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4)
방주로들어가라
창7:11-16
11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그 달 열 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12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13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14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가 그 종류대로
15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16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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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나라도 충격이지만, 세계적으로충격적인 선거 결과가 있었죠. 모두의 예상을 깨고 기인에 가까운 트럼프 라는 인물이 미합중국의 대통령이되었습니다. 그 직전 주일 날, 그러니까 주일로는 지난 주쯤되겠나요? 미국의 유명한 존 맥아더 목사님이 이런 요지의 설교를 하셨어요. 이미 미국은 타이타닉 호가 되었다. 그러니까 침몰해 가고 있다. 대통령 선거를 바로 직전에 두고 한 내용이에요. 그 얘기는 이런암시도 담아져 있는 것 같아요. 누구를 뽑느냐는 큰 의미가 없다 그 말이에요. 다시 말해서 나쁜 사람을 뽑느냐 더 나쁜 사람을 뽑느냐? 그 정도이해면 맞을 것 같아요. 이미 미국은 타이타닉 호와 같다. 침몰은피할 수 없는데 지금 상황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 막 쏟아져 이리저리 휩쓸려 가는 집기나 의자들을 재배치 하고 그걸 다시 배열하는 것은 큰 의미가없다는 거에요. 차라리 지금은 어쩌면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구명 조끼를 준비하고 구명 보트를바다에 던지는 것이 어쩌면 더 시의 적절한 행동 기준이 아닐까? 일면 이해가 돼요. 같은 목회자로써. 지금 노아의 홍수의 사건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향해 보실 때 그런 심정이었던 것 같아요. 더 이상 이 세상은 회복이 어렵다. 말하자면 고쳐서 쓰거나 재활용도 이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갈아엎는 방법 밖에는 없는데 그것이 바로 홍수 심판입니다. 성경 전체에서는 홍수, 바다, 물 이 세 가지 개념이 사실 한 묶음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데 뭘 이야기 하냐 하면 보통 요한 계시록에 보면 바다가 많이 등장을 해요. 그런데 그 바다에서 일어나는 용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그렇게 선한 게 없어요.그리고 사복음서에도 보면 예수님의 제자를 태운 배들이 바다에서 뭘 겪죠? 풍랑을 겪어요. 고난을 상징하는 거죠. 또 시편 110편같은데도 보면 우리 인생을 바다에서 영업하는 자로 묘사를 합니다. 그리고 그 파고가 높이 일 때 파도끝에 배가 높이 올랐다가 스올에 음부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그런 고난을 바다에서 겪습니다. 항상 물, 홍수, 바다는 적어도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고난과 환란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심판을 담기도 해요. 자 이제 드디어 우리는 그 홍수 직전의 방주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방주는히브리 말로 테바 라고 합니다. 테바. 그런데 이 테바라는 말이 성경에서 정확하게 두 번 등장을 해요. 창세기에 방주라는 표현으로 등장을 하고 또 하나는 출애굽기에 등장을 합니다.출애굽기? 성경을 몇 차례 읽어 봐도 출애굽기 즈음에 홍수가 났다던지 그래서 방주가 예비되었다든지 인용 구절도 읽어 본 적이 없는데 출애굽기에 왠 방주가 등장을 하지? 등장 합니다.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생산한 이후에 모든 히브리 남아들은 죽이라는 명령이 바로에 의해 떨어지고 얼마간은 품에놓고 집에서 키우죠. 그러다 아이가 점점 성장하면서 울음 소리가 자꾸 밖으로 새어 나가고 혹 들켜서살해 될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겁니다. 그 때 모세의 어머니는 결단을 합니다. 뭘 만들죠? 갈대 상자를 만들어요.이 갈대 상자가 정확하게 테바입니다. 같은 단어를 써요. 그리곤 역청을 바르죠. 물이 새어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리고 강보에 싸서 그 갈대 상자에 모세를 넣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일강에띄워 버려요. 우리도 가끔 그런 절대 절명의 선택 앞에 내몰릴 때가 있어요. 외통수의 인생이 걸릴 때 방법이 없는 거죠. 외통수라는 말 아시죠? 장기 두다 보면 방법이 더 이상 없을 때 그 상황을 외통수라 그럽니다. 그때는 나일강에 던지는 거에요. 그럴 때가 참 있어요. 제친구 가운데 가끔 편지 속에 기도 제목을 나누는데 그런 표현을 써요. 이 문제는 강물에 던졌다. 자기 손을 떠났다 그 말이죠. 참 그럴 때가 많아요. 그래서 모세라는 이름은 무슨 뜻인가 하면 아이러니 하게도 물에서 건짐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물에서 건짐을 입은 자. 그러면 여러분 지금 설교를 듣다가 생각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저는 알아요. 방주 얘길 하다가 뜬금없이 왜자꾸 모세 얘기를 할까? 여러분 이 방주의 의미를 알려면 모세의 기능과 역할을 알아야 정확히 방주의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방주라는 표현이 모세의 경우와 창세기 홍수 때의 경우만 사용했기때문에 이 둘은 해석학적으로 중요한 연결 고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라는 이름은 물에서 건짐을입은 자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모세는 자라서 훗날 이스라엘의 명실공히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지도자가됩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이 백성들을 집어 넣을 때, 자기는결국 못 들어가지만 유명한 책 한 권을 쓰게 됩니다. 신명기서 라는 책이에요. 그 책 18장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이 본문을 잘 보세요. 너희 가운데네 형제 중에서. 그러니까 선지자가 누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겁니까?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거에요.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여기 나는 누굽니까? 이 글을 누가 쓰고 있죠? 모세. 모세가 쓰고 있어요. 나,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겠대요. 그리고 너희는 그의 말을들을 지어다. 자, 이것은 앞으로 역사 속에 저 먼산 너머등장할 한 사람을 가리키는 지향점입니다. 하나의 표지판이에요. 이런자가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을 뭐라고 표현했죠? 나와같은 선지자 하나가 일어날 것인데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 지니라. 그런데 그 선지자가 너희 형제 중에서일어난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이쪽 신약에서 받아요. 요한이이런 기록을 남기죠. 요한 복음 띄워 주세요. 자 다같이시작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참으로 세상에 오실, 이건 누가 가르친내용입니까? 아까 모세가 가르친 내용이에요. 그 선지자라하더라. 누굴 보고? 예수님을 보고. 그러니까 모세가 지적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는 결국 신약에서 누구를 묘사한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거에요. 자, 그러면 종합해 보면 이런 그림이 돼요. 방주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말하는 거에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연결 고리에 해당하는 성경 구절 하나를 좀 보여 드리겠습니다. 고린도 전서 10장을 띄워 주세요.1절 시작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예, 1절은 홍해를 건넌 사건입니다. 놀랍게도 홍해를 건넌 사건을 신약에서 바울이 뭐라고 해석을 했죠? 세례를받은 걸로 해석을 해요. 근데 2절이 문제에요. 누구에게 속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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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모세를 따라 그러지 않았을까요? 모세를따라 걷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 모세에게 뭐하여?속하여. 이 말은 모세 안에서 그 말이에요. 아까우리가 살펴 본 바대로 모세는 또 다른 누구의 예표였습니까? 예수님의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였어요. 그럼 저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그리스도께 속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뜻입니다. 종합하면 이런 그림이나와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전체 그림이 뭐냐 하면 노아가 만들었던 방주는 바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예표 하는 그림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볼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멘, 일류가 이 땅에 존재했던 이후에길은 한 길 밖에 없었습니다. 유일한 길, 온 땅에 물로덮여 심판 아래 놓였을 때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의 방식 밖에 없었어요. 배 안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배가 신약에서는 누구로 묘사되고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로 묘사돼요.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여러분 이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까? 이걸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이런 증언을 남깁니다. 4장 띄워 주세요 .12절 시작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아멘, 온 역사와 인류의 시간을 통해서구원에 관한 다른 길을, 다른 이름을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적이 없어요.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그 상징인 방주를 지난 시간 배운 것처럼, 인간이 심판 당하기 까지 남은 시간이 몇 년이라고 했죠? 120년이라고말씀 드렸어요. 이제 120년 동안 배를 뚝딱거리면서 만들어갑니다. 자, 그런데 배가 이제 거반 다 됐어요. 그리고 7장 2절을 보니까이런 풍경이 나옵니다.
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내게로 데려 오며
이 노아 방주 사건을 읽다가 궁금했던 게 이 부분이에요. 노아의 방주에는 정결한 짐승만 들어간 게 아니에요. 뭐도 데리고들어갔죠? 부정한 짐승도 데리고 들어갔어요. 우리 생각엔좀 이랬으면 좋았을 법 하지 않습니까? 이왕 세상을 청소할 거, 이참에 그냥 부정한 것은 일소하고 그냥 정결한 짐승과 노아의 가족만 탁 데리고 들어가면 깔끔하게 정화가 될 것 같은데 부정한 것까지 데리고 들어가요. 그러니까 저와 같이 이런 의문을 갖는 것 자체가 인간의 착각이에요 .여러분6장 18절을 한번 볼까요?
18 그러나 노아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언약은 언약인데 무슨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내 언약. 왜 내 언약일까요? 그냥 언약이라고하면 안 될까요? 이 베리트라는 말은 성경에서 중요한 사상이죠. 원래 언약이라는 개념은 쌍방 개념이에요 .양자가 동등하게 이 언약을 지키도록 돼있습니다. 그런데 왜 내 언약일까요? 여기에는 이런 의미가 함의 되어 있어요. 즉, 지금 상대방이 이 계약의 내용 따라 순종하거나 지켜 낼, 완성할실력이 안 되는 거에요. 전적으로 타락하고 무능했기 때문에. 그런데저를 구원은 해야 돼. 그래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되 내 언약을 세우시는 거에요. 이 말은 일방적으로 하시겠다는 거에요. 상대가 능력이 전무하니까.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하느냐? 그 내용으로 방주 안에 정결한 짐승만데리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부정한 짐승도 데리고 들어가요. 그리고는 보십시다. 9절을 보세요.
9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그리고 16절로 가볼까요?
16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그를 들여 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예, 문이 닫혔어요. 문이 닫혔다는 것은 이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문 안쪽의 사람들에게는보호가 됩니다. 근데 문 밖의 사람들은 이제 곧 닥쳐질 운명이 뭡니까?심판이에요. 그래서 문을 사이로 심판이 이루어지고 구원이 이루어져요. 이중적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문을 닫고 나서 몇 일 후에 비가옵니까? 홍수가 옵니까? 7일 후입니다. 10절을 한 번 볼까요?
10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맞죠? 자, 그리고 이제 저를 잠깐 보십시다. 인간의 남은 날수가 백이십 년이라그랬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예비할 것을 명령하십니다.그리고 그 설계도를 주세요. 노아는 그 설계도 대로 그 때부터 120년의 세월을 뚝딱거리면서 아침에 눈을 뜨면 하는 일이 그 일에요. 배짓는 일이에요. 그런데 훗날 베드로 사도가 그 광경을 이렇게 소개했네요.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노아가 많은 사람들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세상의 경향과 세상의 패턴에 취해 있을 때그 한복판에서 그 수많은 사람들의 희롱과 조롱과 손가락질 속에 뭐를 만들고 있었어요? 배를 만들고 있었어요. 이게 뭐예요? 의를 전파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드디어 일주일 전까지 그 임박한 시간이 다가왔어요. 그리고일주일 전에 다 부정한 짐승과 정결한 짐승이 들어가고 문이 닫힙니다. 그리고 8장 20절을 보십시오.
20 노아가 하나님께 재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앞을 보십시다. 무슨 얘깁니까? 심판이 끝나고 홍수가 끝나고 그들이 밖에 나와서 이 모든 노아 홍수의 심판을 제사로 마칩니다. 그런데 그 제사 내용을 잘 보세요. 부정한 짐승이 드려졌습니까? 정결한 짐승이 드려졌습니까? 예,데리고 들어갔던 정결한 짐승이 제단에 드려집니다. 그들이 무엇을 대신해서 죽은 걸까요? 부정한 것들을 대신해서 죽은 겁니다. 그러면 그 안에 들어간 노아의가족은 모든 부정한 짐승과 함께 이 정결한 짐승의 죽음을 통해서 정결함을 입은 거에요. 그 얘길 하고싶은 겁니다. 그러니까 이 부정한 것들은 왜 데리고 들어가? 그게우리란 말이에요. 믿습니까? 그게 우리에요. 원래 율법의 기준으로는 부정한 것에 손을 대면 손 댄 자가 어떻게 됩니까? 부정해져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예외가 하나 있었죠? 예수님의 케이스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통곡 소리 속에 그 죽은 아들이 놓여져 있는 관에 손을 대십니다. 정통 유대인으로써 계명을 지금 어기는 거에요. 그럼 뭐가 됐죠? 예수님이? 부정한 자가 돼요. 그럼으로써이 아들에게 생명이 돌아옵니다.
(20:01-30:00)
정결한 짐승의 죽음을 통해서 심판 받아 마땅할 저와 여러분들이 정결함을 입게 되는거에요 .길을 가던 예수님께 바짝 붙어서 청중들에 둘러 쌓여서 혈루증 앓던 여인이 손을 댑니다. 그 여인은 부정한 여인에요. 그럼으로써 누가 부정하게 되십니까? 예수님이 부정한 존재가 되었어요. 그 은혜로 여인은 어떻게 됐나요? 정결함을 입습니다. 평생 곤욕스럽게 인생을 탕진하고 시달리던 슬픈운명을 갖고 있던 여인은 회복과 고침을 입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이방주에 실어진 부정한 짐승은, 이것들을 왜 태워? 아니요우리란 말이에요. 우리가 그렇게 은혜를 입는 거에요. 그리고대신 정결한 짐승의 상징인 어린 양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제단에 죽어지지 않습니까? 그 보혈의 공로로우리는 나음을 입게 되는 거죠. 자 우리는 마지막으로 아까 하다 중단한 얘기를 이어서 결론 겸 하고하고 마칠까 합니다. 이제 홍수는 일주일 남았어요. 일주일. 이제 뚜껑은 닫혔습니다. 문이 닫혔어요. 그 안에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이 들어가 앉아 있습니다. 밖에는 여전히햇빛이 쨍쨍하고 날이 맑아요. 그런데 노아의 가족들이 들어가 앉아있습니다. 심판의 날을 기다리면서. 저는 그 광경이 너무 우스워요. 저러다 비 안 오면 어쩌려고. 그렇지 않아요? 노아가 그랬을 것 같아요. 내가 이러려고 내가 방주를 만들었나? 여러분 비가 안 오면 어쩌려고 그래요? 여러분 생각을 해보세요. 밥만 먹고 방주를 준비한 거에요. 사람들이 뭐라 그랬겠어요? 더위 단단히 먹었구만 냅 둬. 저 양반은 원래 그래. 여러분 정말 예수 제대로 믿고 살면서 그런 손가락질이나 소리를 들은 적 있나요? 바울이나 예수님은 미치광이 소리를 들었어요. 부모님이 걱정이 돼서형제들과 찾아 다니곤 했죠. 바울도 미쳤구나. 그게 이 땅에서우리 그리스도인의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상과 숙명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의를 전파했다는 말의 의미는띠 두르고 전도지 들고 나가서 그런 의미만이 아닙니다. 눈만 뜨면 그의 살아내야 했던 소명의 자리 일상에서방주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이제 그 엄숙한 현실이 또 우리 앞에 한 주간 놓여져 있죠? 의를 전파한다는 것은 바로 부름 받은 그 자리가 내 선교지가 될 때, 요즘우리는 그것을 뭐라고 표현합니까? 선교적 제자로의 부르심이라고 표현합니다. 선교지만 선교지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상으로 보냄을 받는그 자리가 선교지입니다. 무슨 직종의 직업을 갖든 그 자리는 여러분들에게 적어도 부름 받은 자리에요. 그리고 뭇 사람들이 그 여러분들이 살아내는 삶의 모습을 보면서 때로는 이해할 수 없어야 해요. 왜 저렇게 살까? 예수쟁이들은 왜 저렇게 갑갑하게 살까? 그런 소리 듣잖아요. 그게 정상이란 말이에요. 기독교는 그런 의미에서 이 땅에 잘 먹고 잘 살도록 호의 호식과 빵을 약속하거나 제공하는 그런 기독교가 아닙니다. 종교는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붙들고 예수를믿고 그 분을 전파하며 산다는 것은 그 보다 더 훨씬 본질의 이야기 이고 우리의 삶 전체를 걸어야 하는 헌신이 결단 되는 요구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또 한 주를 시작하는 여러분들에게 남은 이 가을 한 복판에 여러분 삶의 한 복판에서 오늘도방주를 예비하는 일상으로 나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 일어나세요. 여호와의 유월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