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책이름(시리즈 분류)
요한복음
Date
날짜
20190317
성경구절
요 3:1-5
시리즈 순서
요한복음(11)
종류(주일, 새벽 등)
주일낮
1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00:00-10:00)
이제 우리는 오늘 요한복음 3장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주제가 되는 인물은 익숙하게 잘 알려진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라는 이름 뜻은 정복자라는 뜻이에요. 조금 캐릭터하고는 안 어울리는 느낌이 들죠? 그 이유를 중간에 초두에 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자, 그런데 우리가 항상 어떤 성경 또 어떤 말씀을 듣던지 간에 은혜를 방해하는 몇 가지 요인이 있는데 그 중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가 기존에 듣고 있던 익숙한 선입관입니다. 항상 말씀 앞에서는 전하는 자도 그렇고 말씀을 청종하는 자도 그렇고 늘 오늘 이 말씀이 피차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음성으로 들려오는가 그 관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자 니고데모에 대해서는 우리가 많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의 최고의 지성 그리고 진리에 목이 마르고 영적으로 허기를 채울 길이 없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 밤중 예수님을 찾았던 인물. 이 정도로 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이 전제마저도 내려놓고 오늘 우리는 니고데모라는 인물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해석에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에 그 인물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성경에 남아져 있어요. 2장 23절을 좀 볼까요? 2장 23절. 때는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이면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큰 명절이에요. 명절이기도 하고. 유월절에 예수께서. 유월절을 상징하는 가장 핵심 가치는 희생의 제물로 쓰여지는 어린 양입니다. 어린 양의 죽음이 유월절의 주제이기도 한데 사실상 출애굽기 12장에서 그 어린 양의 죽음은 누구를 예표 한 그림이었어요? 장차 어린 양으로 세상의 죄 짐을 지기 위해서 오실 예수를 예표 하는 그림이었다면. 유월절과 예수는 썩 어울리는 배치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예루살렘에 계세요.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뭘 봤습니까?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다. 뭐 한 단어 한 단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표적이라는 단어도 중요하고 믿었다 라는 단어 또한 못지않게 중요한데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한 바는 표적도, 믿었다 가 아닙니다. ‘보고 믿었다’ 라는 거죠. 보고 믿었다. 자, 그런데 이 보고 믿은 유대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예수님이 어떻게 평가하고 계신가를 바로 확인 할 수가 있어요. 24절 같이 읽습니다. 시작
24 예수께서 그의 몸을 그들에게 부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이 말만 읽고서는 뭘 얘기하는 건지 잘 이해가 안 되죠. 선뜻? 이런 뜻입니다. 24절을 다시 보시면 눈으로 보세요. 예수는 그의 몸을 그의 남은 시간을 의탁하지 아니하셨다. 그 사람들에게. 여기 의탁이라는 말이 피스튜오 라는 헬라 말을 썼는데 이게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뭐를? 그들의 믿음을. 그들은 뭘 보고 믿었죠?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은 그 믿음을 예수님은 믿지 않았다. 여기 믿음도 피스튜오 똑 같은 단어를 썼어요. 23절에서도 피스튜오. 믿음이란 단어를 썼고 24절에서도 피스튜오 의탁이라고 의역을 했는데 이런 뜻입니다. 풀어 놓자면 유대인들이 표적을 보고 예수 이름을 믿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고 맡길 정도로 믿지 않았다 그 말이에요. 그들의 믿음을 믿지 않았다 그 말이에요. 그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죠? 보고 믿은 믿음이에요. 그리곤 24절 끝에 이런 설명을 덧붙여 놨어요.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어떻게 하심이요? 아심이요. 그들의 믿음의 레벨과 믿음의 상태를 정확히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그 말이에요. 이것은 상당히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이 긍정적인 이해를 가지고 계셨다는 말이 됩니까? 부정적인 이해를 갖고 계셨다는 말이 됩니까? 예, 부정정직 이해를 갖고 계셨다는 말이 돼요.
자, 그리고 나서 오늘 니고데모 이야기가 등장을 하는 거에요. 3장으로 넘어가 보십시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자, 여러분 그런데 라는 말은 앞의 어떤 이런 기록들과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인물과 이야기들이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일까요? 전혀 별개의 이야기란 말일까요? 연관이 있다는 얘기에요. 자,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이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성경에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소개되거나 등장을 하지만 원래 시작이 그렇지 않았어요. 이 사람들은 굉장히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교가 종교에 색깔을 칠하고 너무 썩고 타락하니까 개중에 일부가 우리가 이렇게 동일하게 살아서는 안되겠다. 우리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붙들고 지키자 해서 초 경건주의자들이 스스로 구분을 한 거에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라는 말은 파리새 란 말은 분리하다 이 뜻이에요. 그러니까 출발과 동기는 굉장히 좋게 시작을 했는데 너무 율법주의로 가다 보니까 그것이 더 종교화 된 아이러니가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가장 준엄히 꾸짖음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죠. 자, 그런 뜻입니다. 그런 바리새인 중에 누가 있어요?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뭐랍니까? 지도자. 지도자. 그런데 그 해설에 관계되는 foot note에 보면 지도자라는 설명을 또 다른 말로 뭐라고도 할 수 있다고 설명해 놨어요? 공회원. 산헤드린 공회원. 산헤드린이라는 말은 입법, 사법, 행정권이 총체적으로 집약되어있는 최고의 유대 권력기관입니다. 여기에서 백성들의 생사 여탈권이 달려있고, 굉장히 권력의 정점에 가있는 사람들이에요. 자, 그 중의 한 사람이에요. 게다가 그 이름이 니고데모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는요 오늘날이야 이름이 굉장히 다양하고 많았지만 많지만 이 때는 이름이 몇 개 없었어요. 그냥 쓰던 이름 가지고 자꾸 돌려 막기 했어요. 아버지 이름 따다가 그냥 똑같이 쓰고 그런게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비슷하고 유사한 이름들이 많이 나오죠? 시몬 또 야고보, 유다. 이런 이름들은 굉장히 이중 삼중으로 마리아, 예수라는 이름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돌멩이들처럼 많았고. 그러니까 오늘 날처럼 이름의 종류가 다양하던 시대가 아니에요. 그런데 이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문헌에도 찾기 힘들 정도로 특이하고 이상한 이름이에요. 그런데 이 이름 뜻이 뭐라고요? 정복자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최근에 가장 뜨거운 신학자 중의 한 분이죠. 2년 전 우리 교회에도 왔던 Richard bauckham이라는 분이 이 이름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연구를 한 끝에 하나 밝혀낸 게 이 사람이 구레온 가문의 혈통으로 밝혀 졌어요. 그러면 또 구레온 가문이 어떤 집안이냐 그걸 알아야겠죠? 조사를 해보니까 하스모니안 시대에 전쟁의 영웅의 가문이에요. 이제 이 이름 뜻이 이해가 되죠? 그래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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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라는 이름은 정복자라는 뜻입니다. 굉장한 집안의 혈통이에요. 유대의 지도자라고 칭하는 것이 굉장히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사실상 니고데모는 여기에서 뭐로 등장하냐 하면 유대인의 대표자로 등장하는 거에요. 유대의 대표자. 돈과 명예와 권력이 함께 총체적으로 모아져 있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유대교를 가장 함축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그리고 상징적인 인물이 니고데모에요.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온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의 표현을 좀 한번 원문 그대로 살려 보십시다. 2절
2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자, 여러분 이 2절에 니고데모의 예수에 대한 좀 과장스러울 정도의 극찬의 표현으로 봐서 우리는 속아요. 얼핏 예수님에게 굉장히 호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온 듯싶다 해서 우리가 앞서 설명을 드렸던 것처럼 니고데모에 대한 이 방문에 오해를 갖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1세기 때는 특별히 유대 사회는 그 당시 사회 통념상, 이런 과찬에 가까운 인사말은 이럴 때 쓰는 겁니다. 뭔가 논쟁에 대한 포화를 열 때, 논쟁을 불붙이기 위해서 논쟁에 대한 포문을 열 때 상대방을 잔뜩 치켜세우는 과한 인사법이 사회적 통념이에요. 이런 거죠. 당신이 이렇게 이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한번 붙어 보자 그 말이에요.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니까 우리가 기본적으로 지금까지 들어왔던 니고데모의 캐릭터는 어라, 이게 달라요. 자, 이거 너무 성경을 비비 꼬는 거 아닙니까? 과연 그럴까? 자 성경을 보자고요. 2절을 다시 보시면 그의 극찬 중에 이런 표현이 있어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다. 어, 그러면 한 가지 그 과찬의 인사말 속에 감춰진 표현을 통해서 한 가지 드러난 게 있죠. 니고데모도 결국은 예수님을 찾아 온 동기가 뭡니까? 표적을 보고 찾아 온 거에요. 맞죠? 그런데 앞서 우리가 연결 고리에 해당하는 본문을 봤어요. 당시 유대 사람들이 뭘 보고 믿었다고요? 표적을 보고 믿었다고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표적을 보고 믿은 믿음, 피스튜오 이 믿음을 인정 했다 안 했다? 믿지 않았다 그 말이에요. 의탁하지 않았다 그 말이에요. 그럼 그 속에도 사실상 누구도 포함 된 얘깁니까? 니고데모도 포함된 얘기에요. 니고데모도 그런 유대의 백성들의 믿음의 상태를 대표격으로 지금 와서 그 당시에 가장 hot한 issue꺼리인 예수님에 대해서 논쟁의 포문을 연겁니다. 무슨 진리에 목이 마르고 영적으로 허기가 져서 좀 더 예수님을 알고 싶어서 찾아온 그렇게 nice한 상태가 아니에요. 볼까요? 마저 봅시다. 3절
3예수께서 그런 과찬의 인사를 들었다 합시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뉘앙스 어떻게 들리세요? 이것은 굉장히 직설 화법이에요. 그리고 냉담하고 cynical한 태도입니다. 싸늘한 반응이에요. 그러니까 니고데모의 의도를 예수님은 정확히 간파해 낸 거죠. 네가 한 판 하러 왔구나. 과찬의 인사를 하는 걸로 봐서 상대방을 잔뜩 띄워 놓고 그래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가 보자. 교회도 보면 처음에 딱 들어올 때 딱 팔짱 끼고 오늘 목사 무슨 얘기하나 한번 들어보자. 이러고 신앙 생활 시작한 사람들 의외로 많아요.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몇 달 지나면 이 팔이 자기도 모르게 풀어져요. 그러다 또 1년 넘어가면 이제 고개가 앞으로 쭈욱 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 어느 날 펑펑 십자가를 만나면서 인생이 고꾸라지는 거죠. 이게 긴 숨이 필요할거에요. 사실상 니고데모는 진리에 목이 마른 것도 아니고 영적으로 허기가 져서 좀 더 예수님을 알고자 찾아 온 상태가 아니에요. 예수님은 냉엄하게 네가 아직 눈도 안 떴구나 거듭나야 하겠다. 그런데 이 말귀마저도 니고데모는 알아 들었다? 못 알아들었다? 전혀 못 알아들었어요. 여러분, 사람이 영적으로 스스로 분발하여 진리를 찾고자 할 만큼 괜찮은 존재가 아니라니까요. 인간이 그렇게 괜찮은 존재가 아니에요. 구원은 1도 아니 0.1%도 사람에게 근거나 조건이 있지 않아요. 여러분 요한복음 3장 다음에 뭐가 나오죠? 4장이 나오잖아요. 잠 깨시라고. 4장 다음, 4장의 중요한 주제가 뭡니까?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이에요. 그 여인은 예수님이 찾아 갑니까? 여인이 옵니까? 예수님이 찾아 가세요. 구원은 그런 거에요. 니고데모가 여기에 구원이 궁금하고 영적으로 목이 말라서 온 게 아니에요. 요즘 당신이 제일 대단하고 hot한 선생이라는데 한번 좀 그래 붙어 봅시다. 논쟁의 포문을 연겁니다. 아, 참 그냥 지나칠 뻔 했는데 니고데모가 찾아 온 시간이 언제죠? 밤중이에요. 왜 요한은 이 밤중이라는 시간을 그렇게 밝혔을까요? 아침이면 어떻고 대낮이면 어때요? 그런데 요한의 필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쓰는 시간의 용매가 있어요. 요한복음 13장을 띄워주세요.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13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그대로 띄워 주십시오. 이 장면은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배반의 떡을 뗀 이후에 스승의 등에 비수를 꽂기 위해서 유다가 나가는 장면입니다. 그 때 요한은 이 장면을 정확하게 뭐라고 기술을 하고 있는가 하면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라 이렇게 끝내도 설명이 안되나요? 문장이 안되나요? 그런데 뭘 밝히죠? 밤이러라. 이걸 문예적 이야기 방식이라고 합니다. 밤이라는 시간의 장치를 통해서 이제 점점 마지막 종말의 시간이, 어둠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요한은 이렇게 설명하는 거에요. 그런데 니고데모가 언제 찾아왔다고요? 밤에 찾아왔어요. 많은 사람들은 사회적 신분 때문에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밤에 왔다고 얘기합니다. 뭐 만의 하나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 밤에 왔다는 뜻은 첫째는 니고데모의 영적인 깜깜한 상태를 설명하는 겁니다. 그리고 요한이 1장에서 이미 뭐라고 선포를 했죠? 빛이 어두움을 비추되 깨닫지 못하니라 어둠의 상태를 설명하는 거에요. 세상이 얼마나 영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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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하고 깨닫지 못한 상태요. 그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배척하고 대척했는가를 밤이라는 물리적 시간을 통해서 암시하고 있는 겁니다. 유월절 얘기가 나왔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 구원해 내기 위해서 완고하게 고집을 꺾지 않던 바로에게 마지막 경고를 했어요. 듣지 않았죠? 그래서 결국은 심판 직전에 어린 양의 희생을 통해서 피가 발라진 이스라엘 백성들만은 사망의 그림자가 Pass over 되요. 지나가요. 그리고 온 애굽 천지에 초태생이 죽는 끔찍한 심판을 통해서 큰 통곡의 소리가 애굽을 덥습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밤이에요. 밤이에요. 여러분. 그래서 요한은 이 밤이라는 물리적 시기를 통해서, 때를 통해서 영적인 어두움을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밤에 찾아오는 인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무슨 사람의 눈을 피해? 이건 아니에요. 그만큼 지금 니고데모는 영적으로 깜깜한 상태에 있었단 말이죠. 자, 성결을 또 볼까요? 3절
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어떡할 수 없느니라? 볼 수 없느니라
자, 앞을 보십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렇게 돼있어요. 누가 하신 말씀이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그런데 똑같은 얘기를 예수님이 다른 곳에서는 다르게 표현하셨어요. 5절을 시선을 돌려 보십시다. 5절 다같이 시작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자, 앞을 보세요. 5절에서는 볼 수 없다고 돼있습니까? 들어갈 수 없다고 돼있습니까? 둘 다 어느 나라를 설명한 거죠? 하나님의 나라를. 그런데 3절에서는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나지 않으면 볼 수 없느니라. 5절에서는 불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렇다면 적어도 이것은 다른 나라를 설명하는데 쓰여진 표현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는데 쓰여진 다른 표현이에요. 3절에서는 볼 수 없느니라. 5절에서는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러면 예수님의 어법에, 인식은 보다 와 들어간다는 것을 다르게 봤습니까? 같은 개념으로 이해했습니까? 그렇죠. 예수님의 어법과 개념은 바르게 봐야 어떻게 된단 얘기에요? 들어갈 수 있단 얘기에요. 그런데 아까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고 믿었더라?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더라.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은 인정했다? 안 했다? 안 했다. 그러면 그 봄이 제대로 본 거에요? 틀리게 본 거에요? 틀리게 본거죠. 잘못 본거죠. 여러분 문제는 이런 영적인 상태가 교회 안에 많다니까요. 자기는 확신도 있고 보기도 했고 믿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평가는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어디에 아직 머물러 있는 겁니까? 종교. 정말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는가에 대한 그 구속의 의미가 안 들어와 있는거에요. 가슴이 한 번도 맞닿아진 적이 없는 거에요. 얼마든지 그게 가능하다니까요. 그들은 보고 믿었다는데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앞에 놓고도 이 분이 어떤 분인지? 이 분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았다? 몰랐다? 전혀 모르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뭘 보고 있는 것이며, 그들이 믿었다는 믿음은 도대체 뭘 믿는 겁니까? 이런 진리의 상태가 교회 안에 많다니까요. 오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아직도 종교적인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유대인들이 자기네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적임자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어요. 꿈에도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아닐 거라고 상상에 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평가는 이스라엘 최고의 지성, 유대를 대표하는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했더니 이것마저도 잘못 알아들었어요. 아니 내가 지금 어른인데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겠습니까? 이걸 시간적 개념으로 이해를 했어요. 이 아노덴 이라는 헬라 말은 장소적 개념이에요. 위로부터 거듭나지 않으면,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시각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런 얘길 합니다. 5절 다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시작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무엇과 무엇으로 나지 아니하면? 예. 여기 전치사가 에크 라는 전치사가 하나로 돼있어요. 하나라는 말은 물과 성령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성령을 뭐로 설명한 겁니까? 물로 설명한 거에요. 이 원문을 한번 보십시다. 에스겔서 36장을 띄워 주세요.
25 맑은 물을 물 나오죠.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어떻게 하게 하되? 네, 물의 기능은 씻고 깨끗케 하고 정결하게 하는 거에요.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어떻게 할 것이며? 정결하게 할 것이며 물의 기능을 얘기하는 거에요. 그리고 다음 절
26또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절 다같이 시작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해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행할지라
여기 장차 오실 새 영, 성령을 얘기하는 거에요. 이 성령의 역할이 뭐냐 하면 씻는 역할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세례 요한이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다. 나는 물로 씻어서 예식을 할 뿐이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너희들을 씻어주실 것이다. 깨끗케 하실 것이다. 물과 성령은 별개의 기능으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그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의 얼룩진 눈을 씻고 심령을 거둬내서 맑게 해야 우리가 뭘 볼 수 있다는? 참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거에요. 물과 성령. 그런데 이 물과 성령의 성격이 어떤 성격인가? 넘어가서 8절을 보십시다. 8절 다같이 시작.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여기 가장 중요한 단어가 뭐냐 하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다. 구원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그런 얘길 합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었던 표현인데, 어디서 들었죠? 가나 혼인 잔치에서 연회장이 물로 된 포도주 맛을 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더라. 기억 나요? 안 나요? 나셔야 합니다. 그때 제가 이미 이 어디서 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예고했었어요. 자, 여러분 우리는 기껏 구원을 설명 어떻게 하냐 하면 존재론적 방식으로 밖에 설명 못합니다. 여러분 여기 지금 컵이 있죠? 컵이 있다는 것은 이걸 만든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이게 존재론적 설명 방식이에요. 그렇다고 이게 설명이 되는 겁니까? 논리적인 설득은 되지만 이게 근본적인 설명과 이해의 기초는 아니에요. 사실은 구원이라는 것은 어디서 와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른다는 말은 그 주체가 인간에게 기초가 있지 않다는 얘기에요. 그 주권과 주체가 하나님이 홀로 하시는 역사라는 걸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하는 거죠. 2년 전 저 목동의 어느 영화관에서 우리 장로님들하고 시사회에 참석한 적이 있어요.
(30:01-36:50)
그 때 상영되었던 영화가 ‘예수는 역사다’ 라는 영화입니다. 괜찮은 영화에요. 별 기대 없이 봤는데 기대 이상이었어요. 종교 영화 제가 쫓아다니면서 보지 않는데 그 때는 어쩔 수 없이 그냥 보게 된 경우였습니다. 장로님들 모시고 가서 봤는데 스토리는 간단해요 예일 대학을 나온, 실화입니다. 실화. 이 스토리 자체가. 신문 기자인데 14년 차 기자에요. 베테랑이죠. 게다가 법률 전문 기자에요. 아주 똑똑하고 이성주의자이고. 어느 날 어린 딸과 함께 아내를 데리고 파티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동행했던 어린 딸이 경기를 일으키고 뒤집어지는 거에요. 큰 일 났어요. 골든 타임을 놓치면 아기의 생명은 끝나게 생겼어요. 그 때 퉁퉁한 흑인 어느 여성이 다가와서 의료 자격을 갖고 있는 분인데 그 아기의 목에 캔디가 걸려 있는 걸 발견하고 엎어서 뺍니다. 자칫 했으면 숨이 끊어질 뻔 했어요. 그러면서 아기의 숨결이 돌아오고 끝에 그 흑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자기가 오늘 이 파티에 참석할 계획이 아니었다는 거죠. 그런데 갈 곳의 계획이 무산되면서 자기 스케줄이 이 쪽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살리려고 내 계획을 취소시키고 여기에 나를 인도하셨네요.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이 한 마디에 애기 엄마는 완전히 인생이 뒤집어 져요. 신이 존재하시는구나. 그래서 기독교에 귀의해서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고 빠집니다. 그런데 그 상황이 이 남자는 못마땅한 거에요. 자꾸 다툼이 시작이 되고 갈등이 벌어져요. 그러면서 남자는 바깥으로 겉돌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러다간 가정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겠다 싶어서 남자가 결심을 하고 이놈의 기독교의 허구를 내가 깬다. 우선 부활의 허구성부터 깨자 하고 전 세계 도서관, 모든 고증 자료를 찾아서 헤매고 돌아다닙니다. 아주 똑똑한 양반이에요. 지금도 모 교회에서 교육 목사로 미국의 큰 대형 교회에서 섬기고 있는데 그 분의 시각. 그러다가 이 분이 몸도 지치고 회사도 엉망이 되고 가족들과 점점 멀어지고 인생의 깊은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진 듯한 느낌을 가지면서 늦은 저녁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이렇게 얘기해요. 여보 내가 당신에게 고백할 게 하나 있어. 아내는 놀래서 마주 앉아요. 무슨 일인데요? 무언지는 모르겠는데. 이 말이 중요해요. 무언지는 모르겠는데 하나님이 계신 것 같아. 좋아요 하나님, 당신이 이겼어요. 막 욕을 합니다. 저는 거기서 그가 항복했다는 게 감동스러운 게 아니라, 그 이성적이고 변증적이고 논리적인 똑똑한 사람이 입에서 가장 비논리적인 고백을 해요.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좋아요 하나님, 당신이 이겼습니다. 항복을 하지요. 구원의 역사는 그런 거에요. 설명할 수 없는 거에요. 바람이 임의로 불듯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하나님이 홀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 분만이 아시는 역사입니다. 믿습니까?
오늘도 이 자리에는 그런 유사한 많은 방황의 길에 아직도 들어서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어요. 더 헤매시기 바랍니다. 더 돌아다니시기 바랍니다. 결국 조금 더 살아보니까 인생은 두 가지가 있더라고요. 말로 할 때 오는 사람하고 한 대 얻어맞고 오는 사람 차이 그 차이밖에는 없어요. 어느 쪽이 지혜로운 것 같아요? 대답이 필요 없죠? 결국 예수님은 여기서 뭐라고 뭐로 대답하십니까? 그래서 내가 죽으러 왔다는 거에요. 이 깜깜한 밤을 만난 니고데모 같은 인생들을 위해서 3장 14절에 보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한복음의 들려야 한다는 말은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을 얘기해요. 내가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러 왔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
믿습니까? 오늘도 끊임없이 여러분들을 향한 손 내미시고 기다리시는 늘 성령으로 우리 마음속에 찾아오시는 주님의 손 내미심 앞에, 초대 앞에 거절하지 마시고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이 주님의 허기와 목마름으로 채워지는 또 한 주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 일어나십시다. 허무한 시절 지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