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서 강해(03)
이제라도
요엘 2:12-17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14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15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라
16 백성을 모아 그 모임을 거룩하게 하고 장로들을 모으며 어린이와 젖 먹는 자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방에서 나오게 하고
17 여호ㅗ아를 섬기는 제사장들을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지어다
(00:00-05:00)
오늘은 요엘서 세번째 시간입니다. 우리 지난 주 까지는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인가를 두차례 걸쳐 큰 주제로 말씀을 드렸어요. 1장 전체에 걸쳐서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인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죠? 여러분 온라인으로 다 예배 드리셨죠? 첫째는 재앙과 심판의 날이면서 동시에 기회와 구원의 날이기도 하다라는 이중적 의미가 담겨있다고 말씀을 드렸고 또 한켠에 그래서 그 날을 대비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가? 공동체적 제의적 회개. 공동체의 제의적 회개를 요엘 선지자는 문장마다 강력하게 촉구했죠. 우리는 오늘 이어서 2장 12절부터 17절까지를 보겠는데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1절서부터 11절까지를 살짝 스케치하면서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2장 1절을 좀 볼까요?
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이제 임박하였다 라고 1절이 시작이 됩니다. 여기 제사장들에게 선지자가 명령하는 거에요. 세가지 행동을 .첫째는 나팔을 불라. 소파르. 보통 나팔은 언제 부는고 하니 전쟁 때 붑니다. 전쟁을 대비해서 나팔을 붑니다. 두번째는 기쁜 절기의 경우에 나팔을 붑니다. 그리고 국가적 공동의 긴급한 소집의 당위성이 벌어졌을 때 나팔을 붑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나팔을 불 때는 역시 두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을 놓쳐선 안되요. 하나는 경고와 심판과 재난에 대한 눈뜨게 하기 위함으로서 나팔을 불면서 동시에 또 기쁜 날, 절기를 소집하기 위해서 나팔을 불기도 합니다. 우리 남자 성도들은 나팔 소리 하면 끔찍한 기억밖에 없죠? 군대에서 기상 나팔소리. 꿈에도 그 소리가 들린다는 형제가 있어요. 요즘에도 그 기상 나팔을 부는 거 같아요. 아침에 부는 나팔소리와 저녁에 부는 나팔소리가 같은 나팔 소리인데 어쩜 그렇게 느낌이 다른지 모르겠어요. 그렇듯이 오늘 여기도 소파르 할 때는 재난과 심판과 경고의 의미로서 부는 나팔의 경우가 있고 하나는 기쁜 절기를 소집할 때.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양쪽에 다 해당되는 경우이지만 국가적인 중요한 일들을 위해서 백성들을 공동으로 소집할 때 부는데 결국 이것은 공동체를 향한 어떤 액션입니다. 이 세가지를 소개하고 있어요. 두번째는 2장 1절을 보시면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거룩한 산이 어디입니까? 시온산입니다. 시온산에는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미지 속에는 뭐가 있는 산이죠?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산이에요. 그러면 그 성전에서 소리를 질러 경고를 발하라 그 말이에요. 이것은 오늘 이 현대 교회에 주는 굉장히 중요한 커다란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사실 교회의 기능 중에 가장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가 시대를 향한 경고의 나팔이 되어야 돼요. 시대를 향한 나침반이 되야 되요. 시대를 향한 지렛대가 되야 돼요. 그런데 놀랍고 슬프게도 오늘날 교회는 딱하게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어 있고
(5:00-10:00)
또 그 기능을 상실한 채 좋은 게 좋은 거다, 또 그들끼리 만의 리그에 도취 돼서 전혀 세상을 향한 각성의 메시지를 던지지 못하고 지탄의 대상이 되어 있는 슬픈 현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원래의 그림이 아니었고 선지자는 시온산에서, 거룩한 산에서 소리를 질러 경고를 발하라 그랬어요. 우리 삼일교회가 참 따뜻한 교회, 긍휼을 흘 려보내는 교회 기능도 분명 있어야 되겠지만 시대가 잘못 갈 때 분명히 바른 경고의 소리를 지를 수 있는 교회의 기능이 언제나 쇠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뭘 하라고 했어요?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어느 국한된 특정 집단에 해당하는 명령이 아니에요. 이 땅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다 떨게 하라 이 말은 잠자고 있던 주민들, 미몽에 취해있는 백성들을 깨워서 현실을 직시하고 다가올 재난과 심판과 재앙에 대해서 떨게 하라 그 말이에요. 여러분 아예 진짜 하나님의 본심이 죽일 것 같으면, 재난이 목적이라면 이런 경고를 하도록 말할 이유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럴 필요가 없죠, 그냥 예고 없이 들이닥쳐서 재난을 주시고 재앙을 주시고 심판하시면 목적대로 끝나는 거에요. 그런데 나팔을 불라,거룩한 산에서 경고를 날리라, 소리를 지르라, 백성들로 하여금 떨게 하라 이 말은 사실 그 이면에 하나님의 본심이 비춰집니까? 안 비춰집니까? 비춰지는 거죠. 그 본심을 우리는 이렇게 만나게 됩니다. 12절로 건너가십시다. 오늘 본문에 해당되는 첫 절인대요.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이제라도. 여기에 위대한 하나님의 긍휼의 반전이 있어요. 이제라도. 지금까지 여호와의 날에 끔찍하게 벌어질 장면에 대해서 하나님이 무시무시한 그림으로 이미지로 설명했어요. 그 설명의 몇 줄을 우리가 더 확인 해보면 좋겠는데요. 앞에 4절을 보세요.
4 그의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5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뛰는 소리는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6 그 앞에서 백성들이 질리고,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이런 날이 이를 것이다 그 말이에요. 이것은 북방의 강대국을 하나님이 동원 하셔서 이 백성들이 그간에 저질렀던 모든 있을 수 없는 죄악에 대해서 철저히 묻겠다 그 말이죠. 자 그런데 모두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의 본심이 죽이는 것이 본심이고 벌주는 게 본심이고 재앙과 심판이 본심이라면 경고고 예고고 할 꺼 없어요. 그런데 오늘 12절에 보니까 그 본심이 비춰집니다.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여러분 이제라도 라는 표현은 기회와 여지가 있다는 얘기입니까? 없다는 얘기입니까? 있다는 얘기에요. 이제라도 어떻게 하면?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면. 금식이라는 말은 공동체의 제의적행위를 얘기하는 거에요. 백성들이 모여서 함께 금식하고 애통하며 울며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하나님께 돌아오라. 뭘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이들은 수도 없이 하나님 앞 에회개를 했었어요. 그 모양새가 옷을 찢는 것이었습니다.
(10:00-15:00)
그래서 그 다음절 바로 그들의 형식적인 기계적 회개의 지난 날의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13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너희는 뭘 찢지 말고? 옷을 찢지 말고. 이 옷을 찢고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은 고대 유대인들에게 전형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이었어요. 그런데 그거 하지 말고, 기계적인 회개하지 말고, 와서 베옷 입고 옷 찢어가면서 예배 드리면 이들은 스스로 회개했다고 착각을 했고 오해를 했어요. 그런데 사실 오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도 그게 회개라고 이해하는 사람들 굉장히 많아요. 와서 앉아 울면, 눈물이 나면, 자기가 회개한 걸로, 감성적이고 정서적인 반응이 나타나면 회개한 걸로 오해를 하는데 그것을 기계적 회개라고 얘기합니다. 무슨 회개라고요? 기계적 회개라고 얘기합니다. 역사 속에 이런 회개가 굉장히 많아요. 우리가 뭐 백 주년을 기념하고 120주년을 기념해서 회개 운동을 하고 그러는데 그 소위 무브먼트라는 이면과 속내를 들여다 보면 돈이 동원이 되고 명예가 왔다갔다 하고 말 그대로 그냥 일, 행사가 치루어지는 거에요. 철저한 내면적인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냥 무브먼트, 행사에요. 회개에 대한 행사를 하는 거에요. 그걸 우리는 명분적 회개 또는 기계적 회개라고 얘기합니다. 사사기 1,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지역에서 울어요. 전쟁에서 지자 눈물을 흘리고 제사를 드리고 울어요. 회개한 줄 알았어요. 독자도 속았고 자기네들도 속았어요. 그곳 이름을 보김이라고 지었어요. 그래서 그 지명의 뜻이 뭔가 히브리말로 들여다 봤더니 ‘우는 자들의 곳’ 그냥 운 것 뿐이에요. 그냥. 그래서 성경 기자가 요엘 선지자가 옷을 찢지 말고 기계적 회개를 하지 말고 명분적 회개를 하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우린 마음조차 찢을 능력이 안되는데. 이 마음을 찢으라는 말은 마음의 할례를 얘기해요. 우리 골로새서 2장을 함께 볼까요? 사도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그런 혼합주의와 종교성에 충만해 있던 성도들에게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여러분 그리스도의 할례는 무슨 할례입니까? 십자가에 자기 몸을 찢으시는 할례에요. 우리가 마음을 찢을 능력이 안되니까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찢었어요. 자신을 찢어서 우리를 살려내시는 거에요. 사실은 이 요엘 선지자는 그 예언의 성취를 이 속에다가, 우리에겐 방법이 없으니까, 어떤 구원의 수단도 우린 자정 능력이 없으니까 마음을 찢으라! 그런데 우린 마음을 찢을 능력이 안되니까 이것을 오셔서 누가 하시는 겁니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얘기를 하는 거에요. 다음절을 한번 볼까요? 12절.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거기에 우리 죄를 다 묶었어요. 그래서 자신을 찢음으로써 우리를 살려 내시는 겁니다. 믿습니까? 십자가와 구속의 은혜 외에는 우리에게 방법이 없었어요. 성경을 또 보십시다 요엘서 13절.
(15:00-20:00)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사실은 우리가 돌아갈 능력이 안되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돌아오시는 거에요. 근데 그 근거가 뭔지 아세요? 13절에 이렇게 소개됩니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여러분 하나님이 막 우리의 회개의 여지에 따라서 계획도 바꾸고 마음도 돌이키고 마음도 변하시는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에요. 그런데 분명히 돌이킨다고 했지 않습니까? 이 말은 수사적 표현이에요.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궁극적으로 죽이거나 멸망시키거나 아주 심판으로 여지가 없이 만들겠다는 계획을 가지신 적이 없어요. 대신 독생자를 죽이세요. 아직 우린 이거 이해 안되죠? 내가 나를 봐도 무지랭이 같은 존재를 위해서 어떻게 그 독생자 아드님을 십자가에 대신 죄의 대가로 지불하실 수 있을까? 내가 하나님 앞에 그 정도로 존귀한 존재인가? 예, 그렇습니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 놀래야 돼요. 여러분 사실 설교 듣다가 기절까지는 기대하지 않더라도 깜짝 놀래야 돼요. 할렐루야! 얼마나 이 이해가 안가는 이런 본문이 가슴에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면 설교하다가 폭발할 꺼 같아요. 감당이 안돼서. 어떨 때는 말씀이 막 감당이 안될 때 있어요. 이 하나님의 약속한 사랑이 너무 커서. 우리에게 가망도 희망도 여지도 없으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 죄를 대속 케 만드시고. 그런데 그 근거를 보니까 이미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했어요. 그분은 은혜로우시고, 자비가 크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고, 우리 집 인애는 작은데 하나님의 인애는 놀라울 정도로. 그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면 할수록 무슨 외침이 더 커질 수 밖에 없는가 하면 왜? 왜 나를? 저는 지금도 이게 질문이에요. 내 모습을 보면 왜 나를? 근데 모르겠는데 성령의 은혜는 믿어지는 거에요, 그 사랑이. 그러니 얼마나 놀라운 겁니까 복음이? 자 성경을 더 보십시다. 이제라도 여호와께 돌아오라 이 말은 사실 너희들을 반드시 내게로 돌려 놓겠다 그 말이에요, 직역하면. 내가 너희를 반드시 내게로 향하도록 돌려놓겠다. 여러분 그 약속을 믿으십니까? 자 그런데 14절 보십시다.
14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이 말을 좀 꼬아서 했는데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시겠다 이 말이에요. 여러분 그러면 뭐가 있어야 소제와 전제를 드려요? 곡물이 있어야 드릴 꺼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이에요? 이 초토화되고 불에 타버린 듯한 이 저주받은 시대와 땅에 다시 싹을 돋우시고 비를 내리셔서 곡식의 풍년을 허락하시고 닫혔던 성전문을 열어서 제단에 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회복을 약속하고 있 는겁니다. 그렇게 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런데 15절. 다시 확증하시죠?
15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상회를 소집하라
공동체의 회개를 얘기하는 거에요.
(20:00-25:00)
16 백성을 모아 그 모임을 거룩하게 하고 장로들을 모으며 어린이와 젖 먹는 자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신방에서 나오게 하고
백성을 모아 그 모임을 거룩하게 하고 장로들을 모으며 어린이와 젖 먹는 자를 모으며. 심지어는 그 범위가 누구까지 모으라는 거죠? 젖먹이까지. 예외 없다. 회개는 젖먹이까지 회개해야 된다. 다음세대까지 회개해야 된다. 여러분 니느웨 성의 회개는 어디까지 회개했어요? 짐승까지. 말못하는 미물인 짐승까지도 금식을 시키고 창조주를 향하여 부르짖게 만들었어요. 짐승들이야 배가 고프니까 부르짖었겠지만 부르짖게 만들었어요. 놀라운 회개죠. 여기도 그 공동체의 범위가 젖먹이까지. 심지어는 성경을 보세요.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방에서 나오게 하고. 신명기 24장에 보면 장가를 들면 1년동안 무조건 휴가를 주는 것이 율법입니다. 신부를 즐겁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를 군대에도 소집하지 않습니다. 전쟁이 나면 소집이 되거든요. 그런데 전쟁이 나도 소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회개 운동은 얼마나 절실하고 절박한 회개운동인지 그 신랑도 방에서 나오게 해라, 신부도 방에서 나오게 해라, 젖먹이도 나오게 해라. 예외 없이 누구나 이 회개의 범주에 들어가도록. 공동체의 회개. 자 그러면 여기서 한가지 우리는 좀 생각을 해야합니다. 도대체 도대체, 어떤 내용으로 오늘의 성도는 이정도의 본질적 회개의 무릎을 꿇어야 될까? 3주에 걸쳐 이 말씀을 쭉 기도하면서 퍼뜩 이런 생각이 한 켠에 밀려들어와요. 지금 한국교회는 또 성도들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고 18절, 이게 5장 17절인데 18절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아세요? 이는, 이는 너희에게 화목케 하는 직분을 맡겼으니. 그러면 우리가 성도로써 제일 적극적으로 삶 속에서 드러내야 될 삶의 과제는 무엇이어야 옳습니까? 화목이에요. 화해에요. 화해의 제물이 되야 돼요. 그런데 보세요. 지금 한국교회는 어쩌다가 이 사회 분열의 갈등의 복판에 서 있어요.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지고 서로 사탄이라고 그러고 서로 죽일 놈, 이단이라고 격리하고 구분 짓고 공격하고 고발하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리고 정치권에서 터져 나오는 세상의 이슈마다 교회가 양분이 되는 경우들을 근래 이 펜데믹 상황을 맞으면서 더 끔찍하게 뉴스를 통해 목격하는 거죠. 방역에 찬성하는 교회, 방역에 반대하는 교회.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성경에 어디 그런걸 가르칩니까? 어쩌다가 교회는 분열의 한 복판에 불쏘시개가 되어 있나? 너무 속이 아프고 너무 창피하고 너무 자존심이 상해요. 중요한 것은 왜 한국교회가 그 한복판에서 그 갈등의 주체가 되어 있느냐 그 말이에요. 제가 그림 하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교회죠? 이 교회는 유명한 독일의 분단의 장벽이 쳐져 있던 베를린의 1884년도. 굉장히 오래 전일이죠. 1884년도에 세워진 화목교회입니다. 또는 화해의 교회라고도 합니다. 어쨋거나 화목교회라고 합시다. 이름이.
(25:00-30:00)
근데 이 교회가 1884년도에 세워진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특별히 베를린 지역에? 이 지역은 가난한 빈민들, 또 젊은 노동자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계층이 벌어지는 거에요.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노동자 계급, 지배층 계급. 가진 자 못가진 자. 그래서 이 교회를 세우면서 화목교회라고 이름한 중요한 이유는 뭔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구분 없이, 구분 없이 화목하게 신앙생활을 하자라는 취지에서 이 교회를 화목교회라고 이름하여 1884년도에 지은 거에요. 그러다가 독일이 1차 세계대전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일으키는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면서 독일에는 역사의 이단아, 괴물인 히틀러가 등장을 하죠. 나치 정권이 들어섭니다. 이때 나치 정권을 지지하고 부역했던 인물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상당한 교회의 성직자들입니다.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전세계에 확보하자 라는 밑도 끝도 없는 민족주의에 사로잡혀서 역사의 광란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지금도 티빙겐이라는 어느 도시에 가면 어느 한 교회 담벼락에 믿어지지 않는 글귀 두개가 적혀있습니다. 읽어 드릴게요. 첫째 피빙겐 시민들은 유대인 학살이라는 이 범죄의 가해자 중 하나입니다. 티빙겐의 어느 한 교회 담벼락에 실제 적혀있는 문구에요. 티빙겐 시민들은 이 범죄의 가해자 중 하나입니다. 오고 오는 역사 속에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이 글귀를 적어 놨어요. 왜 그랬을까요? 창피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이었을텐데 다음 세대 만은 이런 광기의 역사, 맹신의 기독교를 물려줘서는 안된다는 뼈아픈 결단 끝에 이런 글귀를 적어 놓은 것입니다. 두번째 글귀가 더 섬뜩해요. 두번째 글귀는 뭐냐 하면 대학의 지식인들은 그 범죄가 가능하도록 철학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군부 독재 시절에도 일부 지식인들이 그 군부독재의 합법화를 위해서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시류에 편승했던 경우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믿어지지 않는 문구죠. 그런데도 독일인들은 뼛속 깊이 역사적 반성과 회개를 하면서 다시는 이런 악하고 추잡한 역사를, 끔찍한 기록을 다음 세대에게는 계승토록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남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치 정권이 들어섰을 때 결국 전쟁에 폐하게 되고 독일은 분단이 됩니다.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지죠. 그리고 그 사이에 베를린을 중심으로 3m높이의 담장이 쳐져요. 근데 여러분 그 담장 근처에 아파트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파트 그림을 좀 볼까요? 저 아파트인데 저 아파트로 무서운 탈출이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그 옆에 군인들이 철조망으로 바리케이트를 쳐요. 그래서 완전히 봉쇄를 하고 폐쇄를 합니다. 이때부터 동독과 서독의 교인들인 비대면 시대를 지내게 됩니다. 오도가도 못하는.
(30:00-35:00)
우리나라처럼 혈연이 끊어지고 소식도 끊어지고 오랜 세월 그렇게 지내게 되죠. 게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독 시민들이, 성도들이 포기하지 않고 교회의 도움을 받아서 탈출 러시가 끊임없이 이어지니까, 다음 그림 한번 볼까요? 베를린 장벽 곁의 저 화목교회를 완전히 폭파해버립니다. 끔찍한 만행이 일어나는 거죠. 저렇게 교회를 폭파해 버립니다. 저게 1985년도에 있었던 일이에요. 근데 여러분 독일이 언제 통일 됩니까? 1989년도. 이 끔찍한 만행이 있고 몇 년 안돼서 동독은 장벽을 허물지 않을 수 없었어요. 하나님의 강권적인, 주권적인 역사로 1989년도에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고 통일이 되죠. 하나의 독일이 됩니다. 그 한복판에 동독과 서독 교회 성도들의 이 화목에 대한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과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얘기입니다. 그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서울 모 교회에서 시무할 때인데 아마 그 89년도 10월즘인걸로 기억해요, 그 통일되던 달이. 10월 3일인가 1일인가 기억은 희미한데 독일 전 국민이 동서독이 연합하여 음악회를 엽니다. 그런데 그 음악회 때 연주되었던 곡이 2곡이 있는데 다 베토벤의 음악입니다. 하나는 베토벤의 교향곡 6번과 또 하나는 베토벤의 교향곡 마지막 곡인 9번 교향곡이 울려 퍼져요, 전 독일 전역에. 6번 교향곡은 잘 아시는 대로 전원교향곡입니다. 한없이 대지에 펼쳐진 푸른 전원에 그들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꿈으로 그 노래를 연주했겠죠? 그리고 두번째 연주되었던 노래가 뭔지 아십니까? 합창입니다. 합창. 합창은 왜 독특한 가 하면 교향곡이라는 것은 대게 악기로 연주되는 음악인데 합창에 솔리스트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노래가 삽입됩니다. 그때는 베토벤의 귀가 완전히 상실 됐을 때 9번 교향곡을 만들죠. 오로지 내면에 하나님이 주신 영감으로만 그 노래를 만들게 돼요. 전원 교향곡과 합창이 한 시대를 어울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정말 기적 같은 장면을 볼 수 있었어요. 우리 한국 교회에 이런 날이 올까요? 시대에 이렇게 파편조각처럼 나뉘어지고 끊어지고 이 조그만 땅에서 조차 남북으로 나뉘어 있을 뿐 아니라 동서로 나뉘어 있고 사분오열된 이 한복판에 과연 한국교회는 화목의 제물이 될 수 있는가? 일터에서 우리는 그렇게 화목의 제물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89년도에 독일은 통일이 되어서 6년만에 이런 교회를 무너졌던 화목교회의 자리에 재건을 하게 됩니다. 이 사진이 무너졌던 화목교회의 터에 세워진 재건된 교회입니다. 가운데 십자가가 있죠? 그리고 이 교회의 모습이 원형이에요. 원형. 팔을 감싸 안아서 십자가로 양 서독, 동독 이 모아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만나는, 멋진, 단순하면서도 역사의 메시지를 담은 교회가 재건이 되죠. 근데 이 교회를 재건할 때 더 의미 있는 것은 무너졌던 화목교회의 재료로 이 건물을 다시 짓습니다. 물론 전체 사용은 할 수 없었겠죠.
(35:00-40:00)
그리고 이 교회를 저도 가보진 못했는데 사진을 보니까 가장 대표적인 조각물이 하나 있어요. 교회에. 이런 조각물이죠. 두 사람이 부부인지 연인인지 그건 중요하지 않지만 남과 북이 만나 듯 동과 서가 만나서 이렇게 화목하는, 얼싸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심이 보시면 그 밑에 돌 위에 책이 하나 놓여져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성경의 가치로 다시 화목 되는 독일 역사의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어요. 부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만감이 교차되요. 과연 이 땅에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한국교회는 왜 화목의 제물이 되지 못하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답은 세가지 입니다. 첫째,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십시다. 오늘 이 마지막 절 17절에서 요엘 선지자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어요. 제가 읽겠습니다.
17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지어다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왜 하필 낭실과 제단 사이일까요? 이 곳은 제사장들이 예배 준비와 예배를 위해서 집무하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역대기나 열왕기상에 과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바로 이 공간에서 솔로몬이후로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만을 오로지 예배해야되는 그 공간에서 우상이 들어오고 우상숭배가 이루어졌던 현장이에요. 거기 서서 울라 이 말이에요. 거기 서서 울라. 이 백성들의 가장 고통스러운 죄악은 우상숭배입니다. 이 분열도 왜 분열합니까? 왜 갈등을 일으킵니까? 자아라는, 자기라는 이데올로기라는 우상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이데올로기 밖에 없어요. 믿습니까? 거기서 만나야 돼요. 그리고 요엘 선지자는 첫번째로 이렇게 고백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어떻게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제가 이 말을 수없이 읽고 듣지만 이번만큼 절실히 각인되었던 적이 없어요. 우린 누구나 젊든 늙든 나이를 한해 한해 먹어가겠죠? 그러면서 느끼는 그 켜켜이 스며드는 부인할 수 없는 고백이 뭡니까? 인간은 불쌍한 존재인 거에요. 인간은 불쌍한 존재예요. 뭐 과거에 뭐 대단했어도 인간은 결국 마지막에 홀로 남게 되고 병들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모습으로 바뀌어질 때 인간은 불쌍한 존재예요. 아직 피가 끓고 손에 땀이 있을 나이에는 그게 잘 실감이 안될 꺼에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 불쌍히 여기며 살아야 돼요. 긍휼이 여기며 살아야 돼요. 그래서 선지자는 제사장들에게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뭐에 의지해야 된다? 언약. 하나님의 언약에 의지하라. 우리 13절을 보시면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전부 누구의 약속이었습니까? 진행형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이 하나님의 언약에 우린 기댈 수 밖에 없어요.
(40:00-45:00)
이런 표현이 맞을 진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유비해서 말하지 말고 부모로 한번 얘기해봅시다. 아이들을 키울 때 제일 부모가 꼼짝 못하는게 뭐죠? “아빠 약속했잖아요.” 못된 아빠들은 내가 언제 그랬어 그러지만 사람은 그럴 수 있어요. 근데 하나님은 실언치 않으세요. 변개함이 없으세요. 믿습니까? 그게 제일 하나님의 아킬레스건이에요. 하나님은 약속하셨어요. 원래 우릴 멸망시키시고 재앙을 줄 본심이 없으셨어요. 그래서 “이제라도” 하고 희망을 열어 놓는 겁니다. 우리에겐 기회가 있고 언제나 여지가 있고 희망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기대하라. 마지막 세번째 뭘 구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라. 여러분 17절 하반절에 보면
17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지어다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지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적 지탄의 정확한 그림이에요. 그렇죠? 지금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명예가 교회의 영광이 이 땅에 내동댕이쳐져 있어요. 너무 죄송하고 너무 속상하고 너무 기가 막혀요. 우리는 우리 한사람한사람이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편지로서, 향기로서 다시 이 땅에 내동댕이쳐진 그 하나님의 영광이 복원되도록 이 세가지를 구해야 됩니다. 첫째 뭘 구하라고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십시오. 두번째, 어디에 기대하시라고요? 하나님의 약속에 기대 하십시오. 세번째 하나님의 내동댕이쳐진 그 영광을 우리가 회복하는데 순종하겠습니다. 고통스러운 결단일 수 있지만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 홀로 영광이 되옵소서. 할렐루야! 이 약속이 이 간구가 한 주 내내 여러분 가슴 속에 큰 강줄기로 흘러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