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내게 노여워하느냐
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00:00-05:00)
우리는 지금 요한복음 7장을 살펴보고 있는대요. 7장이만만치 않게 깁니다. 그리고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한두 주에 마치기에는 분량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몇 차례에 걸쳐 나누겠는데요. 아마 다음주쯤까지 해야 그쳐지지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우선 오늘 첫 절을 보니까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이렇게 시작이 되죠? 혹시 지난 주 설교제목이 뭔지 기억하십니까? 올라가라였습니다. 올라가라. 우선 지난 주 설교의 맥락을 알아야오늘 내용을 좀 이해할 수 있기에 설명을 잠깐 2, 3분간 드리고 시작을 하겠습니다. 올라가라. 예수님에게 한 말인데 누가 먼저 했죠? 예수님의 형제들이 가족들이 먼저 했습니다. 근데 이 말은 권면의차원보다는 살짝 조롱이 담긴, 조소 섞인 제안이었습니다. 이런뜻이었죠. 당신의 주장이 옳고 또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려 한다면 그것이 목적이라면 왜 형님은 이 갈릴리촌구석에서 마냥 이러고 있습니까? 그러지 말고 명절도 됐겠다 그냥 예루살렘으로 가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여기서 행했던 그런 기적 한번 해보시죠. 이런 뜻이었어요. 그러자예수님께서 어떤 반응이셨는가 하면 일언지하에 아직 내 때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올라가지 않겠다이런 뜻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왠걸 그 명절이 마쳐지기도 전에 살그머니 올라가셨어요. 은밀하게. 왜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을 하실까요? 이런 역설적인 행동이 많죠 예수님에게는. 대표적인 케이스로 가나혼인잔치의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이 그랬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 여자여이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안 만들 것처럼 얘기했다가 또 만든단 말이에요. 이것도 앞뒤가 태도였습니다. 왜 그러실까요? 분명히 이유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는 올라가기를거절했던 것은 그런 기적을 베풀어서 사람들을 환호케 만들고 인기를 몰고 가는 이런 차원의 요구는 내가 거절한다 그 뜻입니다. 그러면서 명절이 마쳐지기도 전에 올라간 이유는 뭘까요? 즉, 이제 나는 그 명절에 담긴 의미처럼 십자가에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로 올라가는 퍼포먼스를 올라감으로써설명하신 겁니다. 올라가긴 올라갔지만 외적인 태도는 다를 바 없었지만 의도와 목적은 전혀 달랐다는 것은우리가 금방 눈치챌 수가 있어요. 그런 흐름에서 오늘 본문을 좀 보자고요.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올라가셨죠? 뭐하고 계셨습니까? 가르치시니이렇게 돼 있어요. 가르치시니. 앞을 잠깐 봅시다.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고 병자를 고치고 하는 게 아니라 성경은 정확하게 성전 안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아놓고 뭐하고계셨어요? 가르치고 계셨어요. 가르치고. 그러자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두 가지 때문에 놀란 거에요. 놀란 이유를 15절에서 여러분 같이 읽어보십시다.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예, 유대인들이 놀란 것은 두 가지 입니다. 보통이 당시 가르침의 관습은 이렇습니다. 자기의 유식을 조금이라도 더 어필하기 위해서 이런 관례가 있었어요. 제가 설교를 하면서 이런 어법을 쓴다고 합시다. 크리소스 톰이 말하기를, 마틴 로이드 존스가 말하기를,
(5:00-10:00)
존 스타트가 말하기를, 아무개 박사가 이렇게 얘기했는데. 그러면 좀 있어 보이지 않아요? 좀 유식해보이지 않아요? 그렇듯이 이 당시에도 어느 문하생이라면 누군가를 불러모아놓고 가르칠 때 반드시 랍비 누구누구가 말하기를 이렇게해야 쉽게 얘기하면 유식해 보이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말하도록 돼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법을 보니까 전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뭐근본도 없는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놀란거에요. 첫 번째. 두 번째는 15절을 잘 보세요. 두 번째 놀란 이유가 정확하게 밝혀져 있는데 이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느 문하생에게 본적이 없는 사람인걸 안단 말이에요. 배우지 않았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히브리어를 읽어가면서 설교를 하시는데 깜짝 놀란 거에요. 그런데여기 어떻게 그 내용을 아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뭘 아느냐? 글. 그라마타. 우리 그래머 그래머 하죠. 문법.그러니까 어떻게 그라마타를 아느냐? 이 사람들이 놀란 거는 정확하게 이야기 합시다. 내용을 듣고 놀랬습니까? 글을 아는 것 때문에 놀랬습니까? 그렇습니다. 내용 때문에 놀랜 게 아니에요. 글을 안단 말이에요. 이 사람이 어느 공기관에서 배운 적이 없는걸 우리가 다 아는데, 또 어느 문하생에 들어가서 공부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아는데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이런 표현을 쓰지 않나? 또 글을 알 뿐만 아니라 표현과 논리와 수사법이 보통 유식한 게 아니에요. 여기에 놀랜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이런 반응들이 교회 밖에많습니까? 교회 안에 많습니까? 교회 안에 많습니다. 교회 안에 보면 설교 내용보다도 어법 가지고 문법 가지고 표현 가지고 또 지적을 하는 분들이 열렬히 또 있어요. 고마운 일이죠 저한테는. 당연히 그런 지적이 저는 고맙습니다. 고칠 기회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용을 가지고 놀랜 게 아니라글을 읽는 걸 보고 놀랬단 말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조그만 신앙생활의 과제가 있다면 우리는 어법과표현력과 글에서 뭘로 옮겨져야 됩니까? 메시지를 옮겨져야 되요. 내용으로옮겨져야 되요. 이런 편견이 사실상 내용을 이해하는걸 가로막아요. 오늘날에도그런 게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강사가 초청이 됐는데 사람들이 제일 먼저 보는 게 프로필을 봐요. 어 이분 하버드에서 공부했네? 그리고 학위가 PH.D야. 아 뭐 좀 내용이 있겠다.그런데 뭐 엉뚱한 얘길 하고 가도 프로필 때문에. 오! 역시. 이런단 말이에요. 그런데 중학교 중퇴에다가 학위도 어느 학교인지이름도 없는 학교가 적혀있고 그러면. 이 많은 청중 앞에서 저분이 옳게 성교나 제대로 할 수 있겠나그러고 삐딱한 마음을 가지고 들으면 꼬투리나 잡으려고 하지 내용을 듣질 못한단 말이에요. 이 편견과선입견 때문에. 이게 교회 안에 많아요 사실은. 여러분 정말좋은 설교는 뭘까요? 제가 모시고 있던 원로 목사님이 쓰시던 강대상이 있었어요. 그걸 제가 몇 년 동안 썼던 적이 있는데 그 강대상 안쪽 앞에 보면 그 목사님이 영어로 타이핑해서 적어놓은글귀가 있습니다. 청중으로 그리스도를 보게 하라. 청중으로그리스도를 보게 하라. 참 잊지 못할 교훈이었습니다.
(10:00-15:00)
좋은 설교자라는 것은 화려한 말 습관, 논리력, 수사력도일부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이 좋은 설교의 기초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좋은 설교라는 것은 첫째가청중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16절에이런 말씀을 하시죠? 제가 읽겠습니다.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
이 교훈은. 예수님은 이 글은 입니까? 이교훈입니까? 이 교훈이에요. 메시지에요. 그라마타가 아니란 말이에요. 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이의 것이라. 이 교훈의 권위와 출처를 어디에 두고 있나요? 나를보내신 하늘 아버지께 그 권위와 출처를 두고 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평생 어쨌든 설교를 하면서 살아온사람이지만. 두 가지 설교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하나는자기가 열심히 이 자료, 저 자료 해서 만든 설교가 있다면 또 하나는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올라온설교가 있어요. 이거는 저희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과제이지만 사실 한국교회 성도들이나 청중들에게도 이것을기준으로 분별해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듣기 좋은 설교가 좋은 설교는 아니에요. 아 저분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올라온 설교인가? 그냥 자기가만든 설교인가? 이건 알 수 있잖아요. 사실. 우리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그런 목회자들이 될 수 있기를 예배 때 마다 기도해주실 의무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이 부실함에는 일차적인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지만 여러분들도 그 한 몫을 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 이제 17절을 좀 읽을까요?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이 깜짝 놀랄 일을 얘기하십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청중은 유대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이 어떤 분들입니까? 글자 작고 하나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에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부들부들 떨면서 매일매일을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사람들인데. 아 그 사람들을 갖다 대고 너희가 모세의 율법을 안 지킨다 그래요. 그렇다면예수님의 기준과 그들의 기준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간격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셔야 합니다. 그들은 그 글자 하나하나 붙들고 있는 게 그 율법을 지키는 줄 알고 있는데예수님은 아주 극단적으로 너희 중에 율법을 옳게 지키는 자가 없다 그 말이에요. 이 말은 너희가 율법을모른다 그 뜻입니다. 계속 해서 예수님이 들통을 내는 게 뭔지 아십니까? 이들의 영적인 무지에요. 그들은 율법 율법 하는데 정작 너희가 율법을모르는구나 아무도 지키는 자가 없구나. 유대인들에게 이 말을 한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말씀을 하세요.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이 죽이려 한다는 말은 청중을 향해 한 말이 아니에요. 유대 당국자들을향해 한 말입니다. 이 청중들은 아직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도도 시비도 일으키질 않았어요. 그 다음절을 한번 볼까요?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그런데 요한복음 5장서부터 이미 예수님은 당국자들의 죽이려는 음모에 걸려있어요. 그리고 점점 그 음모는 예수님을 향하여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었습니다.
(15:00-20:00)
그리고 7장이 끝나기 전에 유대당국자들은 사람들을 보내서 예수님을 잡으려 하죠. 왜 죽이려 하느냐? 예수님은 이 일 때문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거에요. 놀라운 것은이 영적인 인간의 무지가 예수님을 결국 죽음의 자리로 몰아 갑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는길가에 옷가지를 깔고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러고불과 얼마 안 있다가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라는 폭도로 바뀌죠. 자기들의 기대 요구에 맞지 않으니까 금방돌변하는 백성들의 영적인 무지를 우리는 멀지 않아 만나게 됩니다. 자 오늘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영적인무지를 발견해요. 메시지에는 관심이 없고 수사력, 논리력, 화려한 말, 글을 아는 것을 보고 놀랩니다. 그건 뒤집어 얘기하면 예수님을 아직 제대로 누군지 모르고 있다는 얘기가 되요.자 그런데 21절을 보십시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여기 한가지 일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생명을 살려내는 일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문맥과맥락에서는 요한복음 5장에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시는일입니다. 그런데 그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자 청중들, 즉유대 지도자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38년을 죽음 같은 삶에 시들어가던 영혼의 회복에는 관심이 없고안식일에 누가 너한테 안식일을 범하는 이런 못된 짓을 했느냐? 그 사람이 누구냐? 그러고 그때부터 예수님을 사실상 유대 당국자들은 체포하려고 의도를 품기 시작합니다. 공개적인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그 얘기를 하시는거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정확하게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거에요. 그 일이 7장으로부터 약 7개월정도 전의 얘기입니다. 그 베데스다 연못가의 일이. 그 일을염두 해 두고 예수님이 지금 하시는 말씀이에요 .자 그런데 우리가 조금 더 가서 보십시다. 오늘 해석의 제일 어려운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22절.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자 여러분 이제 앞을 좀 보십시다. 할례는 누가 준겁니까? 할례는 하나님이 주신 거에요. 우리 레위기 12장을 띄워주실까요?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3 여덟째 날에는 그 아이의 포피를 벨 것이요
이 할례가 사실은 모세의 율법에 기록돼 있지만 원래는 창세기 17장에 한번 띄워주실까요?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이 된 겁니다.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다음절.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네. 자, 그러면 정확하게 할례는 누구의명령이에요? 하나님의 율법이에요. 그런데 안식일을 지키라는것도 누구의 명령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명령이에요. 그런데이제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이 생겨요. 아이가 태어났어요. 사내아이가. 그러면 팔 일 만에 뭘 행해야 한다고요? 할례를 행해요. 그런데 하필 그 팔 일째가 안식일에 딱 걸린 거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해요?할례를 행하자니 뭐가 깨져요? 안식일이 깨지는 거에요.
(20:00-25:00)
그 안식일을 지키자니 또 뭐가 깨지는 거에요? 할례가 깨지는 거에요. 그러면 왜 하나님은 요럴 경우에는 요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명시된 법규가 없었고 안 만들어졌을까? 미처 하나님이 그 생각을 못한 걸까요? 성경에는 가끔 이렇게 하나님께서의도적으로 모호한 법을 그냥 둘 때가 있어요. 대표적인 예가 한 규빗.한 규빗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입니까? 이 손끝에서 팔꿈치까지가 한 규빗이에요. 그러면 팔이 긴 사람들은 길이가 또 달라요. 저 같은 숏팔은 불과얼마 안 되요. 그러면 똑 같은 한 규빗이라도 저 사람 기준이 다르고 내 기준이 다를 수 밖에 없단말이에요. 저는 이 모호함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감추어져 있다고 봐요. 세상은 명확히 떨어지는 게 없어요. 특별히 인생을 살다 보면 명확히재단해서 딱 떨어지는 경우가 없습니다. 항상 뭔가 잘 모르겠고 안개를 걷는 거 같고 모호하고 잘 드러나지않고. 그 속에서 뭐가 이루어지죠? 성장과 성숙이 이루어진다는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 모호하게 남겨둘 때가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난지 팔 일만에. 그런데 그 팔 일이 안식일에 딱 걸릴 때 어떻게하겠냐 그 말이에요. 그러면 둘 중에 하나는 우선적 가치를 통해서 결정을 해놓고 취사선택을 해야 해요. 그러면 이 결정을 누가하냔 말이죠? 율법선생들이 한단 말이죠. 자 예를 들어서 미드라쉬 해석을 보면 생명이 위중한 경우 안식일에 치료를 해야 되느냐? 안 해야 되느냐? 이때도 이 질문이 있었단 말이죠. 이런 해석을 해놨습니다. 할례를 아아브라함으로부터 온 것이니까 이거는생명과 건강에 관한 것이니 안식일보다 크다. 그래서 안식일에 할례만은 할 수 있도록 규정을 한 겁니다. 그러면 그 규정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이 한 거에요? 인간이 한 거에요? 인간이 했죠. 인간이 했죠. 무슨말인지 이해가 되요? 아, 이거 되야 되는데. 이해가 되죠 여러분? 성경을 다시 보세요. 22절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할례를 행하느니라. 그러면 이 결정은 누가했냐? 그말이에요. 사람이 했단 말이에요. 그렇습니까? 안그렇습니까? 자 그런데 23절
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내게 노여워하느냐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저를 보세요. 좀 어렵습니다.유대인들은 사람의 모든 기관을 248개 기관으로 구분을 합니다. 그런데 이 248개 기관이 건강해 지려면 평생 건강하게 살려면 난지8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건강하다는 이론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요. 이걸실지 이론화 시킨 사람은 A.D. 100년 경에 엘르아살이라는 랍비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이론은 그 전에도 있었지만 그거를 그렇게 명시한 사람이 랍비 엘르아살이라는 사람이에요. 그 정도로 이 할례에는 영적인 의미도 있지만 실질적인 건강에 관한 이유도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할례가 사람의 몸에 건강하다는 학설은 일부 의학계에도 인정하고 있는 학설이에요. 자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거죠.
(25:00-30:00)
248개의 신체기관을 중요하게 여겨서 안식일에도 할례를 하는 너희들인데 나는 38년 동안 죽어가던 그 일어서지도 못하고 수족을 쓰지도 못하던 그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만들었는데 안식일을어겼다고 왜 나한테 시비냐 그 말이에요. 자 이런 관점에서 23절본문을 다시 읽어보라고요. 다같이 한번 시작.
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내게 노여워하느냐
이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왜 예수님이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하는 것이라는표현을 썼을까요? 그런 비교 때문입니다. 이런 얘기죠. 너희들은 사람 몸의 기관을 248개 기관으로 이해를 해서 그걸 중요하게중요하게 여겨가지고 할례를 안식일에도 받으면서, 그렇게 결정을 해 놓으면서 나는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만든 일을 안식일에 했는데 왜 나한테 시비를 걸고 죽이려고 하느냐? 그걸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얼마나 자기 모순에 빠져있고 안식일의 참된 율법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걸 금방 들통을 내는거에요, 스스로가. 그러면서 오늘 가장 중요한 얘기가 나왔어요. 24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자 이제 다 됐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뭐로 판단하라? 공의. 오늘 말씀의 제목이 뭐죠?하나님의 공의란? 질문으로 끝났어요. 보통 율법사들의공의나 세상의 공의는 재단하고 판단하고 분석하고 해석해서 거기에 어긋나면 죽이는 게 공의에요. 그리고심판하는 게 공의에요. 물론 이 세상의 공의적 기준에는 그런 요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성격이 틀립니다. 결국 하나님의 공의는 뭘공의라고 말할까요? 생명을 살려내는 게 하나님의 공의에요. 그것이가장 꽃피웠던 장소가 어딥니까? 십자가에요. 십자가에는 이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값을 지불함으로써 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이루어진 심판을 통해서 멸망당한 우리가 뭘 얻게 되었나요? 무지를 깨트리고 영적인 구원을 받게 되었어요. 생명을 얻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 공의라는 디카이오스라는 이 말은어떤 의미를 담고 있느냐 하면 마땅히 줄 것을 주는 태도. 즉 이웃에게 타자에게 마땅히 줄 것을 주는태도를 공의라는 이해 속에 담고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공의는 세상을 재단하고 심판해서 처벌하는죽이는 정의나 공의가 아니라 내가 이웃을 위해서 스스로 죽음으로써 그 이웃에게 마땅히 돌려줄 것을 돌려주는 하나님의 공의. 이 공의가 하수와 같이 온 땅에 퍼져야 되는데 이 땅은 세상의 공의로 죽음의 냄새가 가득 차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될 가치나, 우리 성도들이 평생을 살면서명료하게 붙들어야 될 가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공의적 가치에요. 생명을 살리는 일인가? 아닌가로 우리는 모든 선악을 구별해야 됩니다. 믿습니까? 이것이 끝까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교회적 가치이고 성도의 존재감입니다.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 즉 생명을 살리는 공의가 여러분들을 통해서 온 땅에 죽은 냄새를걷어내고 죽음의 땅을 살려내는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와 같이 흘러가는 순종이 있기를 주님의이름으로 축원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