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00:00-05:00)
이제 오늘 요한복음 3장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지난 주는 니고데모 이야기를 좀 했었어요.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죠. 니고데모라는 인물은 사실상 유대인의 대표를 상징합니다. 그는 어떤영적인 진리, 허기에 목말라서 찾아온 게 아니고 예수님과 실질적인 논쟁을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대화 중 한가지 사실이 드러났죠. 영적으로 깜깜하고 무지했다는 사실입니다.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예수님은 그런 인생들을 위해서 모세가 광야에서놋뱀을 든 것 같이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천명함으로 그 사건은 마무리가 됩니다. 오늘이야기는 그 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22절이렇게 시작을 하죠.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뭘 베풀었다고 되어 있죠? 세례를 베풀었다. 그런데사실 예수님은 세례 베푸신 적이 없어요. 무슨 소리냐? 여기성경에 있는데? 4장 1절을 한번 볼까요?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봤어요? 들었어요?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본 게 아니에요. 2절 다같이 시작.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자 이제 확실히 드러났죠? 예수님은 세례를 베푼 적이 없습니다. 그 제자들이 베푼걸 사람들이 어떻게 오해를 했어요? 예수님이 베푼것으로 오해를 한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그렇게 시작이 되는 거에요. 22절을 그런 각도에서 한번 보자고요.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그러니까 여기에 실질적인 세례는 예수님이 베푼 게 아니고 누가 베푼 거죠? 예수님의제자들이 베푼겁니다. 그리고 이제 그 다음절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잠깐 멈추어서 이 부분을 좀 이해를 하고 이것은 내용보다도 구조를 이해를 해야 할 꺼 같아요. 사복음서기자가 세례 요한을 설명하고 예수님을 설명하지만 이렇게 동시에 사역을 같이 한 장면을 그려 넣기는 요한 뿐입니다.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시차가 있어요. 그리고 사역을 하더라도 다른 사역으로 그림을 그려놔요. 그런데 요한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도 세례 베푸는 사역을 하고 계시고 그 가까운 마을에 세례 요한도 똑같은 사역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배치를 해놓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에요. 예수님이 지금 청파동에서 지금 제자들 데리고 세례를 베풀고 있는데 세례 요한이 요 남영역 근처에서 세례를 베풀고사역을 하고 있는 거에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요 장면이정확히 그런 그림이에요. 그러면 요한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의 세례사역과 세례 요한의 세례사역을 한 지역에서그것도 인근거리에서 동시에 하고 있는 모습으로 구조를 해놨을까? 여기 매우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자 이것 때문에 문제가 벌어져요. 다음절을 한번 보죠. 24절을 보십시다.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좀 뜬금없죠? 마치 이 말은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아요??갇히기를 기다리는. 문장자체가 굉장히 꼬여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아요? 뭐 하러 이런 말을 여기에 써놔요?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5:00-10:00)
마치 옥에 갇히기를 기다리는 어떤 모습처럼 기록을 했단 말이죠. 이 기록은 사실 성경에서잘 소개되지 않는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을 표시한 내용이에요. 여러분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 예수님의본격적인 사역은 언제부터 시작되는지 아세요? 요한이 옥에 갇히면서부터 시작이 되요. 요한이 왜 옥에 갇혔는지는 아실 꺼에요. 당시 왕이었던 헤롯 왕궁의스캔들을 요한이 지적을 했습니다. 그 스캔들은 헤롯 왕궁의 아주 유명한 역사에도 기록된 스캔들이에요. 자기 동생의 아내를 뺐죠. 그 동생의 아내가 굉장히 절세 미인이었다그래요. 그래도 뺐을 사람이 따로 있지. 그거를 누구도 입벙긋하지 못하던 시대에 세례 요한이 지적을 합니다. 그래서 미운 털이 박혀서 체포가 돼 나중에는 그의 목은쟁반에 얹어지고 참수형을 당하죠. 그런데 아직 옥에 갇히지 않았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옥에갇히는 것으로 실질적인 요한의 모든 사역은 완성이 됩니다. 끝이 납니다. 그러면 요한은 뭐냐? 그래서 요한을 가리켜 성경에서는 구약의 마지막선지자라고 하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 얘기에요. 그러니까 요한은 구약을 실질적으로 닫는 마지막 주자에요. 그토록 수 천년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선지자들이 오리라 약속한 메시아를 전하고 전하고 전하다가 그 마지막 바톤을받은 자가 누구냐 하면 세례 요한이에요. 그런데 그의 임무는 감옥에 갇히는 것으로 구약의 장구한 역사를마감합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리고 이제 오리라예언되었던 실체이신 예수님이 역사 속에 일어나셔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는 거에요. 해가 떴으니 달은더 이상 필요가 없듯이 사라지는 거죠. 그 과정에서 오늘 일어난 일인데 그러니까 오늘 이야기는 니고데모에가려져서 많이 언급이 잘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한데 사실은 중요합니다. 자 성경을 좀 볼까요? 25절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앞을 잠깐 보십시다. 아까 구조를 잠깐 언급했어요. 남영동에서는세례 요한이 지금 세례 베푸는 사역을 하고 있어요. 청파동에서는 예수님이 세례 베푸는 사역을 제자들과함께 하고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살살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원조 논쟁이 벌어진 거에요. 여러분들에게 한 번 여쭤볼게요. 세례라는 사건만 놓고 볼 때 사실상 세례 요한이 원조입니까? 예수님이원조입니까? 세례 요한이 원조죠. 예수님마저도 누구에게 세례를받았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어요. 그래서 원조 논쟁으로치자면야 이 세례는 누가 원조입니까? 세례 요한이 원조에요. 그런데두 가지 현상이 나타난 겁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자꾸 예수님에게로 빠져나가요. 요한복음 1장 36절을보세요. 1장 앞으로 두어 장 넘기면 나오죠 36절. 제가 읽겠습니다. 요한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얘기해요.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절 시작.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네. 자 요한이 저 사람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야. 이렇게얘기하니까 평생 요한의 가르침을 받고 따르던 제자들이 슬그머니 누구에게로 넘어가고 있죠?
(10:00-15:00)
예수님에게로 넘어가고 있어요. 이탈 현상이 벌어진 거에요. 게다가 방금 읽었던 4장 1절을가보세요. 1절을 보시니까 이렇게 돼 있어요.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누구보다 많아요? 요한보다 많아요. 이렇게 된 거죠. 후발주자인 예수님의 세례가 더 인기가 좋은 거에요. 그리고 더 사역이 잘 되요. 심지어는 요한의 제자들도 그리로 넘어가고있고. 또 원조는 세례 요한인데 후발주자인 예수님의 세례가 더 인기가 있어서 사람들이 그쪽으로 요한보다더 많이 몰리는 거에요. 자 그러면 누구 입장에서 생각을 해봐야 되냐 하면 요한의 제자들의 입장에서생각을 해보라고요. 이게 뭐지? 기분이 좋았을까요? 나빴을까요? 기분이 슬슬 불쾌해지는 겁니다. 아니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래요. 아니 지금 우리가 남영역에서세례 베푸는 사역을 하고 있는데 멀리 뭐 부산에서 하는 것도 아니고 꼭 그 근처인 청파동에서 똑 같은 사역을 해야 돼? 우리가 원조인데 꼭 같은 설렁탕 집을 차려야 돼? 뭐 이거랑 비슷하게된 거죠. 게다가 원조인 집은 잘 안 되요. 그리고 나중에차린 집이 지금 더 잘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요한의 제자들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란 말이에요. 기분이 어땠을 꺼 같아요? 일단 화가 나고 뭐가 생겼을까요? 시기심과 분노가 생긴 거에요. 그래서 이들이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와서 지금 질문을 해요. 질문을 잘 보세요. 26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그에게로 가더이다
네. 이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요? 아선생님 지금 사람들이 다 저쪽으로 지금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에다가 제자들 마음속에 의문이 하나가 생겨요. 25절을 잘 보세요. 그 의문 중에 하나가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정결예식에 대하여 뭐가 일어났어요? 변론이 일어났어요.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정결예식은 뭔 두고 벌어진 논쟁일까요? 당연히 세례입니다. 이상하다 저 집이 더 잘되는데 어느 게 진짜인 거야? 이게 원조논쟁이 벌어진 거에요. 쉽게 얘기하면, 여러분들 이해를 돕기위해 이런 표현을 하는걸 양해해주세요. 아니 이 설렁탕 집은 우리가 먼저 차렸는데 저 집이 잘되는걸보니까 어느 게 진짜 설렁탕이야? 제자들 마음속에 이런 의문도 생기고 좀 짜증도 나고 시기도 나고 분노가일어난 거에요. 그래서 세례 요한에게 찾아와서 이 질문을 던진 겁니다.다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선생님. 그러자 세례요한이 아주 명징스러운 대답을 꺼내놓습니다. 그 대답은 오늘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룹니다. 27절을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간단해요. 하늘에서 주신 것이 아니면 사람이 아무도 받을 수가 없다. 자 그러면 여러분 생각에 이 말을 요한이 했다 칩시다. 요한이 한거죠. 자기를 두고 한 얘기일까요? 예수님을 두고 한 얘기일까요? 둘 다 입니다. 우선 요한은 이 말을 하고 멋진 자기 사역의 마무리를하는 은퇴사를 남기죠. 그는 흥하야여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15:00-20:00)
이 말은 정확하게 지금까지 내가 광야에서부터 부름 받아 이 사역을 한 것도 여기까지인데, 내임무는 여기까지인데. 이 일도 그 권한이 누구로부터 왔다는 얘기에요?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얘기에요. 또 한 켠에 이 말이 누구에게도 적용이 된다고요? 예수님에게도 적용이 되요. 지금 점점점 잘되고 있는 저 예수님은흥해야 되는 분인데 저분이 하시는 저 사역도 누구로부터 권한이 왔다는 얘기입니까? 위로부터 권한이 왔다는얘기에요. 자 이 인식이 왜 중요할까요? 이 인식이 정확히들어왔을 때 내 사역은 안되고 저분 사역은 잘되고 에 대한 비교나 시기심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게 정확하다면.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한이 아니라고생각할 때 누구의 마음처럼 시기질투가 벌어집니까? 제자들의 마음처럼 시기 질투가 벌어지는 거에요. 왜 우리 집은 잘 안되지? 왜 저 집은 잘되는 거야? 왜 이런 생각이 들어올까요? 공동체 안에 이런 현상들이 얼마나 많이일어나는지 아세요? 이런 걸로 비교하고 시기 질투하고 경쟁하고. 왜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이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일이라는 사실에 눈이 열어지지 않으면 그런 현상이나타나는 거에요. 기억을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서 요셉의 이야기를 한번 해보십시다. 형들이 자기 앞에 양식을 구하러 엎드린 모습을 보고서야 형들이 놀랜 게 아니라 진짜 놀랜 건 요셉이에요. 왜? 지난 세월 툭툭툭 알 수 없는 기호들처럼 무수한 사건과 사연들이있었어요. 그 사연들과 사건들을 겪고 지날 때는 어어어 이게 뭐지? 왜나한테 자꾸 억울한 일이 생기지? 도무지 해석과 설득이 안됐어요. 그런데형들이 환란 속에 기근을 피해 양식을 구하러 엎드린 모습을 보고서야 요셉의 그 단편의 기억과 지나간 사연들이 주루룩 줄이 맞으면서 하나의 그림이되는 거에요.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요셉이 경천동지할 경이가 인식 속에 열어진 겁니다. 아 이게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구나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일이라는 사실 앞에 눈이 열어지자 원수도 가해자도피해자도 의미가 없어지는 거에요. 이해가 되요 여러분? 여기서자연스럽게 용서를 할 수 밖에 없는 거에요. 아 이게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구나. 이 기근의 때를 대비해서 저들은 나를 팔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앞서 나를 보내신 자리였구나. 믿습니까? 요한에게 이게 있었어요.아 내 임무와 내 역할은 여기까지구나. 여기까지구나. 이게정확할 때 저분이 잘되는 일에 대해서 아무 질투나 시기나 부러움이 일어날 수가 없어요. 왜? 하나님께로부터 내게 부여한 역할과 임무가 여기까지라는 사실 앞에 눈이 떠진 때. 그런데 이게 눈 열어지지 않으면 공동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죠? 시기, 질투, 다툼, 경쟁. 피곤해지는 거죠. 인생의 평화가 없는 거죠. 샬롬이 없는 거죠. 이것이 요한과 제자들의 인식의 차이였습니다. 자 성경을 또 보십시다. 27절.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절 다같이 시작.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원래 헬라 말을 잘 보시면 이 문장을 보면 그대로 직역을 하면 너희가 바로 그 증인이 되야 된다.
(20:00-25:00)
이 너희니 라는 말이 맨 앞에 붙어 있어요. 그건 강조하는 얘기입니다. 너희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해야된다. 오로지 신랑만 드러나는 역할을해야 된다. 그 다음절을 볼까요? 29절. 알듯 모를듯한 표현을 하나 썼어요. 이것은 당시 결혼에 대한 문화이해를 좀 가져야 이해가 되는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아멘. 앞을 보십시다. 유대 결혼법은 까탈스럽기로아주 유명합니다. 실질적으로 예식을 두 번하죠. 한번은 신부집에서하는 정혼이라고 합니다. 정혼이 끝나면 부부는 헤어져야 되요. 이때이미 법적인 부부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이 정혼을 한 사이였어요. 대신육체적인 관계는 갖지 못합니다. 신부는 신부 집에 남고 신랑은 자기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의 감독아래신부를 데려다가 살 집을 집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보면 그 대목이 나오죠? 너희가 지금 나의 가는 길을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그랬어요. 집 짓는 기간이 대략 1년이걸립니다. 신랑은 정혼을 마치고 자기집으로 돌아갈 때 신부에게 이 한마디를 꼭 남겨요. 1년 후 알지 못하는 어느 날 내 반드시 그대를 데리러 오리라. 그날짜는 신랑이 몰라요. 그 날짜는 누구만 지정할 수 있는 날짜인가 하면 아버지만 지정할 수 있어요. 돌아간 신랑은 자기 집에서 아버지의 감독아래 일꾼들과 함께 뚝딱 거리며 집을 지어요.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호출을 해요. 얘 이리 오너라. 이만하면 네 아내를 데려다 살 집이 훌륭하다. 오늘 밤 당장 가서건너 마을에 네 아내를 데리고 오도록 해라. 그러면 그 시간부터 잔치는 시작이 됩니다. 그러면 잔치에서 결혼잔치에서 제일 중요한 인물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신랑입니다.신부는 아직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 그 다음에 중요한 인물이 누군지 아세요? 쇼세빈이라는 역할을 감당해야 되는 신랑의 친구가 그 다음으로 중요합니다. 그역할을 담당하는 친구를 쇼세빈이라고 합니다. 뭐 하는 역할이냐 하면 두 가지 역할을 해요. 정중하게 친구의 아내인 신부의 집으로 가서 신부를 신랑의 신방까지 잘 안내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임무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드디어 신랑과 신부는처음으로 합방을 하게 됩니다. 그러느라고 날이 밝겠죠? 마을사람들은, 친인척들은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잔치 중에 있어요. 유대인들의잔치는 굉장히 깁니다. 그리고 뿌옇게 새날이 밝아오면 신랑이 신방에서 나와요.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친구에게, 쇼세빈에게 이런 얘기를 합니다. 나의 신부는 정정하였다. 깨끗하였다. 그러면 이 소식을 들은 신랑의 친구는 이 소식은 복음이 되어서 그 아침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잔치에 참석한자들에게 신부는 깨끗하였습니다. 선언함으로써 모든 잔치가 마무리 됩니다. 그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다 돌아가요. 신랑의 친구의 임무는 그신랑의 아침의 이야기를 듣는 거 까지가 임무에요. 오늘 요한이 그 얘기를 하는 거에요. 자 29절을 다시 보세요.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멋진 퇴임사를 이렇게 선언합니다.
(25:00-30:00)
어느 신학자가 그리스도인은 세가지를 연습해야 된다 그랬어요. 첫째 희미해지는 연습, 둘째, 작아지는 연습, 셋째, 사라지는 연습. 얼마 전에 국민일보 어느 기자 분이 우리교회 협동목사님인신구원교수님과 함께 대담형식으로 저희를 인터뷰를 했어요. 우리교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오르도 토메오 아카데미에대해서 설립취지가 궁금해서 좀 기사화 하고 싶다고. 기사를 보신 분들도 계실 거에요. 인터뷰 거의 말미에 그분이 이런 얘기를 해요. 요즘 시대가 사사시대를방불 하는데 한국교회에 롤모델이 없습니다. 롤모델이 없습니다. 목사님생각하시기에 롤모델을 있다면 누구를 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좀 조심스럽지만 이런 얘기를 했어요. 롤모델이 꼭 있어야 됩니까? 기사에도 그렇게 썼더라고요. 롤모델이 꼭 있어야 됩니까? 한때는 박수와 갈채 속에 스타와 영웅처럼뜬 사람들이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붕괴음을 내고 무너지고 많은 교회에 좌절을 주고. 하나님이 인간이박수 받는걸 그렇게 원칠 않으세요. 여러분, 사사 시대는절망의 시대라고 알고 있죠? 정말 그럴까요? 그 절망의 시대를뚫고 인류의 마음 속에 어떤 희망으로 바꾸셨습니까? 참된 사사는 누구일까? 참된 왕은 누구일까? 진정한 샬롬을 가져다 줄 왕에 대한 허기와기대로 역사를 바꾸지 않습니까? 요한의 역할은 여기까지 에요. 그는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래서 그는 자기가 이렇게 사라지는 역할로 임무를 마치는걸 기꺼이기뻐했어요. 이 기쁨은 우리가 갖는 기쁨과 실체가 다릅니다. 보통성도들이 어떤 때는 가끔 은혜받았다고 그래요. 그러면 저는 또 짓궂게 물어봐요.어느 대목에서 은혜를 받았냐고? 그러면 엉뚱한 얘기를 해요. 엉뚱한 얘기를 해요. 은혜마저도 다 자기 본의로 은혜를 받았다 그러더라구요. 앤드류 머레이라는 분이 겸손에 대한 기막힌 정의 하나를 소개할게요. 들어본분들도 계시겠지만. 겸손이라는 것은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이해가 잘 안되죠? 어렵죠? 겸손이라는것은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이건 어떨 때만이 가능해질 인식일까요?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둘 때만 가능해지는 인식입니다. 제가 욥기를얘기하면서 늘 했던 말 중에 하나님은 옳은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언제나옳죠. 달라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리고 요한의 기쁨은 자기 사역의 어떤 성과나 완성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에요.예수 그리스도가 높아지는 데서 오는, 그분이 드러나는 대서 오는 그 기쁨이 요한의 기쁨의진정한 실체였어요. 아, 나 달려갈 길을 마쳤다. 그 성취감에서 오는 뿌듯함. 그 기쁨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신랑이 드러날 때 갖는 기쁨이에요. 제가 약 십여 년 전에 은퇴를한지 1년쯤 되는 옥한흠 목사님하고 어느 잡지사에서 부탁을 해가지고 대담자로 나섰어요. 옥한흠 목사님을 대담하는 대담자로 좀 해달라고 해서 나섰습니다. 영광스러웠죠저야. 교계 큰 어르신을 대담한다는 것이. 미리 질문지가다 주어졌고 대본대로 질문을 하고 목사님 답변을 하시는데
(30:00-35:00)
마지막 질문이 뭐냐 하면 목사님 목회자로서 행복이 뭡니까? 이게 질문이었어요. 그러면 천편일률적으로 목회자들은 대개 두 종류의 대답을 해요. 말씀을통해 성도들이 변화되거나 교회가 성장해서 교회가 부흥되고 새로워질 때. 그게 나쁜 건 아니겠죠. 그런 의례적인 대답을 저는 기대했었어요. 그런데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런 대답을 꺼내놓으시더라고요. 나 같은 죄인이구원받아서 하나님 편에 서서 날마다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한다는 것 자체 만큼 행복한 사실은 없다. 나머지는그 다음 얘기이다. 교인이 수가 늘어나는 거 의미가 있겠지만 하면서 그 끝에 이런 질문을 하세요. 그러면 쪼개진 산골에서 10명도안되는 성도들을 3,40년씩 붙들고 씨름하고 고뇌하는 그 목회는 실패한 목회인가? 누가그렇게 재단하던가? 더 나아가서 가장 치욕스러웠던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는어떻게 설명할건가?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믿고 산다고 하지만 우리 기쁨의 실체는 뭡니까? 결핍이 채워지고 뭔가 덧씌워져서 내 만족이 포만감으로 드러날 때, 그때도물론 기쁘겠죠. 그러나 이제는 그 기쁨의 기준과 근거와 기초와 축이 달라져야 되지 않겠어요? 신랑이 높아짐으로 갖는 세상의 이해할 수 없는 기쁨. 또 한주간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 그 전쟁터와 같은 삶의 현장에서 그 기쁨을 회복하는 우리 삼일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