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서 강해(06)
거룩한 산 시온
욜3: 14-21
1.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2.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
3.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시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하리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시리로다
4.
그런즉 너희가 나는 내 성산 시온에 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 것이라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
5.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6.
그러나 애굽은 황무지가 되겠고 에돔은 황무한 들이 되리니 이는 그들이 유다 자손에게 포악을 행하여 무죄한 피를 그 땅에서 흘렸음이니라
7.
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으리라
8.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 당한 것을 갚아 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 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에 거하심이니라있을 것임이니라
(00:00-10:00)
자 오늘은 요엘서 마지막 강해입니다. 여섯 번째로 마쳐지겠는데요. 오늘 내용은 세 가지로 구성이 됩니다. 14절부터 21절까지 내용은 사실상 요엘서의 결론이면서 세 가지 주제로 구분이 되는데 첫 번째는 다시 한번 원론으로 돌아가서 여호와의 심판의 날은 어떤 날인가? 이것을 설명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되지만 우리들에게는 최종적 승리의 날이 됩니다. 승리. 승리를 약속해요.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그 승리의 날에 우리에게 부여되는, 우리에게 공급되는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은 어떤 것일까? 이렇게 3단계에 걸쳐 설명되어질 겁니다. 14절을 보십시다.
1.
사람이 많음이여, 히브리 원문에는 두 번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이 사람이 많다 할 때는 정말 물리적으로 사람이 많은 것을 얘기하지만 그것만을 얘기하는 건 아니에요. 히브리 사람들은 사람이 많다 할 때는 그 사람들이 토해내고 쏟아내는 시끄러운 소리들까지를 포함합니다. 지금 세상이 많이 시끄럽죠. 미국서부터 지금 시끄러워요. 뭐 끌어내겠다는 둥 별별 헛소문과 아집과 고집이 뒤섞인 소문들이 많이 뉴스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케 만들고 또 현실적으로 우리 나라 상황을 보면 국정 감사를 하긴 했는데 어쩜 그렇게 저마다의 렌즈를 가지고 아집과 고집과 편견으로 백성들을 정신 못차리게 하는지. 그런데 그건 들리니까 들을 수밖에 없지만 거기에 집중하지 마시고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소리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해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사람이 많다는 뜻도 되지만 더불어 이 세상에 가득 쏟아지는 가짜 뉴스라든지 우리 가치관을 더럽게 만들고 혼란케 만드는 그런 이야기가 이 표현 속에 담겨 있습니다. 좀 볼까요?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그 소리가 어디에 가득 메워져 있다는 뜻일까요? 우리 지난 주 이 심판의 골짜기를 무슨 골짜기로 이해했죠? 여호사밧의 골짜기. 여호사밧이란 말은 무슨 뜻이라고요?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그래서 이 골짜기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에게는 심판의 골짜기가 되었지만 역대하 20장을 근거로 우리가 살펴봤었죠?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을 가지고 신뢰를 가지고 그분을 송축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브라가의 골짜기가 됐어요. 브라가의 골짜기가 됐어요. 브라가 라는 말은 하나님을 송축하라, 그분을 높이다 이런 뜻이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러면 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졌던 최종적 승리는 총칼로 이겼나요? 세력과 크기와 규모로 이겼나요?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자기들끼리의 좌충우돌을 통해서 그냥 그 전장에 나가서 병사들은 노획물들을 거둬들인 수고 밖에는 없어요. 하나님이 하신 전쟁이었죠. 여호사밧이 하나님의 영을 통해 받은 메시지는 뭐였습니까?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우리 인생이 그렇다는 거죠. 자,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이 말은 사실상 우리 구속 받은 백성들의 최종적 승리를 이 언어 속에 담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요엘서를 오늘 마무리까지 읽다 보면 요엘서에 뜻밖에도 단순히 그 시대에 일어났던 구원 사건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그 시대의 황폐했던 것을 회복하겠다는 약속만이 담긴 것이 아니고, 그 샘플에 해당하는 역사적 신뢰, 사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오고 오는 세대의 그의 백성들에게 어떤 은혜, 어떤 복을 허락하실 것인가를 그 안에 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마치 도토리 안에 큰 상수리 나무가 감춰져 있듯이 이 작은 한 역사의 시점에 벌어졌던 일 속에 거대한 하나님의 플랜과 구속의 마무리가 설명되어있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을 겁니다. 자, 15절 볼까요?
2.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
언제?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이 땅의 광명들이 빛을 잃어버리고 그들에게는 캄캄하고 흑암의 날이 될 거에요. 이 샘플을 우리는 이미 봤죠. 애굽에 430년의 노역의 백성들을 건져 내실 때 열 가지 재앙 중에 온 천지가 흑암에 덮이는 재앙이 있었어요. 캄캄함이 임해요. 그 먼먼 홍해를 건너기 직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기적 속에 이미 이 날을 예고로 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속은 로봇 팔머라는 분이 이렇게 설명을 했어요. 남자분들을 아실 텐데, 총을 쏘면 총이 어떤 물질에 박혀요. 몸에 맞았다 그러면 들어간 자국은 점에 불과해요. 딱 총알 반경 크기밖에 안되는데 뒤로 뚫고 나올 때는 이 구멍이 커요. 이게 돌기 때문에. 그래서 뒤에는 구멍이 크게 나게 되어있습니다. 나선형이라 그러죠. 마치 하나님의 언약은 그렇게 진행이 돼요.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인의 후손이 네 머리를 밟을 것이고. 이 약속은 하나의 씨에 해당하는 원 복음이에요. 구속의 원 복음. 이것이 시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나선형으로 점점 커지고 확대되고 계시록 21장 22장에 가보면 이것이 어마어마한 크기로 바낍니다. 계시록 21장 22절을 한번 볼까요?
1.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잘 보세요. 오늘 요엘서에서는 심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흑암이 임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나중에 그 성은, 이 성이 어떤 성인지 아직 몰라요. 그러나 이 성이 틀림없는 것은 우리가 영원히 거할 산성이에요.
(10:01-20:00)
이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런 세상의 물질적 광명이 무의미해지는 더 밝고 영광스런 빛 아래 우리가 머물 것이란 뜻입니다. 운명이 이렇게 극적으로 바뀌는 거에요. 여호사밧 골짜기에 하나님을 대적하던,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거부하던 무리들에게는 그 골짜기는 해도 달도 빛을 잃어 버리는 캄캄한 심판의 골짜기가 돼요. 애굽 당시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처럼. 그러나 하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 쪽의 선택을 입은 백성들에게는 해나 달도 필요 없는 놀라운 광명이 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성경을 보십시다.
1.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여기 사실 번역이 좀 어색한데,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다 라는 말은 큰 소리를 발하다 라는 말이에요. 아까 14절에서 하나님의 원수 세력이 골짜기에 모여서 무슨 소리를 냈죠? 사람이 많음이여. 큰 소리를 내요. 그런데 이 소리에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겁을 먹고 움츠려 들고 쪼그라들고 낙망하고 좌절하고 공포에 휩싸이는 것이 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연약함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두려워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이걸 그렇게 강조해요. 365번이나. 왜 365번일까요? 1년이 365일이니까. 그 말은 매일 우리가 염려에 붙들려 있고 근심에 붙들려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동시에 매일 걱정마라 두려워 마라. 그 소리를 그 위협을 그 공포를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덮고도 남을 누구의 소리가 발하고 있다는 거죠? 시온에서? 하나님의 소리. 하나님이 큰 소리를 발하심은 천하의 모든 것들도 잠잠하게 되어있어요. 그 하나님의 권능과 전능하심을 믿습니까? 주 목소리 발하시면 천하에 모든 것들이 잠잠하게 되어있어요. 하나님이 시온에서 큰 소리를 내세요. 이 부르짖다 는 말은 하나님께서 큰 소리를 내다 그 뜻인데 16절을 다시 보세요.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시리니 여기 시온과 예루살렘이 나와요.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히 거할 도성을 말하는데 요한 계시록 21장 22절을 다시 보십시다. 구약에서 내내 설명되었던 시온과 예루살렘이 어떤 성을 얘기하는가?
3.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그 성 안에 들어갔는데 마지막에는 성전을 보지 못했어요. 성전 안에 들어갔는데 성전이 안 보여요. 왜?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할렐루야! 그러니까 여기서 시온이니 예루살렘이니 하는 모든 묘사들은 결국 궁극적으로 누가 성전 되심을 설명했던 거죠? 어린 양. 우리가 마지막에는 어린 양 안에 그분과 함께 머물게 된다는 거죠. 이 이야기를 성경 기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16절 하반절에 보시면
하늘과 땅이 진동하리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시리로다
여러분 피난처와 산성의 차이가 좀 있죠. 피난처는 임시적 성격을 말합니다. 산성은 영원한 도성의 영원성을 강조해요.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사실은 영원한 도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인데 그때 그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세요. 그래서 찬송가 70장에 보면 피난처 있으니 환란을 당한 자 이리 오라. 그 피난처가 누구세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세요. 그 피난처의 역할을 하시면서 우리를 영원한 도성, 새 예루살렘, 산성으로 우리를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도성으로 우리를 이끄는 순례길에 우리를 동행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실 때 이 코로나가 언제까지 갈 거냐 없어질 거냐. 지난 주 5부 예배 때인가요? 싱싱한 청년들이 마스크 쓰고 있는 게 속이 상해서 질문해 봤어요. 여러분, 옛날처럼 우리가 마스크 벗고 옆에 다닥다닥 붙어서 함께 찬양하고 예배드릴 날이 올 것 같습니까? 했더니 아니요 그래요. 뭐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이 길에도 코로나를 겪고 사는 이 길에도 하나님이 동행하고 계시다는 걸 놓쳐서는 안됩니다. with COVID를 넘어서 with GOD, with JESUS! 믿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과 함께. 그런데 평생 우리 순례길이 그래요. 많은 청년들이 이런 얘길 해요. 여길 택해야 복이 되겠습니까? 저길 택해야 복이 되겠습니까? 이게 늘 우리 틀이에요. 그런데 그건 틀렸어요. 질문이. 어느 쪽이 되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면 눈으로 황폐한 땅도 옥토가 될 것이고, 눈에 보기 좋은 땅도 최악의 환경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믿습니까? 그러니까 대충 만나서 그냥 결혼을 해요. 여러분들이 복이 되면 되는 겁니다. 요셉 때문에 한 시대가 먹고 살았잖아요. 그 흉년과 기근이 가득했던 시대가 요셉 때문에 먹고 살았잖아요. 자꾸 얘기하면 우린 패밀리라고. 우린 가족이라고. 그러니까 이성으로 안 보이는 거에요. 여기 형제, 자매들이. 뭔 놈의 가족이에요. 제가 그런 소릴 요즘 많이 들어요. 여기 좋은 자매들이 이렇게 많은데 하면 아이, 우린 가족입니다. 제가 화가 나가지고. 내가 언젠가 설교 시간에 얘기하겠다 했어요. 가족 아니에요. 이성으로 보세요. 남자로 보고, 여자로 보시란 말이에요. 그리고 대충을 오해하시면 안돼요. 대강이란 말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복이 되면 먹여 살릴 수 있고 또 먹고 살게 되어있어요. 누구를 만나야.. 이런 걱정 하지 마세요. 이것도 아멘을 안 하면 어떡하자는 거에요? 두 달도 안 남았는데. 나는 안팎으로 속이 타요. 해가 넘어가는 끝 무렵 쯤 되면. 자 그런데 더 중요한 얘길 할 거에요. 16절을 다시 보세요. 피난처가 되고 산성이 되시리로다
(20:01-30:00)
라는 말은 이 땅에 거처는 우리가 피난처잖아요. 그리고 우리 산성을 향해서 걷는 순례자인 우리들에게 주님이 동행하시고 끝까지 완성하여 거기 들이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여러분들이 그 약속에 붙들려 있다는 것을 확신하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복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세요. 믿습니까? 자, 17절 같이 읽읍시다. 시작
1.
그런즉 너희가 나는 내 성산 시온에 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 것이라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택함 받지 못한 백성은 절대 통행할 수 없는 영원한 도성입니다. 이걸 요한 계시록 21장에서 1절부터 한번 보죠.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여기서 큰 음성이 들리죠?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이 말은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요. 이것은 어린 양이 이 땅에 장막을 입고 오신 거에요. 그래서 누구와 함께 머물고 계시죠? 우리와 함께,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것은 장막을 입고 오신 거에요.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1.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4절을 잘 보세요. 제가 오늘 본문 중에 18절을 읽겠습니다.
18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여러분, 싯딤 골짜기는 아카시아 나무로 빼곡한 골짜기입니다. 싯딤은 아카시아 나무에요. 광야 어디서나 만나기 쉬운 잡목들입니다. 볼품없는 나무죠. 지난 주 금요일 번제단을 설명할 때 그 번제단 나무를 무슨 나무로 만들도록 명하셨습니까? 싯딤 나무에요. 아카시아 나무를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위에 놋으로 씌워요. 놋은 심판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떤 모습으로? 아카시아 나무와 같은 우리의 모습으로 심판을 받으셨어요. 내가 받아야 될 심판을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시면
1.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여러분, 시편 84편을 보시면 거기 눈물 골짜기가 나와요.
1.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2.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아멘. 자 이 말씀을 이해해야 우리 성도들이 이 땅의 순례길을 걸으면서 겪었던 눈물 골짜기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5절에 보니까 시온의 대로. 시온의 대로가 어디에 있는 자죠? 마음에 있는 자. 그럼 우선 대로는 누가 왕래하는 길입니까? 우리의 왕이 왕래하는 길이에요. 그런데 그 대로가 우리의 마음에 있대요. 그럼 그게 무슨 뜻이 돼요? 이런 의미가 됩니다. 어떤 경우나 어떤 상황 앞에서도 주께로 나아가는 겸손하고 가난한 성도의 태도를 말합니다. 다시요. 어떤 경우나 어떤 상황 앞에서도 왕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성도들의 가난하고 겸손한 태도를 말하는 거에요. 겸비한 태도. 그 자에게 복이 있대요.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원천의 복을 받은 자만이 그 태도가 가능할 수 있단 얘기죠. 그런데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날 때. 자 여러분 목자들이 가끔 양들을 눈물 골짜기로, 이 눈물 골짜기는 협곡이고 계곡이고 박하의 골짜기라고도 불립니다. 그런데 시편 23편에도 보면 이 골짜기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그랬어요. 그런데 목동들이 목자들이 양떼들을 이런 골짜기로 데리고 가요. 거기가 위험한지 몰라서 그러는게 아니에요. 양들에게 양질의 꼴을 먹일 수 있는 곳이 바로 그런데 있습니다. 음습하고 습기가 많은 곳에 양질의 꼴이 있어요. 그래서 목자들이 각오하고 양들을 끌고 갑니다. 그러면 양들은 두렵고 떨리고 공포스럽죠. 그런데 이때 뜻밖에 꼴보다 더 중요하고 더 놀라운 유익을 경험하게 돼요. 뭔지 아세요? 두 가지 유익이 있는데 첫째, 그 골짜기를 통과하는 기간 때만큼 양과 목자가 밀착되어있는 기간은 없어요. 그 기간만은 양들이 목자와 철저하게 밀착됩니다. 겁이 많으니까 두려우니까. 동시에 또 하나의 유익은 뭐냐 하면 그때 양들은 그 동안 몸 안에 축적되었던 영양분들이 근육으로 바뀌어요. 그 협곡과 계곡을 지나면서 근육으로 바뀌는 거에요. 두 가지 유익이 발생하는 겁니다. 우리도 돌아보면 야 그때 어떻게 지나왔나, 어떻게 겪어냈나. 그런데 그때 가장 내가 하나님 앞에 한 호흡이라도 더 나와서 부르짖고 간구했던 시간들이었잖아요. 그 곤고함 때문에,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시간을 지날 때, 돌아보면 그때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밀착되어 있었는가? 주 밖에 답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고백했잖아요. 그 기간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1.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무슨 얘기에요? 그때만큼 하나님께로부터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풍성히 경험한 기간이 없게 된다 그 말이에요. 자, 다시 오늘 본문으로 눈을 돌려서 19절 아주 중요합니다. 어쩌면 결론 같은 본문인데 같이 읽겠습니다.
1.
그러나 애굽은 황무지가 되겠고 에돔은 황무한 들이 되리니 이는 그들이 유다 자손에게 포악을 행하여 무죄한 피를 그 땅에서 흘렸음이니라
네, 여기 두 족속이 등장하죠. 애굽과 에돔이 등장해요. 애굽은 여기 왜 등장할까요? 이 시대적 시간과는 거리가 있는 나라인데 여기 애굽이 소환되어 등장을 하고 또 에돔이 등장을 해요. 도대체 이 두 종족이 요엘서를 마름하면서
(30:01-37:32)
왜 결론 부분에 소개가 될까? 그래서 이 두 종족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제대로 된 결론을 도출할 수가 없죠. 우리 이사야서 30장을 같이 보십시다.
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죄에 죄를 더하도다
2.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
무슨 얘기냐 하면 성경에서 애굽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와 이스라엘인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의존하고 싶었던 지정학적 나라에요. 기억 나세요?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서 왕이 됐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뭐죠? 애굽의 바로의 공주를 정식 아내로 데려다 놓은 일입니다. 그게 솔로몬 통치의 첫 번째 일이에요. 그러면 그 당시에 나라와 나라간의 결혼은 사랑과 애정이 기초한 결혼입니까? 정략적 결혼입니까? 정치적 결혼이에요. 그러면 솔로몬의 의도 속에는 나라의 안보와 안위를 적어도 하나님께 신뢰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하겠다는 복선을 깐 거에요. 그러면 이방 여인이 어쨌든 다른 나라로 시집을 올 때는 몸만 옵니까? 그 나라가 섬겼던 신을 같이 데리고 와요. 그래서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본격적으로 혼합종교가 됩니다. 나중에 열왕기상 저 후반부에 가면 나라 꼴이 어떻게 돼요? 하나님의 성전 안에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우상 숭배가 준비되고 차려져요. 나라 꼴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애굽은 우리 성도들에게 오늘도 매우 중요하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어요.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자꾸 규모, 크기. 자기가 사회적으로 가지고 있는 백그라운드를 의존해서, 통장의 잔고를 의존해서 인생을 든든하다 아니다 를 가늠하는 이런 사고에 얼마나 많이 젖어있습니까? 그것들이 우리를 안위하고 붙들어주는 게 아니라고요. 그런 사고방식들이 결국 뭐를 의지하는 거에요? 애굽을 의지하는 거에요. 애굽을. 또 에돔은 여기 왜 불려나옵니까? 에돔은 왜 불려 나오죠? 여러분, 창세기를 한번 보십시다.
1.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어라, 에돔이 누구의 후손이에요? 에서. 에서는 누구의 형입니까? 야곱의 형 아니에요. 이 둘이 전 성경의 역사를 통해서 중요한 실체적 사건 하나를 남겼죠? 자, 우리 히브리서를 한번 볼까요? 이런 얘기가 있어요.
1.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2.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여기 망령되다 라는 말은 뭐 노망이 걸렸다 이런 의미가 아니라 망령되다 라는 말은 자기 영혼을 경홀히 여긴 자란 뜻입니다. 자기 영혼을 경홀히 여긴 자. 에서는 그래서 이 이후에 끊임없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 한 켠에 남아있는 육체적 모습으로 등장을 해요. 여러분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서 광야에 딱 첫 발을 디뎠을 때 제일 먼저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백성을 가로 막았던 백성이 누굽니까? 아말렉이에요.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이에요. 에서. 얼마나 그러니까 이 아말렉은 뭘 얘기하냐 하면 구원받은, 홍해를 건너 구원받은 백성에게 부딪히는 육의 싸움이에요. 어떤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 내 안에 여전히 끈질기게 뿌리를 내리고 남아있는 옛 사람의 희미한 그림자에요. 그래서 이 에돔과 애굽이 여기 등장을 하는 겁니다. 사울 왕이 처음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이 뭐였습니까? 아말렉을 진멸하라. 그런데 어떻게 진멸하도록 되어있습니까? 남녀 소아 젖먹이까지. 이건 윤리적 잣대로 들이댈 것이 아니고 철저히 그 뿌리를 뽑아라 그 말이에요. 나중에 아말렉이 무슨 짓을 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군을 하는데 뒤에 쳐져 있는, 지쳐있는 자들을 계속 공격을 하죠. 신명기서에 보면. 그게 아말렉의 실체입니다. 아말렉은 우리가 천성 문에 이를 때까지 그 전쟁은 한번에 끝나질 않아요. 그래서 그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불어 완전히 진멸하고 승리를 했지만 출애굽기 17장 16절을 어떻게 끝이 납니까? 여호와께서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라. 그 전쟁을 하나님이 안 끝내요. 그걸 거역한 게 사울이에요. 육체의 싸움을 멈춘 거에요. 순종하지 않은 거에요. 우리도 여전히 이 싸움이 이번 한 주도 진행 될 것이고, 영원한 산성에 이를 때까지 이 싸움은 진행 될 거에요. 그때마다 누구를 피난처로 삼아야 됩니까? 우리의 영원한 도성인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가 또 한 주도 남은 순례 길에도 여러분들의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