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자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00:00-05:00)
한 해를 매듭지을 때마다 하루도 엄청나지만 한 해를 건너온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 얼마나어마어마한가를 갈수록 절감합니다. 오늘은 1월부터 시작된요한복음 강해를 마흔여덟 번째로 마감하는 마지막, 학교로 얘기하면 책걸이 시간이 되겠습니다. 세가지 질문과 사명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눌 때 한 해를 마감하는 여러분들에게 아주 큰 울림과 강력한 회복의말씀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지난 주 까지는 부활의 주님께서 낙향한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조반을준비하는 장면까지 나누었었어요. 오늘은 그 조반을 다 마친 후에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속에서 오늘의 이야기를 좀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15절을 좀 볼까요?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15절서부터 좀 보도록 하겠습니다.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자 여러분지금 이 자리는 아주 행복하고 따뜻한 자리일 수는 없어요. 차가운 새벽에 모닥불은 피워져 있지만 아직도이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상처가 들쑤시고 수치심이 가득한 새벽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단호하게 호언장담까지하면서 따르겠다고 장담했던 자기의 모든 결단과 각오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뼈아픈 실패를 경험한 직후에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스승은 부활하신 후에 이 디베랴 바다까지 찾아오셔서 조반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 제자를 부르시는데호칭이 좀 이상해요. 베드로야 이렇게 부르시지 않고 요한의 누구야? 시몬아. 시몬아. 이 시몬이라는 이름은 아시는 것처럼 베드로의 옛 자연인으로살 때의 이름이었어요. 우리 요한복음 1장을 한번 좀 봅시다.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동료 하나가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님에게 처음 소개하는 뜻 깊은현장이었죠.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이때이름이 시몬이었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그 이름을 이렇게 바꿔줍니다. 장차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뭐라고요? 페트로스,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게바라는 말은. 너는 반석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때부터 사실상 아직 반석 같진않지만 반석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부르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성경의 베드로의 이름은 슬그머니 베드로로 바뀌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바닷가에서 예수님이 상처가 들쑤시고 있는 수치심으로 가득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요한의 아들시몬아 라고 부르시는 중요한 심리적인 이유가 있어요. 왜 그랬을 꺼 같아요? 왜 이렇게 부르셨을까요? 여기에는 깊은 회복의 의중이 담겨 있는겁니다. 네가 지금은 수치심으로 가득하고 얼굴을 들 수 없는 자리이지만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것은 이 스승과 제자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을 떠올리는 호칭이에요. 우리다시 시작하자 그 뜻이에요. 우리 다시 시작하자. 어떻게보면 한 해를 매듭짓는 순간 즈음에 매우 적절한 장면이에요.
(5:00-10:00)
그 옛 이름의 호칭으로 부르시는 장면은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우리 모두에게도 매우 많은 의미를 시사한다고 볼 수 가 있어요. 아무개야 우리 다시 시작하자. 그리고 이제 이렇게 묻습니다.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여러분 이 사람들 이라는 이 단어가 사실 인칭명사가 아닙니다. 투턴이라는 말은 남성으로도번역이 될 수가 있고 중성으로도 번역이 될 수가 있어서 학자들 간에는 아직도 설왕설래 논란이 많은 질문의 구절입니다. 해서 세가지 정도의 해석을 소개할거에요. 그러면 그 해석을 다 듣고나서 우리는 그 중의 하나를 채택해서 오늘 이야기를 좀 풀어나가야될텐데 들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학자들간에 세가지 견해가 있다는 것 정도는 이해를 가지고 오늘 본문을 좀 보십시다. 첫 번째, 이렇게 번역을 할 수가 있어요. 해석을. 니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러면놀랍게도 여기에 비교급으로 물으셨는데 어 이거 누가 잘 쓰던 화법이죠? 누가 잘 쓰던 화법일까요? 난 잘 모르겠는데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꼼꼼히 생각해보세요. 이거베드로가 잘 쓰던 화법이에요. 베드로는 항상 이 스승이신 예수님에게 쫓아다니는 3년 내낸 그가 자주 사용했던 화법 하나가 항상 주변 것들과 자기를 비교시켰어요.얘네들은 다 달아날지라도 저는 아닙니다. 그냥 자기 혼자 어떻게 하겠다고 하면 될 텐데항상 옆의 것을 끌어들여서 얘네들은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안 버릴 겁니다. 이런 식으로 자꾸 비교를통해서 자기를 증명하고자 하는 화법을 가장 즐겨 사용했던 인물이 베드로에요. 이런 거 보면 예수님이조금 안 그래도 쑤시는 상처에 소금을 친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세요? 그런데 이것은 상당히 의도적인 발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번역할 수가 있어요.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러니까 예수님은 누구와 누구를 놓고 비교한 거죠? 베드로와 이 사람들을 놓고 비교한 거에요. 제자들을 놓고. 니가 나를 더 사랑하냐? 이 사람들이 나를 더 사랑하냐? 이렇게 물은 거에요. 그런데 두 번째 가능한 해석이 있어요.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흘깃 보면앞의 질문하고 다를 바 없는 질문 같은데 다른 질문이죠. 목적어가 달라요. 그렇죠? 미처 눈치채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 앞의 질문을 한번 더띄워드릴게요.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두 번째 질문 한번 보실까요?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나를 더 사랑하느냐? 두 번째 질문은 뭐죠? 이런 거죠. 예수님인 자신과 또 이 사람들과 둘 중에 누굴 더 사랑하느냐 그 질문이에요.이해가 됩니까? 안되면 그 이상은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넘어갑시다. 세 번째, 네가이것들을, 인칭명사가 아니죠? 이것들을 이라고 번역을 했어요. 아까 제가 이런 설명을 드렸어요. 헬라 말은 중성으로도 번역할 수있고 남성으로도 번역할 수 있어요. 그러면 여기에서는 중성으로 번역을 했다는 뜻이죠? 베드로가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을 처음 쫓아서 제자의 길로 들어설때 성경을 잘 보시면
(10:00-15:00)
배와 그물과 물고기를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다 그랬어요. 그러면 이것들은 뭘 얘기하는걸까요? 그의 생업의 현장으로 돌아와 다시 그 도구를 잡았던 모든 것을 총칭하는 표현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것들보다 나를 아직도 더 사랑하느냐 라고 질문을 하신 거에요.자 그러면 이 세가지 가능한 해석 중에 우리는 어느 해석을 택해야 전체 이 성경기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와 자연스러울까 했을 때첫 번째 해석입니다. 다시 보세요.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뭘로 물었다고요? 비교급으로물었어요. 이건 누가 즐겨 쓰던 화법이에요? 베드로가 즐겨쓰던 화법이에요. 여러분 베드로의 이 화법은 사실상 베드로의 헌신의 결정적인 문제점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부드러운 질문을 통해서 베드로의 문제점을 들춰내고 싶었던 거에요. 너 이거 고쳐야 된다. 그 암시가 이 속에 사실은 담겨있는 거에요. 그래서 베드로가 즐겨 쓰던 화법을 통해서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물었던겁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대답을 좀 보세요. 본문을 좀 다시보세요. 15절.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누구도 아시나이다?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자 이사랑의 고백이 조금 문제가 있어요. 야 이 사람 참 뻔뻔하다. 어떻게 그 짓을 해놓고도 또 여전히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 저같아도 아마 이렇게 성격상 대답을 했을 꺼 같아요. 주님, 저는틀렸습니다. 딴 사람 알아보세요. 제가 이 체면에 그렇게 세 번씩이나 주님 모른다고저주하고 욕하고 배반했던 사람인데 어떻게 주님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글쎄 저는 그랬을 꺼 같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이 아시잖아요.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주님이 이 제자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이게무슨 뜻이에요? 사명을 주시는 거에요. 사명을 사실상 회복하셔서맡기는 거에요. 이게 뭐냐 이 말이에요. 여기에서 우리는이 짤막한 대화 속에서 참 만감이 교차되는 그 내용을 좀 묵상할 필요가 있어요. 제가 이 본문을 놓고한참 읽어보고 또 읽어보고 베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감히 주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여러 각도에서한번 생각을 해봤어요. 베드로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체면으로 그래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을까? 예수님은 또 어쩌자고 이런 사람에게 사도직을 회복하시는 듯한 암시를 담은 내 양을 먹이라, 그것도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이렇게 까지 사명을 맡기실까? 처음에는잘 이해가 안됐어요. 그러다가 묵상을 하는 가운데 섬뜩한 은혜를 주셨어요. 그렇구나. 이거는 정말 부모자식간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이 대화를 절대 이해할 수 없겠구나. 저희 어머님이 스물 아홉에 혼자가 되셨어요. 이년 전에 작고하셨는데 그때 사남매가 있었어요. 제가 8살이에요. 그때.
(15:00-20:00)
저희 어머니는 스무 살인가 스물하나에, 스무 살에 결혼을 하신 거죠. 그땐 다 일찍들 하셨으니까. 그리고 아홉 살 된 누나, 6살 동생, 태어난 지 얼마 안된 갓난쟁이 이렇게 사남매가 있었는데스물아홉에 혼자가 되셔서 그 사남매를 키우신 거에요. 장남이니까 유난히 엄하게 돌아가실 때까지 칭찬을한번도 안 하셨어요, 저한테. 그런데 제가 무슨 잘못을 하면야단을 쳐도 꼭 동생들 안보는 방에, 장남이라고 체면 깍이면 안 된다고 동생들 안보는 방에 데리고 들어가셔서혼을 내셨어요. 그러니까 어머님이 저의 못남, 약점, 또 수치스러운 일들 다 아시죠. 다 아시죠. 그리고 어릴 적에 유난히 장남이라고 야단만 많이 맞았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도그런데도 항상 저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져버리신 적이 없어요. 그리고 저도 야단을 맞으면서 한번도 야단을맞으면서 이런 생각을 가졌던 적이 없어요. 내가 이제는 더 이상 어머니 볼 면목이 없다, 집을 떠나야겠다. 이제 어머니랑 호적정리를 하는 게 낫겠다. 이런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항상 혼자 고생하시는 어머니, 그런 무게감 때문에 저를 야단치는걸 알고 엄마 사랑해요. 엄마 잘못했어요. 이 고백을 할 수가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베드로의 주님이 아시는그 사랑을 고백할 수가 있었던 것은 그것이 무슨 완성이 돼서 완전해서 드리는 사랑의 고백이 아니에요. 우리도이렇게 한 해를 지나보면 얼굴 들 수 없는 순간과 기억들이 더 많잖아요. 그래서 주일날 올 때면 전부면목없는 마음으로 면목동에서들 와요. 그런데 우리가 올 수 있는 근거가 뭐죠? 떳떳해서 오나요? 그런 사람은 없어요. 면목이 없지만 그래도 내 마음 한 켠에 주님을 향한 고백을 끊거나 내려놓을 순 없잖아요. 그걸 누가 알고 계세요? 주님은 알고 계세요. 주님 아시잖아요. 저 그래도 주님 사랑해요. 그런데 그 사랑이 얼마나 모자라는 사랑이고, 흠 많은 사랑이고, 연약한 사랑인지 주님이 아세요. 그런데 주님 입장에서는 그걸로 된거에요. 그 이상 바라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에게는누구나 신앙적인 결벽증들이 다 있어요. 떳떳해야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다고 오해를 해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매주, 아니한 해를 돌아볼 때마다 떳떳할 수 없는 기억과 순간과 아픔이 더 많아요, 주님 앞에. 그런대도 한해 끝에 이 마지막 날, 주일날, 예배자로 설 수 있는 것은 주님, 그래도 저 주님 사랑해요. 저의 이 실낱 같은 고백을, 제가 주님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주님아시잖아요. 그걸로 된 거에요. 그래서 베드로가 세 번째고백을 잘 보세요. 17절에 이렇게 돼있어요.
17 세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뭐하여? 근심하여. 자꾸 물어보니까 걱정되는 거에요. 근심해서 이렇게 얘기해요. 이르되 주님 모든걸 아시오매 .여기 눈물이 나는 거에요. 뭘 아실까요? 주님이.
(20:00-25:00)
여러분 얼마 전 자기 가슴에 비수를 꼽고 등을 진 장본인이 바로 이 제자에요. 자기는가장 혹독한 죽음의 길을 향해서 걸어갈 때 이 제자는 어린 여자 앞에서 아니다, 모른다 욕하며 부인하던제자에요. 그거 본인이 더 잘 알고 예수님도 다 알아요. 근데베드로가 그 고백을 하는 거에요. 주님 다 아시면서 왜 이러세요. 걱정이되가지고 모든 것을 아시오매 그래도 저 주님 사랑해요. 여기에 누구도 헤집고 들어갈 수 없는, 누구도 이 관계를 깨부술 수 없는 주님 쪽에서의 단단히 붙들고 있는 그 무언가가 있는 거에요. 우리는 한 해를 이렇게 주님 앞에 이제 마름해야 되는 자리에요. 어쩌면이 베드로의 마음이 내 마음하고 똑같을까? 우리 그렇잖아요? 저도마찬가지에요. 제가 무너졌던 자리, 실수했던 기억들, 얼굴을 들 수 없어요. 부끄러워요.그런데도 제 마음 한 켠에 주님 그래도 주님이 저 잘 아시잖아요. 저 주님 사랑해요. 그걸로 된 거에요. 세 번에 걸쳐서 질문 끝에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확고하게 이 제자에게 사명을 맡겨요. 그런데 먹이라, 치라, 먹이라. 이 단어가 언어 플레이를 통해서 깊은 우리의 과거를 뼈쑤시게 들추어내요. 여러분 우리 마태복음 8장을 한번 볼까요?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뭐하고 있었어요? 먹고 있었어요. 여기 먹이라는 말이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채택합니다.또 한군데를볼까요? 소위 돌아온 탕자, 돌탕 이야기가 누가복음 15장에 있는데 그 15장에 보면 둘째가 아버지 두 눈 뜨고 살아 계신데유산을 요구하죠? 이거는 신명기 율법에 근거해서 돌에 맞아 줄을 짓이에요. 그런데 이 아버지기 무슨 뜻인지 그 말도 안 되는 아들의 요구를 들어줘요. 재산을챙겨서, 아니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유산을 챙겨서 아주 국경을 넘어 먼 나라로 떠나버립니다. 유대인들이 먼 나라를 떠나는 것은 돌아오지 않을 각오를 한 겁니다. 그리고창기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싹 탕진을 해버려요. 이제는 먹을 게 없어요. 그러니까 결국 그는 유대인들이 가장 율법에도 혐오하는 돼지치기가 됩니다. 그리고돼지들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어요. 우리 누가복음 15장한번 볼까요?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여기에 보면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어떻게 하였는데? 네. 돼지가 먹고 돼지를 치는. 이 표현은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일컬어졌던 유대인들에게는 막장에 떨어진 모습을 그려낸 그림이에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지경을설명할 때 이렇게 표현을 하는 거에요. 그런데 요한이 절묘하게 이 단어를 그대로 갖다 쓰면서 이 베드로에게사명을 회복하여 맡기시는 그 표현을 쓸 때 이 단어를 채택해서 씁니다. 뭘 얘기하고 싶은 걸까요? 우리의, 아니 베드로를 대표하는 우리의 과거의 모습이, 얼마 전까지의 모습이 어떠했다는 겁니까? 바로 이 막장 같은 자리에있었다는 얘기에요. 돼지를 치고, 돼지를 먹는, 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고 토하는. 베드로가 그랬어요.
(25:00-30:00)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그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사명을 회복해주세요. 이게 더 이상한 거에요. 지금. 아니주님이 이 연약한 제자를, 실패했던 제자를, 아직도 온전치못한 고백으로 서있는 제자를 틀림없이 아셨을 텐데 그냥 한번 더 믿어보는 걸까? 아니에요. 여러분. 여러분 19절끝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하반절에. 19절 하반절 제가읽겠습니다.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따르라 하시니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자 여러분, 이 나를 따르라는 말은 좀 거칠게 그대로 직역을 하면 이런 뜻입니다. 이제부터나랑 같이 가자는 뜻이에요. 이제부터 나랑 같이 걷자 그 뜻이에요. 그러니까이 말은 무슨 말이에요? 이제부터 내가 너한테 사도로 회복을 해서 이 직무를 맡길 텐데 이 사명을 다시시작 케 할 텐데 이제 너 혼자 네 맘대로 하게 버려두지 않는다. 이제 나와 함께 이 길을 걷자 그뜻이에요.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나자 이 뜻이에요. 그럼 어떻게구체적으로? 그것이 오늘 18절에 고스란히 녹아져있죠? 18절을 전체가 다시 읽겠습니다.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네, 베드로의 젊은 날과 늙어서 펼쳐질 날들을 정확히 구분했어요. 그리고 그 두 기간을 이렇게 설정을 했네요. 젊은 날에는 항상 능동적으로적극적으로 살았어요. 스스로 띠 띠,고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다니고, 호언장담하고, 결단하고. 결심하고. 헌신하고. 그런데그것이 전부 자아가 중심이었어요. 자기가 중심이었어요. 그런데늙어서는 어떻게 될 꺼 란 얘기죠? 남이 너에게 띠 띠우고, 네가팔을 벌리고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여러분 성숙이라는 게 뭐에요? 성숙이라는 건 딴 게 아니에요. 살아갈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점점 없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게 성숙입니다. 젊은 날에는 우주가 다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죠. 우리는 그래서 두 개의 가방을 가지고 있어야 되요. 하나의 가방에는이 세상은 나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고백이 한 켠에 있어야 되고 동시에 나는 먼지와 흙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두 가지를 갖고 있는데 인간은 두 양자속에서 본질을 찾는 거에요. 그래서 이 베드로의 상황을 훗날 성경기자가 어떻게 소개하는가를 사도행전12장에서 만나게 됩니다. 띄워주세요.
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지금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왔어요. 야고보도 죽고, 스데반도죽고, 무시무시한 환란이 폭풍처럼 닥쳤습니다. 베드로도 지금옥에 갇혔어요.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자는데. 대개 둔했던 거 같아요, 지금 잠이 와요? 이 상황 속에서?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다음절 시작.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벗어지더라
8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자 이 띠를 본인이 했어요 천사가 시킨 거에요? 천사가 시킨 거에요.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다음절 시작.
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 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이 모든 과정이 그대로 베드로가 지금 자의적으로 걸어가고 있는 겁니까?
(30:00-35:00)
뭔가의 영적인 존재에 이끌려 가고 있는 겁니까? 이끌려가고 있어요. 젊은 날에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대로 다녔어요. 그게 신앙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늙어서는 베드로가 스스로 띠를 띠는 게 아니라 옥중에서 밤을 지내다가 천사에 이끌려띠를 띠고 천사에 이끌려 옥을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렇게 마지막에 스승이 하늘을 향하여머리를 두고 죽은 그 십자가에 나는 감히 스승과 같은 방향으로 죽을 수 없다 해서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는 기록들이 고대 문서에 남아있어요. 클래멘트 고증서라든지, 또 성경에는 채택이 안됐지만 베드로행전이라든지이런 기록에 보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죽었다는 기록들이 전설로 남아있어요. 그리고 여기에 팔을 벌리고라는 말은 그 당시 사람들은 그게 무슨 죽음인지 누구나 다 알아요. 십자가의 끔찍한 죽음을 얘기하는거에요. 예수님이 그것을 베드로에게 암시 시키고 있는 겁니다. 자그런데 다음 성경을 보십시다. 20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묻던 자더라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여러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그 제자가 누굽니까? 이건 요한이에요. 요한이 따르는 걸봤어요. 그리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인간이 잘 안 바뀌어요. 원래. 금방 누구와누구를 비교시킵니까? 자기와 이 제자를 또 비교시키는 거에요. 얘는어떻게 되겠사옵니까? 그러자 주님이 속이 상해서, 그 본문은여러분들이 그냥 읽으세요. 22절 시작.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그러니까 베드로가 금방 뛰쳐나가서 얘는 안 죽는대.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고,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 이러라. 이해가 돼요여러분? 자 이 얘기입니다. 우리가 농사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과일을 농사지으려고 심어야 되는데 어떤 일꾼에게는 얘 너는 땅만 좀 파라. 어떤일꾼에게는 너는 이 나무가 잘 자라는지 안 자라는지 비바람이 불던 폭풍우가 오던 너는 원두막에서 하여간 눈이오나 비가오나 이 나무를 잘 관리하고지켜라. 또 어떤 일꾼에게는 자네는 추수의 계절이 되면 그 열매 맺힌 거 금방 따야 되니까 열매만 따라. 그러면 최종적으로 박수는 누가 받겠어요? 당연히 열매 따는 사람만박수 받아요. 그런데 그 사람 하나 때문에 농사가 잘 된 건가요? 그렇지않죠. 땅 파는 사람은 땅 파고 가는 거에요. 비바람이 불던폭풍우가 치던 그 과정을 지켜야 되는 사람은 원두막에서 그 과정을 지켰을 꺼에요 .그러니까 사명이라는것은 그 몫을 내가 선택하는 게 사명이 아니에요. 사명은 주께서 맡기는 게 사명이에요. 자 베드로는 그렇게 일찍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어요. 그걸로베드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베드로가 그렇게 살아생전 신경 썼던 요한은 아주 오래, 아주 길게 가늘게 살아 남아서 뭘했나요? 이 글을 남기잖아요.
(35:00-40:00)
이 그리스도의 생생한 유언과 증언과 기록을 남기잖아요. 그러니까 요한은 길게 남아서증언함으로써 영광을 돌린 거고 베드로는 이방에 복음의 문을 열어놓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거에요. 어느게 낫다 못 하다의 평가는 인간이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인간이할 수 없어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이렇게 한 해떠밀려 끝에 서 보면 참 유쾌했고 만족했던 일들이 더 남습니까? 억울하고 속상한 일들이 더 남습니까? 환장할 일이 더 많이 남죠. 그게 인생사의 본질이에요. 그런데 너무 속상해 하지 마세요. 너무 억울해 하지 마세요. 내가 일상의 직무 속에도 맡긴 역할이 따로 있을 뿐이에요. 누가영광을 받던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기대할 것은 바울의 고백을 잊어선 안됩니다. 그 날이 오면 그날에내게 주실 것이니 의로우신 재판장이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무슨 말이에요? 당대에 최종적 심판대가 황제의 심판대입니다. 바울은 지금 붙들려서 사형언도 당하고 집행날짜만 남겨두고 있을 때에요. 세상의모든 권력이 들러붙어도 기 판결은 못 뒤집습니다. 한 사람이 뒤집죠.바울이에요. 아니다. 이것이 최종적 평가가 아니다. 내게는 더 궁극적이고 더 진정하고 더 영원한 평가가 아직 남아있다. 의로우신재판장이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그의 나타내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멋지게 이 땅의평가를 한방에 뒤집어요. 우리가 그걸 믿음이라고 하죠. 여러분오늘 이 말씀이 또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여러분들 속에 깊은 울림이 되고 원리가 되어서 한 해의 속상한 일, 억울한일, 평가 받지 못한 일에 모든 생각을 연연하지 마시고 또 새날 우리에게 허락할 은혜를 바라보면서 다시새해를 준비하는 우리 삼일의 모든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