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잇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00:00-05:00)
이제 4장을 마치면서 오늘은 왕의 신하의 이야기를 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니까 이것이 몇 번째 표적이라고 기술되어있죠? 두번째 표적이라고 쓰여져 있어요. 두 번째라는 순차를 밝히는 걸로 보아서 이 본문은 첫 번째 표적과 어떤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고 들어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첫 번째 표적이 뭐였나요? 가나에 있었던 혼인잔치 이야기 입니다. 근데 이 사건도 어디에서벌어지고 있는 이야기죠? 가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에요. 예수님이다시 지금 갈릴리로 와 계셔요. 사마리아를 가셨다가. 자그러면 어떤 연관성이 있고 또 차이는 무엇이고 공통점은 뭘까 에 대해서 우리가 말씀을 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선가나 혼인잔치의 메시지는 희망이 끊어진 잔치, 절망이 찾아온 잔치를 예수님이 포도주를 만듦으로써 회복을시켜놓죠. 그것은 자신이 이 땅에 왜 오셨는가에 대한 아주 중요한 목적진술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신은 죽기 위해서 왔다. 이렇게 불행에 빠지고 행복해야 될 결혼식이중단된 인생 같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은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 왔다 이렇게 목적진술을 한 겁니다. 자그러면 오늘 왕의 이야기는, 왕 신하의 이야기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자, 한 아들이 죽어가고 있어요. 왕의 신하의아들입니다. 권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절망으로 진행되고 있죠. 그런데그 아들이 살아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나요. 그러면 첫 번째 이야기가 예수님의 죽음을 선포한 이야기였다면사실 이 두 번째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은 다음에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에 다시 부활하신다는 약속과 비전을 이 속에 담아내고 싶었던겁니다. 공통점은 뭘까에 대해선 우리가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텐데 그때 다시 한번 언급하기로하고 본문으로 우선 들어가겠습니다. 자 우선 4장 43절을 좀 볼까요?
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사마리아를 얘기하겠죠? 갈릴리로 가시며. 갈릴리는 앞서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잔치를 행하셨던바로 그 가나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제 44절을 볼까요?
44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자 이 뉘앙스가 뜬금없어 보이는데 이 얘기를 갑자기 요한이 왜 여기다가 기록을 했을까? 전혀가나혼인잔치 이야기,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 다시 갈릴리로돌아온 어떤 이야기와는 좀 문맥도 엉뚱하고 좀 맞지 않는 거 같은데 이 이야기가 여기에 슬쩍 끼워져 있어요. 선지자가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자 이 문장 자체만 놓고 볼 때는 여러분 생각에 독자 입장에서긍정적인 뉘앙스로 들리십니까? 부정적인 뉘앙스로 들리십니까? 그렇죠. 굉장히 부정적인 어떤 뉘앙스를 느껴요. 그러면 이 뉘앙스는 앞으로전개될 어떤 장면과 이유가 있는 예견을 여기에 담고 있는 거에요. 자 볼까요? 어떤 일들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가?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어떻게 했어요? 영접했다고 돼있어요. 그러면 앞에 이야기와 더더욱 맞아요? 안 맞아요? 안 맞죠. 그렇죠 여러분?
(5:00-10:00)
예. 분명히 이 갈릴리로 들어가시면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이렇게 부정적인 뉘앙스로 이 여행이 시작이 됐는데 정작 들어가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했다고 되어 있죠? 영접했다고 돼있어요. 그러면 이 함수관계를 우리가 좀 풀어야 됩니다. 여기서 영접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이것은 정말 그분을 예수그리스도로 믿고 구주로 인정하고 열렬히 환영했다는 그 영접의 의미가 아닙니다. 자, 그 다음 표현을 좀 볼까요? 이는 영접한 이유를 설명하는 겁니다.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어떻게 하였더라? 보았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영접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어떤 청년이 일어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인기를 끌고 그가 기적을 행하고 병자를 고치고 그런걸 보고 그러한 생의 혜택들이 자기들에게도 어떻게 좀 가능한가라는 차원에서 그를 영접했다 그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써 우리의 생명의 구주가 되시고 이런 영접의 차원이 아니란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마을에 들어가는 목적과 이들의 영접의 사이에는 괴리가 있어요. 이거는 옳은, 온전한 영접이 아니란 거죠. 그 다음 본문을 좀 보십시다. 시작.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네, 모두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 두 번째 가버나움의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 고치는사건과, 이것을 두 번째 표적이라 그랬어요. 첫 번째 가나혼인잔치에서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과는 순서를 밝히는 걸 봐서는 어떤 연관성이 있다 말씀을 드렸죠? 그리고그 연관성의 차이를 말씀을 드렸어요. 자 그런데 그 다음 볼까요?47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되었음이라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그가 누굽니까? 왕의 신하에요. 지금 왕의 신하는 어떤 상황을 갖고 있는가 하면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 아들이 심각한 병에 걸려 있어요. 이제 죽어가는 시간만 남겨놓고 있는 절대 위기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가 갈릴리 가나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사람들처럼 들은 거죠. 그러고는 무슨 믿음이 있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게 아니고 그냥 오로지 절박한 마음 하나 때문에 온 거에요. 자 그런데 47절을 좀더 보시면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되었음이라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자 여기 올라갑니까? 내려옵니까?내려옵니다. 자 지형을 우리가 좀 이해했으면 좋겠는데요.내려온다는 걸로 봐서 지금 가나가 높아요? 이 사람이 살던 곳이 높아요? 예. 가나가 높은 지형입니다. 이사람은 지금 집이 어딘가 하면 가버나움이에요. 가나는 높은 지형입니다.그래서 표현을 내려오소서 이렇게 표현을 했어요. 자 그런데 아들의 상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밝히고 있죠?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자, 이 사람의 신분이 누굽니까?왕의 신하에요. 그러면 상당한 권력가에요. 그런데지금 권력가고 자시고 간에 아무 지금 의미가 없어요. 이 사람에게는 오로지 병들어 죽어가는 아들의 위기를어찌할 수 없는 타들어가는 아버지의 마음밖에는 없는 거에요. 왕의 신하로써 찾아온 게 아니에요.
(10:00-15:00)
그것도 이 꽤 먼 거리를. 그러니까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는 약 25마일. 30킬로 전후의 거리입니다.상당히 되는 거리죠. 게다가 이 지형자체가 어떤 지형이라고요? 가버나움에서 가나를 가려면 내려가야 됩니까? 올라가야 됩니까? 올라가야죠. 언덕을 넘어서 산비탈을 몇 개 건너서 와야 도착이 되는곳이 가나입니다. 왕의 신하정도면 사람을 넣어서 시킬 수도 있었겠죠.그렇게 지금 여유 있거나 한가한 상태가 아니에요. 아들은 시간다툼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속이 시커멓게 타 들어가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달려갈 수 밖에 없어요.꽤 되는 거리를 이게 나중에는 이틀 길인 것이 밝혀집니다. 성경에서. 돌아가다가 길 중간에 종들을 만나죠? “언제 나았더냐?” “어제 제 7시입니다.” 라는표현으로 봐서 이 길이는 이틀길이에요. 그러면 우리 생각에 야 뭐 30킬로를이틀씩 가냐? 우리가 조금 부지런을 떨면 상황도 급할 텐데 한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일 텐데. 예. 그런데 이 당시 지형을 우리가 생각하는 도로가 잘 돼있고 평탄한길로 이해하시면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데 그 지역의 전체 사진을 보면 이게 도저히 한나절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좁은 비탈길에 산을 넘어서 가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에요. 자 그런데 오늘 성경을 또 보십시다.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되었음이라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라고 돼있어요. 청하되 라는 말은 에로타라는 말을 썼어요.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반복적인 동작을 말하는 미완료시제에요. 그러니까 이 아버지는 와서선생님에게 계속 요구를 한 거에요. 제발 좀 가서 고쳐주십시오. 왜? 소문을 들었으니까. 이분정도면 우리 아들을 어찌할 수 있겠다라는절실한 마음 하나로 와서 예수님을 만나서 요청을 한 겁니다. 계속 반복해서. 자 그런데, 그런데. 문제는머냐 하면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에요. 48절을 한번 같이 읽을까요? 시작.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자 또 앞을 보세요. 이 말도 긍정적인 느낌입니까? 부정적인느낌입니까? 부정적인 느낌입니다. 마치 이런 느낌 들지 않으세요? 마치 안 고쳐줄 것 같은, 아주 냉소적인 반응처럼 느껴지지 않으세요? 그런데 요런 반응을 하시곤 고쳐주셨어요? 안 고쳐주셨어요? 고쳐주셨단 말이에요.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패턴인데? 어디서 이런 유사한 패턴을 봤죠? 예. 가나혼인잔치에서도 예수님이 어머니가 야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 그러셨어요? 어머니가 아니고 오히려 여자여 이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느낌상 해주겠다는 얘기에요? 안 해주겠다는 얘기에요? 안 해줄 꺼 같은데 또 해주셨어요? 안 해주셨어요? 해주셨단 말이에요. 똑 같은 패턴이에요. 이게 공통점이에요. 예수님이 이렇게 안 해 줄 것 같은 냉소적인표현을 해놓고는 또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냉소적인 내용을 한번 다시 확인을 해봅시다. 48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자 앞을 또 보실까요? 그러면 여기 너희라는 말은 누가 포함된 얘기입니까? 왕의 신하도 복수이니 당연히 포함된 대상이에요. 그러면 왕의 신하가지금 믿음이 있는 상태라는 말이 됩니까? 없는 상태라는 말이 됩니까?없는 상태라는 말이 되요.
(15:00-20:00)
다시 거듭 밝히지만 왕의 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게 아니에요. 여러분우리도 우리도. 예수님을 영접하여 온전한 구세주로 만나기까지 사실 처음부터 예수님을 온전히 메시아로그리스도로 알고 깨닫고 백프로 이해한 다음에 이쪽으로 온 사람이 있던가요? 아니에요. 어떤 절실함 때문에, 어떤 곤고한 문제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함 때문에 우리가 접촉점을 가지게 됩니다.맞지요 여러분? 예. 그렇습니다. 이 왕의 신하도 먼 길을 달려온 이유가 그냥 왕의 신하로써가 아니라 죽어가는 아들을 둔 아버지의 새카만 가슴을가지고 그냥 절실한 마음에 온 거에요. 이틀을 걸려서. 언덕을지나 산을 넘고 예수님이 가나에 와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그냥 쫓아온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같으면 그렇게안 하겠어요? 내 아들을 살려낼 수만 있다면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 저라도하겠는데요? 예. 이게 사람이에요. 자 여기서 이걸 뭐라 하는 게 아닙니다. 자 그런데 이제 여기에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조금 마저 보십시다.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또 내려와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듣자니까 어디서 많이 어떤 인물과배치되는 느낌을 받아요. 어떤 인물과 배치되죠? 백부장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은 하인이 그것도 아들도 아니고 하인이병이 들었어요. 성경에는 하인이라고 돼 있지만 원문에는 내 아이라고 돼 있어요. 그만큼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인간에 대한 존중감을 갖고 있었던 백부장인데 이 백부장은 예수님이 가서 고쳐주겠다고하니까 뭐라 그러죠? 내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뭐만하옵소서? 말씀만 하옵소서. 그런데 이 왕의 신하는 그런믿음이 없어요. 내려와 달라는 거에요. 그러자 예수님께서이렇게 얘기합니다. 50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잇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잇다 하시니. 예수님께서 내려와달라고 거듭 요구하는 왕의 신하의절박함을 마치 외면하기라도 하듯이 가라. 네 아들 죽지 않았어. 살아있어. 뭐만 하신 거에요? 말씀만 하신 거에요. 말씀만. 이게 바로 원격치료입니다.이때부터 원격치료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이상한 게 하나 있어요. 그 사람이, 신하죠. 예수께서하신 말씀을 어떻게 하고 가더니? 이게 이제 아리송한 거에요. 지금까지흐름과 문맥으로 봐서는 이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에요? 없는 사람이에요? 믿음이 없는 사람이에요. 사실은.뭐만 있어요? 절실함만 있어요. 근데 여기서지금 어떻게 하고 갔다? 믿고 갔다고 돼 있어요. 그래서우리가 이 본문을 읽다가 독자의 시각에서는 착시현상을 일으킵니다. 아 드디어 믿음이 생겼구나? 그런데 여러분 선생님은 버티고 움직이지도 않으시면서 걱정하지만 니 아들 죽지 않았어. 살아있어. 집으로 돌아가. 그런데어느 아버지가 아니 그거 아니에요. 같이 가셔야 되요. 이러고버틸 아버지가 있겠어요? 그냥 믿고 갔다는 말은 여기서 온전한 믿음을 말하는 게 아니고 긴가민가하고갔다 그 말이에요. 너무 꼭 과대추측을 하는 거 아니십니까? 자53절을 한번 보십시다.
(20:00-25:00)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여기자기는 누구에요? 왕의 신하에요. 아버지에요.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어떻게 했다? 믿으니라. 이 때 이 왕의 신하의 믿음은 온전해지는 거에요. 믿고 갔다는 말은그 예수님의 말씀을 확신하고 갔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중요한 힌트가 성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자 오다가 누굴 만나죠? 종들을 만나요. 51절에 보십시다.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있습니다. 소리를 치니까 그 낫기시작한 때를 어떻게 했어요? 물었죠. 언제 나았냐? 그랬더니 어제 일곱 시입니다. 일곱시, 오후 한시에요. 어제 일곱 시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 자기와 온 집안이 믿었다라고 돼있어요. 자 여기서중요한 건 이 질문입니다. 여러분이 왕의 신하 입장에서 한번 이입을 해서 한번 생각해보시라고요. 왜 물었죠? 난 시간을 왜 물었을까요? 신하는? 그 예수님의 말씀을 확신했다면 묻고 자시고 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그러면 그렇지. 이렇게나와야 되는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했다고요? 질문을해요. 몇 시에 나았냐? 그러니까 왕의 신하의 머릿속은 갑자기복잡해진 거에요. 뭐가 복잡했을까요? 간단해요. 이게 어쩌다가 나은 건지 정말 그 사람이 얘기한 그 시간에 나은 건지 뭘하고 싶은 겁니까? 그렇죠. 확인하고 싶은 거에요. 그러니까이 왕의 신하는 믿고 갔다라는 말은 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일 수 없고 반신반의하면서 그냥 떠난 거에요. 틀렸구나, 글쎄 정말 우리 아들이 고쳐져 있을까? 그러고 반은 걱정에 반은어떤 일말의 기대에. 그 상황 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데 그런 기대조차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냥 내려가는 길인데 저쪽에서 종들이 달려오는 거에요. “아 이급한데 어디 가셨습니까?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그분만나러 가신다더니.” “웬일이냐? 어르신 아들이 살아났어요.” “어 그래? 몇 시에?” 이렇게된 거죠. 몇 시에? “어제 일곱 시요.” 보니까 그 선생님 만난 시간이에요. 예수님이 돌아가라 네 아들이살았다 그 시간이에요. 그러고 나서야 뭐가 생겼다고요? 믿음이생겼다고요. 자 그러면 여기서 한가지 과제가 남아요. 이아들의 치유는 이 아버지의 믿음과 상관이 있다 없다? 없다. 아무상관이 없어요. 그러면 이 아들은 뭘로 고쳐진 겁니까? 예수님의말씀으로 고쳐진 거에요. 그러고 나서 이 아버지에게 뭐가 생겼어요? 믿음이온전하게 된 겁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과제가 필요해요. 과제라는것은 삶의 적용점일 수도 있는데 아버지가 찾으러 돌아 나오는 종들에게 뭘 했죠? 질문을 했어요. 질문은 왜 했죠? 확인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 확인하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안하고 믿는 건 말할 것도없고. 그런데 그런 믿음이라도 없으면 뭘 해야 되요? 확인이라도해야죠. 확인이라도. 이 확인을 통해서 이 아버지에게는 믿음의뭐가 생겼죠? 눈금이 하나 생긴 거에요. 흔적이 하나 만들어진겁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을 굉장히 이끕니다. 제가 어느교역자님들하고 이 본문을 가지고 대화를 좀 했어요. 어제.
(25:00-30:00)
자네 생각에는 이 왕의 신하가 왜 질문을 했을 꺼 같냐? 이 종들에게. 그리고 그 질문한 의도가 뭘까? 그 질문한 것을 요한은 왜 성경에다가기록했을까? 그랬더니 자기 군대얘기를 해주더라고요. 목사님제가 군에 있는데 군대 가기 전까지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잘 이해를 못했대요. 모태신앙인데. 이 모태신앙들이 문제가 있어요. 근데 군대를 딱 갔는데 시간이 많이남더래요. 무슨 군대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자기가 기도한내용을 적었답니다. 기도 제목을 적었대요. 시간이 나아가지고. 그런데 그게 얼마나 유익이 되냐 하면 적어보니까 기도응답에 대한 확인이 되더래요. 그때야 야 하나님이 정확히 응답을 하시는구나. 그 확인을 통해서이 친구가 어떤 눈금을 갖게 됐는가 하면 정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구나. 여기에 눈금을 갖게 된 거에요. 신앙의 흔적이 생긴 겁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이 자라고 점프하는데소중할까요? 소중하지 않을까요? 굉장히 소중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왕의 신하가 질문했다고 해서 너무 나쁘게 볼 필요는 없어요. 그걸뭘 묻고 말고 해? 그냥 믿지? 아니요. 도마도 선생님 좀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만져보라 그랬어요. 도마가 전설에 의하면 인도까지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순교했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확인을 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문제는 이 믿음이 본인의 것이 아니에요. 누가 주신 거죠? 예수그리스도가 만들어주신 거에요.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고 다시 부활하셔야만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결국은 내게서 생성된 게 아니에요. 사실은결국 이 신앙은 아들을 되돌려 받으면서 신앙의 눈금을 갖게 되고 그분의 말씀을 근거로 한 뭘 가지게 됐나요? 믿음을가지게 된 거에요. 질문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누구나이렇게 처음부터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출발하는 사람은 없어요.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염려와 걱정과 긴가 민가 하는 상태에서 조금씩 조금씩믿음의 눈금을 만들어가면서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거죠. 이 모든 과정을 누가 이끌어가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끌어가시는 거에요. 믿습니까? 4월 한달 동안에는 또 한 주 동안에 여러분들이 일상에서 이렇게 믿음의 눈금을 하나하나 확인해 가면서 여러분들의믿음이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날 수 있는 귀한 복과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