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46)
에서가가는 길
창36:1-8
1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2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3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
4아다는 엘리바스를 에서에게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고
5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태어난자들이더라
6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7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8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00:00-10:00)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예, 저는 오늘 하루 먼저 나고야에서 돌아왔습니다. 나고야까지 방문으로일본 전역의 연계 교회를 이번에 다 마무리 할 수 있었어요. 마지막 꼭지점이라 그런지 유난히 하나님의부어 주시는 은혜가 우리 대원들에게도 컸고, 특별히 저에게도 참 많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나고야에 가면 우리 연계 교회 중에 히스콜 교회가 있습니다. 저는이게 일본말인 줄 알았는데 영어더라고요. 그의 부르심이라는 영어를 저는 일본 말로 이해를 하고 참 독특한일본어다 계속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기도도 하고 그랬는데 가보니까 영어로 HIS CALL이라 쓰여 있더라고요. 마침 목사님은 출타 중이셨습니다. 하와이에 어학 연수를 위해 3개월간 떠나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대원들과 그 모든 일정과정을 유미라는 사모님이 직접 나서서 챙기시고 또 진행하시고 도와 주시고 하곤 했습니다. 둘 째날 그사모님과 식사를 하는데 한 50이 채 안 되는, 40대 중반정도 나이일 것 같아요. 보니까 담임 목사님이 마흔 여덟인 걸로 봐서 뭐 그 앞뒤 정도 아니겠어요?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는데 유난히 동작이 크고 잘 웃으세요.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잘 웃으세요. 거의 막 입안이 다 보일 정도로 입도 막 너무너무 활짝 활짝 열고 그렇게웃으시더라고요 식사 후에 그 옆에 맛있는 커피와 케익 집이 있다고 해서 저희를 거기로 꼭 대접하고 싶다 해서 부르시는 거에요. 그래서 대원들과 함께 대화를 하는데 계속 액션이 크시고 활짝 활짝 웃으시고 옆의 사람 때리고 그래요. 그런 분 계시죠? 그래서 제가 궁금함을 참다 못해서 여쭤 봤지요.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통역을 거쳐서 질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분이 막 또 오버를 하시면서 아니 왜 안 기쁘냐고? 주님이내 안에 계시는데 안 기쁘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제 그런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였는데 그분이 진심으로 그러니까 확 와 닿는 거에요. 그렇지. 주님이 계시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나? 그러면서 이 분이이어 두 번째 말씀을 하시는데 그런 얘길 하세요. 즐거움과 그리스도의 기쁨이 있는 곳에는 사탄이 절대틈 탈 수가 없대요. 자기가 목회를 하면서 자잘한 어려움이 너무너무 많았는데 정말 즐겁고 기쁨을 항상잃어버리지 않으니까 사탄이 틈을 타려고 들어오다가도 제 풀에 지쳐 떨어지거나 절대 틈을 탈 수가 없다는 거에요.아주 큰 깨달음을 가졌어요. 그렇구나. 우리신앙 생활 속에 정말 즐겁고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사탄이 우릴 흔들 수가 없겠구나. 여러분들이오늘 밤에 기도할 때도 찬양할 때도 유미 사모님처럼 아주 잊혀지지 않는, 지워지지 않는 그 사모님의잔상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참 걱정거리 많은 세상에서, 일터에서, 캠퍼스에서 여러분들을 볼 때 그리스도의 기쁨이, 그리스도의 은혜가여러분들의 표정에 얼굴에 언어에 찬송 속에 드러나기를 축복합니다. 자,기뻐합시다. 옆에 인사 좀 하세요. 자 오늘은우리 오랜만에 창세기 강해를 이어 가겠습니다. 이제 창세기 36장을좀 보십시다. 1절서부터 8절까지 한 절씩 교독하겠습니다.
1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2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3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
4아다는 엘리바스를 에서에게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고
5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태어난자들이더라
6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7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8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이번에히스콜 교회에 갔더니 일본 교회 치고는 꽤 규모가 되는 교회인데 전체 청년들과 어린 아이들까지 한 200여명출석하는 교회입니다. 일본 교회로서는 작지 않은 규모죠. 개척한지한 13년 되는 교회이고 특별히 나고야 라는 도시는 참 복음을 받아 들이기가 유난히 더 어려운 지역정서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10년 만에 히스콜이라는 이름을딴 교회를 네 군데 확장하고 개척을 해서 우리 대원들이 연계 교회에 지금 다 흩어져 함께 사역을 하고 있어요. 제가그 연계 교회에 가서 도요다라는 지역을 갔습니다. 자동차 공장이 있는 데죠. 정말 한국 사람이 없어요. 노방 전도를 하다가 우연히 모태 신앙이었던신앙을 잃어버린 한국 청년 하나를 또 거기서 만나게 되는 기가 막힌 일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사복 차림으로청바지에 반팔티 입고 철길 밑에서 찬양하면서 전도하는 우리 청년들을 찾아서 가서 이렇게 옆에 섰는대도 제가 누군지 모르더라고요. 늘 화면으로만 멀리서 보다가 옆에 이렇게 나타나니까 설마 이제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실제 선교지에 가서 이렇게 스킨십을 가까이 하면 친구들이 몰라 봐요. 오히려. 제가 삼일 교회 송태근 목사입니다. 하면 기겁을 하죠. 아니 어떻게 여기까지 뭐 이런 표정을 하면서. 그런데 이 히스콜교회 청년들은 독특한 것이 노방 전도를 해요. 우리 한국 청년들과 함께. 다른 교회는 보통 우리 한국 청년들이 가서 끌어내야 함께 전도를 흉내라도 내곤 하는데 히스콜 교회 청년들은아마 순복음 계통의 신학적 배경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상당히 뜨겁더라고요. 우리 나라의 여느 청년들집회 못지 않게 굉장히 뜨거웠어요. 어제 집회를 유투브로 실시간 한국에다가 중계를 하곤 했는데. 제가 설교 중에 선교사님 통역을 세워서 인간의 죄에 대한 설교를 했어요.
(10:01-20:00)
죄. 조금 단어들이 굉장히 적나라한 단어들이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고, 그 하나님을 떠난 그 죄의 결과가 뭐냐에 대해서 설교를 하는데 저는사실 일본인들의 정서를 모르고 그런 주제를 정하게 되었던 거죠. 일본에서는 그런 주제로 설교를 하면큰 일 난다고 합니다. 듣지도 않을뿐더러 굉장히 큰 반발과 거부감을 갖기 때문에. 후에야 알았어요. 그런 사실을. 그런내용을 담아 설교를 하는데 이상하게 선교사님이 통역을 못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속으로 아 일본어를 조금더 하셔야겠구나 이러고 쳐다보고 있었는데 나중에 문자가 왔어요. 사실은 목사님이 사용하신 그 죄에 대한표현과 단어들이 일본인들이 듣기에는 너무 직설적인 뉘앙스와 표현들이라 그대로 전달하기에는 좀 어려움이 있어서 제가 사실 좀 머뭇거렸고 버벅거려서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직설적인 죄의 문제에 대한 지적의 설교를 듣고 어제 한 10여 명의 초대된 일본 청년들이 사실 손을 들었어요. 그리스도를 믿겠다고영접을 하겠다고. 그것은 대단히 일본 교회에 있을 수 없고 가능하지 않은 현상이었다는 거에요. 그러면서 이 선교사님이 하는 소리가 차라리 그냥 통역을 할걸 그랬어요. 그러면더 손을 들었을 텐데. 물론 그것은 선교사님 주관적인 시각이지만 제가 느끼는 것은 어떤 질병이 걸렸을때는 의사가 진단의 결과에 대해서 에둘러 표현하면 환자에게 사실은 혼란을 줄 수가 있습니다. 헷갈리게할 수가 있어요. 또는 희망 고문을 할 수가 있어요. 아주절망적인 상태의 환자에게는 또 그런 지혜로운 접근도 필요하겠지만 정말 이 환자를 살릴 수 있고 고쳐야 되겠다면 그 환자의 상태에 대해서 굉장히정직하게 접근을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환자가 자기 병명에 대해서 쓸데없는 안심을 하거나 그로 인해그 병을 더 덧나게 할 수 있다 그 말이에요. 이제 우리는 다음 주까지 야곱의 톨레돗. 족보와 오늘은 에서의 족보, 톨레돗을 살펴 볼 겁니다. 그런데 에서의 족보는 오늘 하루에 끝나요. 성경의 전체 스토리로비율을 따지자면 상당히 간략하게 에서의 족보는 오늘 다 끝납니다. 그러면 이건 무슨 뜻인가 하면 성경을쓰는 기법상 이것은 더 중요한 어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서 그냥 생략하고 지나갈 수는 없으니까 앞에 간단하게 언급하고 지나가는 정도로이해를 하면 되요. 실제 우리가 살펴 보고자 하는 내용은 37장1절서부터입니다. 한번 볼까요? 1절을 보시면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앞을보실까요? 성경 기자는 창세기 전체에 걸쳐서 가장 집중해서 강조하고 싶었던 핵심 메시지가 뭐냐 하면야곱의 스토리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야곱의 스토리가 끝나면곧 이어서 무슨 얘기가 등장할 것 같습니까? 바로 요셉의 이야기가 등장을 합니다. 분량으로는 야곱의 스토리 못지 않아요. 그런데 항상 가치와 의미는분량으로만 체크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요셉의 이야기도 야곱의 이야기의 연장이라고 보면 신학적으로 혼란이없을 거에요. 굉장히 그것은 정확한 관점입니다. 자, 그래서 우리는 오늘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는 다음 주로 미루기도 하고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야곱의 생애를 조금서론 겸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갖기로 합니다. 자, 여러분들하고1절부터 8절까지 읽었어요.사실은 36장 전체를 읽어야 하는데 시간 관계상 잘랐습니다. 그래도 몇 절만 합독을 하면 좋겠습니다. 15절
15 에서 자손 중 족장 이러하니라 에서의장자 엘리바스의 자손으로는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족장, 그나스 족장과
16 고라 족장, 가담 족장, 아말렉 족장이니 놀랍게도 이 아말렉이라는 유명한 족속이 등장을 하는데 아뿔싸 누구의 혈통이었어요? 에서의 혈통입니다. 이 아말렉 족속이 나중에는 크게 번성을 해서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본격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백성을처음으로 시비를 걸고 일어났던 민족도 아말렉입니다. 그리고 이 아말렉은 평생에 걸쳐 이스라엘을 괴롭히는사명으로 살아요. 성경 전체에 걸쳐서. 내 인생에도 그런구조가 반듯이 있습니다. 놀라워요. 그런데 이게 누구의 혈통인가하면 에서의 혈통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지금 15절만읽어 봐도 공통점이 하나 있죠? 에서의 후손들은 전부 장 자리를 차고 앉습니다. 여기뿐만이 아니에요. 20절로 넘어가는데
20 그 땅의 주민 호리 족속 세일의 자손은로단과 소발과 시브온과 아나와
그리고넘어가서 31절을 보세요.
31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
에돔은에서의 혈통을 얘기하는 거죠. 그리고 지금부터 소개되는 이름들이 전부 역대 왕들입니다. 자 그러면 정리를 하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에서의 혈통은 낳았다하면 족장을 하고 낳았다 하면 왕들이 태어납니다. 그러면 이게 하나님의 언약과 뭔가 반대되는 느낌을받지 않습니까? 원래 하나님은 잘 되기로 누구에게 약속을 하셨습니까?야곱에게 약속을 하셨어요. 이삭의 축복을 통해서. 그리고에서는 야곱의 종들이 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에서의 족보 한 장만 들춰 보더라도 에서의자손들은 붙었다 하면 명문 대학이요, 들어갔다 하면 일류 기업이요 뭐 예를 들면 그런 거에요. 너무 잘 되는 거에요. 반면에 야곱의 스토리로 넘어가면 그는 자기고백대로 험악한 세월과 시간을 보내요. 그리고 우리는 지난 장까지 벧엘에 그가 이르기까지 그의 가정에불어 닥친 혹독한 시련의 현장을 함께 목격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자 우리는 7절을 한번 주목해 볼 필요가 있어요. 제가좀 읽겠습니다.
7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8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네, 자 여러분 오늘 읽은 본문까지만 보더라도 에서는 후손들만 잘된 게 아니라 재물까지도 장난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가 결국은 무슨 선택을 하게 되죠?
(20:01-30:00)
그늘어나는 집안의 부흥 때문에 가나안 땅에 거주할 수가 없어서 가나안 땅을 어떻게 하게 되죠? 떠나게되요. 여러분 이 역설을 잘 생각하셔야 해요. 잘 되는데잘 될수록 잘 되면 될수록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을 떠나게 됩니다. 정확하게 에서가 가나안을 떠나게되었던 견고한 근거는 뭡니까? 재물이 많아서 그래요. 그가나안 땅 안에서는 그의 늘어나는 이 놀라운 영육간의 이 재물의 복을 용납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그가 넘어간 데가 세일 산입니다. 거기는 이방의 통치 지역입니다. 이얼마나 역설입니까?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이제 야곱은 이 가나안 땅에서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지지리궁상을 펼치면서 살아야 되요. 많은 어려움을 이어서 겪습니다. 그런데여러분 우리 말에 이런 말 기억하시죠? 못난 나무가 뭘 지켜요? 산을지켜요. 잘난 나무들은 곧고 바른 키가 큰 나무들은 찍혀가지고 다 팔려 갑니다. 그래서 왕이 사는 집의 재목으로도 되고 배도 만들어지고 그렇게 둥지에서 잘려서 그들의 고향인 산을 떠나게 되죠. 그런데 못난 나무들은 누가 불러가는 사람도 없고 뽑아가는 사람도 없어요. 그냥그 산을 지키면서 거기에 뿌리를 박고 살 수밖에 없어요. 어쩌면 그 얘기가 내 처지 같다 라는 느낌을갖는 분들이 혹 있을 수 있어요. 누구나 젊은 날 그런 생각 한번 안 해본 사람들 없을 겁니다. 야곱과 그의 후손들은 가나안 땅을 떠날 수 없었어요. 그리고 거기서힘겹게 고난의 시간들을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힘겹게 어렵게 고난의 시간을 겪으며 살아가기에그들은 약속을 떠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언약의 바운더리를 넘어갈 수 없었어요. 이게 하나님의 큰 그림에서보면 얼마나 인생 자체가 역설로 가득 찼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꼭 불행이 결국 불행이냐? 세상적으로 잠시 잘 나가는 성공이 꼭 성공이냐? 그렇지 않거든요. 우리가 결말에서 만나보겠지만 결국 이 에서의 혈통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정확한 언약의 성취대로 유대 민족에게제약되어서 편입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에돔의 족속과 그가 통치했던 왕국의 흔적 자체가 지도상에서 사라집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는 이 땅에서 보면 시편 73편의 기자의 그 놀라운 고백처럼 그 시편 기자가 세상 사람들의 그 성공과 잘남에 시험이 들었어요.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신학적인 혼란이 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자녀라면서요 그런데 왜 우리는 맨날 이렇게 찌질 하게 살아야 하고 하나님 안 믿는 저들은 저렇게 잘 먹고 잘 사는가요? 이게 신앙 생활의 보람이고 결과라면 하나님은 정말 그렇게 모순으로 가득한 분이십니까? 라는 질문을 시편 기자가 던집니다. 그런데 언제 전말을 알게 됩니까?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야 그의 존전에서 악인의 결말과 의인의 결말을 거기서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 결말을 우리 개념으로는 뭐로 봐야 하죠? 말씀이라는 렌즈를통해서 믿음으로 봐야 해요. 자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미세한 하나님의손길을 이야기 좀 하고 말씀을 마쳐야 할 것 같아요. 그러면 가나안을 떠나지도 못하고 지질하게 지지리궁상으로 살았던 하나님의 자손들은 뭐 그렇게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행적을 남겼던 기록들이 야곱만 보더라도 기특할 만한 내용들이있었던 가요? 그것도 없거든요. 결국 야곱의 의는 결말에누구의 의라는 걸 알게 되죠? 그게 하나님의 의라는 걸 알게 되요. 나를구석에 밀어 넣어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가지고 족쇄를 채워서 깎고 빚는 가운데 비명이 터져 나오게 만들고, 왜그러실까? 거기서 무슨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을 하고 무슨 사랑을 하고 전혀 그런 거 없어요. 지나놓고 보니까 아 그때 그 힘들었던 시간들, 힘들었던 일들 때문에내가 복을 받게 되었구나 이걸 깨닫는데 그걸 깨달을 즈음에 하나님은 꼭 뭐라고 단서를 붙여 놓는지 아십니까? 믿음으로송태근은 아주 이러고 들어오시는데 얼굴을 못 들겠죠. 아 이에 아닌데.우리가 알잖아요. 살아 보면서. 아 이거 아닌데. 그런데 시편을 넘어서 히브리서 11장에는 전부 그런 논조로 그 영광과그 행위를 그 의를 누구의 칭찬으로 돌려 놓습니까? 믿음으로 모세는,믿음으로 다윗은 뭐 이런 식이 되는 거에요. 아, 나는그게 아니었는데. 나는 이렇게 돌아 서다가 그냥 부딪힌 것뿐인데. 공이나한테 와서 맞아가지고 볼이 들어간 것뿐인데. 그런 거죠. 골대앞에 서있는데 그냥 공이 날라와서 맞고 들어간 거에요. 와 송태근 나이스 슛! 그렇게 신물에 대서특필, 성경 신문에다가 막 써주는데 진땀이 나는거죠. 그래서 우리는 그 영광을 그분께 돌릴 수밖에 없는 거에요. 오늘이 에서의 족보를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밖에 결과를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첫째는 에서는 가나안 땅에그의 재물을 담기에는 넘치고 흘러서 그 약속의 범주를 떠나게 됩니다. 여기 하나님의 꼼수가 있어요. 하나님의 행위를 꼼수라 해서 불손하긴 한데 우리 이해력을 돕기 위해 표현을 하자면 꼼수죠. 어떤 게 감춰져 있을까요? 성경을 보시면 일관된 하나님의 자녀를사랑하시는 방식이 있어요. 계속 분리하십니다. 아브라함은누구로부터 분리시켰죠? 데라로부터 떼어 놔요. 그래서 정확하게하란에 미적거리고 있을 때 다시 가나안을 향하여 아브라함을 등 두들겨 일으킨 것도 데라의 죽음 후입니다. 데라가죽은 후에. 그리고 아브라함과 롯도 하나님이 어떡하셨습니까? 분리시켜놔요. 그런데 그 분리의 한복판에는 원인이 뭐였어요? 재물때문이었어요. 늘어나는 재물 때문에 롯의 입장에서 불편해 진 거에요.어른과 한 울타리에서 한 공간에서 그 약속을 좇아 산다는 게 불편해졌어요. 그래서 롯을아브라함으로부터 분리해 놓습니다. 그때
(30:01-36:32)
롯이소돔과 고모라 땅이 어떤 땅인지 잘 모르고 갔어요? 알고 갔어요? 너무도잘 알고 갔죠. 왜? 그는 일찍이 애굽의 그 화려한 문명의매력을 경험한 사람이에요. 딱 보니까 애굽 땅 같더라고요. 그런데그것을 뭐로 알았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 같았더라. 이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한 문장에 있는 이유는 신앙적 혼란 때문에 롯이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거에요. 애굽 땅 같았던 문명의 매력의 땅, 소돔과 고모라를 롯은 누구의복으로 이해를 했을까요? 그렇죠. 하나님의 복으로 이해를했어요. 그래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 같았더라, 이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하나님은 계속 누구와 누구를 분리시켜 놓습니까? 에서와 야곱을 분리시켜 놓는 거에요. 누구를 보호하시기 위한 걸까요? 안 그래도 불안한 존재인데. 누가? 야곱이. 안 그래도이 야곱은 폭탄 같은 존재인데 거기에다가 세속적 가치로 꽉 차있는 에서가 곁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불안하죠. 그래서 떼어 놓는 겁니다. 분리 시키는 겁니다. 성경의 역사는 의외로 일관되게 하나님의 자녀와 그 언약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잘라내고 분리시켜 놓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절묘한 감추인 솜씨를 발견하게 되는 거죠. 오늘이 밤에 여러분들이 이 본문을 놓고 기도할 때 이렇게 정리해서 기도하면 좋겠어요. 딱 보면 에서는 전부왕이 태어나고 족장이 일어섭니다. 그리고 재물이 너무 많아서 이방 땅으로 그의 인생의 행로는 옮겨갈수밖에 없었어요. 과연 그런 세상의 형통이, 세상의 흥왕이에서에게 영원한 복이 되었을까? 아니라는 거죠. 반면에 그런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백성들의 형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여전히 가나안 땅에서 떠나지도 못하고 별로 발전도 없고 그냥 그렇게 찌질하게사는 듯 보여졌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겨웠던 시간들이 결국 그들로 하여금 의외로 약속 안에 머물게되는 은혜를 수동적으로 입게 되더라고요. 먼 훗날 하나님은 그 모든 공로를 누구에게 돌려 주더라고요? 우리들에게 돌려 주더라고요. 네가 참 기특했다 잘 참았다, 잘 견뎠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견딤, 우리의 인내, 우리의 긴 기다림은 우리의 몫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기다려 주신 시간이었고 참아주신 시간이었다는 겁니다.그것이 성경의 일관된 원리에요. 오늘 이 말씀 앞에 나의 생애를 한번 반추해 보십시다. 내가 오늘도 아직 그 에서 쪽에 인생의 추가 기울어져 있어서 에서의 시각으로 인생을 조망하는 부분은 내 심령속에 없었는가? 돌아보십시다. 지금은 비록 답답하고 앞이안 보이는 것 같고 나는 왜 이렇게 자꾸 힘든 일만 계속 반복될까? 도무지 이해가 안되고 번민이 가득한이 밤일지라도 그렇기 까닭에 하나님의 은혜 밖에는 매달릴 수 없었고, 거기 앞에 징징 울 수 밖에 없었고그러다 보니 내가 세상 길로 떠나지 못했고, 세상 길로 떠나지 않는 게 아니라 세상 길로 떠날 수 없었죠. 그럴 겨를과 정신조차 우리는 마음 먹지 못할 정도로 하나님이 우리를 들들 볶았더라 그 말이에요. 그래서 막 힘들면 죄 지을 생각이 안 나요. 그렇죠? 슬며시 웃는 여러분들의 입가에 번진 미소의 의미를 저는 알죠. 들들볶여 봐요. 죄 지을 생각이 나나? 안 나나. 어디 그런 생각이 나겠어요? 그것이 참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우리를사랑하시는 우리를 다루시는 우리 속에 불순물들을 뽑아내시는 하나님의 수단이고 방식이었다는 것을 곧 머지않아 깨닫게 될 겁니다. 우리는 금요일 밤마다 이 성소로 나와서 이 공간이 성소라는 말이 아니고 여러분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성소로 나오는거에요. 이 성소로 나와서 말씀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그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결과를 믿음의 눈으로 붙자고바라보는 복된 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94장 찬송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