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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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오늘은 요한복음 10장을중심으로 해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양과 목자의 관계를 소개하겠는데요. 두 파트로 나눠져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는 양과 목자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팩트를 말씀하셨는데 6절에보니까 바리새인들이 이걸 못 알아 들어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해서7절서부터 예수님이 18절까지 아주 긴 본문을 통해서 그것을다시 해설해 주시고 설명하시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설명을 할 텐데 팩트부분의 한 절을 읽고 이것을 예수님은 설명 부분에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이렇게 교차 방식을 통해서 설명을 드릴 겁니다. 자, 우선 요한복음 10장첫 절을 볼까요?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사람들을 뭐라고 여기 표현되어 있어요? 절도 강도. 그리고 2절을 한번 같이 읽읍시다.시작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당연히 여기 양의 목자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은양이 자기 양이니까 도둑처럼 담을 넘을 이유가 없고 어디로 들어가신다고 되어 있어요? 문으로 들어가신다고되어있어요. 그래서 나는 양의 목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그런데 왜 절도며 강도라는 표현을 했는가 하면 이들의 상태를 해설 부분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소갤 했네요. 11절로 가보면 이제 해설 부분입니다.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오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또 헤치느니라
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선한 목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와 대비 돼서 강도며 절도는 와서 양들을 죽이고 빼앗아 헤치고하는 역할을 해요. 자, 그런데 여기에 이제 삯꾼이라는 표현이등장을 하죠. 이것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삯꾼에 부어진 과도한 오해를 먼저 걷어내고 이 본문이 정말말하고 싶은 본의가 무엇인지를 본문의 의도에 가깝게 접근해 보는 작업을 좀 같이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어느 가정에서나 열 마리 안팎의 양들을 다 키워요. 여러 가지 목적이 있겠지만 생계 수단으로도 양을기를 수 있겠고 또 특별히 절실한 필요는 겨울이 오면 추우니까 식구들마다 털옷을 입어야 하는데 그걸 양에서 취합니다. 해서 이들은 집집마다 아무리 어려워도 양들을 다 몇 마리씩 가지고 있어요. 평균열 마리 전후로. 그런데 문제는 20마리씩, 30마리씩 그 이상으로 양을 가지고 있는 집안은 형편이 사는 집안이겠지요? 그래서그런 집안들은 많지 않아요. 0.1%도 안 되요. 그런 집안은양만 따로 치는 목자를 고용해서 생활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을 텐데 99%의 대부분의 집안은 그 몇마리 안 되는 양을 키우기 위해서 목자를 고용해서 돈 주고 살 여유가 없단 말이에요. 그런데 양들은키워야 되고 그래서 어떡하나 하다가 공동체를 워낙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 관습 때문에 이들이 마을 주변에다가 공동 우리를 만듭니다. 각 가정마다 많은 돈 안 내도 십시일반으로 조금씩 모아서 그 공동 우리를 관리 할 수 있는 목자를 고용을 해요. 그러면 이 사람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공동 우리를 관리하고그 우리 안에 들어오는 양 떼들을 지키면 돼요. 자, 그런데이들에게는 항상 세 가지 위험이 외부로부터 상존합니다. 첫째는 밤이 되면 이 양떼를 훔치러 노리는 도둑들이있어요. 펜스가 좀 높은데 거기다 사다리를 놓고 펜스에 유리 조각이나 쇳조각을 얹어 놔도 그걸 넘고들어옵니다. 그리고 양들을 가져가곤 하죠. 그러니까 마을로내려와서 양떼를 데려가고 또는 헤치는 그런 강도들이 있어요. 또 하나의 강도는 바깥의 강도가 있습니다. 낮 시간 같은 데는 양떼를 데리고 들판으로 풀을 먹이러 나가겠죠 .그러면동굴이나 계곡 같은데 숨어 있다가 지쳐서 후미진데 떨어져 있는 양들을 훔쳐 가거나 데려가는 강도들이 있어요. 이게이제 두 번째 위험이에요 .그리고 세 번째 위험은 맹수들입니다. 19세기까지만해도 이 양떼를 주로 어떤 짐승이 물고 갔는가 하면 표범, 퓨마, 사자그리고 가장 흔한 맹수들이 이리떼들입니다. 떼로 몰려 다녀요. 이리는. 해서 그냥 그 방어 능력이 없는 양 떼를 헤치거나 물고 가곤 합니다. 이양들은요 굉장히 겁이 많고 눈이 나쁘고 신경질적이고 우리하고 똑같아요. 그런 양의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항상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공동 우리를 만들어서 목자를 고용해서그걸 지키도록 하는 겁니다 .자, 그런데 성경을 보시면 12절을 보세요.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물고 가고 또 헤치느니라
앞을 잠깐 보실까요? 이 삯꾼에 대해서우리가 과도한 오해를 거둬내겠습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상을 상세하게 담은 미쉬나라는 책이있어요. 이 미쉬나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도움이 되는 교제입니다.그런데 이 미쉬나에 보면 어떤 내용이 있는가 하면 삯꾼에 대해서 이런 설명을 합니다. 삯꾼은말 그대로 돈을 주고 돈 때문에 고용이 된 사람들이에요. 이 때 어떤 마을의 관례가 있는가 하면 이목자가 양을 지키다가 이리떼가 오면 한 마리까지는 방어를 해요. 그런데 이게 두 마리 세 마리가 되면, 양이 중요합니까? 자기 생명이 중요합니까? 정직하게 대답하세요. 그래도 양이 중요해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다시, 양이중요합니까? 자기 생명이 중요합니까? 자기 생명이 중요하죠. 그래서 두 마리 이상 방어할 수 없을 경우가 발생할 때는 그냥 도망 가도록 되어 있어요. 그래도 그에게 그를 고용한 마을 사람들이 손실에 대한 책임이나 양의 피해에 대한 책임을 변상하지 않아도 되는문화적 관례가 있습니다. 왜? 목숨이 더 중요하니까. 그러니까 여기 너무 이런 삯꾼 같은 놈,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너무 지나친 과도한 편견 때문에 그래요. 정확하게 삯꾼은 고용된 계약된 사람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감당해야 될 분복이 넘어갈 경우에는 자기 목숨이 소중하니까, 그게정상이고. 도망가도 마을 공동체 그를 고용했던 사람들은 그에게 어떤 책임도 못 묻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게 마을의 이 양을 치는 사회의 관습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과연삯꾼은 못된 인간 이라는데 초점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그 당시에 평범한 문화였어요. 그런데 그 앞에 초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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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제가 읽습니다.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뭐를 버리거니와.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것도 정직하게 한번 생각을 하셔야 해요. 집에 키우는 개가 참예뻐. 요즘은 개가 거이 가족 아니에요. 그래도 그 개를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어요? 가능해요? 아무리 개가예뻐도 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건 그건 아니죠. 저희 집에 4남매가있는데 막내가 지금 전주에 목회를 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개를 너무 예뻐해요. 제가 잊을 수 없는 편지 하나가 얘가 군대 가서 집에 처음 편지를 보내는데 제일 윗줄에 집안에 루비는 잘 있는지요? 집에 나도 있었어요. 우리 어머니도 있었고. 그만큼 개를 사랑하고 좋아해요. 그런데 저는 그 당시, 요즘은 안 먹지만 그 당시는 먹는 것 쪽으로 좋아했어요. 그리고이렇게 애완견 키우는 게 싫어가지고 오며 가며 툭툭 발로 차면서 다녔어요. 들어가 들어가 하면서, 그래서 저만 떴다 하면 꼬랑지 딱 내리고 개 집 구석에 들어가서 절대 안 나와요. 그런데 신기하죠. 동생이 골목에 떴다 하면 막 대문에서 뒹굴고 미쳐요. 미쳐. 너무 좋아가지고. 아사람도 그렇게 반가워할까? 그렇게 정이 들면 진짜 감동스럽더라고요. 텅빈 집에 그래도 자기를 맞아 줄 애완견이 있다는 건 요즘 1인 가족 시대에 트랜드 아닙니까? 그래도. 내가 왜 흥분을 하지? 그래도그 개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수 있어요? 그런 경우는 없어요. 그런경우는. 개가 사람을 구했다는 얘기는 들어봤어요. 그런데여기 지금 이 미물에 불과한 양떼를 위해서 목자가, 나는 선한 목자라 목숨을 버리노라. 이거는 어디에 초점이 있는 본문인가 하면, 삯꾼은 얘는 정상이에요. 그렇게 나쁜 놈도 아니고. 왜? 삯때문에 고용되어 삯 때문에 일하는 사람인데 목숨이 중요하지 양떼를 위해서 왜 목숨을 버려요. 그걸 너무심하게 매도하면 안돼요. 문제는 이 미물 같은, 우리는 다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제 길로 갔거늘. 우리 같은 죄인들을 찾아서 하나님이신 아드님이 양의 모습으로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이해할 수 없는 과분한 사랑을 강조하는 거에요. 여기는. 삯꾼 나쁜 놈이라는데 초점이 있는 게 아니고. 자, 우리 여기서 한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 분명히 2절에서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뭐라 그랬죠? 목자가 그랬어요. 그런데 7절을읽어 보세요. 다같이 시작.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여러분, 2절에서는 나는 양의 목자라. 그런데 7절에서는 나는 양의. 문하고목자하고 같아요? 같지 않잖아요. 그리고 또다시 11절에서는 자기는 선한 목자래요. 그래서 제가 첫 번째 질문이 여기에서딱 걸렸어요. 성경을 죽 묵상하다가 어떻게 목자하고 문하고 같아? 목자가선한 목자인건 맞는데 어떻게 목자가 문이 될 수 있어? 이것을 고민하다가 기가 막힌 그림 하나를 봤어요. 어렵게 구한 겁니다. 띄워 주세요.이게 유대인들의 마을에 설치된 공동 우리에요. 안에 양 떼들이 풀을 뜯고 있죠? 그런데 저 문쯤 보시면 목자가 지팡이를 딱 집고 문을 가로막고 어떻게 있어요?밤새 저러고 지켜요. 자 이 그림 딱 보니까 나는 양의 목자라, 나는 문이라 이해가 돼요? 안 돼요? 이 그림보다 더 정확히 설명 가능 할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목숨을안보하고 지켜주기 위한 목자로, 문으로 오셨어요. 자, 그런데 성경 본문 하나를 참고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예고가이미 구약에 어떻게 예고되었나?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라
여러분, 전 애굽을 심판하여 장자를죽이실 때 유대인의 집에 희생되어 발라진 어린 양의 피가 묻어있는 그 문에서 뭐가 넘어갑니까? 심판이지나가요. 문에 발라진 어린 양의 피는 바로 양의 문이 되어서 양을 위하여 지키다가 십자가에 피 흘려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구약 유월절 어린 양의 피에서 예고했었다고요. 그대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우리처럼 양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스스로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신사건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면서 동시에 뭡니까? 동시에양의 문이 되시는 거에요. 그래서 그분으로만 구원이 이뤄지도록 역사는 설계되어 있죠. 그러니까 요한복음 10장의 이야기는 단순히 그 분을 잘 따라다니면풍성한 꼴을 먹고 안전하고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훨씬 뛰어 넘는 예수 그리스도는 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십자가에 피 흘려 구원의 문에 피를 발라주셨는가? 그것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자, 다시 3절로 가서이렇게 설명이 됩니다.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4절 시작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이렇게 돼있어요. 이 비유를 바리새인들이뭔 소린가 하고 못 알아 들었어요. 요한복음의 1장서부터계속 밑에 깔려 있는 기조 하나가 뭐죠? 알지 못하더라. 알지못하더라. 깨닫지 못하더라. 영적으로 눈이 감아진 이 백성들은이 말의 의미를 못 알아 들었어요. 그런데 저도 이 본문을 읽다가 제 마음 속에 살며시 올라오는 두번째 질문이 있었는데 뭐냐 하면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쓰여져 있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우리 배웠던요한복음 8장 47절에도 보니까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하는 고로 하나님께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렇게 소속의 문제를 설명했어요. 여기서제가 물었던 질문이 뭐냐 하면. 저 자신에게, 그럼 그 양은어떻게 그 주인의 음성을 인지하게 되었을까? 예를 들어서 양이 어느 한 집에 사들여져 왔어요. 그럼 그럼 주인도 새 주인이고 주인에게도 새 양이에요. 그럼 어떻게그 음성을 인지하게 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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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에요. 그러다가 저하고 똑같은 의문을 가졌던 어느 교수님이 쓴 책을 읽다가 무릎을 쳤어요. 그 교수님이 누군가 하면 중동 문화전문가인데 케네스 베일리 라는 교수님이세요. 이 분은 얼마나 대단한가 하면 특별히 이 양의 문화, 목자와 양의 문화를 철저히 연구하기 위해서 오랜 세월 중동에 머물면서 그들의 생활을 하면서 연구한 분이에요. 그러니까 실제 현장을 몸으로 익힌 신학자에요. 신학자가 책상에서연구하는 법인데 그러기가 쉽지 않다고요. 그런데 그분이 선한 목자라는 쓴 책이 있습니다. 거기 요한복음 10장 부분에 보면 놀랍게도 이 교수님도 거기에 대한질문이 하나 있었어요. 어떻게 양이 새 주인의 음성을 인식할까? 그러다가레바논에 베이루트라는 곳에 머물 땐데 시골 청년들을 데리고 가르치는 경우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청년들은다 농촌 청년들이니까 다 양들에게 익숙한 청년들이에요. 그 중의 한 청년에게 질문을 했어요. 만약에 너희 집에 새 양을 사왔을 때 이 새 양을 어떻게 훈련시키기에 주인의 음성만 듣게 되는 독특한 메커니즘으로이 양들이 바뀔 수가 있는가? 그랬더니 뜻밖에 이 청년들이 오랜 역사 전부터 조상들에게 물려진 자기들독특한 문화 하나를 소개하더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그 책에다 써놓은 거에요. 제가 그 이야기를 읽다가 깜짝 놀랐어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집에 양 한 마리가 새로 사들여져 오면 주인이 이것을 내 양으로 완전히 만들기 위해서 열네 시간을 무조건 금식을시킨대요. 그 때부터 간헐적 금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요즘뭐 다이어트 한다고 그런 거 하죠. 그런 거 하지 마세요. 그냥배고플 때 드시고 운동 열심히 하면 되지. 그런데 열네 시간을 굶긴 다음에 양들이 아침을 맞으면 거의제정신들이 아니래요. 배가 고파서 막 소리를 내고 짜증을 부리고 심한 녀석은 머리를 담벼락 같은데 막받는대요. 배고프다고. 그리고 동료들한테 막 건드리고. 보니까 이게 교회 영적인 구조하고 똑같더라고요. 교회도 보면 Mr. 핏대들. 왜 핏대를 내냐 하면 영적으로 주려서 그렇거든요. 다 목사 책임이에요. 그런 상태의 양들이 아침을 맞으면 어떤 기대들을할까요? 이제 푸른 풀밭으로 주인이 나를 데리고 가겠지? 빨리이 허기를 채우기 위한 기대에 온 감각이 주인을 향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그 때 주면 안 된대요. 밥을 조금 더 기다렸다가 이른 아침과 점심 사이에 이들이 기다리다 지쳐서 아주 하얘질 때 그 때 탁 음식을준다는 거에요. 그러면 폭풍 흡입을 한답니다. 이렇게 일정기간을 가지고 매일 한번씩 훈련을 하면 그 기간 동안에 거의 대부분의 양들이 신경 쇠약 증에 걸린다는 거에요. 그래서그 신경 쇠약 증이 나을 즈음이 되면 신기하게도 일절 다른 사람들의 소리는 귀로 못 듣고 주인의 음성만 듣는 주인의 것으로 귀속이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유대인의 아침은 장관이래요. 그 공동 우리에서 이제 낮에풀밭으로 양떼를 풀을 먹이기 위해 마을에서 주인들이 다 올 것 아닙니까? 공동 우리로. 그럼 수백만의 양이 그 안에 엉켜있을 텐데 단 한 마리도 혼선 없이 각 주인의 특이한 음색과 부르는 기호를따라서 냇물이 흘러 갈 데로 흘러가듯이 쫘악 주인을 찾아 간다는 거에요. 신기하게. 단 한 마리도 오차가 없이 자기 주인을 정확히 찾아 간다는 거에요. 그러니까혼선을 일으킬 아무 이유가 없다는 거죠. 그런 독특한 훈련 방법 때문에. 그래서 양들이 새로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훈련이 주인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시킨다는 거에요. 그런데 저는 이걸 실제 경험했어요. 제가 사당동에 있는 총신대학에70년대 학번 아니에요? 그 때는 지금은 사당동이 좋은 동네가됐지만 그 때는 사당동 하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 하는 뻘 밭이에요. 비만 오면진흙 밭으로 질퍽 했어요. 89번 종점까지 걸어서 왔다 갔다 하는 거에요.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산이에요. 그런데 그 산 중턱에 어느 집사님이양을 키웠어요. 꽤 많은 숫자의 양을 키웠어요. 그런데 저희가그 때 전부 기숙사 생활을 할 할 때니까 기숙사는 5시에서 6시사이에 무조건 밥을 먹어야 해요. 나 지금 속이 안 좋은데 하면 굶어야 해요. 그 다음은 밥이 없어요. 그런데 군대 밥이나 기숙사 밥이나 공통점이먹고 숟가락 놓으면 배고프다는 거에요. 끈기가 없어요. 쌀이. 그리고 뭐 국이래야 휑해요. 한 번 휘 저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앞의 친구가 다 건져가지. 그리고 이제 6시 넘어 8시쯤 되면 도서관에 앉아 있다가 방에 앉아 있다가 전부거이 배들이 고파요. 그러면 이제 돈을 조금씩 모아서 당번을 뽑아가지고 주전자 하나를 들려서 막걸리받으러 가듯이 양 젖을 사러 가요. 싸게 팔았어요. 우유마시듯이 그것을 먹으려고. 집사님 양 젖 좀 주세요 하면, 전도사님들인줄 아니까 싸게 줘요. 한번은 낮에 갔는데 전도사님 제가 재미있는 거 하나 보여드릴게요. 그때 우리 나라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 중에 지금 그 분 이름이 김민희씨인가요?똑순이라는 드라마를 했어요. 아주 유명하고 시청률이 대박이 난 드라마였는데 그 양 한 마리, 한 마리당 다 이름을 매겼습니다. 요놈은 뭐 요놈은 뭐, 태근이 성복이 똑순이. 이렇게 이름을 다 매겼어요. 저보고 뭐라 그러냐 하면 여기 똑순이가 한 마리 있는데 똑순아 하고 불러 보래요. 그래서 불러봤더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이제 보세요 전도사님그러더니 주인이 똑순아 그러니까 음메~ 하면서 한 놈이 고개를 들어요.고놈만 딱 고개를 들어요. 고놈만. 신기하죠. 자, 하나님께 속한 자는 누구의 음성을 듣는다고요? 하나님의 음성을. 그러니까 이 듣는 다는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물론 목사가 졸립게 설교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안 들어오는 것은내 책임이 아니에요 .제 책임도 있어요. 사실은. 이게 영적인 문제가 있을 때가 많아요. 자, 그런데 이제 오늘 본문이 그럼 결국 뭘 얘기하고 싶은 걸까? 첫째는양들에게는 항상 외부의 뭐가 상존한다? 위협이 상존한다. 세가지 위협이라 그랬어요. 두 번째는 삯꾼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과부한 사랑으로 양을 위하여 목숨을버려 주신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에 초점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자, 그러면 이 본문이 향하고 싶은 결론이 뭘까? 우리 1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하리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여러분 이 16절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이 땅에 오셔서
(30:01-34:25)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주신 중요한 이유를 여기에 다 담아내고 있어요. 제가 다시 한번 끊어서 읽어드릴 테니까 귀로 눈으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자 앞을 보세요. 그러면 이 양들은어디에 가 있는 양이에요? 아직도 구원의 숫자에 들지 못한 양들입니다.사망의 냄새를 풍기면서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죽어가는. 여러분 아까 개 얘기도 했지만 요즘은집안에 고양이 한 마리, 개 한 마리만 나가도 현상금 써 붙이고 난리가 나요. 아파트가 난리가 나요. 그런데 아직도 이 우리에 들어오지 않은 잃어버린하나님의 가족이 있어요. 그 가족은 누구의 가족입니까? 곧? 내 가족이기도 해요. 우리가 선교 때마다 이 심령이 내 속에 부흥이되어야 해요. 내 안에 회복이 되어야 해요. 아직도 하나님이가슴을 태워가며 돌아오길 기다리며 찾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있는데. 곧 그 아들, 딸들은 나와 한 몸이에요. 그런데 우리의 가슴이 덤덤하다면 그건문제 있는 거죠. 여러분 선교라는 것은 그런 긴박성과 그런 절박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떠날 수 없는길입니다. 제가 요즘 강조하는 게 뭐죠? 선교는 교회가 존재하는양식이면서 우리가 살아가야 되는 이유입니다. 믿습니까? 이것이우리 생의 목적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길 떠나는 길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늘 길 위에 있어야 해요. 이번 여름 선교도그런 심정으로 우리에 들지 않은, 이 복음을 아직도 듣지 못하고 길을 못 찾고 있는 근시안적인 영적인맹아 상태에서 헤매고 있는 그 영혼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땅끝까지 가는 겁니다. 그리고 성경을 마녀 읽어보십시다.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하리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 마지막 과업을 누구에게 부탁하는 거죠? 여러분요한복음 21장이 어떻게 끝나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고향으로 낙심하여 떠난 그 제자를 바닷가까지 추적하셔서잃어버리고 실추된 사도권을 회복시켜 주시고 첫 번째 부탁했던 말이 뭐에요?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이것이 오늘날 베드로에게만주신 과업과 사명이 아니라 이 땅에 남겨진, 주님의 손발이 되어야 될 하나님의 공동체에게 허락하시는마지막 삶의 과제입니다. 이제 두 달, 다음 주부터 제주로부터시작이 되죠. 국내 선교 세 군데입니다. 제주, 영동 영덕 울진 선교, 영덕 울진,수도권, 농어촌, GOP 그리고 해외는 대만, 일본, 캄보디아, 미얀마, 몽골, 쿠바 이 선교지를 향해서 우리 온 성도들이 주님의 이 명령앞에 순복 하는 마음으로 길 떠나기로 다시 한번 각오하고 결심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일어나십시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