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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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요한복음 강해를 본격적으로 시작을 하겠습니다. 우선 요한복음 강해는 태초라는말로 시작이 되요. 이 태초라는 말이 어디에 또 나오냐 하면 창세기를 한번 띄워주실까요? 창세기. 태초에. 한번같이 읽읍시다. 시작.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 태초가 나오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참 이 본문 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주권이 이 안에 담아져 있습니다. 자 그런데 창세기 1장1절의 태초와 오늘 우리가 이제 만나야 될 요한복음 1장1절의 태초는 번역은 같은 태초로 번역이 됐는데 의미 자체가 틀립니다.우선 이 아르케라는 태초라는 말은 창세기에는 물리적인 시간의 시작을 얘기합니다. 말하자면이 우주 만물이 창조된 그때부터, 태초에. 물리적인 시간을얘기한다면 요한복음 1장 1절의 아르케라는 태초라는 말은물리적인 시간이 아니고 물리적인 시간 이전의 어떤 존재의 원을 얘기합니다. 어느 게 근본적인 태초일까요? 요한복음 1장 1절의태초가 더 근본적인 태초입니다. 이것은 시간의 길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 격이 달라요. 요한복음 1장1절은물리적인시간의 시작을 말한다면, 창세기 1장 1절은.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어떤 존재의 기원을 설명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오늘본문으로 다시 가서 태초에 뭐가 계셨어요? 말씀이 계시니라. 이말씀이라는 말은 헬라 말에는 로고스라고 표현되어 있죠? 우선 이 로고스라는 말은 많이들 들으셨어요. 그래서 그렇게 낯설지 않은 표현인데 이 로고스라는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거같아요. 우선 이 로고스라는 말은 제가 요한복음 강해를 준비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 단순한 이해에서헬라 시대에 헬라 철학의 배경을 담은 표현이나 단어가 아니겠는가? 정도로 이해를 했었습니다. 그런 의미가 전혀 없는 게 아닌데 깜짝 놀랍게도 이 로고스라는 개념은 유대의 구약의 배경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알게됐습니다. 여기에 지금 말씀이 로고스에요. 근데 어떻게이 로고스가 구약의 배경을 안고 있을까? 그 몇 가지 증거를 여러분들과 설명 하면서 나누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 첫 번째, 여러분하나님이 무엇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죠?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두 번째, 두 번째, 그런데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타락함으로 사망아래에 놓이게 되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할 계획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그들을구원하셨습니까/ 언약과 말씀이에요. 언약 이콜 말씀이라고할 수 있는데 언약과 말씀이에요. 자 그러면 하나님은 놀랍게도 구약에서 말씀으로 창조도 하시고 그 말씀으로뭣도 하셨어요? 재창조인 우리를 다시 만드시는 구원의 역사를 언약하시고 이루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약에 담아진 중요한 로고스의 개념이에요, 말씀의 개념이에요. 그런데 더더욱 이것을 증명 할 수 있는 문헌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유대 중간기에 보면 많은 문학들이 생성이 되고문학이 개념을 통해서 많은 표현들이 다듬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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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회당이나 유대문학에 보면 자주 사용했던 표현 하나가 멤나라는 표현이 있어요. 멤나. 멤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바로 로고스라는 뜻입니다. 말씀이라는뜻이에요. 그런데 이 멤나를 유대문학 속에서 유대사람들이 인식하거나 사용할 때는 어떤 때 이 개념을도입하냐 하면 신의 행위나 창조의 행위를 말할 때. 이 멤나, 로고스라는표현을 씁니다. 자 이런 것으로 보아서 요한이 채용한 이 말씀 즉 로고스라는 표현은 놀랍게도 단순히헬라 시대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 아니라 그 첫 번째 배경이 구약적 배경을 즉 구약성경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데 인식을 해야 되요. 두 번째, 크게 두 번째입니다. 그러면헬라적 배경은 전혀 없는 거냐? 아니요. 헬라적 배경도 분명히있어요. 지금부터 두 번째는 헬라적 배경을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헬라시대에는 스콜라철학, 플라톤의 철학 이런 철학들이 주류를 이루어서 그 헬라 시대를 살았던 즉 이 성경이쓰여지던 그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이 로고스라는 개념이 잘 이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이 당시의 사람들이 로고스를 이해할 때는 어떻게 이해했는가? 자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설명은 헬라 시대에살았던 사람들의 로고스에 대한 이해를 설명드리는 겁니다. 이렇습니다.이 개념은 합리적인 생각과 그 생각이 외적인 표현으로써 나갈 때 뭘로 나갑니까? 말로 나갑니다. 어떤 합리적인 생각이든지 그 생각이 머릿속에 의미나 내용들이 가치관들이 외적으로 표현될 때 무슨 수단을 쓰죠? 언어. 말이라는 수단을 써요. 이걸로고스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이렇게 또 한 그 개념을 확대 발전시켜왔어요. 우리 인간이 이 우주의 모든 이치를 이해할 수 잇는 것은 이 로고스의 씨가,씨가. 즉 로고스가 우리 속에 있어서 그 지식을 갖게 된 것이다. 그노시스라고 그러죠. 그래서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구원을 얻으려면그 지식, 그노시스가 있어야 된다. 그래서 이들이 아주 위험한신학을 만들어내죠. 즉, 그 지식이 있어야 구원이 이루어진다. 이게 소위 영지주의자들이 이 개념을 토대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이 뿌리가 오늘날에도 있어요. 믿음이라는 것은 지식을 깨닫는 것이다.이거는 굉장히 위험한 사상이죠? 이단이 되기까지 이런 사상적 경로를 거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걸 뭐라고 그랬다고요? 로고스라고 그랬다고요. 로고스. 자 그러면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그런 로고스라는 언어를 채용하게 되었을까? 자 이 로고스라는 단어의 형식을 채용해서 요한은 거기에다가구약의 로고스의 내용을 담은 겁니다. 그래서 구약의 로고스라는 내용을 담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구약의 로고스가 결국은 성취되어서 누구로 오셨기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오늘 1장 1절상반절에 보면 태초에 로고스가 창조되었다 만들어졌다라고 되지 않고 인격으로 소개를 했습니다. 계시니라. 이렇게 소개를 한 거에요. 그러면 이 계시니라 는 말은 미완료 형태를썼어요. 미완료라는 말은 아직 덜된 존재다 그런 의미가 더더욱 아니고 이 말은 시간을 초월해서 그분은언제나 계셨다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물리적인 시간을 초월한 그 이전에서부터 이 로고스, 말씀은계셨다. 정리를 하자면 복잡하게 설명을 했지만 간단히 이해를 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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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로고스의 개념을 신약의 헬라 시대의 로고스의 형태에다가 어떻게 한 겁니까? 집어넣은겁니다. 그래서 이 분이 누구에요?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이 분이 태초에서부터 계셨다. 이 태초는 시간의 시작의 태초를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이전부터 계셨다. 제가 이것을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설명하는 이유가 있어요. 바로 요한복음 1장 1절, 2절에서 우리가 그토록 난해하게 이해를 제대로 잘 하지 못하고 있는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이 여기서 만들어지기때문에 그래요. 성경에는 당연히 삼위일체라는 표현은 없어요. 어디에도. 그런데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개념이 바로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의미로 등장을 합니다. 다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태초는 물리적 시간의 이전에 기원을 얘기하는 것이다. 신적 기원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말씀이라는 것은 구약의 로고스라는 내용을 신약시대의 로고스라는 형식에 담아서 누구를 설명하고싶었던 거죠?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그분이 창조되었다, 만들어졌다, 시작되었다 이런 표현을 쓰지 않고 계시니라. 미래완료형 문법을 썼다 그 말이에요. 그 다음에 하반절을 한번 볼까요? 이 말씀이. 이 말씀이. 자하나하나 이제 뜯어가면서 설명을 들읍시다. 첫 시간이니까 어쩔 수 없어요.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은 누구를 가리키는 걸까요? 예수 그리스도. 이말씀이, 예수그리스도께서 누구와 함께 계셨어요? 예. 여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시는성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과 어떻게 계셨어요? 함께 계셨어요. 자 또 저를 보십시다. 두 번째 중요한 게 뭔가 하면 여기 함께라는단어입니다. 보통 우리가 함께 있다라는 말은 우리가 지금 이 공간에 함께 있어요. 이걸 보통 영어 전치사로는 with. 라는 전치사를 써요. 그런데 요한이 여기에서 함께라는 전치사를 어떤 전치사를 썼는가 하면 독특한 전치사를 썼어요. 헬라말로 프로스라는 말을 써요. 프로스. 이 프로스라는 말은 두 가지 아주 적극적인 의미를 담은 전치사입니다. 이것은그냥 함께 있다는 말이 아니고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하나님을 향하여 마주하고 그런 뜻이에요. 다시요. 이 함께라는 말은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하나님을 향하여 마주하고 있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첫 번째로 이 두 분의 지위와 영광과 본질의 격이 같다는 뜻입니다. 자 여기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중요한 개념이 등장을 해요. 다시요. 영광과 격과 본질적인 면에서 위가 같다 그 말이에요. 누구와 누구가?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이. 성자하나님이니까 한 단계 낮은 이런 개념이아니에요. 격이 같다 그 말이에요. 이 두 분이. 그런데 이 두 분이 지금 아들 성자가 아버지 성부를 어떻게 하고 있어요? 향하여있어요. 이게 중요한 개념이에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이런 뜻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성부 예수님을 향하여 있다는 말은 그분의 생각과 행동과 모든 계획이 아버지를향하여 살아내고 있다는 그 뜻이에요. 여기에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붙잡아야 될 중요한 개념이 걸러집니다.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마땅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온 인생에 대한 계획과 에너지와행동과 삶의 방향이 누구를 향하여 있어야 될까요? 그렇습니다. 성자아들 안에 부활의 첫 열매 되신 그분 안에 묶여진 우리는 당연히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그런 삶을 추구해야 된다는 얘기를 이렇게 하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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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공간복음과 요한복음의 설명의 방식이 달라요. 공간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를 얘기하죠? 예수님의탄생을 예수님의 소개를 저 역사의 지평선에서, 어느 역사의 한 정점에서 태어난 리얼리티를 소개해요. 실제로 역사 속에 오셨던 하나님의 아들이다 를 소개한다면 요한복음의 설명방식은 다릅니다. 수직적 관계로 예수님을 소개해요. 즉 그분은 위로부터 오신 분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바는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온전한 하나님이심을 소개하고있는 거에요. 그래서 설명방식이 틀려요.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은 주어가 하나님이지만 요한복음 1장 1절에서는 주어가 말씀이에요, 로고스에요. 성자 예수님이에요. 자 그러면 조금 더 나아가서 보십시다. 함께 계셨으니. 여기서부터 오늘 가장 어려운 대목에 들어가니까 미리마음가짐을 가지시고 들으시면 덜 어려울 겁니다. 오늘 해석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에요. 제가 이거를 일일이 이렇게 단어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개념정리를 해드리는 이유가 있어요. 그래야 우리가 요한복음의 전체 패턴을 우리가 실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이 말씀은 이 말씀은 누구를 가리키죠? 성자 예수님을 가리켜요. 이말씀은 곧 누구시라? 하나님이시니라. 자 또 앞을 보십시다. 이 대목입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영지주의자들이 가장 오해했던 부분중의 하나가 그들은 말씀을 지식으로 이해했어요. 그로시스. 지식으로 이해했어요. 그지식이 곧 누구라는 말도 만들어질 수 있어요? 신이다. 그지식이 곧 신이다. 그래서 이 지식을 깨닫는 것이 구원을 얻는 길이다.이것이 실제 플라톤의 철학이나 그 당시 영지주의자들의 신학이해에서 가능했던 논리입니다. 이말씀을 그렇게 오해할 수가 있어요. 자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 말씀은 성자 예수님을 가리켜요. 그 성자 예수님은 곧 누구라는 거에요? 하나님이라는 거에요. 자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앞에 하나님과 다른 분은 아닌데 설명이 틀려요. 설명이달라요. 이 뒤에 하나님은 관사가 없습니다. 이 뒤에 하나님은삼위 하나님을 말하는 거에요. 여러분 표정이 그렇게 될 줄 알았어요.다시요, 다시. 이거는 제가 1부부터, 지금 목이 쉬었어요. 하도지금 강조를 하다가 애를 쓰다가 설명을 하다 보니까 다시요. 이 말씀은 누굴 가리키죠? 성자 예수님을 가리켜요. 근데 이 말씀이 곧 누구시라고요? 근데 이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앞에 앞에하나님은 누구 하나님이에요? 성부 하나님이에요 .근데 이하나님은 누구 어떤 하나님이에요? 삼위의 하나님이에요. 그래서관사가 없어요. 뒤에 보면 그러니깐 예수님은 삼위 하나님 중에 한 분인 거에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여러분? 이것만큼 삼위일체를 선명하게 소개한성경본문도 드물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성령님보다 격이 낮거나 떨어지는 분이 아니고 똑같이뭐에요? 삼위 하나님 중에 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거에요. 믿습니까? 우리가 조심해야 될 양태론적 설명이 있어요. 제가 교회에 오면 담임목사가되요. 집에 들어가면 아이들 아빠가 됩니다. 근데 또 학교에가면 선생이 되요. 삼위 일체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요게양태론적 이단이에요. 이런 식의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이 굉장히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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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삼위일체를 설명한답시고 도표를 만들어 설명하는 위험한 시도가 있어요. 그것도 혼란을일으킬 우려가 굉장히 많습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온전히 설명할 수 없으나 우리가 믿어지는 거에요. 이분은 서로 모든 영광과 지위와 통치를 공유하십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의하나님을 이해하면 이 세분이 얼마나 서로 존중하고 함께하고 사랑하는 관계임을 금방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이 하나님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면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되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 존중해야 되고, 서로 섬겨야 되는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그냥 강압적으로 위에서 폼 잡고 이거 해, 저거 해 지시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그 세분의 관계처럼굉장히 존중감을 가지고 겸손하신 하나님이세요. 배려해주시고 기다려주시고 서로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분이 세 삼위 하나님께서, 삼위가 서로 사랑의 관계였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의 속성을 갖고계십니다. 믿습니까? 이렇게 간단히 이해를 하면 되요. 아 앞의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시지만 뒤에 하나님은 관사가 없는 걸로 봐서 무슨 하나님이다? 삼위 하나님이다. 자 여기까지 이해하면 오늘 거의 다 된 거에요. 이제 마지막 설명이 남았어요. 마지막 설명. 오늘만 어렵습니다. 3절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자 놀랍게도 여기서 만물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만물을 얘기하는 거에요. 근데그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 그는 누굽니까? 성자예수님을 가리키는 거에요. 우리는 보통 천지창조는 성부하나님 홀로 하신 사역으로 오해를 하는 경우가많아요. 아니요? 천지 만물을 지으실 때 누구도 함께 지으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도 그 천지창조의 역사에 창조하셨어요. 그래서 그 분이 통치자세요. 창조주이십니다. 믿습니까? 그리고 이 인류의 역사는 그분으로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계획하신 겁니다. 믿습니까? 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여기 긍정문과 부정문을 같이 사용함으로써. 요한의 필체가 놀라워요. 사실 한 문장 안에 긍정문과 부정문을 섞어서 어떤 하나의 목적을 설명하는 방법은 쉬운 방법은 아니에요. 그런데 3절만 딱 떼어놓고 보면 요한은 긍정문을 쓰고 부정문을 써서한 이야기를 합니다. 맞죠? 다시 그런 관점에서 읽어보세요.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아멘. 그러니깐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창조주이세요. 믿습니까? 아버지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는 팔짱 끼고 있다가 세상이병들고 무너지니까 할 수 없이 예수님이 오신 게 아니에요. 창조주이십니다. 이 모든 피조 세계는 그분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자 그런데 아담의죄가 들어오고 세상은 무너졌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 그러니까집이 폐허가 된 겁니다. 우리 인생으로 치자면 집인데 이 집이 무너진 거에요. 퇴락하고 썩은 냄새가 나고 악취가 풍기고 전원이 끊어지고 캄캄한 집이 됐어요.폐허가 됐어요. 이걸 어떻게 하나 하다가 가만 보니까 이거 리모델링 해가지고 될 수준이아니에요. 헐고 다시 지어야 되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 거한다는 말이 텐트를 친다 그 말이에요.새집을 짓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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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집을 지으려면 옛날 집을 허물어야 되요. 그래서 우리를 묶어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친히 죽으신 거에요. 죄의 역사를 끝내신 겁니다. 그래서예수님은 마태복음의 족보를 보면 육체적인 후손을 남기지 않고 죄 된 아담의 족보를 끝내요. 죽으심으로써. 그래야 새집을 짓기 때문에.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에 모든 인류의죄를 묶어서 끝내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새집을 짓는데. 이 새집을 짓는 두 가지 양식이 있어요. 그게 4,5절의 말씀이에요.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안에 뭐가 있었으니? 예. 그리스도 안에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에 뭐라? 빛이라. 빛은 뭐 하는데 쓰는 겁니까? 어둠을 몰아내는데 빛을 쓰는 거에요. 맞죠? 빛이라. 그리고뭐라 그래요? 5절 다같이.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자. 깨닫지 못하더라 라는 말을 썼는데 이건 이해하지 못했단 그 말이 아니에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성경을 보면 거기에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에 2라고숫자가 붙어있어요. 좋은 성경은. 있어요? 없어요? 있죠? 보급판에는없어요. 근데 웬만한 성경에는 이 2라는 숫자가 다 있는데풋노트를 잘 보세요. 풋노트에 뭘로도 해석이 될 수 있다? 이기지못하더라 고도 해석이 될 수 있다. 근데 차라리 이 번역이 더 원문에 가깝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깨닫지 못하더라 라는 말로 의역을 한 거에요. 원문에 가까운 번역은 풋노트의 번역입니다. 이기지 못하더라. 무엇이 무엇을 이기지 못했다는 뜻일까요?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했다는뜻입니다. 이렇게 멀고 먼 역사의 언덕을 넘어서 마지막 최종적인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엄하신 생명과그 생명으로 대변되는 빛이 어둠을 이길 거라는 얘기에요. 결코 어둠은 그 빛을 흩어내거나 물리칠 수없어요. 그런데 어둠을 몰아내는 방법은 빛이 조명되는 방법밖에는 없어요. 그것을 우리는 선교라고도 말하고 순종이라고도 말합니다. 이번 요한복음강해를 이렇게 시작을 하면서 이 강해가 마쳐지는 즈음에는 개인적인 소원이 뭔가 하면 폐허가 되어버린 내 인생에 생명의 빛 되신 그리스도가 찾아오셔서내 인생의 구석구석에 빼곡히 가두어져 있고 드리워져 있는 어둠을 몰아내고 다시 한번 내 인생의 집이 새롭게 재창조되는 기적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하는 소원과 응답이 이루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