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03
빌레몬서 강해(3)
“되돌아 가는 종”
몬 1:15-22
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20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22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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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오늘 15절에 보니까 잠시라는 말이 있고 영원이라는 말이 대조가 되죠. 15절을 잘 보세요.
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그리고 또 너로 하여금 그를 어떻게 두게 하려 함이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삼 일째 이 빌레몬서를 하면서 빌레몬서의 전체 주제는 종이었던 오네시모와 빌레몬 관계가 이제 영원한 형제 관계로 바뀌는 놀라운 현장을 우리가 목격하게 됩니다. 보통 이제 사회 운동하는 사람들은 모든 초점을 제도 개혁에 맞춰요. 제도를 바꿔야 된다. 제도를 고치자. 그 말이 일면 동의도 되고 저는 이해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더 기독교 입장에서 과연 제도로 세상이 달라질까? 제도 아무리 바꿔 놔도 그 제도를 경영하고 운영하는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겠죠. 오늘 우리는 그 반대의 선례를 이 성경 속에서 마치 진주처럼 발견할 수가 있어요. 특이하게도 사도 바울은 또 예수님도 마찬가지지만 복음을 전했던 사람으로써 어느 한군데서도 무슨 제도 개혁타파에 주창이나 의견을 말하지 않았어요. 항상 공통된 관심과 초점은 복음을 통해서 어떻게 사람을 바꾸느냐 어떻게 복음을 통해서 어떻게 사람을 바꾸느냐, 어떻게 복음을 통해서 새롭게 되느냐 여기에 일관된 관심과 초점이 있었습니다. 노예 제도를 철폐 해야 한다. 이런 말이 한 군데도 없었어요. 그런데 빌레몬에게도, 오네시모에게도 복음이 들어가니까 주종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죠? 형제로 달라져요. 할렐루야!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이 거칠고 악한 세상을 어떻게 바꾸느냐에 대한 원리를 던져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직면하는 어떤 부당한 제도나 어떤 공동체 속에서 아주 살아가는데 중요한 삶의 힌트를 던져주는 메시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7,80년대 소위 운동권이라고 하죠. 스포츠를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고 운동권이라고 있어요. 캠퍼스 주변에, 저한테도 그런 친구가 굉장히 많아요. 가깝게 지냈고, 또 일면 그 형제들의 주장에 진심으로 또 동의하는 부분이 있고.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아요. 별로 달라지는 게 없어요.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말했죠. 빵이 없어서 기근이 아니다. 결국 무슨 문제로 접근을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빈민촌 운동을 했던 어느 목사님이 그냥 퍼다 주고, 노나주고, 갖다 주고 거의 평생을 그렇게 해 봤는데 그게 공동체를, 사람을 바꾸지 못하더라는 거에요. 그래서 늘그막에 크게 깨닫고 복음을 제대로 전하기 시작했어요. 공동체 속에, 한 영혼 속에 이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 복음이 들어가기 시작하니까,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해서 주변이 따뜻해 지고 주변이 달라지고 누가 서슬 퍼런 주장을 하지 않아도 손에 돌멩이를 내려 놓고 모든 공격 언어를 다 중단하고, 달라지더라는 거에요. 몇 년 전에 전라북도 김제라고 있습니다. 김제. 거기 모악산이 유명하죠. 모악산 기슭에서 그 지역의 여러 노회들이, 이제 시골은 아무래도 규모들이 조금 작을 수 밖에 없으니까 여러 노회들이 연합을 해서 집회를 한번 갖게 되었어요. 집회를 하는데 낮에 뭐 딱히 할 일이 없잖아요. 그렇다고 서울을 왔다 갔다 할 수 없고 그래서 숙소에 우두커니 있는데 지역 목사님들이 목사님 이 지역에 목사님이 꼭 보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뭔 데요? 그랬더니 문화재로 지정 된 교회가 하나 있대요. 문화재 지정 136호인데 그 교회 꼭 가보셔야 된대요. 그래서 따라 나섰어요. 교회 모양이 어제 잠깐 설교 시간에 말씀을 드렸지만 아담한 한옥인데 기역자로 된 교회에요. 아주 교회가 건물도 깨끗하고 오래 됐는데 한 100년이 넘었죠. 오래 됐는데 그런 기역자 교회더라고요. 그런데 그 교회 내력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 교회는 테이트라는 선교사님이 전도를 해서 개척이 된 교회입니다. 그때는 선교사님도 우리 나라 시골 길을 다니면서 전북쪽은 또 전주가 원래 선교 본부가 있었어요. 초기에 거기에 파송 되었던 테이트 라는 선교사가 말을 타고 김제까지 전도를 하러 올라오게 된 거죠. 말을 탔으니까 그 때는 말들이 쉬어가고 먹이를 주고 물을 줄 수 있는 마방이라는 게 있었답니다. 저는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마방을 들르게 된 거에요. 전도자니까 그 마방 주인에게 전도를 하게 된 겁니다. 그 마방 주인은 조덕삼이라는 분이에요. 유명한 분이죠. 조덕삼이라는 분인데 어마어마한 부자에요. 평안도에서 아버지가 피난을 온 분인데 그 김제에 가면 금산이라고 있습니다. 금이 많이 난다고 해서 금산이래요. 그 아버지가 그 금광을 다 매입을 해가지고 금 채취를 하는 겁니다. 그리곤 넓은 김제 평야 거의 모든 땅이 그 분들의 땅일 정도로 잘 살았어요. 어마어마한 부자죠. 마방까지 하고, 이재에 밝은 집안이었던 것 같아요. 그 마방에 쉬어 가면서 전도를 하게 된 거에요. 이 부잣집 아들래미 조덕삼씨가 예수를 믿게 된 겁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머슴이 하나 있었어요. 그 머슴 이름이 우리 한국 교회에 나오는 분인데 이자익이라는 머슴이 있었어요. 그 집에서 교회가 시작이 되고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주인이 예수를 믿으니까 종도 따라서 예수를 믿게 된 거에요. 이자익 이라는 종이. 둘 다 세례를 받았어요. 예수 믿게 된 연조가 1년 차이 밖에 안 나죠. 주인과 종이. 그리고 이제 이 조덕삼씨는 교회 재정을 맡아서 재정 부장을 하고, 종도 같이 주인 따라 나오고. 한 50명쯤 모여 있을 때 교회에서 일꾼을 뽑아야겠다 그래서 장로 투표를 했어요. 그런데 누가 장로가 됐냐 하면 종이 장로가 된 거에요. 교회가 아주 술렁술렁하게 된 겁니다. 이 노릇을 어떻게 하나, 과연 저 조덕삼씨가 교회를 계속 할까? 사람들이 굉장히 걱정을 했어요.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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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조덕삼씨가 종이 장로 선출이 된 것을 보고 앞에 나가서 먼저 발언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 이자익 피택 장로를 앞으로 교회 지도자로 잘 섬기겠습니다. 참 있을 수 없는 발언을 한 겁니다. 그 당시 사회적 맥락을 볼 때. 그런데 이 이자익 종이 아주 장로 노릇을 잘했어요. 그래서 주인 조덕삼씨가 이자익 장로를 평양에다가, 그때는 신학교가 평양에 있었겠죠. 옛날이니까. 신학교에 보냅니다. 돈을 다 대주고 그리고 목사가 됐어요. 그리곤 이 조덕삼씨가 그 후에 장로가 됐죠. 그리고 나서 그 종이었던 이자익, 이제 목사를 그 금산 교회 담임 목사로 청빙을 합니다. 우리 그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연보에 보면 이 이자익 목사가 13대 총 회장까지 해요. 근데 총 회장을 한 정도가 아니라 총 회장을 세 번씩이나 하게 됩니다. 원래 총 회장을 연임하는 법이 없어요. 그 인품의 됨됨이를 넉넉히 짐작을 할 수 있겠죠. 그 신망이라던가. 교회를 설립하고 교회를 개척해서 제공을 했던 주인 조덕삼과 종이었던 이자익 목사가 한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이 복음이 가능케 한 일이에요. 우리 한국 기독교 역사에 이런 선례가 굉장히 많아요. 그 반대의 예도 또 있었어요. 여러분 지금 롯데 호텔 그 쪽을 곤당골 이라고 그랬대요. 지금은 그런 이름 흔적이 없어 졌지만 거기에 또 세뮤얼 무어라는 선교사님께서 오셔서 개척을 하고 교회를 설립하게 됩니다. 그 때는 이제 양반들과 장사하는 상인들만 주로 교회에 나왔어요. 거기도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까 일꾼을 뽑는 투표를 하게 됐는데 박성춘이라는 분이 장로로 피택이 된 거에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분이 놀랍게도 신분이 밝혀 졌는데 백정 출신이에요. 백정이 뭐 하는 분들인지 아시죠. 그 때는 백정은 어디 감히 1800년 대 말,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백정은 교회 못 왔어요. 올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까 이분이 신분을 숨기고 있었고, 알고 보니 백정 출신이에요. 교회가 들고 일어났어요. 어떻게 백정을 우리가 장로로 모실 수 있으며 함께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느냐. 못 드린다고. 이러한 일들이 지금은 말도 안되지만 그 때는 당연한 일이었어요. 들고 일어난 거에요. 그래서 그 분을 중심으로 해서 백정 출신들이 또 따로 교회를 하게 됩니다. 그 분들이 교회를 나갔어요. 옆에 홍문동 이라는데 지금 조흥은행 지점쯤 될 겁니다. 위치가 교회가 그 것 때문에 분리가 된 거에요. 각 자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곤당골에 모여 있던 먼저 교회가 불이 나 버렸어요. 불이. 그러니까 너희들과 예배를 같이 드릴 수 없다고 뛰쳐나갔던 사람들이 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냐 하면 복음을 통해서 자기들이 너무 잘 못 했다는 참회와 회개를 안 그래도 하고 있었어요. 언젠가 이 역사의 매듭을 풀어야 될 텐데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 자기들이 몸담아 시작을 했던 교회가 불이 난 거에요. 그래서 먼저 가서 제안을 합니다. 이 김에 우리 교회를 합칩시다. 그래서 백정들과 양반들이 그런데 이 양반들 쪽에는 누가 있었는가 하면 고종 사촌 이제선씨라는 분이 계셨어요. 왕족이죠. 이제선씨의 어머니도 그 교회에 나왔고. 그러니까 왕족이 양반을 중심으로 모였던 교회에요. 이 두 교회가 나중에 한 교회의 화재로 합치게 됩니다. 그 교회가 지금 바로 파고다 공원 옆에 있는 승동 교회에요. 우리 교단이죠. 담임 목사님이 저하고 신대원 동기입니다. 그런 역사를 가진 교회에요. 한국 초기에는 우리 나라가 갖고 있었던 특유의 그런 양반 문화와 상놈 문화가 존재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런 빌레몬서에 나타난 스토리 같은 비슷한 사례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런데 결국 제도 개혁으로 하난가 되고 이루어 진 게 아니에요. 그 영혼 속에 바른 복음이 들어가고 용서와 화해와 사랑의 복음이 들어가니까 사람들이 바뀌는 거에요. 달라지는 거에요. 그러면서 자기들의 잘못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고 하나로 손을 잡는 이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사도 바울도 이제 이 서신을 거의 마쳐 가면서 주인 빌레몬에게 이런 부탁을 해요. 성경을 좀 보십시다. 16절.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대 석학이요, 사도인 사도 바울도 오네시모를 신실한 동역자, 사랑 받는 아들, 형제로 불러주고 있다면 이와 상관된 너에게는 더욱 그러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권면을 합니다. 사랑에 빚진 자로써 그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권면을 합니다. 자 그런데 18절을 한번 볼까요? 재미있는 얘기가 하나 있어요. 18절 같이 읽겠습니다.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네 이것이 이제 바울의 신앙의 굉장히 중요한 관점이에요. 오네시모는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주인에게 재정적 손실을 끼치고 도망을 나온 종이에요. 그러다가 로마까지 흘러와서 복음의 사도인 바울을 만난 거에요. 그런데 바울이 지금 오네시모의 손실 끼친 행위를 자기 앞으로 계산을 해달라고 얘기를 합니다. 우린 보통 사랑을 관념으로 그냥 마쳐 버릴 때가 많아요. 그냥 언어의 유희 정도로 사랑을 뭉뚱그릴 때가 많아요. 마태복음에 보면 또 누가복음에도 그 기사가 나오죠. 예수님이 극찬을 했던 인물 하나가 있어요.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그리고 그 극찬의 배경에는 정치적으로 원수 관계일 수 밖에 없는 유대 장로들이 이 백부장을 칭찬을 해요. 선생님 이 분에게는 그런 호의를 베풀어도 될 만한 분입니다. 그러면서 세 가지를 얘기해요. 유대 장로들이 로마 백부장에게. 백부장의 종이 병이 들죠. 죽게 되요. 병이 들어요. 그래서 그 백부장이 예수님에게 내 종을 좀 고쳐 달라고 데리고 나옵니다 이 때 추천을 누가 하냐 하면 유대 장로들이 추천을 해요. 여러분, 로마의 백부장은 로마 군대의 꽃이에요. 그리고 정복자에요. 그 당시 노예는 어떤 존재입니까? 집안에 부리던 노예 하나가 병이 들었는데 그 노예를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에게 그 건수를 가지고 나온 겁니다 .그런데 그 표현을 보면 아이가, 내 아이가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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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을 써요. 종을 갔다가. 그 말은 이 백부장의 신앙을 왜 예수님이 칭찬을 했는가가 여전히 반영되는 표현이에요. 한 인간이 아니라, 물건에 불과한 종에 대해서 내 사랑하는 종이, 또는 내 아이가 라는 표현을 쓰는 걸로써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거에요. 좋은 신앙은 첫 번째가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갖는 태도입니다. 그 사람이 신앙이 좋으냐 나쁘냐를 가늠할 수 있는 몇 가지 잣대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첫 번째를 꼽으라 하면 그 사람에게 영혼을 사랑하는 태도가 있는가? 가장 중요한 기준점입니다.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라 이 백부장은 유대 장로들의 추천의 내용에 의하면 이런 추천을 해요. 이 사람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 민족을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모이는 종합적인 장소에요. 거기에서 교제가 이루어 지고 가르침이 이루어 지고, 예배가 진행이 되는 공간이거든요. 그런데 이 백부장이 그 회당을 지었어요. 회당을 지었다는 것은 뭐가 들어간다는 얘깁니까? 재정이 들어간다는 얘기에요.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허신 사랑하지만 거기에 대가를 지불한다는 측면에서는 굉장히 약해요 우리가 사랑한다면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대가가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완성된 사랑이라고 봐요. 꼭 물질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오늘 사도 바울은 이 아들 오네시모를, 종이었던 자를, 형제로 아들로 동역자로 부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인에게 끼쳤던 모든 손실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얘기입니다. 사랑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또 한 측면이 진짜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이 사랑이에요. 사랑의 아주 중요한 구체적 태도입니다. 믿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 백부장을 극찬 할 수 있었던, 이스라엘 중에도 이만한 믿음을 내가 본적이 없다. 이렇게 칭찬을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돌려 보내면서 그가 끼친 손실은 나한테 계산을 하도록 하라. 여러분 돈이 많든 적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과 사람끼리 사는 관계 속에서 항상 마지막 책임자가 되십시오. 아멘? 굉장히 중요한 신앙의 기초이어야 합니다. 내가 책임 질게. 지도자가 된 다는 것은 달리 책임자 입니까? 책임을 진다는 거거든요. 여러분 뒷골목의 어두운 세계의 조직들도 주먹이 센 사람이 보스가 아니에요. 보스들 보면요 작아요 그냥. 주먹을 잘 쓰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 그 보스들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부하들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거에요. 그 사람이 보스가 되는 거에요. 책임을 지는 태도가 그 사람을 존경과 신망과 리더로 밀어 올리는 거에요. 내가 리더다 주장하고 말 한다고 리더가 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묵묵히 책임만 지어 보세요. 어느 새 시간이 흐르면 그 사람이 앞에 서 있게 됩니다. 그걸 알거든요 사람들이. 우리는 신앙인으로써 마지막 책임자가 되어야 해요. 아멘? 특별히 남자들은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가 뭐냐 하면 남자는 책임을 지는 자에요. 그래서 남자로 둔 겁니다. 남자 중의 남자가 누굽니까 예수님 아니에요. 모든 책임을 십자가에 홀로 지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어요. 그래서 온 인류가 그 분을 따르지 않습니까? 믿던 안 믿던 간에. 구속은 그 마침표가 책임을 지는 거에요. 아멘? 자 그 다음에 보십시다. 마지막, 20절을 볼까요?
20 오 형제여. 이 말은 그냥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말하자면 Yes, brother! 그렇게 받아줄 줄 믿는다 그 말이에요. 형제.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21절 시작 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오 형제라는 말 속에는 이 뒤의 이야기의 모든 부탁이 이루어 질 것을 나는 확신한다. 내가 너를 잘 알고 있다. 너도 나한테 빚진 것이 있지? 물어요. 어디에 물었냐 하면 19절을 한번 볼까요?
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빌레몬이 바울에게 빚진 것이 있대요. 무슨 빚을 졌을까요? 빌레몬은 분명 부자여서 재정적인 빚을 질리는 없고 떠돌이 바울에게 무슨 돈을 꾸었겠어요. 그러면 여기 너도 나에게 빚진 게 있지 않냐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요? 복음을 받은 사랑을 얘기합니다. 빌레몬은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접한 사람이거든요. 여러분 그 보다 더 큰 부채가 어디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 빌레몬서 강의를 하면서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는 전부 뭐한 사람입니까? 빚을 지고 있어요. 이 빚은 갚기까지 내 마음 속에 늘 큰 열렬한 부담으로 들어 와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빚진 자에요. 빚 갚으세요. 오늘도 빚 갚으러 나가십시오. 그게 그 인식이 우리 속에 말라선 안돼요. 빚지고 살 수 있어요? 갑갑해서? 오늘 그 빚진 사랑의 대상인 빌레몬에게 이 오네시모를 거의 반 강제적으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렇게 이루어 질 줄을 믿는다 그러고 부탁을 합니다. 자 그런데 한 군데 우리가 마저 볼 필요가 있어요. 22절 다같이 볼까요? 시작,
22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노라
이런 표현은 굉장히 뜬금없는 표현 같아요. 사도 바울은 이 골로새 교회를 가 본적이 없기 때문에 아마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 교회도 보고 싶고 이곳을 꼭 한번 죽기 전에는 방문을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네시모를 부탁하면서 빌레몬에게 또 다른 부탁을 하는데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 하나만 좀 마련해 다오. 거처 할 곳이라는 얘기겠죠. 자 그런데 바울이 이 숙소가 단순히 잠자기 위한 숙소를 위해서 이 부탁을 했을까요? 우리 사도행전 28장 23절을 찾아보고 마치겠습니다. 사도행전 28장 23절 우리 다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시작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아멘, 바울은 가는 곳마다 이런 숙소를 부탁합니다. 거기서 잠 잘라고 숙소를 부탁했을까요? 바울이 지금 이 집에서도 뭘 하고 있죠? 날마다 주야로 예수를 가르치고 있었어요. 항상 바울의 일관된 관심은 이것밖에 없어요. 딴 게 없어요. 숙소 하나 좀 부탁한다 그 말은 내 잘 곳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에요. 바울은 흘러가는 모든 인생에 찍는 발자국마다 복음의 흔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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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익을 남기고 싶었어요. 이자, 열매. 항상 바울이 이자 또는 열매를 표현 할 때는 뭘 염두에 둔 발언이었어요? 영혼 사랑입니다. 수 많은 돌아 올 영혼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행위를 얘기합니다. 이것이 이렇게 처절한 우여곡절 속에 지금 투옥 돼있는 지금 바울은 감옥에서 연금 상태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그의 일관 된 평생의 관심은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숙소를 마련해 달라는 말은 단순히 내 몸 하나 누일 편안한 잠자리 좀 있으면 좋겠다. 이런 사적인 부탁 때문에 이 기록이 여기 남겨진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거점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계속 이어집니다. 우리 삼일 교회 모든 성도들이 전 인생을 통해서 머무는 곳마다 복음이 고이고 그 복음이 흘러가서 온 세상을 밝게 만들고 새롭게 만들고, 소성케 만드는 귀한 순종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붙들고 또 오늘 하루의 삶을 위해서 또 오늘 개천절이죠. 단순히 노는 날이 아니라 오늘은 좀 국가를 위해 기도하십시다. 이 조국 대한민국이 언제까지 분단의 아픔을 그대로 두시렵니까? 북녘의 지하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또 북녘의 정권을 위해서 모든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 복음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기적을 보게 하시고, 남북이 하나되어 무너졌던 평양의 거리 거리마다 찬송이 다시 흘러가게 하시고, 금강산에 기도원이 설립되게 하시고, 북녘의 동포들이 복음을 통해 다시 한번 살아나는 민족의 활로가 열리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 소리 내어 다시 한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