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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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의 제목이 예수님의 특별한 여행입니다. 현대인들이 여행을 참 좋아하죠? 그리고 또 여행 시장도 점점 커가고 있는 것 같아요. TV를 가끔 보면 요즘은 현장에 가있는 것처럼 상세하게 구체적으로 여행에 관한 기사들을 또 현장의 내용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 속에 특별한 여행은 어떤 여행입니까? 제게도 그런 특별한 여행이 있었어요. 어느 날 우리 교단의 아주 어른이신 목사님 한 분이, 물론 은퇴를 하신 분인데 전화를 하셨어요. “송목사, 시간이 있나?” “무슨 일이신데요?” “며칠 며칠 확인 좀 해줘” “예, 마침 비어있습니다” “그래 그럼 나랑 어딜 좀 가지” “어딜요?” “따라 와.” 그래서 정말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 나섰던 이상한 출발이었습니다. 가보니까 저 전라남도 토말이라는 데가 있어요. 땅 끝이란 뜻입니다. 거기에서 배를 타야 해요. 조그마한 똑딱선 같은 배인데 배 이름이 붙어있더라고요. 방주호. 선장이 약간 다리를 불편하게 사용하시는 목사님이세요. 목사님이 그 배에 저를 태우시더니 어딘가를 향해 막 가는 거에요.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정말 죽을 뻔 했어요. 그 여행은 제겐 잊을 수가 없죠. 그리고 도착했는데 그 섬 이름이 마삭도라는 섬이에요. 들어 보셨나요? 혹시? 이 남녘에는 크고 작은 올망졸망한 섬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 섬에는 그저 뭐 어떤 섬에는 다섯 가구. 제가 도착한 섬이 총 다섯 가구가 살고 있었어요. 그런 데는 교회도 없고 당연히 목회자도 없어요. 그러니 그 분들이 예배를 드리려면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드리거나 또 어렵사리 배를 타고 뭍으로 나와야 해요. 그러면 일기에 따라 못 나올 수도 있고 못 들어갈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변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다 못해 이 연세가 높으신 박요한이라는 목사님이신데 이 어르신이 배를 하나 구입을 해서 방주호 라고 써 붙이고 그런 섬들을 돌아다니는 거에요. 예배 인도하러. 그래서 거기는 주일이 따로 없고 이 배가 들어가야 그 날이 주일이에요. 다섯 가구를 이제 놓고 어느 한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나왔던 아주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여행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늘 행로도 제가 이름 붙이기를 특별한 여행이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오늘 본문은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로 아주 잘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이 여인의 유명세만큼이나 슬쩍 놓치고 지나가는 대목이 있는데 1절과 2절 이에요. 1절과 2절을 한번 보면
1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지난 주 잠깐 언급했던 내용인데 이런 뜻입니다. 갑자기 등장한 어느 나사렛 출신의 시골 청년이 세례를 베풀고 다니는데 선발 주자인 세례요한보다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잘못 된 소문을 바리새인들이 들었어요. 또 그 잘못된 소문을 들은 바리새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님이 들었다 그 말이에요. 이게 왜 잘못 된 소문인가 하면 예수님은 세례 주신 일이 없죠. 2절을 한번 볼까요?
2(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었는데 바리새인들은 이걸 잘못 이해하고 예수님이 한 걸로 오해를 한 거에요. 그리고 그 오해에 대한 소식을 예수님이 듣고 마음 속으로부터 스며드는 예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 이들이 벌써부터 나를 경계하는 구나,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적대 감정이 점점 더 유대 땅에서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마음 한 켠에 어떤 결단을 내리신 거에요. 여기는 더 이상 머무를 필요가 없다. 그리고 3절을 보니까 이런 표현이 있어요.
3유대를 떠나사
아무것도 아닌 표현처럼 여겨지는데 적어도 요한복음에서는 이 표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떠나사 라는 말은 그냥 유대 땅에서 다른 곳으로 갔다 그 뜻이 아니에요. 마음 속에 어떤 의지와 확고한 결정을 내리고 이 땅을 포기하고 버렸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행로를 바꿔서 다른 곳으로 결단을 하고 옮기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거에요. 왜냐하면 복음이라는 것은 유대 땅만의 것도 아니고 유대 민족만의 것도 아니에요. 예수님은 일찍이 승천하시기 전에 유언처럼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남기셨어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기억 나시죠? 이제 이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유대 땅에 맴돌다가 배척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는 것을 예수님이 느끼시고 그 유대를 떠나기로 결정을 했다는 말은 이 복음이 이제 유대에서 어디로 넘어간다는 얘기죠? 이방을 향하여, 땅끝을 향하여 이제 복음이 확대되고 넘어가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유대를 떠나사 라는 이 사소해 보이는 설명과 표현은 결코 사소한 표현이 아니라는 거죠. 자, 그리고 이제 성경을 보십시다.
3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앞을 보세요. 여기 보니까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다는 이상한 논법을 쓰셨어요. 그러니까 영어에 보면 I must라는 용법을 쓰셨어요. Must 라는 말은 무슨 뜻인지 아시죠? 반듯이 무엇 무엇을 해야만 하는 이 상태를 must 용법을 우리가 씁니다. 그러니까 이 사마리아 땅은 유대 땅을 떠나서 그냥 다음에 자연스럽게 통과하는 땅이 아니란 얘기에요. 유대를 떠나서 어떤 의지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을 가야만 했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슬픈 역사의 배경이 녹아져 있습니다. 지리적 이해를 좀 가져야 하는데 예를 듭니다. 이 쪽이 유대 남쪽이죠. 유대 땅이죠. 저쪽이 찬양대가 앉아 계시는 쪽이 갈릴리에요. 지금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시는 겁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스라엘의 지도를 놓고 보면 사마리아가 그 한복판에 딱 얹어져 있어요. 그래서 상식대로라면 그리고 가장 지름길로 노력을 시간을 아껴, 노력을 아껴 갈 수 있는 거리라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게 맞아요. 그런데 정통 랍비나 유대인들은 평생에 그럴 일은 없어요. 사마리아로는 절대 발걸음도 대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멀어도 강원도 태백산 줄기를 넘어서 돌아가요. 이해가 되죠? 자, 여기에는 매우 슬픈 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이 있어요. BC 750년경.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700여년 전에 앗수르라는 아주 난폭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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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포한 민족이 이스라엘을 잡아먹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나훔서에도 소개가 되었지만 무시무시한 민족이에요. 포로로 끌고 갈 뿐만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을 혈통을 말살하는 정책을 펴는데 가장 확실한 방법이 피를 섞어 버리는 겁니다. 반 강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결혼을 시켜요. 자기 민족들과. 그래서 유대 혈통을 없애 버리는 겁니다. 먹고 살려니까 할 수 없이 고통스럽지만, 그 당시 이방인들과 결혼한다는 것은 단순한 결혼이 아니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사실상 포기한다는 슬픈 고백을 전제하지 않으면 그 정책을 따를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때도 목숨을 걸고 평생 하루에 한끼를 먹고 살지라도 그걸 거부했던 사람들이 있어요. 이렇게 양극단의 부류가 자연스럽게 형성이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앗수르는 망하죠. 영원한 제국은 없어요. 그 후에 입장은 바뀝니다. 옥중 성도파. 거대한 역사와 맞서서 순수 혈통을 지켜내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켜내고 살았던 사람들은 이제 좋은 위치에 앉게 된 거에요. 대신 그 험악했던 역사 속에 부역했던 사람들은 피가 이미 섞여 버렸어요. 그 때부터 정통 유대인들에게 그 사람들은 개 돼지 취급을 받게 된 거에요. 그 때부터 이 사람들은 시대적 냉소, 사회적 편견, 공동체적 차별 이런 처사와 함께 평생을 자자손손 대접을 받고 살아야 했어요. 굉장히 슬픈 운명을 안게 된 피가 섞인 혈통들이죠. 그들은 자녀들까지 개, 돼지 취급 받고 사마리아 지역에 모여 산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땅을 밟지도 않고 이 사람들과 상종도 안 하는 것이 사회적 관습이고 통념이에요. 그런데 보세요. 예수님이 그걸 몰랐을까요? 모를 리 없죠. 그런데 사마리아 땅으로 어떻게 해야겠는지라? 통과해야 하겠는지라. 이건 뭐죠? 이건 시대의 관습과 통념과 가치관과 대세와 맞서는 거대한 예수님 나름대로의 저항이에요. 나는 이 민족의 사마리아인들을 향한 이런 부당한 대우와 처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서 세상은 대세라 하여 그렇게 냉소를 쏟아내고 차별을 하더라도 예수님은 그 길을 따르지 않고 사마리아로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이것은 단순한 기록일까요? 아니라는 거죠. 그런 편견과 차별의 역사 앞에 예수님은 온 몸으로 저항하여 맞서는 위대한 퍼포먼스에요. 그럼 이런 것들이 오늘 날에는 우리에게 요구되지 않을까요? 아니죠. 투기 안 하면 바보 같은 세상이에요. 그렇게 살면 손해 봐요. 남들도 다 그렇게 하고 그것이 이 세상의 보편적 가치관이고 사회적 통념이라면 그 흐름 속에 떠밀려 가지 않을 자신 있겠어요? 어렵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그 길로 지나갑니다. 보통 퍼포먼스가 아니에요. 그리고 성경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5절
5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자, 누가 누구에게 준 땅이 가까워요?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까워요. 자, 여러분 이 글의 배경이 되는 창세기 33장 글을 우리가 한번 확인을 하고 오늘 본문으로 한번 돌아가십시다. 띄워 주세요. 시작
33:19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이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네, 아주 잘 알려진 장면인데 밧단아람 외삼촌 집에서 20년 만에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에 들어오자마자 처음 장막을 친 데가 세겜이에요. 여기에서 백 크시타에 땅을 삽니다. 그리고 이 땅을 세월이 지난 후 가장 사랑하는 여인 라헬이 낳은 요셉에게 물려줍니다. 그게 48장에 나오죠. 시간이 없으니까 그 대목은 생략하고 지나가겠습니다. 바로 오늘 그 땅이에요. 자 본문을 보십시다.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거기 또 야곱의 뭐가 있더라? 우물이 있더라
자, 여러분 그런데 여기는 우물이라고 돼있는데 번역은 우물이라고 했는데 희랍어, 그리스어의 원문을 보면 정확하게 샘이에요. 그럼 물어봅시다. 샘과 우물은 같은 거에요? 다른 거에요? 다른 거지요. 그러면 다르다고 대답을 하셨는데 근본적인 차이를 하나 말씀해 보세요. 우물은 뭘 우물이라 하고 샘은 뭘 샘물이라 하죠? 우물은 인간이 파서 만든 거에요. 그런데 샘이라고 할 때는 파서 만들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샘은 인간이 파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거지. 이 차이가 있어요. 그런데 이것이 후에 어떤 결말로 바뀌는가를 우리가 유심히 오늘 흐름을 쫓아 보는 겁니다. 자, 어쨌든 그냥 넘어갑시다. 우물이 있더라. 그런데 문제는 성경 전체에 걸친 역사 속에서 우물 얘기가 참 많이 나와요. 특별히 구약에 많이 나와요. 구약은 무슨 책이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리라 예언 된 내용이 전부입니다. 자 제가 세 가지 실 예를 들께요.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주인이 도련님 이삭의 신부감을 찾으러 갔다가 그 이삭의 아내가 되는 여인을 어디서 만나죠? 우물가에서 만납니다. 우물가. 두 번째, 이삭의 아들이 되는 야곱은 그 아내를 또 어디서 만납니까? 역시 우물가에서 만납니다. 우물가. 게다가 건너와서 모세가 그 아내 십보라를 어디서 만납니까? 우물 가에서 만납니다. 그러면 세 경우만 실 예를 들었는데 이 세 경우의 공통점이 있어요. 우물 가에서 만난 사연으로 무엇이 이루어지죠? 부부가 맺어집니다. 게다가 이 후손을 통해서 성경은 끊임없이 누가 오리라고 예언되어 있죠? 메시아가 오리라고 예언되어 있는 혈통을 계속 줄기차게 질기게 생산해 냅니다. 그리고 그 혈통을 통해서 오늘 역사의 멀고 먼 언덕을 넘어 오신 이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런데 그 분이 지금 놀랍게도 어디에 앉아 계세요? 성경을 잘 보세요. 6절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어떻게 앉으시니? 그대로 앉으시니 자 이거에요. 이 그대로 앉으신다는 말은 사뿐히 고요히 이렇게 살며시 앉는다는 말이 아니고 아휴, 이제 도착했구나 하고 털썩 주저앉는 거에요. 이게 재미있어요. 진짜 재미있어요. 여러분 언제 그렇게 털썩 주저앉죠? 목적지에 도착해서 이제 시름과 안도감이 내려질 때. 그렇죠? 여기 보니까 길이 피곤하여. 물론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을 드러내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그대로 앉으셨다는 말은 털썩 주저앉은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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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물가에서 이게 어떤 뉘앙스를 던져주고 싶은 걸까요? 드디어 멀고 먼 여행 길에서 예수님이 찾고자 했던 그 어떤 영혼을 찾기 위해 이제 그 목적지에 어떡한 거죠? 도착한 거에요. 여기서 참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누가 만납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만나죠. 그러면 사마리아 여인이 누군가요? 아내가 사마리아 여인인가요? 그런 의미가 아니죠. 사마리아 여인은 누굽니까? 오늘 우리를 얘기하는 거에요. 먼저 찾아주지 않으면 눈 떠 볼 수 없는 존재. 평생 고단한 우물 시대. 허기와 목마름으로 끝이 없었던 인생. 남편을 다섯씩이나 둬야 했고 지금 그 남편마저도 자기 남편일 수 없는 허무. 늘 이것을 인생의 짐마냥 이고 지고 살아야 했던 여인이에요. 어디에도 이 여인의 진정한 목마름을 해갈해줄 수 없었던 여인이에요. 이 여인은 사마리아인이라는 모습으로 등장을 하지만 사실은 우리를 설명하는 그림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참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대변하는 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뭐가 이뤄지는 거에요? 혼인이 이뤄지는 거에요. 만남이 이뤄지는 거에요. 믿습니까? 그래서 이 여정을 우리는 아주 특별한 여행이라고 제목 붙여 봅니다. 이제 이 우물가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우리가 조금 더 들어가서 확인해 보십시다. 몇 절을 보시냐 하면 7절. 다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9절 제가 읽습니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아까 설명 드렸죠? 10절 시작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자, 여러분 예수님이 여기서 아주 독특한 물에 대한 표현을 쓰셨는데 그가 네게 뭘 주었으리라? 생수를 주었으리라. 물이 아니에요. Living water 생수에요. 그럼 이 예수님의 표현으로 봐서 지금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아니 이 여인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이 여인은 지금 눈 떠서 인지했다는 얘깁니까? 전혀 깜깜이란 얘깁니까? 전혀 깜깜이란 얘기에요. 자, 그럼 잘 보세요. 앞서 3장에서 우린 누구를 만났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최고의 지성 니고데모를 만났어요. 그는 한 밤중에 찾아와서 예수님의 대화 속에 들통이 하나 났죠.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아니,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어머니 모태에 들어갔다 다시 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눈이 떠졌다? 안 떠졌다? 전혀 눈이 열어지지 않은 겁니다. 그러면 그 니고데모나 이 사마리아 여인이나 영적인 본질은 지금 같아요? 틀려요? 같아요. 우리는 이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서 지나친 동정을 갖는 것도 불필요합니다. 영적인 차원으로 접근할 때는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이나 똑같아요. 그럼 똑 같은 얘길 왜 여기 두 개 덧붙여 놨을까요? 구원이 뭔지 설명하기 위해서 입니다. 니고데모는 찾아 왔어요. 구원은 자기가 더듬어 찾아서 논리적으로 이치를 열고 깨달아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으로 니고데모는 등장을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뭡니까? 구원은 예수님이 멀고 먼 길을 찾아 손 내밀지 않으시면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이 여인의 등장 이유에요. 그래서 이 두 사람은 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걸 역설적으로 설명한 그림이에요. 자, 그런데 오늘 보십시다. 12절
12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누구보다 큽니까 라고 물었죠. 자, 여기가 이 여인의 인식의 한계에요. 이 여인이 지금 머리 속에 젤 큰 인물과 존재는 누구입니까? 야곱이에요. 야곱이 우리에게 이 우물을 파서 줬는데 여기 우물은 정상적인 우물을 얘기합니다. 샘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그럼 우리 조상 야곱보다 큰 분입니까? 자, 지금 앞에 있는 분에 대해서 점차적으로라도 깨닫고 있다? 아직도 깜깜이다? 아직도 깜깜이에요. 영적인 무지를 점점 짙게 드러냅니다. 전혀 못 알아채고 있어요. 그러자 예수님이 답답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13절 다같이 시작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뭐가 되리라? 스톱 앞을 보십시오. 자, 뭐가 되리라? 예수님의 질문은 잘 분석해서 들어야 해요. 예수님은 샘물을 주신다 그랬어요? 샘을 주신다 그랬어요? 성경에 있는 대로만 대답하세요. 샘물을 주신다 하셨어요. 예수님은 샘을 주신다 한 게 아니에요. 샘물을 주신다 그랬어요. 어, 우물로 시작된 얘기가 지금 무슨 얘기로 끝이 나고 있죠? 샘물로 바뀌어 있어요. 그러면 아까 우물과 샘의 차이는 뭐라고요? 우물은 사람이 땅을 파고 만들어서 퍼 올리는 유한하고 한계가 있는 우물이에요. 그런데 샘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여기에서 샘물을 주겠다 셨지, 샘을 주겠다고 한 게 아니에요. 그러면 두 번째 질문입니다. 샘은 누구에요? 이 논리대로만 대답을 하자면 샘은 누굽니까? 예수님이 되시는 거죠. 놀랍게도 예수님은 자기를 뭐로 소개하고 있어요? 샘터. 내가 샘이다. 그리고 나에게서 그 샘물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여인이 이런 재미있는 반응을 해요. 여인의 반응을 15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자, 앞을 보십시다. 우리가 이 본문을 흘깃 읽으면 마치 이런 것처럼 느껴지거나 이해가 될 오해의 소지가 있어요. 드디어 이 여인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채고 그 구세주 되신 예수님에게 그 물을 달라고 제대로 눈 떠서 요구하고 있구나. 아니요 요 15절을 헬라어 문법에 맞게 뉘앙스를 살려서 제가 언어로 연기를 할 테니까 들어 보시고 이해가 되시면 제 언어의 연기가 괜찮은 거고, 이해가 안되면 제 언어의 연기력이 형편 없는 걸로 봐서 자책할 필요 없어요. 깨닫지 못해도. 이 15절을 정확히 연기를 해드릴 테니까 들어 보시고 판단을 하세요. “아휴, 참나, 아니 선생님 그런 물 있으면 한번 줘보세요. 제가 다시 여기 와서 물 기르는 수고 안 해도 되게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지금 두 분이 이해가 안 됐어요. 그 마지막 두 분까지 이해를 돕게 한번만 더 할게요. “아이고 나 참, 선생님 그런 물 있으면 제게 줘보세요. 제가 여기 다시 물 안 기르러 오게. 그 얘기에요. 이 얘기는 뭐죠? 선생님의 그 얘기에 어떻다는 얘깁니까?
(30:01-39:28)
선생님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그 뜻이에요. 무슨 이치를 깨달아 가는 게 아니고. 자 그런데 방금 전 제가 뭐라 그랬죠? 예수님은 샘물을 주겠다셨어요. 그러면 자신은 뭐가 되는 거죠? 샘이 되는 거에요. 자, 이게 뭘 얘기하는지 우리가 밝혀야 해요. 요한복음은 이제 앞으로 더 많은 분량이 남았지만 치밀한 건축물 같아요. 굉장히 하나하나의 위치가 나름대로 정확한 이해를 갖고 있어요. 유기적 관계를 갖고 있어요. 우리 앞에 앞에 장에서 2장이죠. 성전에서 예수님이 성전을 척결하면서 이런 말씀하셨어요. 이 성전을 헐라 헐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이는 자기 육체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 바리새인들이 깨닫지 못하더라. 거기 다시 짓겠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다시 일으키겠다는 표현을 쓰세요. 이게 무슨 뜻이죠? 자기 죽음을 가리켜 하신 말이에요. 그리고 부활을 암시하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까지의 너희들이 경배해왔던 장소인 그 성전은 나를 모형했던 것이니까 이제 이거 끝내자. 그리고 누가 참된 성전이라는 거죠? 예수님 자신이 참된 성전이라는 거에요. 그러면 이 성전에서 이 성소에서 뭐가 나와야 해요? 물이 나와야 해요. 샘물이 나와야 해요. 어디 그런 말이 있나? 에스겔서 47장을 한번 보세요.
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장소가 어디죠? 성전이에요.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뭐가 나와요? 할렐루야. 물이 나와요. 그리고 이 물은 발목에 차고 무릎에 차고 허리에 차서 나중에는 잠기게 되죠. 그리고 그 물은 나중에 강물이 됩니다. 9절로 건너 뜁니다.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이 강물이 잇대는 곳마다 다 살아나요. 죽었던 식물과 병든 땅들이 다 살아나요.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감으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또 뭐할 것이며? 살 것이며
이 물이 대어지는 곳마다 다 소성과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요. 10절 시작
10 또 이 강가에 어부가 살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건너뛰어서 12절 바로 갑니다. 다같이 시작
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그 잎사귀는 모든 걸 치료하고 회복하는 약재료가 돼요. 이것이 마지막 날 계시록에 가서 어떻게 성취되는가 한번 보십시다. 21장 시작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알파와 오메가는 누구에요? 당연히 어린 양 그리스도에요.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 말은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도 예언되었던 예언 중 하나에요. 한번 확인해 볼까요? 55장
1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할렐루야! 자 여러분 이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23절부터 다시 읽겠습니다. 4절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뭐 하시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들을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기 위해서 그 멀고 먼 역사의 언덕을 넘어 고난 여정을 통해서 지금 우물가에 그대로 주저앉으신 겁니다. 그리고는 여인의 대화를 통해서 이 대화가 어디로 건너 뛰냐 하면 참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한 주제로 바뀝니다. 그럼 선생님 물어봅시다. 우리 조상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는 게 맞다 그러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게 맞다 그러는데 아직 이 여인의 예배에 대한 이해는 철저히 장소적이었어요. 어느 게 진짜 예배입니까? 그러자 참 성전이신 예수께서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 그러면 누구를 예배하는 게 참된 예배라는 거죠? 예수님 자신을 예배하는 게 참된 예배라는 거에요. 그런데 그걸 뭐로 한다고요? 자 24절을 보세요. 다같이 시작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라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이 뭐예요? 이 말이 요한복음 7장에서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자 띄워 주세요.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 하시니
여기 보니까 그 배에서 무슨 강이?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 다음 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러니까 성전이신 예수님에게 샘물이 나와요. 그런데 이 물이 뭔가 봤더니 요한복음 7장 39절에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걸로 소개되고 있어요. 믿습니까? 그러니까 진짜 참된 예배는 제도와 순서와 멋진 퍼포먼스가 참된 예배가 아니라 성령으로 예배하는 자입니다 .이 성령의 눈뜸과 성령이 흘러나와 맞대어 지는 곳마다 죽었던 삶의 자리와 내 마음대로 어쩌지 못했던 모든 죄의 문제가 자유를 얻고 살아나는 회복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거죠. 참된 예배라는 건 뭐냐 하면 형식과 순서와 제도를 갖춘 예배 보다는 더 중요한 것은 삶의 현장이 회복이 되고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 삶이 바뀌는 예배, 죽었던 현장이 살아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는 현장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맞대어지는 곳마다 회복이 되고 소성함이 일어나고 치유가 일어나는 역사 그게 무슨 예배라는 거죠? 참된 예배라는 거에요. 정말 형식과 제도가 중요했다면 성경에 예수님께서 그걸 몰랐을까요? 축도는 어떻게 하고 설교는 몇 분간 하고 이거 다 적어 놓으셨을 거에요. 정말 그게 중요하다면. 그러나 그런게 중요한 게 아니라 참된 예배, 영으로 예배하는 예배, 성령으로 예배하는 예배. 그 예배는 우리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을 입어서 삶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 내가 회복이 되고 맞닿아지는 현장마다 어둠이 물러가고 살아나는 예배를 얘기하는 거에요. 이 말씀이 또 한 주 새 날을 여는 여러분들에게 큰 능력과 은혜로 일어나는 복된 한 주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다 일어나세요.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