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7)
노아와 세 아들
창9:20-29
20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알리매
23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8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29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00:00-10:00)
자 오늘은 노아의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그 동안 몇 시간에 걸쳐서 노아 부분에 너무 오래 머물러있었죠. 오늘은 그 이야기를 마무리를지으려 합니다. 오늘은 성경 봉독을 통해 읽었지만 아버지 하체 이야기가 나오고 불편한 부분들이 자주등장을 할 겁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19금 설교가 될공산이 큽니다. 노아가 술을 먹고 아랫도리를 벗은 채 드러누웠던 것 같아요. 그걸 함이라는 아들이 봅니다. 그리고 나가서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알리죠? 그것 때문에 그는 저주의 아이콘이 되어 오고 오는 자자손손 저주를 받는 설움을 받게 됩니다. 우선 이 내용만 간단히 보면 몇 가지 선뜻 받아 들이기 어려운 대목이 생깁니다. 객관적으로 함과 노아만 놓고 볼 때 실수는 누가 큰 듯 보입니까? 그렇죠. 함은 그냥 본 것뿐이에요. 나가서 그냥 나가서 얘기한 것 외에는딱히 무슨 그만큼 저주를 받을만한 내용이 상식적으로 봐도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잘잘못을 따지자면노아 쪽에 더 실수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성경 기자가 노아의그러한 모습에 대해서는 팩트만 기록을 해놓고 일절 거기에 해석이나 평가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오히려 함의 짧은 기록 된 실수처럼 보이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그 아버지 노아가 술이 깨어서 저주를 선언하는 내용까지 상세하게 기록을해놔요. 그 후손들에 까지. 그러면 여기에는 우리가 이해하는것과는 다른 문제가 감춰져 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좀그런 관점에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8절을 좀 볼까요?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니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지금 세상은 어떤 상태인가 하면 아시는 대로 홍수를 통해서 온 땅이 생명이 있는것은 다 수장이 되는 심판을 당했습니다. 다 물 아래 잠겼어요. 그물이 겨우 빠져 나간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남겨진 인류래야 노아와 그의 가족들 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가족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는 명령을 창세기 모드와 똑같이 그 명령을갱신하십니다. 그것은 이 땅에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을 번성케 하라는 생명 축복의 명령이에요. 이는 사실 우리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선교적 사명과도 맞물리는 매우 중요한, 그리고엄중한 명령입니다. 그 얘길 19절은 이렇게 했어요.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본래 심판 이후에 인류를 아니 하나님의 백성들을 퍼뜨리고 보존케하자는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명령이었고 약속이었습니다. 이 기록 이후에 오늘 노아의 이야기가 등장하고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되요. 그리고 노아는 포도 농사를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결과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마셨던 모양이죠. 취해서그가 하체를 드러내고 벌거벗은 채 누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둘째 아들인 함이 지나가다가그 광경을 보고 나가서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한 겁니다. 이게 과연 뭘까? 이 내용만 볼 때는 함에게 내려진 그 저주는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가혹해요. 오히려 우리 상식대로라면 아버지에게 사실 과실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함의이 태도가 이 행동이 도대체 무슨 죄를 말하는 건지 독자의 입장에서는 참 난감해요. 선뜻 수용이 될정도로 알 길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재귀 용법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이 해석을 추론해 낼 수밖에없어요. 뭐냐 하면 다른 두 형제의 행동을 조사해 봄으로써 거기서 드러난 차이점이 분명히 있을 거에요. 그럼으로써 함의 실수를 우리가 재발견해 보는 겁니다. 그 얘기를성경 기자가 어떻게 남겼는지 한번 보십시다. 23절
23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함의 이야기를 듣고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자, 여기 함의 실수가 뭔가를 알기 위해서 두 형제의 태도를 유심히 기록만 볼 때 강조점이 어디 있는가 하면 아버지의하체를 보지 않았다는데 강조점이 있어요. 보지 아니하였다. 얼마나안 보려고 했냐 하면 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그 옷으로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다고 할 정도로 보지 않았다고 하는데 초점이 있어요. 그런데 함은 어떻게 했어요? 보고.보고. 함의 행동을 볼까요 22절. 이렇게 돼있어요.
22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그러면 정리를 하자면 이렇게 돼요. 오늘함의 저주의 아이콘이 되었던 행동적 의식적 실수가 뭐냐 하면 함은 어떻게 했고? 보았고.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고. 두 형제는 어떡하든 보지 않으려고 했어요. 보지 않았어요. 보았다는데 초점이 있어요. 여러분 인류의 죄의 타락이 뭐에서부터 옵니까? 봄으로 온 거에요. 창세기 3장 6절을 띄워주세요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 도 먹은지라
이 본문은 우리 인류 역사에 아주 중요한 본문이 되죠.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유혹에 넘어지는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그 유혹이 어디로부터 들어오죠?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보암직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여 하나님이 설정해 놓으신 경계선을 넘어갑니다. 경계선을 넘어가요. 그래서 그 여파가 아담에게로까지 끼치게 해서아담도 무너집니다. 이렇게 인류는 죄에 떨어지게 되고 실락원이 되죠.에덴의 상실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인류의 먼먼 길고 긴 여정은 이 에덴의 회복을 향한 여정이에요. 그 회복이 계시록에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완성이 되는 거에요. 창세기의이 혼인은 망가진 결혼이 되고 말았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계시록에서는 어린 양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의온전한 연합으로 이 무너진 에덴이 회복이 됩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 인류에게 경계선을 설정하셨습니다. 여긴 넘어가지 마라. 이게 금단의 열매에요. 그런데 그 무너진 죄가 뭐로부터 들어 온 거죠? 보고. 봄으로 들어왔어요. 그런데 모든 인류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이시점에 함이 뭘 봤어요?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자
(10:01-20:00)
그러면 이제 우리는 함이 도대체 아버지의 하체를 봤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리고 노아가 벌거벗고 있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여러분 히브리말에 벌거벗었다는 말은 원래 인류는 벌거벗은 상태가 부끄러웠어요? 부끄럽지 않았어요? 부끄럽지 않았어요. natural 한 상태였어요. 부부끼리 상대 개념입니다. 보니까 나더라 그 말이에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보니까 나에요. 그래서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인류는 부끄러움이 없었어요. 노아가 지금 포도주에 취해서 벌거벗었어요. 히브리인들의 이 언어개념 속에는 벌거벗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부부관계를 얘기합니다. 사실은.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라는 말이 성경에서 어떻게 통용되는 가를 보십시다.우리 레위기 18장을 띄워 주세요. 6절
6 각 사람은 자기의 살붙이를 가까이 하여. 여러분근친 상간을 얘기합니다.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과 인류를 번창시키는 origainal 방식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 다음 절을 볼까요?
7 네 어머니의 하체는 곧 네 아버지의 하체니
자 여기 놀랍게도 어머니의 하체와 누구의 하체를 동격으로 놉니까? 아버지의 하체를 동격으로 놔요. 그러면 아버지의 하체를 봤다는 것은누구의 하체를 봤다는 말도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걸어떻게 강조하냐 하면 너는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어머니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범하지 말지니라
8 너는 네 아버지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아버지의 하체니라
여기서 강조한 것이 뭐냐 하면 너는 네 아버지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네 아버지의 하체니라. 그러니까 함이 부부 관계가 끝난 이후에 잠들어 있던 누구의 하체를 본 걸까요? 어머니의 하체를 본겁니다. 사실은.그건 은유적인 표현으로 성경에서는 누구의 하체를 보았다고 돼있죠? 아버지의 하체를 봤다고돼있어요. 그리고 나가서 두 형제에게 말했다고 나오는데 단순히 폭로했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 말 속에는 마치 하와가 하나님이 금지하신 그 금단의 열매의 설정한 경계선을 넘어가서 타락하듯이 인류에게죄가 들어왔듯이 함의 마음 속에는 그런 공모와 음모와 더러운 본성과 마음이 감춰져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두 형제는 이걸 거절하죠. 두 형제는 이걸 거절합니다. 왜?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원리와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8장 21절에 보면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제사를 드리죠.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다시는 홍수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멸하지 않겠다는 말이에요. 그 말은 다른 방법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단의 제물로 죽으실어린 양을 준비하신 다는 뜻입니다. 왜? 우리 인류는 어려서부터, 원래부터 아담 아래서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방식 외에는 방법이 없단 뜻입니다. 그게 누굴까요? 함이에요. 함은또 다른 누굴까요? 다른 인류일까요? 거기 우리가 있었어요. 여러분 십자가 앞에서 이 자기 identity라 그러죠. 정체성에 대해서 정직하게 경험상 서보지 않으면 우린 십자가를 아직 못 만난 겁니다. 십자가의 진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거에요. 이렇게 해서 함은 아주악한 의도를 가지고 두 형제에게 사실은 공모를 하고 얘기를 했던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그러죠?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음이라. 행동과 마음의 동기를 주님은늘 같이 보세요. 그게 성경의 원리입니다. 이미 함은 그하나님의 경계선을 넘어가 버린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땅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백성을 충만케 하려던 그 계획에 여러분 부부 관계는 성스러운 겁니까? 나쁜 겁니까? 물으나 마나 한 거죠. 하나님이 설정하시고 계획하신 가장 아름다운방법이에요. 그런데 아담은 마치 하와가 그 경계선을 넘어가듯 경계선을 넘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 야벳과 셈은 그걸 보지 않아요. 두 형제의 행동속에 우리는 재귀용법적 해석을 통해서 이 함의 실수가 실수가 아니라 얼마나 의도 된 악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금방 눈치 챌 수가 있는 거에요. 두 번째 꼭지입니다. 여러분 24절을보세요.
24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여기 작은 아들이라는 단어 옆에 foot note 보시면 둘째라고 돼있죠. 함은 둘째에요. 그행한 일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25절을 보시면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25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이제 이 부분이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여러분 이 본문 25절 방금 읽으신 이 본문 선뜻 이해가 됩니까? 아니 실수는 누가 했어요? 실수가 아니죠. 죄를 누가 지었어요? 함이 지었어요. 그런데 왜 그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습니까? 죄는 유전이 되는겁니까? 맞아요?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으라 이런 이상한책들 돌아다니죠? 이런 내용들을 잘못 해석하기 때문에 그런 오류가 가득한 책들이 돌아다니는 겁니다. 무비판적으로. 죄는 유전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본문이 말하고 싶은 게 뭘까요? 왜 함이 하나님앞에 죄를 범했는데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아야 합니까? 가나안은 함의 아들이거든요. 여러분 지금 이 창세기라든지 아까 우리가 읽었던 레위기 서는 소위 모세 5경이라는책입니다. 모세 5경은 누구를 위해서 어느 시대에 쓰여진겁니까? 모세가 이제 곧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히브리 공동체에게 교훈을 위해서 규범을 하나님께로부터받아 적은 겁니다. 왜요? 이미 가나안이라는 땅은 진공 상태가아니에요. 텅 빈 상태에 히브리 민족이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거기에는오랜 시간 축적 된 오랜 악한 문화가 가나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어요. 게다가 그 문화에 가장 핵심적인가치는 뭡니까? 우상 숭배를 빌미로 한 성적 타락인데 근친상간을 얘기합니다. 그게 아무 죄의식 없이 가나안 문화라는 명목으로 종교라는 이름을 덧씌워서 가나안 땅에 가득히 벌어지고 있었어요.
(20:01-30:00)
이제 히브리 백성들은 거길 들어가야 해요. 텅빈 공간이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뭘 염려 하셨죠? 백성들이그것을 답습하고 따라 할까 봐 그것을 걱정했어요. 답습하고 따라 하는 것이 유전입니까? 가치관의 전달입니까? 그건 유전이 아니라 가치관의 전달이에요. 함의 이런 인식 세계가 일본 속담에 그런 속담이 있죠. 아들은 아버지의등을 보고 자란다. 그 말은 죄가 삶이 유전되어서가 아니라 답습되는 겁니다. 그런 가나안의 토양과 문화적 배경 때문에 모세는 이 글을 빌려서 쓰고 있는 겁니다. 자 그런데 노아의 이 선언을 왜 빌렸을까요? 여러분 히브리인들은독특한 문화가 있어요. 아버지들이 주로 족장입니다. 족장. 또는 제사장이기도 하고. 그래서 족장 선언이라는 게 있어요. 이것은 이삭의 예를 통해서 발견이 돼요. 이삭도 죽기 얼마 전 즈음에꼭 죽기 임박한 시점이 아니라도 적당한 시점에 에서와 야곱에게 예언적인 축복을 하죠. 그게 그대로 하나님의경륜 속에 베풀어지고 이뤄집니다. 그렇듯 히브리인들은 족장 선언이라는 게 있어요. 이 노아의 선언도 사실은 그런 족장 선언의 카테고리에서 이해를 해야 해요. 그러니까함이 그런 못된 짓을 했기 때문에 바로 저주를 했단 말이 아니에요. 함, 셈, 야벳 이 세 아들의 길고 멀었던 함께 했던 세월과 삶을 아버지보다더 잘 이해하고 파악한 사람이 있을까요?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기 전에 그 세 아들에 대해서그간에 누적되었던 삶의 내용들을 놓고 예언적인 성격의 족장 선언을 한 내용이 이 내용이에요.
여러분 그 속담에 이건 우리 나라 속담은 아닌데 그 쪽 지역의 속담에 돌아 다니는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지푸라기 무게 하나라도 낙타의 등뼈를 부러뜨릴 수 있다. 이해가 됩니까? 지푸라기 무게 하나라도 낙타의 등뼈를 부러뜨릴 수있다는 거에요. 낙타가 아주 척박한 기후 속에서 찌는듯한 더위 속에 작열하는 태양 밑에 사막 길을 갑니다. 등에는 더 이상 질 수 없을 정도의, 거의 비등점에 이르는 무게를등에 싣고 갑니다. 그 무게가 얼마나, 우리 이제 일본적관용어를 빌려 쓰자면 이빠이 실은 거에요. 더 이상 실을 수가 없어요.그 때 만약에 누가 지푸라기 무게 하나만 얹어도 낙타의 등뼈는 부러질 수 있다 그 말이에요. 그러면그 지푸라기 무게가 낙타의 등뼈를 부러뜨린 건 아니죠. 그것이 하나의 촉발이 되고 동기가 되었을 뿐이지이미 낙타의 등에는 그것을 부러뜨릴만한 무게가 이미 얹어져 있었어요. 그게 함이 받은 저주의 내용이에요. 단순히 이 사건의 무게도 물론 중요하지만 함의 일생은 그렇게 하나님과 대척 점에 서서 늘 반역하는 인생을 살아오다가이 사건이 결국은 절정을 친 겁니다. 뭐 요즘 우리 나라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현실이 어느 날 갑자기된 게 아니잖아요. 3,40년 오랜 세월의 시간이 축적되었다가 터진 거에요. 참 다행이라고 봅니다. 그나마도.늦었지만 이제라도 드러나고 실체가 밝혀지는 것. 마치 그런 거에요. 자 그러면 우리는 이 가나안의 저주는 함의 죄가 유전이 되어서가 아니고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시대적 맥락을이해해야 해요. 즉 이제 곧 가나안에 들어 갈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게 경계로 주시기 위해서 이 노아의선언문을 족장 선언문을 인용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그 가나안은 사실은 천국의 모형이 아닙니다. 만약에 가나안이 천국의 모형이라면 거긴 전쟁이 없어야 지요. 그런데들어가자 마다 뭐 했어요? 그런데 그 전쟁의 선봉에 누가 서 있었습니까? 여호수아. 여호수아가 누굽니까? 예수님의모형이에요. 호세야, 여호수아, 예수 같은 단어입니다. 가나안은 이런 거에요. 말하자면 오늘 날 이 세속의 문화를 비교합니다. 함은 누굽니까? 그 가나안 문화의 뿌리가 된 죄인의 인식 세계와 가치관을 얘기하는 거에요. 우리는그 가나안 문화라는 세상 속으로 매일 지금 들어가서 전쟁을 하지 않습니까? 매일 피를 철철 흘리면서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사야의 글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왜 창조하셨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딱 한가지만 얘기하라 하면 우리를 왜 창조하시고 왜 부르신 거에요? 예배케 하기 위해서. 그럼 선교는 뭡니까? 예배할 자가 없는 그 땅에. 예배가 없는 그 어둠의 세계에 예배자를일으키고 예배자를 찾기 위해서 선교는 하나님의 방법이죠. 선교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선교는 그 땅 끝에어둠의 땅에 예배하는 자가 없는 그 곳에 예배자를 찾으시고 예배자를 일으키기 위해서 어둠을 거둬내기 위해서 선교라는 방식을 교회의 마지막 시대에허락하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꼭지로 들어가서 26절을보셔야 합니다.
26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여기 보시면 셋째 아들에 대해서 소개가 됩니다.야벳입니다. 야벳은 야벳의 장막에 거해야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야벳은 복으로 누구의 장막에 거하도록 돼있습니까? 셈의장막에 거하도록 돼있어요. 왜 자기 장막에 거하지 않고 셈의 장막에 거하도록 하셨습니까? 집이 없었나요? 이건 그런 물리적인 개념이 아니죠. 여러분 우리가 한 장을 넘기면 11장 10절부터 보세요.
10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주욱 가다가 26절
26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예, 이 셈의 족보를 통해서 누가 태어납니까? 아브라함이 태어나요. 그리고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던 해에 누굴 낳습니까? 이삭을 낳아요. 그리스도는 누굴 통해 나시도록 예언되었습니까? 이삭을 통해 오도록예언되었어요. 그러니까 셈의 장막은 그리스도의 우산을 얘기하는 거에요.결국 인류는 셈의 장막 안에 진정한 안정과 평화와 행복과 구원을 완성하도록 하나님은 이 창세기의 노아의 선언 속에 종말을 역사의 끝을미리 보이시고 감춰 놓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이었던 자리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어요. 그런데 오늘여기 기술 된 문법적 표현대로라면 그리스도께 정복당함으로써. 가나안은 이스라엘에게 정복됨으로 그 땅은회복되는 거에요. 정복 당하는 게 나쁜 게 아니에요. 우리가나안처럼
(30:01-34:01)
살았던 함의 인식 세계와 가나안이 문화에 취해 살았던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습니까? 우리의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 여호수아, 그 분께 정복됨으로써 여인의 후손이 사단의 머리를, 뱀의 머리를밞음으로써 정복함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짧은 노아의 세 아들의 이야기속에 하나님은 역사의 종말이 누구로 다 귀결되고 누구로 완성 될 것인가 종말은 끝난다는 개념이 아니에요. 종말은완성 된다는 개념이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몇 가지 명제를 붙들고 함께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첫 째는 함은 단순히 아버지의 하체를 봤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새롭게 하시려는 창조의 질서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불신앙적 행동을 통해서 저주의 아이콘이됩니다. 그리고 그 한 사건만이 함의 저주를 재촉했던 게 아니에요. 족장선언은 딱 어떤 한 사건만 놓고 선언하는 선언문이 아니에요. 그의 일생, 모든 삶의 궤적을 아버지의 입장에서 또 하나님께로부터 교제를 통해서 그의 미래를 선포하고 설명하는 거죠. 그렇게 함은 저주의 아이콘이 됩니다.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같은 죄인인 거에요. 그 함은 우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또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그 함 속에 우리를 발견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여인의 후손인 그리스도께서 원수의 궤계를 밟음으로써, 승리하심으로써 우리는 셈의 장막에 거하는 은총을 야벳처럼 입게 되었다 그 말이에요. 믿습니까?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자로 세우기 위해서 부르시고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오늘 우리에게 선교라는 사명을 통해서 땅 끝까지, 땅 끝이라는 말은 물리적인 거리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가 없는 그 곳이 땅 끝입니다. 이제 두 주간의 특새가 남았습니다. 마쳐지면 이제 통영, 레바논을 시작으로 국내, 국외 선교가 시작이 될 겁니다. 이번 겨울도 찬 바람을 가르고 우리가 마땅하게 가야 할 그 땅을 향해서, 예배자를찾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정으로 복음을 가지고 떠나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삼일 인의 life style이 되어야 해요. 오늘 이 설레는 명제가 또 한 주간여러분들이 살아가야 할 일터에서 어둠을 밝혀내고 거기가 땅끝이 되어서 선교적 제자로 살아가는 결단과 순종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 일어나십시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