에요. 집에서 쫓겨나고 평생 살아가면서 그 공동체의 무시무시한 탄압과 불이익을 각오해야되는 일입니다. 왜 안 두려웠겠어요? 왜 무섭지 않았겠어요? 그럼에도 그 두려움과 다가올 고난과 그 박해를 뛰어넘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기에 그 침례를 감행했던 겁니다. 똑 같은 얘기에요.
(30:00-35:00)
이렇게 하면 유대인들에게 공분을 사고 탄압을 받고 십자가를 향하여 죽을 것을 예수님은 압니다. 그런데아버지를 향한 열심이 그것을 능히 삼키고도 남기에 이것을 하는 거에요. 이것은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굉장히 중요한 신앙의 원리로 들어와야 해요. 우리가 직장인으로서, 캠퍼스에서, 일반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이런 갈등 앞에 맨 디밀어지잖아요. 어떻게하나? 내가 조금만 눈감아버리면 나도 편하고 단 열매도 생기고 가족에게도 이익이 되는데 그러나 이것을또 하나님의 원리를 붙잡고 살아가기엔 너무 겁도 나고 두려워요. 나 하나 이런다고 뭐 세상이 바뀌는것도 아닐 텐데… 별의별 생각이 갈등이 매일 밀려와요. 그럴때 두렵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제가 거기서 은혜를 받은 것은 그 아이들이 너무 무서워하더라고요. 너무 두려워하더라고요. 몸이 빳빳하게 굳어가요. 겁이 나가지고. 그런데도 우리는 물어봤어요. 그래도 받을래? 받겠대요. 무서운데힘들어지는 것을 아는데 주를 향한 그 고백을 멈출 수가 없는 거에요. 얼마나 감격이 오던지… 예수님이 똑 같은 심정이에요. 그것이 오늘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주님이 요구하시는 삶의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우리가 마무리 부분을 좀 들어가서 보도록 합시다. 18절.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자 유대인들이 뭘 보였죠? 표적이라고 그랬는데 사실 이 표적은 우리 성경신학적으로의표적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이적을 얘기하는 거에요. 이적. 풋노트에도보면 뭐라고 되어 있죠? 이적이라고 되어 있어요. 1 하고관주에 보니까 또는 이적이라고 되어 있죠?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유명한 말씀 19절을 다 함께 읽어볼까요? 시작.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여러분 예수님이 표적을 보여달라는, 아니 이적을 보여달라는 그들에게 성전을 헐라 그랬어요.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는 표적을 보여주겠다. 그런데 여기사용된 단어가 굉장히 해학적인 말놀이입니다. 왜냐하면 헐라 라는 말은 사실 죽여라 그 뜻이에요 .날 죽여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어떻게 하리라? 일으키리라. 여기 원래 표현은 일으키리라는 단어를 써선 안 되요. 사흘 만에 헌다 그랬으니까 짓는다 라는 건축용어를 써야 되요. 그짓는다 라는 건축용어가 오이코도메오 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쓰지 않았어요. 오히려 일으키리라는 부활의 용어로 썼어요. 에게이로. 정확하게 에게이로. 예수님이 육체로 일어날 때 사용된 부활의 용어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누구를 가리킨 건가 하면 보이는 건물을 헐면 내가 삼일 만에 재 완공 하겠다 그 뜻이 아니라뭘 가리킨 거에요? 자기 육체를 가리킨 거에요. 몇 절을보시냐 하면 21절을 볼까요?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제 이런 눈에 보이는 가견적인 성전은 의미가 없다. 왜? 참된 성전인 내가 왔기 때문에. 자기를 가리킨 거에요. 근데 문제가 있어요. 이 표적을 말씀하셨는데 표적을 요구한 사람들은정작 표적을 얘기하니 알아 들었다 못 알아들었다? 못 알아들었다. 깨닫지도못했다. 깨닫지 못했어요. 그런데 마지막 22절을 다같이 읽고 설명을 듣겠습니다. 시작.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참 여기에 묵직한 감격이 있어요.
(35:00-40:00)
제자들은 언제가 한 박자 늦어요. 이 모든 진리를 말씀하실 때는 못 알아 들어요. 까막눈이 되가지고 뭔 소린가 해요. 그런데 항상 그것이 성취되고이루어지고 나서야 제자들은 한 박자 늦게 아 그때 그 말씀이 이 말씀이었구나. 더 중요한 것은 한번도예수님은 인내를 멈춘 적이 없어요. 집요하게 끝까지 기다리세요. 그리고결국 그 까막눈들을 눈을 열게 하시어 새로운 공동체로, 새로운 성전으로 묶어주시죠. 우리가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지어져 가고 새로운 성전이 된 겁니다 .믿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주신 이 말씀이 또 한 주를 살아가는데여러분들에게 세가지 원리로 자리잡길 바랍니다. 첫째는 내 안에 참된 성전 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머물러 있는 예배자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종교라는 빌미로 여전히 장사하고 있는 내용은 없는가? 이참된 성전마저도 장사하는 집을 만들고 있진 않는가? 지금 내가 이렇게 아버지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다보면 이 길이 고난이 예고되고 핍박이 오고 내게 불이익이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순종은 그것을 주를 사랑하기에 넘어서고 삼킬 수 있는 고백이있는가? 결단이 있는가? 당장은 깨닫지 못하고 더디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끊임없이 나를 향해서 찾아오시고 기다리시고 참된 성전으로 묶어주시는 그 사랑 앞에 이 한 주도 떠밀려가서 주님 앞에 묵묵히 그 은총을누리고 살아내는 순종과 결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