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사랑하시니라(2)

책이름(시리즈 분류)
요한복음
Date
날짜
20190811
성경구절
요 13:1-11
시리즈 순서
요한복음(32)
종류(주일, 새벽 등)
주일낮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00:00-05:00)
오늘 본문이 지난 주와 좀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3부 성도님들께만 세족식의 의미에 대해서한 3분정도, 복습 겸, 여러분들에게는복습이 아니겠지만 설명을 드리고 말씀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보통 세족식 하면 예수님께서선생님으로서 모범을 보였다든지, 또는 도덕적인 윤리적인 차원에서 샘플이 되었다든지, 겸손에 대한 본이다 이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가분명히 있어요. 있는데, 당시 사회적 통념에서 또 구약의배경 속에서 이 세족식은 조금 근본적인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유대사람들은 모든 삶의 중심이 성전이에요. 그래서 그 성전에 출입하려면 제사장서부터 반드시정결케 하는 목욕이나 손발을 씻어야 됩니다. 그래야 성전에 들어갈 수가 있어요. 구약에서 말했던 성전은 신약으로 넘어와서 누구로 실체가 드러나죠? 예수그리스도. 그러면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영접되어지고 들어간다는 것은 뭘 거쳐야 될까요? 정결의식을 거쳐야 되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위해서 이 땅에오셨단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세족식 하시듯이 정결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자기의 가족으로 자기의 사람으로 참 성전이신 그분에게로우리를 환영하시고 맞아주시고 영접했다는 뜻입니다. 또 유대인들은 반드시 집 입구에 돌 항아리 같은 데에물을 담아뒀어요. 이유는 외부인이 들어오시거나 가족들이 출입 할 때 밖에서 더러워졌던 것들을 거기서씻고 그리고 들어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인에게는 그 행위가 이제 당신은 우리의 가족의 일원이고 우리와동등한 사람입니다 라는 인정함이 되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나갔다는 것은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새로운 한 가족공동체가 되었다는 의미에요. 그런차원에서 오늘 본문을 좀  두번째로 이어가겠는데요. 미진한 설명이었다면 여러분들이 인터넷에 들어가셔서 지난 주 설교를 한번 청취하시는 것도 도움이 될 꺼 같습니다. 1절 제가 읽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복음에는 유독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때라는 단어입니다. 때. 때라는 말이 요한복음에는 전부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진 표현인가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때에 초점을맞출 때 이 단어가 등장을 해요. 기억 나시죠? 요한복음2장의 첫 표적 때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거기에이미 예수님의 모친이 와 계셨는데 포도주가 떨어졌어요. 얘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런 대답을꺼냅니다. “여자여, 이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 다음에 한 말이 뭐죠?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 때는 죽음의 때에요. 죽음의 시간을 얘기해요. 아직 그 시간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 뜻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오늘 13장즘 건너오니까 두 번째 큰 단락의 챕터에서예수님이 이제 그때가 이르렀다 이 말이에요. 그 때가 이르렀다.
(5:00-10:00)
우리는 여기에 한걸음 멈추어 서서 좀 묵상해야 될 첫 번째 과제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의일생을 추적해보면 반드시 하나의 일관성이 있는데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의지나 계획대로 걸어간 길이없어요. 철저하게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이, 아버지의 계획과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움직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에는 저 가파른 갈보리 언덕으로 향하는 길에는죽음의 색깔이 독특해요. 일체 비장함이나 장렬함이 전혀 배제되어있습니다. 오히려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걸어가는 이 길에 비장해도 누가 뭐라 그럴 리 없고 장렬함이 드러나도 누가탓할 일 없을 텐데 일체 그런 뉘앙스나 흔적이나 느낌이 없어요. 그래서 담담하고 고요하게 그냥 하나님께서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설계하신 구원의 프로그램을 따라 그 시간표를 따라 묵묵히 뚜벅뚜벅 한걸음 한걸음 갈보리 언덕을 향하고 있을 뿐이에요. 자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생각을 하나 해야 되는데 저도 그래요. 뭐좀 공익을 위해서나 뭔가를 위해서 희생 되어 지고 위해서 뭔가 헌신할 때 너무 과잉스럽게 장렬감을 뿜어내고 비장함을 드러내고 싶은 심리가 이 밑바닥에서부터꾸물꾸물 올라와요. 이게 뭐죠? 이게 자기 의에요 결국은. 근데 왜 자기 의가 들어나냐 하면 그 일에 속성을 제대로 모를 때, 그게자기일인 줄 알 때 자기 의가 그렇게 꾸물꾸물 드러나고 쓸데없이 비장해지고 쓸데없이 장렬해져요. 예수님의걸음을 보면 일체 그런 느낌과 색깔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왜? 이일은 아버지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요, 걸어가게 하신 길이기 때문에 모든 초점이 아버지께 맞춰져있지 사람에게 드러나 보이거나 사람에게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액션도 드러내질 않습니다. 모든 겸손은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이 일이 누구의 일인가? 초점이맞추어질 때 우리는 분기탱천할 이유도 없고 감정이 과잉 될 아무 근거가 없어요. 담담하게 주께서 설계하신구원의 프로그램을 따라서 그냥 인류를 사랑하기 위해서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에 또보면 이런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3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앞을 잠깐 볼까요?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아버지는 아들을 믿었어요. 그래서 이 구원에 관한 모든 직임을 책무를 아들에게 다 맡겼어요. 이제공은 누구에게 넘어와있죠? 예수님이신 아들에게 넘어와 있어요. 그래서예수님이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지금 한걸음 한걸음 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십자가 달리시기 전날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치열하게 갈등 해요. 어느 정도까지 표현을 하셨는가 하면 “아버지여, 아버지여, 이잔을 피할 수 만 있다면, 피할 수는 없는 겁니까?” 왜? 너무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 뜻을 이루고 싶은데 한 켠에 이 아버지와의 단절이 너무 힘든 거에요. 아버지와의 끊어짐이 너무 아픈 거에요.
(10:00-15:00)
이 기로에서 또 한 켠에 아버지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이 땅에 죽은 저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해 내기 위해서 나를 십자가의제단에 제물로 보내셨는데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온밤을지새우면서 갈등해요.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리시죠. 내뜻이 이루어지기 원하기 보다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그 죽음의 잔을 마시기로 결단을 합니다.만약에 예수님께서 그 갈등 없이 그냥 십자가에 쑥 죽으셨다면 감동이 좀 덜했을 꺼 같아요. 그런데치열하게 고민하시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나올 정도까지 혹독한 밤을 지샌 끝에 예수님이 제가 이 죽음의 잔을 마시겠습니다 이렇게 결정하실 때저는 거기서 절절한 그의 마음을 오히려 더 헤아릴 수 있고 눈물이 나는 거에요. 정말 힘드셨겠구나, 주님이 우리를 그 정도까지 사랑하셨구나. 별로 감동스러운 표정들이아닌 거 같은데… 그렇게 순종하신 길이에요. 그래서 오늘1절에 보니까 이런 표현이 있죠?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사랑하시니라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어떻게 사랑하셨어요? 끝까지사랑하셨어요. 근데 이 끝까지 사랑하신 대상이 누구입니까? 자기사람들이에요. 왜 이렇게 독점적 표현을 썼을까요? 여긴 2절 때문입니다. 2절 한번 읽어볼까요? 다같이 시작.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이 본문이 좀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마귀가 유다를 딱 지목해가지고 유다의 의지와 상관없이 유다의 마음에다 배반의 마음을 집어넣었다그 말이 아니에요. 이 자리에서는 누구도 유다가 될 수 있었어요. 말하자면마귀가 덫을 놓은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그 덫에 수용을 한 겁니까? 유다가 수용을 한 거에요. 그러니 이 전적인 책임은 유다에게 있는거에요. 원문에 보면 유다가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되어 있어요 .사역을해보면 이런 의미입니다. 유다의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려는 마음으로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말이에요. 이것은 누구에게도 가능성이 있었던 일이었는데 그 덫에 누가 수용이 된 겁니까?유다가. 이 책임은 전적으로 유다에게 있는 거에요. 그리고그는 그 자리를 떠나서 나갔어요. 이 자리를 떠나서 나가고 그때가 밤이러라 그랬어요. 영원한 어둠 속으로 들어간 거에요. 그런데 1절에 보니까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어떻게 사랑하셨다고요? 끝까지사랑하셨어요. 여러분 이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 말은 시간의 어떤 마지막 타이밍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거는 굉장히 물리적인 개념인데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완성하셨다그 말이에요. 석공이 원석 하나를 발견했어요. 이걸 가지고멋있는 작품을 만들어야겠다 계획을 했으면 그때부터 끌과 정을 망치를 동원해서 그때부터 잘라내고 후벼파고 쑤셔대고 찔러대고 덜어내고 베어내서 의도하고계획하던 작품을 만들어가요. 그러면 작품의 입장에선, 작품을포이에마라고 그러죠. 작품의 입장에서는 아프죠. 괴롭죠. 싫죠. 저항도 나오죠. 그러면아유 나 도저히 고집 쎄서 안되겠다 그러지 않는다 그 말이에요. 태평양을 건너서 바다 끝까지라도, 또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주님은 계획하신 것을 끝장을 보신다는 말은 완성하신다 그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계시록에 자기를 어떻게 표현했어요? 알파와 오메가라는말이 바로 그 말이에요.
(15:00-20:00)
시작한 것은 완성하신다 그 말이에요. 거기에는 우리가 좌절해도 이유가 없어요. 실패해도 이유가 되질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의 완성의 근거는 우리의인내가 우리의 가능성이 아니에요. 기독교는 인간의 잠재력이나 가능성을 새롭게 하거나 그걸 빌미로 인간이더 나은 인간을 만드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 모든 기초는 하나님의 끝까지 가는 사랑이 기초가 있는 거에요. 그 안에 우리가 걸려있어요. 운명적으로. 그래서 우리는 포기될 수도 없고 좌절 할 수도 없어요. 왜? 그분의 손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그 분이 끝장을 보신다니까요. 자그 실례를 우리가 이제 우리가 하나 만나게 됩니다. 4절을 볼까요?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재미있는 대화가 세족식 가운데 주고받아졌어요. 이 대화의 의미를 조금 세밀히 살펴보도록하겠습니다. 제자들이 쭉 앉아서 예수님이 대야에 물을 담아 허리에 수건을 동이고 하나하나씩 씻겨오는데베드로가 이걸 봤겠죠? 쭉 지켜 보고 있어요. 자기 순서가왔습니다. 베드로가 이래요. “어떻게 선생님이 제 발을 씻길수가 있습니까?” “절대로.” 절대로라는 말은 영원히. 성격대로 표현을 해요. 극단적이죠.아주 극단적으로 절대로 씻기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 극단적인 표현을 예수님이 받아요. 받아서 “내가 니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예수님이 또 이럴 꺼 까진 없을 텐데 예수님이 이런 표현을 썼어요. 여기서상관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네가 나와 상속을 나누지 못한다 그 뜻이에요. 네가 나와 교제하지못한다 그 뜻이에요. 굉장히 근본적인 표현이에요. 문제는오늘 여러분들과 나눌 두 번째 묵상과제가 뭔가 하면 왜 베드로는 절대로 씻기지 못한다고 얘기했을까요? 그동기가 뭘까요? 그 생각을 한번 해보셔야 됩니다. 여러분들이베드로 입장에서, 기분 나쁘게 생각하시지 마시고 베드로의 입장에서 한번 베드로는 왜 그랬을까 한번 생각을해보세요. 왜 그랬을 꺼 같아요? 여러분 그 당시에 누구의발을 씻긴다는 것은 최하 낮은 직분의 사람들 만이 하는 행위입니다. 즉 종이나 노예들만이 하는 행위에요. 그런데 그 일을 지금 누가 하고 있어요? 예, 체면이 가장 생명처럼 중시되던 유대사회에 선생님이 하고 있어요. 이건오늘날 일반 상식에도 안 맞는 통념이에요. 즉 예수님이 그 당시 사회 질서를 완전히 뒤집어 엎는 행위를지금 하고 있다고요. 베드로가 이렇게 봐요. 뭐지? 자기 순서가 왔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절대로 씻기지 못합니다. 과연 무슨 마음으로 베드로는 그랬을까 그말이에요. 이런 뜻입니다. 아니 내가 모든걸 포기하고 이양반을 따라 나섰는데 기껏 저분의 제자가 되어서 앞으로 이런 거 하자고 우리가 따라 나섰단 말인가? 그뜻이에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라는 사람과 꿈꾸는 나라는 여전히 세상의 가치와 속성을 버리지 못한물리적인 나라입니다.
(20:00-25:00)
아니 내가 기껏 모든걸 버려두고 이분을 쫓아나선 대가가 아니 저런 거나 하자고 우리가 지금 이 생고생을 하고 따라 나섰단 말인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 말이에요. 안 된다. 여러분 마태복음을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0점 만점에 10점짜리 고백을 해요. 누가? 바로 이 베드로가. 그러자예수님께서 드디어 자기의 오신 목적에 대해서 진술을 하세요. 설교를 하십니다. 가르치십니다. 이제 내가 많은 사람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것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뭐라 그래요? 선생님 절대 그런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항변을 해요. 따졌다 그 말이에요. 그건우리가 꿈꾸는 나라가 아닙니다 선생님. 그 뜻이에요. 우리가모든걸 버려두고 선생님 따라 나선 게 이런 거나 하자고 따라 나선 게 아니란 말이에요. 자 이런 부류의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습니까? 교회안에 있어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잘못된 오해를 갖는 게 예수 믿어가지고 세상의 헤게모니를잡고 사회의 1%가 되어서 파워를 기르고 실력을 쌓아서 세상을 장악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 그말이에요. 이건 복음이 가르치는 질서가 아니에요. 그게 맞다면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서는 안되죠. 베드로의 논리가 맞는 거죠. 제자들은베드로를 포함해서 지금 예수님이 이 제자, 새롭게 가족이 된 공동체와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의속성과 질서가 뭔지를 몰랐어요. 예수님이 꿈꾸는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어요. 낮아지고, 세상의 제물이 되어서 다른 이를 살려내는 일, 회복시키는 일, 섬기는 일이에요.그것이 예수님이 이 제자공동체와 즉 오늘날 교회공동체와 꿈꾸는 예수님의 나라에요. 그러니까베드로가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래?내가 니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넌 나와 상관이 없다. 즉 나는 너희가 꿈꾸는 나라를 위해서이 땅에 오지 않았다 그 말이에요. 자 성경을 또 보십시다. 9절.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성격은 어딜 가지 않아요. 금방 또 극단적으로 이쪽으로 와가지고 그러면 목욕까지 씻겨주십시오이렇게 된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 그러죠?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이게 무슨 말이냐하면 결론적으로 여기 목욕을 했다는 말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의 피로 새로운 가족이 되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 그 말이에요. 그 얘기를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손발밖에는 씻을 수 없다는 말은그 당시 요한이 이 글을 쓰면서 처음에 이 서신을 보냈던 에베소 지역의 에베소 공동체입니다. 그런데에베소는 어떤 도시인가 하면 로마가 점령한 도시 중의 도시에요. 로마의 가치와 로마의 철학과 로마의문화가 가장 빼곡히 함축되어 잇는 도시 중에 도시입니다. 이 로마는 세계를 정복해 가면서 가는데 마다로마의 가치를 펼쳐내기 위해서 큰 목욕탕을 만들어가요. 그런데 그 목욕탕 규모가 동네 무슨 사우나 찜질방그런 수준이 아니에요. 케러비안, 그 정도 수준이에요. 제가 얼마 전에 선교사님들을 점 섬길 일이 있어서 중국에 모처에 잠깐 다녀왔어요. 2박일정으로. 이튿날 선교사님이 여독도 좀 풀 겸 사우나나 한번모시겠습니다. 그래서 가자고. 차를 타고 한참 외곽으로 사우나를갔는데 들어갔어요.
(25:00-30:00)
사우나에 들어가서 길을 잃어버렸어요. 실제. 얼마나큰지. 서로 찾다가 못 찾아가지고 나중에 밖에 나와서 서로 만났어요.어디가 있었냐고. 얼마나 넓은지. 야, 대륙의 스케일 말만 들었지 체험해보니까 이게 차원이 달라요. 로마의목욕탕이라는 것은 그 정도 규모에요. 그래서 그 안에 큰 탕 안에 이제 몸을 씻고 다 씻은 다음에는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탈의실로 갑니다. 그러면 탈의실로 걸어가는 동안에 또 발이 더러워져요 씻었지만. 그래서 옷을 환복 한 다음에 갈아입은 다음에 이제 다시 뭐만 씻으면 됩니까?예, 발만 씻으면 됩니다. 이것이 그 당시 에베소공동체, 로마 문화의 한 단면이에요. 근데 로마인들이 탕안에 함께 목욕을 한다는 것은 유일하게 그때만은 사회 계급과 모든 것이 다 평등해 집니다. 그 안에서의공간만은. 그러니까 목욕탕이라는 곳은 그 당시에 단순한 몸을 씻는다는 공간만이 아니고 교제와 문화와모든 것이 교류되고 함께 하는 멀티 풀, 복합 공간입니다. 이것이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쓰여진 글이라는 것을 우리가 놓쳐선 안되겠죠. 자 그런데 결론.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이렇게 끝까지 사랑하시는가? 왜? 여러분 성경을 한번 보십시다. 14절. 다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34절 다같이 시작.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앞을 봅시다. 방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베드로를 중심으로 제자 공동체가 이해하고꿈꿨던 나라는 이 세상의 물리적인 나라와 일체 다를 바가 없었어요. 근데 오늘날 이런 극명한 사례가언제 가장 드러나는가 하면 선거 때 드러납니다. 선거 때 오만 대서 전화가 다 와요. 한번도 보지도 못한대서 전화가 와요. 그러면서 목사님같이 젊은이들에게영향력이 있는 분들이 좀 이럴 때 우리 기독교 정치인들을 밀어줘야 됩니다. 도와줘야 됩니다. 나 영향력 없어요. 무슨 내가 영향력이 있어요. 그리고 이럴 때 일수록 기독교인들이 힘을 모아서 기독교 인들이 당선이 되야 됩니다? 여러분 제발 선거 때 기독교인들을 찍지 마시고 정치를 바르게 하는 사람들을 찍으세요. 왜들 그러세요? 기독교가 힘을 모아가지고 규모를 키워서 세력을 가지고이 세상에 파워를 형성하면 그래서 세상이 감동하고 세상이 끌려올 것 같아요? 그랬던 역사가 있던가요? 한번도 그렇게 세상이 설득된 적이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낮아지고 비천하게 죽어서 제물이 될 때 세상은 무릎을 꿇었어요. 근데 우리는 자꾸 무슨 흉내를 내죠? 세속적 가치관의 흉내를 어줍지 않게 내요. 힘을 갖자. 논리는 그럴듯한데 이거는 철저히 비성경적입니다. 세력을 키우자.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모든 사회의 요직에 앉아서 대한민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자. 망할라고 그래요? 아닙니다. 세상이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설득 당하고 알 때는 우리가 철저하게 낮아질 때, 십자가의 가치관을 따를 때세상이 설득되고 항복하는 거지 세력과 규모와 힘을 가져서 세상은 절대 우리를 대항하면 대항했지 설득 당하지 않아요.
(30:00-35:00)
선거가 또 언제 있는지 모르겠는데 여러분 선거 때 제발 예수 믿는 사람들 뽑지 마시고, 예수믿고 바르게 정치를 한다면야 누가 뭐라 그러겠어요? 근데 아니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에요. 아니니까. 이제 이 설교를 또 누가 들으면 분명히 시비를 겁니다, 이제. 넌 도대체 뭐냐? 정체가? 나는 예배당이에요. 예배당. 아무당도 아니에요. 그만 교회가 그걸 잃어버렸어요. 지금. 그 십자가의 가치관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쓸데없이 흉내를 내요. 세상에 논리를 그대로 흉내를 내요. 재정이 있어야 되고, 숫자가 많아야 되고, 힘을 합해야 되고. 어디 십자가 정신이 힘을 합하는 정신입니까? 죽어지고 낮아져서 제물이되어서 그때야 세상은 드디어 참된 복음의 매력에 끌려올 수 있는 거지, 그때야 교회가 진짜 그리스도의제자구나 설득 당하는 거지. 힘? 여러분 그건 세상이 더잘 압니다. 예? 또 한 주도 이건 교회 공동체에 국한된얘기가 아니라 우리 개개인에게도 적용해야 되는 일이에요. 세상의 헤게모니를 붙잡는 싸움을 내려놓고 십자가의정신을 붙잡는, 우리 방금 귀한 찬양, 우리 같이 찬양을올렸죠?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 너무 그 찬양을 듣는데 마음이 힘들더라고요.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 하는데. 우리 다같이 일어나셔서 사명 찬양 부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