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함을 넘어 이김의 자리로

책이름(시리즈 분류)
요한복음
Date
날짜
20190922
성경구절
요 16:25-33
시리즈 순서
요한복음(38)
종류(주일, 새벽 등)
주일낮
25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니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다해라 내가 세상을이기었노라
(00:00-05:00)
오늘은 요한복음 16장을 마치도록 하겠는데요. 우선첫 절을 볼까요?
25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이렇게 돼 있어요.자 그러면 이것은 범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 한 두어 절만 뽑아서한번 읽어볼까요? 16절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21절로 건너뜁시다.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대표되는 구절을 두 구절을 봤지만 사실 이 화법이 굉장히 모호합니다. 예수님이 이것을이라는 말은 앞서 16절 서부터 21절까지의 내용을 설명하는거에요. 근데 이것을 뭐라고 설명했는가 하면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다라고 얘기해요. 비유. 보통 우리가 비유 하면 성경을 그래도 접한 독자들의 입장에서낯선 표현은 아니에요. 비유 하면 천국비유도 있고 누룩비유도 잇고 겨자씨비유도 있고.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비유는 그런 비유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표현이틀려요. 번역이 좀 같이 비유로 번역을 했어요. 그런 방금열거한 비유들은 헬라말로 ‘파라볼레’ 이렇게 쓰는데 여기에설명한 예수님의 어법은 굉장히 독특합니다. ‘파로이미야’라는말을 썼어요. 근데 이 말은 사실 모호함이라는 뜻입니다. 모호함. 예수님이 애매하게 얘기했다 그 뜻이 아니라 이 말은 예수님이 격언과 교훈과 잠언을 담아 설명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그게 어떻게 들렸다 그 말이죠? 모호하게 들렸다 그 말이에요. 보통우리가 천국비유, 겨자씨, 누룩, 양의 비유, 탕자의 비유 이런 거는 ‘파라볼레’라는 비유라는 표현을 쓰는데 여기선 아주 독특하게 ‘파로이미야’ 이것은 사실 모호함으로 비춰지는 표현들이라는 뜻이에요. 그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의도했다기 보다는 듣는 입장에서 명확히 알아들었다 못 알아들었다? 못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들려질 수 밖에 없죠? 모호하게 들려질 수 밖에 없었다 그 말이죠. 자 그 얘기를 하는겁니다.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게대한 것을 어떻게 이르리라? 예. 밝히 이르리라. 여기 밝히 라는 말은 이제는 분명하게 얘기하겠다. 이제는 정확하게아주 선명하게 얘기하겠다 그 말이에요. 간단해요. 지금까지는모호하게 너희가 들렸는데, 또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비춰졌는데 이제는 정확하게 분명하게 얘기하겠다. 그런데 거기 조건이 있더라고요. 때가 이르면 그랬어요. 때가 이르면. 자 우리 이 때를 요한복음 강해를 수십 번 들은 여러분들의입장에서는 이 때가 어느 때를 암시하는지 이해를 가져야 되요 분명히. 어느 때를 얘기하는 걸까요? 여기서 말하는 ‘때’라는말은 예수님의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때를 얘기해요. 그런데 사실 그 때는 그 의미만 내포하고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는 때까지를 얘기하는 거에요. 그때. 그런데 고 사이에 우리가 생략된 게 하나 있어요. 예수님이부활하시면 그리고 아버지께로 승천하시면 반드시 누구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죠? 예. 성령님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어요. 그래서 오늘 여기서 예수님이 때를언급한 것은
(5:00-10:00)
누구의 곧 오심을 예고하고 잇는 걸까요? 성령님의 곧 오심을 예고 하고 있는 겁니다. 그 분이 오시면, 그 뜻입니다. 때가이르면. 나는 아버지께로 갈 것이고 그 분이 오시면 그분이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남겨놓은 모든 것들을어떻게 한다는 얘기죠? 밝게 설명할 것이다. 할렐루야. 요 대목 즘 이르면 상당히 기대를 가지는 눈빛을 해야 되는데 전혀 기대가 없는 거 같아요. 속으론 다 기대를 갖고 있죠? 예수님은 뭔가를 설명하셨는데 제자들은이것을 어떻게 들었다? 애매하게 들었다, 모호하게 들었다. 그런데 때가 이르면, 근데 그 때는 사실상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얘기하지만 여기에서 암시하는 것은 그 너머 뭘 같이 의도하고 있다? 성령님의 오실 것임을 내포하고 있다. 근데 그분이 오시면 이제는 모모든 것 어떻게 말씀하신다고요? 네. 분명히 말씀하신다고요. 밝히 말씀하신다고요. 그런 은혜가 여러분 속에 누려지기를 축복합니다. 자 이제 넘어가서26절을 보십시다.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아멘. 이 두 구절은 아주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어요.지난 주에도 말씀을 나누면서 이 부분을 좀 강조했는데 지난 주 참석하신 분들은 기억을 떠올릴 필요가 있어요. 지금까지는 너희가 누구에게 구했다? 내게 구했다. 내게 물었고 내게 구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희가누구에게 직접 구할 수 있다? 아버지에게 직접 구할 수 있다. 그러니까이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새로운 관계 설정하시는 매우 어마어마한 특권을 얘기하는 거에요. 믿습니까? 제자들이 지금까지는 궁금한 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누구에게 물었고 누구에게 구했어요? 예수님에게 물었고 예수님에게 구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이 너희가아버지께 직접 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누구의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러면 이제 혹자는 이렇게생각할걸요. 그러면 이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 안 하시나? 그건아니죠. 우리 히브리서 7장을 띄워볼까요? 같이 한번 읽어보십시다. 시작.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우리가 구하던 구하지 않던 예수님은 오늘 이 히브리기자의 말씀처럼 그가 항상 살아계셔서 누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요? 우리를 위하여 구하신다고요. 아버지께.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세요 안 하세요? 중보의기도를 하신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우리가 예수님께 직접 구하고 묻질 않고 그 분의 이름을 의지해서하나님께 직접 구할 수가 있다고요. 근데 이 기초는 어떻게 가능한가?27절이 그 설명을 하고 있는 거죠. 이는 너희가 나를 어떻게 하고? 사랑하고. 자 여기서 조금 갸우뚱해요. 너희는 누구고? 나는 누구에요? 너희는이 연약하고 불안전한 왔다갔다하는 제자들을 얘기하는 거에요. 근데 그 제자들이 지금 누구를 사랑한대요? 예수님을 사랑한 데요. 아 여기서 좀 이해가 안 되요. 앞으로도 이 제자들은 엉뚱한 짓 많이 할 텐데.
(10:00-15:00)
그런데 여기 참 눈물겨운 감사와 감동이 있는 거에요. 예, 제자들은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하고 욕망덩어리이고 실수투성이에요. 우리가성경 곳곳에서 그들의 엉뚱한 면모를 흔히 자주 만나요. 그런데도 그 연약한 실마리 같은 사랑도 주님은자기를 뭐 하는 걸로 여겨지십니까? 그렇습니다. 사랑해 주시는걸로 여겨주세요. 그 볼 것 없는 사랑마저도. 너희들이 나를사랑하는구나. 그러니까 우리가 너무 완벽하게 무언가를 갖추어서, 아니그러면 그렇게 사랑할 수 있어서 그러시는 거에요? 정말? ‘아내가 아직은 좀 아니고 뭐 하나만 제대로 되면’ 영원히 그건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이루어지지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찌꺼기 같은 사랑마저도 자기를 뭐 해 주시는 것으로 받으세요? 사랑해주시는 걸로 받으세요. 믿습니까? 또 그렇게 우리를 그분은 만들어가실 겁니다. 할렐루야. 자 그런데 여기 또 보세요. 또 여기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자 이것도 또 이해가 되요 안 되요? 이것도 사실은 아직도 제자들의믿음은 온전합니까? 불완전합니까? 불완전해요. 근데 예수님은 여기서 그걸 어떻게 했다고 인정해 주세요? 믿었다고인정해주세요. 이런걸 보통 우리가 미래완료형이라 그래요. 아직완성은 안됐지만 어떻게 여겨주시는 거죠? 믿은 걸로 여겨주는 거에요.우리 여기 어르신들이 앉아계시지만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고 키우다 보면 이렇게 속아주고 그런 척 해줄 때가 많습니까? 없습니까? 많아요. 저도그래요 저도. 많아요. 많이 속아줘요. 그리고 많이 그런 척 해줘요. 우리 아이들이 2부때는 안 오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아유, 아직은 아닌데 그래도 막 흉내라도 내니까. 믿었으므로. 믿었으므로. 여기에는그냥 동정과 봐줌의 차원을 넘어서 여기에는 강력한 하나님의 완성을 향해가는 그분의 열심과 그분의 의지가 담겨 있는 거에요. 내가 너를, 너는 지금 흉내 내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반드시 그렇게만들어놓고야 말 것이다. 미래완료형이라 말이에요. 믿습니까? 우리가 다 이 주님의 흥건한 사랑 안에 묶이는 거에요. 자 성경을또 보십시다. 28절 다같이. 오늘 28절이 굉장히 중요한 구절이 될 겁니다. 시작.
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이 28절 한마디는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전부가 담겨있는, 그리고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함축하고 압축해서 설명한 내용이에요. 예수님께서말한 요지는, 설명은 나중에 드릴게요. 내가 아버지께로부터왔고, 또 다음에 아버지께로 갈 것이다. 이 속에는 어떤함의들이 담겨있을까요? 그 분이 어떤 고난을 받고, 어떤죽음을 죽으시고,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이며, 죽음 후에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제자들을 포함해서 어떤 태도와 행동을 보일 것이며. 이 모든 내용들이 여기 생략되고함의된 내용이에요. 자 그런데 이 얘기를 제자들이 듣더니 이런 얘기를 해요. 29절
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15:00-20:00)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자 이 두 구절은 제자들의 반응이에요. 28절의 말씀을 듣고서 제자들이 반응을 했는데제가 좀 이 본문을 읽다가 고개를 갸우뚱 했어요. 역시 역시 제자들이구나. 좀 성급하다는 느낌이 안 드세요? 분명히 밝히 알게 될 때는 누가오셔야 되요? 성령님이 오셔야 되요. 그런데 지금 그 때가왔어요? 안 왔어요?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도않고 그리고 부활하시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성령님이 더더군다나 공개적으로 오시지도 않았는데 제자들이 그 한마디를 듣더니 세가지를 얘기해요. ‘아 예수님 이제야 우리에게 밝히 얘기하시는군요. 무슨 소리인지알겠습니다.’ 그리고 알겠다는 고백을 넘어서 어떻게 했대요? ‘우리가이제 믿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에요. 세가지를 얘기했어요. 제자들이. 이제야 밝히 얘기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습니다. 너무 제자들이 성급하다는 느낌이 드는 거에요. 우리는 항상 이 오류에빠져 있어요. 그래서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신앙인들의 인격과 성숙도 속에 제일 조심해야 되는 게 함부로누군가에 꼬리표 붙이고 분석하고 예단하고 결정적으로 말하는 태도는 아주 위험한 태도에요. 자기 자신을잘 모르는 태도에요. 교회에서 제일 삼가해야 될 공동체의 교제의 원리는 고집을 부리면 안 되요. 고집을 부리는 건 교만한 태도이거든요. 자기 것 만이 옳다는 태도이거든요. 그것처럼 위험천만한 태도가 어디 있어요? 고집이 깊어지면 뭐가 되는지아세요? 괴물이 되요. 괴물. 괴물을 너머 이무기가 되요. 아주 위험한 거에요. 항상 어떤 전제 속에 겸허한 태도를 가져야 되냐 하면 내가 본 게 팩트가 전부가 아닐 수 있다. 내가 경험한 게 전체가 아닐 수 있다. 이 전제를 가지고 살아야되요. 제자들이 예수님이 28절에 하신 그 말씀만 달랑 금방듣고는 금방 예수님이 한 말씀을 못 알아들은 거에요 .사실은. 때가이르면 그때는 밝히 알게 될 날이 온다 그랬는데 아직 때도 안 왔는데. “아 이제야 밝히 말씀하시는군요, 이제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믿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에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좀 봅시다. 31절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자 보세요. 여기 이제 오해사기가 쉬워요. 제자들이믿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제야 너희가 믿는구나 감격하고 감탄해서 하시는 물음이 아니에요. 이것은그렇다고 해서 또 반대로 냉소적인 질문도 안이에요. 여기에는 굉장히 중의적 의미가 있는데 여기는 측은해서하시는 말씀이에요. “이제야 너희가 믿는다구?” 자 제가너무 본문을 좀 비트는게 아니라 그 다음 32절을 한번 보십시다.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온다. 그리고 벌써 어떻게요? 왔도다. 이 말씀을 지금 무슨 말씀을 듣고 하는 거에요? 제자들이 “아 이제 알겠습니다. 우리가이제 믿습니다.” 근데 예수님은 “이제 너희가 믿는다구? 아닌데, 다 흩어질 텐데.” 그러니까제자들이 알겠다 믿겠다 한걸 예수님은 그대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너희가 아직 내 말의 의미를 모르고 있구나, 모르고있구나.
(20:00-25:00)
28절을 다시 보세요.
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제자들이 정확히 몰랐다 그 말이에요. 이 속에는 어떤 함의가 담겨있다고요? 예수님이 어떤 죽음을 죽을 것이고, 그 죽음의의미가 무엇이며, 예수님이 죽어야만 우리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분이 아니라 그랬죠? 우리는 대신해서죽으신 거에요. 위해서 죽으신 것은 휴머니즘이 될 수 있어요. 그러나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죽은 것은 정확히 무슨 개념을 설명하는 겁니까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거에요. 죄값을지불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 말이에요. 믿습니까? 근데제자들이 그 의미를 모른 채 “아 이제야 우리가 알겠습니다.” 교회안에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없어요? 많단 말이에요. 뭐 저한테도 얼마나 진리에 대해서 또 가끔 외부 신자들이 댕댕거리는 분들이 있어요. 그거 틀렸다 그러고 막. 그러니까 그런 소리를 들을 때 그냥 가만히있어야 되요. 거기에 무슨 변론이나 반론을 하면 더 엉키니까 “네, 더 공부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그러고 말아야 되요. 특별히 이 제자들이 호언장담한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아 이 제자 들이 내가 지금 어느 순간을 앞에 두고 있는지를 모르는구나.’ 그리고이제 32절을 이렇게 설명하시는 겁니다.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여기 제 곳이란 말은 세가지 의미가 있는데자기 집을 얘기하는 경우도 있겠고 자기 처소를 얘기하는 경우도 있겠는데 사실 영적인 의미로는 여기서는 ‘자기이익을 따라 흩어지고’ 이 뜻이요. 자기 이익을 따라 뿔뿔이흩어질 것이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두 목자의 태도가나오죠? 어떤 어떤 태도가 나와요? 10장을 볼까요?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삯꾼이 나와요.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어떻게 하죠?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또 하나의 목자가 등장을 해요.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0장 다음절. 아 여기까진가 봐요. 다음절은볼 것도 없이 예수님이 참 목자에요.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거기에 이미 십자가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 16장에서는 누가 누구를 버릴 것을 암시하죠? 양들이 목자를 버릴 것을암시해요. 그리고 그 암시는 이미 놀랍게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예언의 성취에요. 이사야서 53장을 한번 볼까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어디로 갔어요? 제 길로 갔어요. 자기 이익을 쫓아가요. 기독교를 믿는 신앙 속에도 얼마나 제 길이많은지 알 수 없어요. 오늘 예수님께서 그 예화를, 제 곳으로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런데 거기에 놀라운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아멘. 세상은 다 십자가를 외면하고 그 죽음의 길을 떠나지만 제자들마저도 각자의 이익을 쫓아 떠나지만 그 제자들과반대로 하나님은 영원히 신실하셔서 그 십자가의 죽어가는 아들과 그 순간에 어떻게 하신다는 얘기에요?
(25:00-30:00)
함께 하신다는 얘기에요. 아무리 여러분들에게 질풍노도의 혹독한 어려움과 고난이 겹겹이덮칠지라도 항상 우리가 무슨 원리를 붙잡아야 될까요? 주님과 함께 하셨던 이 하나님이 여전히 오늘 내삶의 정황에 동행해주시고 함께 해주신다는 약속을 믿으셔야 합니다. 믿습니까?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지금 칠흙 같은 터널을통과하고 있지만 나를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그 칠흙 같은 어둠 속에도 주님은 여전히 내 손을, 내 발목을견고히 붙들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믿습니까? 이제마지막 절을 한번 볼까요? 33절.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이기었노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뭐를 누리게 하려 함이라? 평안을 누리게하려 함이라.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 보니까 예수님께서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노니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아니하니라. 세상이 주는 약속한 평안과 예수님이 약속한 평안의 실체는 달라요. 그러면예수님이 약속하시는 평안의 실체는 어떤 실체인가? 자 후렴부분을 볼까요? 세상에서는 너희가 뭘 당해요? 환난을 당해요. 담대하라. 이 담대하라는 헬라말이 신기하게도 “따르세오”라는 말을 써요. “따르세오” 한번 따라서 해볼까요? 따르세오가 우리말로 무슨 뜻이라고요? 담대하라. 누구를 따르면 담대해지는 건가요? 이건 말놀이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붙 쫓아야 우리에게 담대함이 생겨요.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왜 따르면 담대해질까요? 거기에 위대한 역사의 종결구가 있어요. 내가 세상을 어떻게 했노라? 이기었노라. 할렐루야. 여기에완료형을 썼어요. 이 완료형을 쓴 이유는 뭔가 하면 이 상태가 반복되고 지속되고 영원히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 본문을 준비하다가 어느 분의 글을 좀 발췌해서 너무 길어서 편집을 좀 했는데 글의 위에 부제는 사실제가 붙인 겁니다, 이 글의 제목은. 십자가의 전망. 디 카세이라는 분인 쓴 글인데 번역상의 고어가 좀 많아서 제가 현대표현으로 좀 바꿔 편집을 했습니다.
징그럽고 진저리 나는 세상의 상처들
온갖 이기적인 인간의 탐욕들
비전과 은혜 없는 사람들이 퍼붓는 악독이가득 담긴 가시들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민족과 사람들
오물과 시궁창에서 쏟아지는 쓰레기 같은값싼 언어와 문화들
이게 지금 세상의 상태를 디 카세이라는 분이 진단을 한 겁니다.
죽기에도 너무나 죄악적인 사람들로 가득찬 세상의 공포와 두려움
참 끔찍한 얘기죠? 근데 요즘 이런 말들이 실감이 나요 안나요? 너무 실감이 나요. 죽기에도 너무 죄악적인 사람들, 그런데 이건 상대가 아니에요. 내 안에 그런 모습이 있단 말이에요, 내 안에. 이런 혹독한 죄 덩어리가 내 안에 있어요.
돈이 힘이 되고, 돈이 정의가 되고 돈이 지혜가 되고 돈이 인격이 되어버린 세상
혼합된 가치와 동기들.
요즘은 펙트를 보고도 의미적으로 막 뒤집어요. 이게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중의 하나에요.
세상의 유명한 해결책들은 곧 한계를드러내고 실패를 보장할 뿐이다.
이러한 오류의 실패를 끝내기 위해 우리에게필요한 새로운 시각은
인간의 오역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종말의시간과 역사의 일몰을 내다보는 골고다를 응시해야 한다.
(30:00-35:00)
그러니까 우리의 새롭게 가져야 될 새로운 전망은 어디에서 바라본 전망이어야 한다는 얘기일까요? 십자가의전망이에요. 우리가 이렇게 평론으로 보는 세상과 저 마천루 같은 높은 빌딩 옥상에서 내려다본 세계는다르죠. 달라요.
인간의 오역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종말의시간과 역사의 일몰을 내다보는 골고다를 응시해야 한다.
어떤 가치와 역사도 흔들 수 없는 우월한 시선이 거기 있기 때문이에요.
십자가에서만이 진정하고 장엄한 전망이펼쳐진다.
우리가 한때 무지로 죽인 그 분이 지금도살아계셔서
은혜로운 구주요, 주님의 보좌에서 본 시각을 우리에게 주셔서
십자가의 슬픔 속에 우주적 갱신을 꿈꾸게하시고
온갖 헌신을 다해 즐거이 주님을 섬기며영원한 노래를 우리 입에 두소서.
디 카세이라는 분이 쓴 글을 제가 조금 편집한 겁니다. 아무리 세상이 절망스럽고 겹겹이우겨 쌈을 당하는 슬픔과 이 악독의 냄새가 진동하는 세상 속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 한 주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무슨 전망을 가져야 되요? 십자가의 전망. 믿습니까? 이십자가의 전망 속에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우월한 시선을 여러분 눈에 담아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