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31)
아브라함의 시험
창22:1-12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드리라
3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8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00:00-10:00)
오늘 본문은 읽으신 대로 워낙 잘 알려지고 또 우리에게도 여러 차례 또 여러 교회의자리에서 말씀을 듣고 또 이해를 갖고 있던 본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늘 오늘 새롭습니다. 오늘 이 밤에도 여러분들에게 이 본문을 통해서 주시는 아주 명료한 음성이 나타나리라고 믿습니다. 우선 이 22장의 본문이 이렇게 시작이 되죠.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우선 우리는여기서 두 가지를 밝혀야 본문으로 진입을 할 것 같습니다. ‘그 일 후에’ 가 어떤 일 후에를 말하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겠다는그 시험은 어떤 종류의 시험일까? 이것을 우리가 먼저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창세기 12장에서부터 아브라함과 함께 걸어 오셨던 하나님의행진을 좇아 보면 참 우여 곡절이 많았고 파란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대해서 기다리셨고 그의 불충스러움과 불순종을 견뎌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악과 죄를 하나님은 넘어서지난 주 우리는 드디어 이 가정에 불신앙의 웃음을 신앙의 실체를 보여 주시는 이삭의 탄생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사실 이삭의 탄생은 아시는 대로 아브라함의 또는 사라의 믿음의 결과이기 보다는 하나님이 말 그대로 약속에 따라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어요. 실질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사라에게 웃음을 선사하시죠. 자, 이것이 지난 주까지 대체적인 요약이었습니다. 수많은 넘어짐이 있었어요. 그 일 후에. 이제 집안에는 이스마엘은 이미 쫓겨나 있어요. 이제 정말 100세가 되어서 낳은 아들이 이제 하나 외롭게 남았습니다. 성경 전체에서는 이 아들을 외아들 또는 독자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그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합니다. 자, 이때 도대체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무엇을 시험하려는 것일까? 그래서 아브라함의 상태를 좀 아셔야 해요. 아브라함은 이미 가나안 땅에 우여곡절 끝에 정착한지 이미 시간이 흘렀어요. 그리고이 가나안의 종교와 문화를 이제 서서히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가나안에는 여러 가지 우상종교가 자리 잡고 있었어요. 그 중에 대부분이 종교 열광주의에 근거한 자기 열심 종교였어요. 그 최고의 극단이 가나안에 어떤 이들이 자리잡고 있었냐 하면 대부분의 종교가 사람을, 산 사람을 재단에 종교의 재물로 바치는 종교 행위를 서슴없이 하곤 했습니다.이건 실제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종교적 광기가 얼마나 끔찍할까요? 이걸 아브라함이 이미 알고 있을까요? 모르고 있을까요? 알고 있어요. 여기에 아브라함은 혼란이 서서히 혼란이 옵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이렇게되는 거에요. 돌아보니까 이삭이 태어나기 까지 자기 신앙은 정직하게 돌아보면 자기가 뭐 하나 떳떳하게내세울 게 없어요. 늘 넘어지고 실패한 것 밖에 없어요. 그럼에도불구하고 독자를 이 가정에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면목이 늘 없는 모습이에요. 이때 시험이와요. 사람들이 면목이 없을 때 그 면목없음을 보충하려다 무리수가 와요. 항상 그렇게 돼있어요. 그게 종교적 열심과 맞물리면 광기가 돼요.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균형과 상식을 놓쳐서는 안돼요. 잘못하다간 넘어갈 수 있어요. 아브라함이 지금 갖고 있는 신학적 질문과 신앙적 혼란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런 겁니다. 내가 이 정도로 충분할까? 뭔가 보답해야 되겠는데. 옆의 다른 여타 종교를 보니까 심지어는뭐까지 바쳐요? 산 사람까지 서슴없이 바치는 그 가나안 종교를 늘 목격하고 오랜 세월을 가나안 땅에지금 아브라함은 머물러 있어요. 그런데 자기 인생 속에 개입해 들어오신 하나님은 알다가도 모를 분이에요. 그 실체는 분명히 알겠는데 그 하나님은 왜 나한테 이렇게 무한히 인내하고 참으시는 걸까? 뭘 바라시는 게 있나? 나는 늘 넘어지고 연약한데. 내가 어떻게 이 하나님께 뭔가를 좀 보답해야 될 텐데. 이런 신학적인질문과 신앙적인 혼란이 늘 밀고 들어오는 겁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러한 영적인 상태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현대 신앙인들에게도 여전히 감춰져 있어요. 그런 의문들이 있어요. 항상 내가 뭔가 좀 부족하니까 목이 마르니까 그 대상에 대해서 어떤 자기의 열심과 그게 지나치면 종교적 광기를통해서 더 가까이 가는 이런 잘못된 시도들이 가능하게 되지요. 그 극단의 현상들이 가나안에 이미 오랜세월 자리잡고 있더란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겁니다. 이시험은 정확히 얘기해서 나중에 결론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실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기를 계시하시는 사건이에요. 자기를 나타나실 때 하나님은 한꺼번에 짠하고 100% 자기를 보이시는분이 아니세요.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이해의 폭을 지나치게 넘어가지 않고 조금씩 열어 주시는 거에요. 이 하나님의 느낌, 모든 걸 하나님의 전부를 한꺼번에 짠 이거다하고 보여주면 우리가 그걸 감당 할까요? 못 할까요? 감당못해요. 알아 들을 수도 없고. 그래서 하나님은 시간과 역사와공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점진적으로 계시해 들어오십니다. 사실상 이 창세기 22장은 그 계시의 climax입니다.굉장히 기대하셔도 돼요. 제 설교를 기대하란 말이 아니고 오늘 성경의 내용을 기대하란 말이에요. 과연 하나님께서 이 절정의 자기 계시가 뭘까? 시험해 들어가십니다. 그 시험이 하나밖에 없는 집안의 독자를, 이스마엘은 이미 떠났고모리아 땅의 어느 한 산에 데려다가 번제단에 제물로 드리라는 거에요. 자, 여러분, 제가 도리어 여러분들께 여쭤볼게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상 이 시험이 상식적이고 합당한 시험이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이 본문을 수백 번을 읽어 봐도 이 하나님의 시험은 동의가 안되고 이해가 안돼요. 지금도. 그럼 하나님은 그걸 몰라서 이런 엉뚱한 시험을 했을까요? 이 시험이 패턴은 어떤 시험일까요? 바로 가나안 종교의 패턴의 시험이에요. 하나님이 그 패턴을 차용하십니다. 뭔가를 계시하기 위해서. 그래서 이제 부자는 말없이 짐을 쌉니다. 성경을 볼까요? 3절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10:01-20:00)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이렇게 돼있어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여기에 아내 사라와 의논했다는 말이 반 마디도 안 나와있어요. 제가 그 의미를 가끔 써먹습니다. 가끔. 이제 잘못된 건데 어떤 때는 그냥 설명 없이, 의논 없이 그냥 통보할 때가 있어요. 나 어떻게 하기로 했어. 그러면 이제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당황하겠죠. 그럼 제가 꼭 꺼내놓는본문이 이 본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 바치러 갈 때 아내랑 의논하는 대목이 있냐, 이미 하나님의 뜻에 확정 된 것은 의논할 필요 없어. joke로그러지만 아내는 만약에 의논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나를 죽이고 가십시오. 진짜 어려웠을 거에요. 웬일인지 무슨 사정인지 몰라도 아내와 의논과정이 빠져 있어요. 그리고 부자는 짐을 싸서 3일 길을떠납니다. 여러분 3일 길을 무슨 얘기하며 갔을까요?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무슨 얘길 하며 갔을까요? 아마 이삭의 입장이 달랐겠죠? 이미 이 길의 목적을 알고 있는 아버지의가슴이 또 달랐을 거에요. 가슴 한복판에는 한없는 비가 내렸을 것 같아요. 3일 길을 가요. 3일 길이 다 돼서 도착한 모리아 땅에 하나님이지명하신 산을 멀찍이 올려다 보는데 기가 막히겠죠. 짐이 꽤, 제사지낼 준비가 되야 하기 때문에 짐이 꽤 되었던 것 같죠. 두 종을 동행해서 길을 떠나는 것 같습니다. 본문을 잘 보시면 4절
4 제 삼 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자, 종들은 산에 두고 갑니다. 사실 지금부터 어쩌면 더 종들의 노동력이 필요한 거 아니에요? 가파른산을 나뭇단을 지고 연장 도구를 가지고 오르려면 오히려 지금부터야 말로 이 종들의 노동력이 필요할 때인데 종들을 산 아래 둡니다. 그리고 부자만 이제 산을 올라요. 자 그런데 이렇게 돼있어요.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자, 그런데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데내가 돌아옵니까? 우리가 돌아옵니까? 우리가 돌아오리라. 이게 아브라함이 말 실수를 했나? 이것은 사실상 신약적 관점에서해석을 하면 아브라함이 부활 신앙을 예표하고 있는 글입니다. 아들이 제단의 제물로 죽어 드려질지라도이 생명을 되살린다는 부활 신앙이 아브라함에게 있었다고 우리는 보는 거에요. 성경 한 구절을 볼까요? 히브리서 11장을 한번 띄워 주세요.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을 때 뭐로 드렸다고 돼있어요?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고 돼있어요. 분명 아브라함은 이 모든 행동과결단이 믿음의 행위였어요. 그래서 두 종들을 산 아래에 두고 부자만 산 위를 올라요. 그리고 종들에게 이릅니다. 우리가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분명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는 이 아들을 이미 목숨까지 걸고 드리겠다는 의지가 분명히 있었어요. 이 먼 3일 길을 마음 편치 않고 걸어 온 걸로 봐서. 그래서 작심 3일이라는 말이 생겼는지도 몰라요. 3일이 늘 술을 끊던 담배를 끊던 무슨 결심을 하던 한계점이라고 해요. 그런데3일 길을 걸을 때까지 아브라함의 마음이 흔들렸는지 안 흔들렸는지는 모르겠어요. 왜 안 흔들렸겠어요. 수많은 번민이 있었을 거라고 봐요. 꼭 이렇게 해야 하나? 그리고 점점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질문은미궁으로 빠졌을 것 같아요. 여러분 그 성품에 대해서 미궁으로 빠지는 거하고 불신하고는 틀려요.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믿지만 그 분에 대해서 혼란을 가질 때가 있어요? 없어요? 많습니다. 저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분명 하나님을 내가 믿어요. 믿고 행동을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이끄시는 과정과 결론을 보면 혼란스러울 때가 많아요. 그건아직 우리가 하나님의 전체 그림을 못 봤기 까닭에 그렇게 밖에 여겨지지 않는 거에요. 자, 이제 산입니다. 6절
6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누구에게 지웁니까? 이삭에게 지워요. 이삭이라는 말은 웃게 하신다 라는 말이죠? 그런데 5절을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말하는 내용 속에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이렇게 돼있어요. 여기 아이라는 말이 테크노니 라는 말이에요. 이 말은 사실 이 본문이 워낙 주일 학교에서 많이 애용되는 설교의 본문이다 보니까 대게 어린이 용으로 전환해서설교하다 보니까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로 많이들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이 테크노니라는 말은 그런 코흘리개어린 아이를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시편 119편에 보면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요 할 때 그 청년이라는 말이에요. 이 아이라는 말이 같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쯤 이삭은 이미 가파른산 위를 올라가는데 나뭇단을 지고 올라갈 정도로 신체 건강한 청년이었어요. 그래도 누구에겐 아이에요? 아버지에겐 아이죠. 솔로몬도 나는 아이라. 하나님 앞에서 아이라고 스스로를 낮췄죠. 여기서 아이를 그런 생물학적인아이로 이해를 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아이는 이미 나뭇단을 지고 가파른 산을 오를 정도의 연령을 얘기하는거에요. 자, 그런데 이 그림은 뭘 연상케 할까요? 지금 나무를 지고 이삭이 모리아 땅 어느 한 산을 향해 오르고 있어요. 예수님이골고다 언덕을 뭘 지고 오르셨어요? 나무를 지고 오르셨어요. 이것은정확하게 예수님의 예표를 얘기하는 거에요. 그리고 아버지는 이 아들을 잡을 연장 도구를 가지고 같이동행합니다. 자 그런데 7절을 볼까요?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 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 아들의 질문만큼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치는 질문이 또 있을까요 제물은 지금너인데 네가 나한테 지금 그 질문을 하면 나는 뭐라 대답을 할까. 그러자 아브라함이 이런 대답을 합니다.
8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 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이 구절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20:01-30:00)
자, 산 위를 나무를 지고 오를 정도의건장한 청년이 지금 제단에 결박을 당하고 있어요. 그럼 이미 아브라함은 지금 생물학적인 나이가 어느정도인지 여러분 짐작을 하시죠. 아이를 더 이상 생산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많아요. 그런데 이 이삭이 어떻게 뉘어지고 결박을 당했을까요? 가능한 일일까요?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세요. 이삭이 꽁꽁 묶이면서도 어린 양은 어디있어요? 그랬을까요? 저는 여기서 조심스럽게 이런 설명이가능하다고 봅니다. 여기에는 아들의 동의가 있었어요. 십자가의사건은 아드님의 순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구속의 계획에 기꺼이 아들이 순종했기에가능했던 사건이었어요. 이삭은 순종하여 나뭇단 위에 뉘어집니다. 그런데문법적으로 이 문장을 다시 한번 조명해 보면 여기 동사들이 몇 개 나와요.
9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9절에만 네 개의 동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이 동사는 보통 이렇게 제사를 드릴 때 사용되는 모든 동사는 제의적 용어가 따로 있어요. 예를 들어서제가 자주 인용하는 본문 중의 하나가 디모데 후서 2장 15절말씀이죠. 거기에 보면 드리기를 힘쓰라 라는 단어가 나와요. 파리스테미라는 단어가 나와요. 이 단어는 정확하게 제의적 용어입니다. 제단에제물이 드려지듯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종들에게 요구 된 삶의 내용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사용된 동사는 네 개의 동사가 등장을 하는데 그 중의 단 한 개도 제의적 단어가 아니에요. 이것은 문학적표현으로 쓰여져 있어요. 그게 뭘까요? 뭐 그것이 제의적단어이든 문학적 표현이든 우린 별로 차이가 없을 것 같은데 예, 우리가 얼핏 보기엔 특별히 번역본을보면 더 그래요. 그런데 여기에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이 한 영혼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행동하심이 나타나있어요. 이것은 제사를 뛰어넘는 사건이었어요. 그래서 제의적 문법이나 단어를쓰지 않고 문학적 표현을 써요. 이것은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맞닿는 행동이었어요. 아브라함이 정말 행동으로 이 순종을 하나님 앞에 그 신학적 질문과 신앙적 혼란을 하나님의 가슴에다가 마치 머릴대고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칭얼거리면서 비벼대듯, 느낌 알겠어요? 애들이막 불만이 있고 짜증이 폭발하면 괜히 막 이렇게 코를 비벼대고, 엄마 가슴팍에다가 막 머리를 박아서비벼대고 찡얼 거리고. 그것은 어떤 습관에 의한 행동이 아니에요. 본능적인거에요. 드디어 지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가슴에다가 본능적인 맞닿는 순간이 온 거에요. 이게 지금 얼마나 절체절명의 순간이에요? 이제 막 아들은 뉘어져있어요. 이제 자기는 칼을 빼 들어서 내리 찍는 일만 남았어요. 이것이그냥 순조롭게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입장에서 그냥 제사 지내듯 가능하겠어요? 그게? 가능하다고 봐요? 불가능하다고봐요. 그래서 제의적 용어를 쓰지 않아요. 이것은 문학적표현을 써요. 이해할 수 없는, 이게 뭡니까? 꼭 이래야만 됩니까? 이래야만 제가 하나님 앞에 검증을 받는 겁니까? 이게 어떻게 제사에요? 제사가 이럴 수 있어요? 드디어 이제서야 아브라함의 그 속살과 하나님의 가슴팍이 본질적으로 맞닿고 비벼대는 순간이 온 거에요. 이거 이해 안되면 다음 주에 다시 한번 할게요. 굉장히 중요한 거에요. 자 성경을 다시 보십시다. 10절
10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자, 여러분 그 아들을 지금 어떻게했어요? 드디어, 드디어 이해 안 되는 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위해서 아브라함은 손을, 이 장면을 그린 많은 그림들이 있는데 정확하게 100% 모든 그림이 아브라함의 손이 이렇게 하늘에 올려져 있어요. 이미이삭은 죽은 거에요. 실질적으로 죽은 거에요. 이삭은. 아브라함의 손에는 칼이 들려져 있고 이미 제물이 되어 제단에 누워있는 아들은 이미 죽은 거에요. 이미 이 손이 들려져 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이 이미 결정 된 거에요. 이때하나님께서 11절에
11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드디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항복을 받아 낸 거에요. 우리 야고보서 한번 띄워 주실까요? 2장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제단에 바칠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여러분 창세기 15장에서는 뭐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어요? 믿음으로. 창세기 15장에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어요 그런데 야고보서 기자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어요. 그 믿음이 지금 완성 된 거에요. 그래서 22절에 이렇게 쓰여져 있죠. 시작
22 내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할렐루야! 이 자리에 이끌기까지 그걸음 걸음을 누가 인도하셨다는 얘깁니까? 이 행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정도로 행해야 된다는 그런 차원이 아니에요. 그아들을 모리아 땅 어느 한 산에 제물로 내어 놓기까지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설득하신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이렇게 얘기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12절에
12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자, 여러분 이제 한숨 돌리고 갑시다. 이 이야기는 이런 얘기입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내가 그렇게 이 가나안종교에 빠져 있는 우상숭배자들처럼 그런 신들처럼 아들을 제단에 바치라고 요구하는 그런 신들인 줄 아느냐? 그질문을 하는 거에요. 내가 그렇게 무자비한 하나님인 줄 아느냐? 무자비한신인 줄 아느냐? 네 아들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너의 헌신을 확인하고자 하는 그런 무자비한 하나님인 줄아느냐? 뭘 드러내시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세요. 그런데 아직 여기까지만
(30:01-40:00)
안다면 우린 결론을 못 간 겁니다. 여기진짜 하나님이 하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뭘 것 같습니까? 그런데나는 내 아들을 내놓는단다. 이게 하나님의 paradox에요. 역설이죠. 그런데 나는 내 독자를 너의 구원을 위해서 내놓는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기 하나님은 이중적 계시를 하시는 거에요. 실질적으로. 첫째는 이 가나안의 열광주의 종교에 빠진 그런 신들처럼아들을 갖다 바치라는, 인신을 바치라는, 생떼 같은 자녀를갖다 바치라는 그런 신인 줄 아느냐? 나는 사랑이 풍성하시고 자비로운 하나님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을 돌려 보내요. 죽었던 아들이에요. 실질적으로 제단 위에서. 그런데 그 사건이 뭘 암시하고 싶었던 건가하면 그 예표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희들의 구원을 위해서 너희들의 구속을 위해서 내 독자를 내놓는다 그 말이에요. 여러분 오늘 이 본문이 17절을 보시면 이렇게 끝이 나요. 17절 16절부터 제가 읽겠습니다.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레와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자 저를 보세요. 여기서 네 씨는 누구를통한 씨입니까? 이삭을 통한 씨에요. 이 씨는 단수에요. 장차 태어날 그리스도를 얘기합니다. 그래서 단수로 썼어요. 문제는 네 씨가 뭘 차지하리라?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여러분 구약에는 성문을 뺏기면 성이 다 함몰되는 거에요. 성문이관건이에요. 그래서 한 군데만 직접 찾아 보십시다. 우리시편 127편을 보세요. 1절.
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헛되도다.
2 너희가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자, 앞을 보실까요? 여기 성, 집 전부 베이트입니다.다 같은 표현이에요. 문학적으로 표현을 달리 한 것뿐이에요. 집, 성 같은 표현입니다. 그런데여기 헛되도다 라는 말이 삼중적으로 등장을 하죠? 첫째, 집을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두 번째는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헛되며. 마지막 세 번째는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돼요. 삼중적인 것은 완전한 헛됨을 얘기하는 거에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인간의 모든 경영과 수고가 헛될 수 밖에 없다는 거에요. 여호와께서 지키지 아니하시면. 그런데 뚱딴지 같은 말이 나오죠. 2절 끝에 보시면.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 뭔 얘기에요? 헛되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대요. 말이 앞뒤가 매끄럽지 않죠?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그러므로사랑하는 자, 여기 사랑하는 자가 여디디야 입니다. 여디디야는솔로몬의 또 다른 이름이죠? 솔로몬의 또 다른 이름이 여디디야 에요.그런데 똑같이 불려졌던 유일한 한 분이 계시죠? 예수님이십니다.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바로 예수님을 얘기하는 거에요. 사랑하는 자에게 뭘 줘요? 잠. 이 잠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모든 잠은 죽음을 얘기합니다. 죽음을 또 성도의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합니다. 쉐나. 정확하게 죽음을 얘기해요. 무슨 얘기가 됩니까? 앞뒤 이어 놓으면 인간의 모든 경영은 하나님이 빠지면 헛된 거에요. 그러므로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것은 그래서 사람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은혜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거에요. 가정의달에 무슨 집 잘 지켜라 그 얘기가 아니에요. 자, 그런데이 이야기의 결론이 중요합니다. 자, 2절에 보시면 이렇게되어 있어요.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다
3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같으니
5 이것이 그의 화살 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어디에서?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이게 무슨 얘기로 끝납니까? 결국 집얘기로 끝나요. 성문의 이야기로 끝나요. 왜 그럴까요? 이 성문을 얻는 자가 성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뭐로 표현했죠? 문지기. 나는 양의 뭐라고 표현했어요? 문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 나를통해서 들어오는 자만이 진짜 참 목자다. 울타리를 넘어오는 자는 다 강도, 도둑들이라 그랬어요. 자, 우리는오늘 창세기 22장에서 크게 세 가지로 귀결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아브라함은 가나안 안에 들어와서 우상 숭배의 문화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그는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신학적 혼란과 신앙적 질문을 가지고있었어요. 내 신앙이 맞는 걸까? 나는 누굴까? 과연 내 인생에 들어오신 그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일까? 이런근본적인, 신학적 질문과 신앙적 혼란이 있었어요. 그때야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겁니다. 그 시험을 통해서 자기를 사랑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세요. 그런데 그 계시를 통해서 뭘 드러내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내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들의 구원과 구속을 위해서 내어주신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하나님의 파라독스에요. 역설. 저는 이 아브라함의 갈등이너무 이해가 돼요. 마치 순종 안 할 수 없는데 분명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순종 안 할 수 없는데 울며불며 하는 거에요. 이게 뭐냔 말이에요. 우리 신앙 생활하면서 혼란이 일어날 때 있잖아요. 이것 참 안 할 수는 없는데 하나님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갈등이일어나는 거에요. 막 가슴팍에 어린 애가 떼를 쓰면서 엄마의 젖 무덤에 얼굴을 파묻고 비벼대며 짜증을부리고 성질을 부리고 떼를 쓰는 것처럼. 우리 교역자 가운데에도 운동하다가 볼을 못 받으면 누워서 발버둥을치는 사람이 하나 있어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마치 자기가원하는 게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왜 이러실까? 하나님이. 그래서 제의적 표현을 쓰지 않고 문학적 표현을 썼어요. 오늘 이 밤은 여러분들에게 좀 그런 하나님과 속살이 맞닿는 실질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는 밤이 됐으면 좋겠어요. 믿습니까? 오늘 이 밤에 우리가 기도할 때 고민이 있으면 고민이있는 그대로. 없는 척 하지 마세요. 왜 고민이 없겠어요. 그리고 쎈 척, 다 된 척 하지 마세요.
(40:01-41:52)
정말 바보 같은 행동입니다. 못나면못난 모습 그대로. 찌그러지면 찌그러진 모습 그대로. 그대로. 하나님 저 정말 이것밖에 안 되요. 나보고 어쩌라고요. 내 실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데 하나님 나보고 어쩌라고요. 그런데하나님이 하라니까 하긴 하는데 정말 동의는 안됩니다. 이런 거 있잖아요. 있어요. 이게 뭐 나이가 들면 그런게 없어지나요? 연기 빠지듯 없어지나요? 그런 거 없어요. 나이가 들면 나이가 드는 대로 또 상황이 똑같아요. 본질이.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끌어안고 고통 당하고 고민하는 그 문제가 문제가 아니에요. 그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넘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를 통해 계시하고 싶으신 겁니다. 너는 내가 그런 하나님인 줄 알았니? 그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오해를 좁혀 가는 거에요. 하나님과 살갗을 마주대면서. 믿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쏟아내는 모든 기도는 그렇게 하나님과 가슴이 맞닿는 기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찬양 하나 하겠습니다. 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우리 찬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