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따르라 하시니
44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임금이로소이다
5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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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요한복음 1장이 드디어 오늘 마쳐집니다. 일곱 번째인데요 어쨌든 오늘은 반듯이요한복음 1장을 끝낼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튿날이라는표현으로 또 하루가 지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43절을 좀 보십시다. 첫 절이죠.
43이튿날 예수께서 어디로가시려고 하죠? 네,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이 갈릴리는 예수님의 3년 동안 생애 속에 가장 중요한 사역의 본거지였습니다. 그러다가 누구를만납니까? 네, 빌립을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씩 제자 무리가 모여 들게 돼요. 자, 그런데 여기 만나다 라는 말을 우리 말 성경에는 마치 이런느낌으로 오해를 할 수 있어요. 목적지는 갈릴리인데 거기 가시다가 길에서 우연히 빌립을 만났다. 우리 말 성경에는 정확히 그런 뉘앙스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여기 표현 된 유리스코 라는 이 말은 만나다 라는 표현은 그런 의미가아니고 정확하게 이런 뜻입니다. ‘찾고 찾은 끝에 만나진’ 이런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빌립은 길 가다 우연히 만난 제자가 아니에요 .예수님이주도권을 가지고, 모든 만남의 주도권은 그 분에게 있어요. 주도권을가지고 갈릴리 어떤 사역을 위해 가시다가 이 제자를 찾고 찾아서 만난 제자입니다. 주님 안에서는 사소한만남일지라도 우연한 만남은 없습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 4장쯤가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세요.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는데 그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라고돼있어요. 우리가 평범한 한 주가 또 지나서 이 공간에 모여 들었어요.때가 되니까 우연히, 일상적으로 온 것 같지만 사실은 저와 여러분들의 이 자리의 만남도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하나님이 간절하게 강렬하게 찾고 찾아서 만나진 자리입니다. 자, 여기에서 어떤 파생적 의미가 가능한가 하면, 예수님은 그래서 소자의대접 하나도 소홀히 있지 않겠다 라고 얘기를 해요. 그 말은 무슨 얘기가 되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사소해 보이는 만남도 소홀히 할 만남은 없다는 얘기에요. 믿으십니까?제가 이번 주 우리 청년들 데리고 저 시리아에서 넘어 온 난민들을 돌보러 레바논 땅을 다녀왔는데, 거기에서많은 시리아 어린 아이들을 만났어요. 그 깊고 슬픈 눈빛이 팍팍 머리에 찍혀 있어서 지워지질 않아요. 그런데 그 아이들과의 만남도 스쳐 지나가는 만남처럼 짧은 일정이지만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는 거죠. 자, 그런 만남이 이어지는데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절
44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어디사람이라고 돼있어요?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보니까 앞서 등장한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마음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마을 이름이 벳새다에요. 벳새다라는 마을은 우리 귀에낯설지 않은 지명인데 이스라엘 온 천지는 참 경이로운 땅입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여행지도 참 의미가있겠지만 평생에 그래도 우리 예수님이 거닐고 살아내셨던 그 한 시대를 경험을 갖고 계시던 그 역사의 땅을 한번 밟아보는 것도 평생의 버킷리스로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이 벳새다 라는 마을은 무슨 뜻인가 하면 어부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어부의 집. 이들은 어촌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살았던 한 동네 청년들같아요. 벳새다 자체가 어부의 집이에요. 예수님도 베드로를보시자 마자 뭐라 그러셨죠?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라 되리라. 낚다라는 말은 끌어 올린다 라는 말이에요. 흑암과 어둠의 구덩이에서 신음하던 영혼들을 끌어 올리는 사람을낚는 어부가 되리라 그 뜻이죠. 자, 여기에 아주 자연적인흐름 속에서 조그마한 첫 번째 결론이 도출됩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찾고 찾아서 만나셨어요. 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청년들 하고 선교지를 가면, 이번에도 참 레바논에서 많은 청년들과생활을 했지만 제 느낌 속에는 이런 느낌이 지워지질 않아요. 이 친구들은 그 한 주, 두 주의 선교를 위해서 나머지 일터의 삶을 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사실은 그게 맞아요. 우리가 이 순위는 정확히 해야 될 것 같아요. 세상의 직업도 소중합니다. 당연히 거기도 하나님의 소명의 자리에요. 그런데 그곳이 밥 세끼를 위한 자리여서는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이나를 그 일터로, 그 직장으로 보내실 때는 밥 세끼를 벌어서 먹으라고 단순히 보낸 자리를 뛰어 넘어서, 거기는 내가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삶의 자리로 새롭게 등장해야 됩니다. 믿습니까?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셨고 찾도록 만나셨다. 그말이에요. 우리를 오늘 왜 부르셨냐? 사람을 낚는 어부가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 일터로 선교를 위한 일터요, 전도를위한 일터요,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삶의 일터로. 제가신학기 1학년 때 딱 입학을 하면 새로 만난 친구들이니까 다 자기 소개를 첫 시간에 하더라고요. 그런데 좀 나이가 들어 입학한 형님 같은 동기인데 한 쪽 다리를 살짝 절어요.그런데 이 분이 자기 소개를 그렇게 해요. 저는 장차 양자강의 어부가 되겠습니다. 양자강은 어디 있어요? 중국 땅에 있죠. 양자강의 어부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마치자 마자 떠났어요. 우리 삶의 본질이에요. 이 순위가 바뀌어선 안됩니다. 자, 그런데 이제 몇 절을 보시냐 하면 45절을 보십시다. 다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45절 시작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네, 빌립이 자기가 만난예수를 누구엔가 빚진 마음으로 소개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이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에요. 사실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나다나엘에게 가서 두 가지 얘길 해요. 하나는내가 누구를 만났는데 첫째,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그 사람이다. 그런데그 사람이 누군가 봤더니 요셉의 아들 목수, 요셉의 아들 나사렛 사람이더라. 여러분, 겉으로 볼 땐 정확한 전달 같지만 사실, 이것은 다 알고 한 얘긴 아닙니다. 정확하게 예수가 누군지, 그 메시아의 역할이 본질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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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지를 100% 알고 한얘긴 아니에요. Fact를 얘기한 거에요. 내가 누굴 만났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사렛 사람이더라. 요셉의 아들 나사렛 사람이더라. 그런데 그 사람이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바로 그 사람이더라. Fact를얘기했어요. 그러자 그 나다나엘이 소극적인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반론을 한번 들어봅시다. 47절 다같이. 아 46절 다같이 시작
46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첫째 나다나엘의 소극적 반론이 뭐냐 하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이 선한 것이라는 것은, 그들이 구약으로부터 기다리던 그 메시아. 어떻게 그런 동네에서 그런위대한 분이 날수 있겠느냐? 반론을 제기해요. 자, 여기 역설의 경이로움이 감춰져 있습니다. 여러분, 이 나다나엘은 나사렛 동네에서 가까운 지역의 출신이어서 그 나사렛이 어떤 동네인지 알아요. 우리고 과거 이 서울 근교에 가까운데 어디 출신 하면 아휴, 거기살았어? 거기 출신이야? 할 정도의 험하고 가난한 동네 사람들이대명사처럼 있었어요. 무슨 무슨 도 사람들. 그래서 거기에서많은 청년들이 가서 야학도 열어주고 청소년들을 돌보기도 하고 그랬죠? 소설의 주제로도 등장을 하고. 어디 어디 사람들. 그 쓰레기를 전부 거기 갖다 매립하는 바람에대명사가 됐죠. 사람이 살 수 없는 땅. 그런데 지금은 거기골프장도 생기고 웬만한 돈 가지고 들어가 살 수 없는 땅이 되고 말았어요. 그 지면을 얘기하면 집값떨어질까 봐 공개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으니까. 서울에 몇 군데 그런 대명사 같은 동네가 사실은 있었어요.
자, 그런데 나사렛은 그보다더 훨씬 슬픈 군상들이 그 불운한 운명을 부대끼면서 살아가던 작고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동네인걸 나다나엘이 다 알아요. 그래서 반론을 제기한 거에요. 그런 동네에서 무슨 선한 게 날 수있겠느냐? 여기 왜 역설의 경의가 담겨 있냐 하면 하나님의 섭리나 일이 신기해요. 항상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보리떡 같은 모습으로 희미한 모습으로, 작은모습으로, 볼품없는 모습으로 만져지거나 다가오거나 시작을 해요. 그래서사람들이 다 그걸 놓쳐 버리고 보지 못하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런 것을 놓치지 않고 보려면 어떻게해야 할까요? 마음이 가난해지고 낮아지고 작아져야 해요. 그래서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낮고 겸손하고 작은 마음이, 가난한 마음이 될 때 그것이 보여져요. 그래서 성경도 뭐라 그랬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그랬어요. 복이 있다. 예수님도 그런 볼품없는 모습으로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마을에서 오셨잖아요. 그런데 이상하죠? 하나님이 일은 늘그렇게 시작해요.
제가 선교지 청년들을 따라 다녀보면 그저 교회 등록한지 몇 주 안되는 청년이, 사영리도 겨우 더듬더듬 외울 둥 말 둥 한 채로 따라왔어요. 쟤가 뭐 할까 싶은데 형들 따라다니면 막 전해요 또. 중국 말로전하고 캄보디아 말로 전하고. 그리고 몇 년 후에 그 청년이 지나갔던 자리를 보면 놀랍게도 그 때 그복음을 받았던 누군가가 그 지역의 일군이 되고 그 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가 되어서 우뚝 자라있는 모습을 본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일은 늘 그렇게 시작이 돼요. 그런데 우리 주변에 사실은일상 속에도 그런게 너무 많아요. 저 청년이 뭘 하겠냐 싶은데, 그속에 보석이 숨어있고 하나님의 큰 경이로움과 역사가 숨어있어요. 이것을 볼 줄 아는 눈이 복이 있는눈이에요. 그런데 대부부의 사람들이 마음이 높아있고 허황돼있고 큰 거와 번듯한 것만 찾다 보니까 그하나님이 기호처럼 툭툭툭 감춰 놓은 경이로움과 은총들을 다 유실해 버린다고요. 우리가 같이 그냥 청년부에있을 때는, 대청진에 있을 때는 아, 그냥 그런 청년인가보다. 돌멩이처럼 굴러 다니는 청년인줄 알았는데 그 보리떡 같았던 청년이 얼마 후 아주 번듯하고 반듯한 모습으로 현실앞에 우뚝 서있는 모습을 불쑥 불쑥 만나게 되는 거죠. 그걸 볼 수 있어야 돼요. 처음부터 크고 대단하고 제대로 된 것만 찾지 말고. 어떤 자매는그냥 일도 없고 늘 그런 청년인데 한 가지에 꽂힌 거에요. 1년 내내 똑 같은 옷만 입고 다니더래요. 그 청년이. 아, 저정도 고집과 뚝심이면 뭘 해도 하겠다 싶어서 꽂혀서 결혼을 한 자매가 있어요 그런 거죠. 그래서 여러분오늘 자기 주변을 다시 보세요. 다시. 아, 내가 미쳐 못 보고 놓쳐버린 그 하나님의 역설이 담아진 경이로운 인물이 누굴까 생각을 해보란 거에요. 정말이에요. 참, 하나님은그런 모습으로 우리 옆에다가 툭툭툭 은총과 복을 그냥 놔둘 때가 있는데 그걸 못 본단 말이에요. 나사렛에서무슨 선한 게 나겠느냐? 이걸 뽑아내야 돼요. 믿으십니까? 자, 그런데 이 반응을 빌립이 딱 보고는 뭐라고 얘길 하냐 하면46절 하반절에 보세요.
46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자 저를 보세요 따라서 해볼까요? 와서 보라! 여러분 저는 이 담백한 빌립의 표현을 너무 좋아해요. 이 표현 속에 제 존재의 가치가 담아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와서 보라는 말은 빌립이 originality를 갖고 있지 않아요.빌립이 처음 한 얘기가 아니에요. 39절을 보시면 이 이야기를누가 벌써 하셨어요. 39절 다같이 시작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누가 이 표현을 먼저 썼나요? 예수님이 먼저 쓰셨어요. 예수님이 뭐 말을 못하십니까? 설득을 못하시겠습니까? 그냥 설명하고, 설득하고, 선포하고 그러질 않아요.예수님도 빌립처럼 뭐라 하셨어요? 와서 보라. 자, 여러분에게 한번 여쭤볼게요.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알고 믿었나요? 믿고 알았나요? 어느 쪽이에요? 아, 질문 자체를 잘 모르시겠어요? 다시요. 알고 믿었나요? 믿고 알았나요? 믿고알았죠. 믿고 알았죠. 누가 예수를 알고 믿어요. 그런데 우리는 전도나 선교나 인생의 이해에 대해서, 신앙이라는 여정에대해서 어떤 오해를 갖냐 하면 한 걸음, 한 걸음 설득이 되고 이해가 되고 해석이 되어야 한 발자국뗀다고 생각을 해요. 아니에요. 우린 믿고 가는 것이고 믿고아는 거에요. 요단강이 갈라진 것은 제사장들이, 백성들이갈라질 걸 알고 들어갔습니까? 믿고 들어갔습니까? 믿고 들어간거에요. 기독교는 논리나 이해나 설득으로 깨달아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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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신이신 그 그리스도가 죄인의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송태근이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여러분 그게 논리로 설명이 되겠어요? 이성으로 설명이되겠어요? 설득으로 이해가 되겠어요? 안돼요. 가장 비논리적인 사건이 내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이에요. 맞죠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은 믿고 가는 거지, 알고 믿는 게 아니에요. 와서 보라! 우리 청년들이 뭐 잘 모르지만 형이 가자 그래서, 간사님이 가자 그래서, 진장이 눈치를 줘서 그냥 따라 나섰다가 자기도잘 모르는 내용을 전하다가 누구를 알게 되는 거에요? 먼저? 사실은자기가 은혜를 받는 거죠. 그게 경이로운 역설이에요. 와서보라! 이 말 자체는 왜 이런 방법을 쓰셨는가 하면 그 근거가 너한테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다행이죠. 내 행동의 여부에 따라 인생의 모든 결론과 결과가 나온다면끔찍하죠. 큰일날 뻔 했죠. 그것이 내게 근거하지 않고 내게근거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오직 어린 양의 공로로 자, 여러분그 다음 절을 보실까요?
47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뭐가 없도다? 간사한 것이 없도다
여러분 이 본문을 오해하시면 안돼요.나다나엘에 대한 어떤 삶의 평가와 그 성품의 평가를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게 아닙니다. 이말은 사실 우리의 모습을 선포하시는 거에요. 여기 간사한 것이 없도다 라는 말은 시편 32편을 한번 띄워 주세요.
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 가려진 자 라는 표현을썼죠? 지난 주에 기억이 나십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했을 때 지고 간다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그 가는 길에 걸림돌, 죄 이런 것을 덮고, 치우고, 제거하고, 가린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자. 그래서 세상 죄를 지고 간다 할 때 그 지고 간다는 말이 치우다,제거하다, 덮다 그 말이에요. 그러면 자신의죄가 가리워진 자는 누구의 공로로 가리워졌다는 얘길까요? 어린 양의 공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공로로. 그 다음에 2절을 보세요.
2 마음에 뭐가 없고? 간사함이 없고
그래서 간사라는 말은 그래서그 마음에 제거됐기 때문에 어떤 미끼가 없다 그 말이에요.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간사함의 대명사는 누굽니까? 창세기 27장을 띄워 주세요.27장 다같이 시작
35 이삭이 이르되 네아우가 와서 속여네 복을 빼앗았도다
네, ‘속여’ 이게 간사란 뜻이에요. 속여. 형을 속였죠. 거슬러 올라가서 아버지를 속여요. 형에게 돌아갈 축복을 뺏기 위해서. 잘 보세요. 이 본문을 그대로 두십시오. 그 복은 원래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기로작정하셨어요. 맞죠? 그런데 그것을 누구의 힘으로 뺏죠? 자기 힘으로 뺏어요. 자기 힘으로.그러면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복 주기로 계획하셨는데 그걸 자기 힘으로 가져요. 그러면 누구를 대신하는 자리에 야곱이 올라가 있는 겁니까? 그렇죠.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리에 자기가 올라가있는 거에요. 하나님이 주시기로작정한 복을 자기가 애써서 조건을 달아가지고 형한테 뺏어요. 그게 속이는 것이고 간사한 것이고 이 간사라는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원문에는 미끼라고 돼있어요. 미끼. 늘하나님과 거래하는 인생. 대표적인 인물이 누굽니까? 야곱이에요. 자, 다시 본문을 보세요. 오늘본문.
참으로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라는 말은 나다나엘 자체가 그런 사람이라는 표현 이전에, 우리 모두를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하나님 쪽에서의 선언이에요. 우리를뭘 만들겠다는 겁니까? 참 이스라엘로 만들겠다는 거죠? 그리고우리 마음 속에 뭘 치우시고? 간사함을 제거하시고, 그런데그 간사함은 누가 대신 제거하시는 거죠? 어린 양. 세상죄를 지고 가다 할 때 그 ‘지고 가다’가 그 간사한 모든것들을 치우고 덮고 제거하시는 거에요. 어린 양의 공로로 우리는 참 이스라엘이 되어 가겠죠. 그 선언을 명제적으로 여기 선포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향해서. 이것은 나다나엘 개인에 대한 문제가 아니에요. 자, 그러자 48절 다같이 시작
48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자 이제 여기 그 신기한 예수님의 대답과 표현이 등장을 해요.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다. 도대체 무화과 나무 아래라는게 무슨 뜻일까? 그냥 나무 그날 아래 한가롭게 쉬고 좀 있었나 보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선 구약적 의미와 예수님 당시에 무화과 나무 아래라는 사회적 통념을 두 가지를 알아야 해요. 열왕기상을 띄워 주세요.
25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화로운 상태를 무화과 나무 아래라는 표현을 수사적으로씁니다. 솔로몬 시대의 그 평안함을 포도나무 아래와 풍요를 얘기하겠죠?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어떻게 살았더라? 평안히 살았더라.그래서 무화과 나무라는 것은 평안에 대한 갈구와 허기를 얘기하는 거에요. 자, 그러면 또 하나. 예수님 당시에 사회적 통념으로 무화과 나무 아래라는것은 뭘까? 이것은 너무 유명한 얘긴데 주로 무화과 나무 아래 앉았다 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가르침을 받고 대화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는 태도를 얘기합니다. 그러면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서 하나님의말씀을 대화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연구하고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뭐에 대한 갈망, 뭐에 대한 허기일까요? 참된 안식과 참된 평안에 대한. 그 시대가 폭력의 시대에요. 오늘 시대와 같이 황금만능주의의 시대에요. 로마의 철권 통치 아래서백성들은 오로지 희망 하나는 구약의 우리 선조들이 오리라 약속한 그 메시아가 와서 이 시대의 허기와 폭력에 신음하는 이 백성들에게 참된 안식과참된 평안과 쉼을 가져다 줄 그 분은 언제 오시는가? 무화과 나무 아래서 그 허기에 가득 차 하나님의말씀을 붙들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있었어요.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서 그런 영적인 허기에 목말라 있는것을 내가 보았다 그 말이에요. 이해가 돼요 여러분? 자, 그러자 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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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49절을 보세요.
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임금이로소이다 50절 다같이 시작.
5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이것은 나다나엘의 작은 믿음을 폄하하는 게 아니에요. “너 내가 너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걸 보았다니까 그제서야 나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인정하냐?” 그 얘기가 아니라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런데 이것은 약과다 네가 더 큰 일을 볼 것이다.” 아니, 메시아를 만난 일보다 더 큰 일? 도대체 그 일이 뭐란 말입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뭐죠? 더 큰 일을 보리라. 그런데 불행하게도 여러분들의 얼굴에는 그 더큰 일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어요. 지금. 네? 더 큰 일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도대체 메시아를 만난 것 이상으로 더 큰 일이 뭘까요? 이런거죠. 자 여러분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가 예수를 만났다는것은 만난 걸로 다 된 겁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 만난 걸로 끝난겁니까? 그 만남을 통해서 둘이 만들어갈, 더 무지개빛깔같은 앞으로의 인생이 더 기대가 되는 거죠. 그래야 맞는 거 아니겠어요? 우리가 글을 배운다는 것은 글을 배워서 읽는 것으로 끝난 겁니까? 그내용 안에 부요한 사상과 철학과 의미와 내용으로 들어가야 글을 배우는 목적이 맞듯이, “네가 메시아만난 걸로 그게 끝인 줄 아느냐? 아니야, 그건 아무것도아니야.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야, 도대체 그렇다면 거기서 말한 더 큰 일은 뭘까? 그러면서 이런 얘길해요. 오늘 본론이면서 결론입니다. 51절 다같이 시작
51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이게 더 큰 일이래요. 이게뭘 얘기하는 걸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게 된 이 출처가 어딘가를 좀 알아 볼 필요가있어요. 인자 위에 하늘이 열리고, 이 하늘이 열렸다는 말이완료형 분사형 형태를 썼어요. 그 말은 늘 열려 있어요. 하늘이늘 열려 있어요. 구약시대처럼 닫혔다 열렸다 하는 게 아니라 하늘이 늘 열려 있어요. 그런데 그 늘 열려 있는 하늘로 인자 위에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걸 보게 될 것이에요. 점점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 뭘 애기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우리는 이 의미를 알기 위해선 예수님이 인용한 구약의 원 출처로 떠나보는 수 밖에 도리가 없어요. 창세기28장 다같이 엽니다. 창세기 28장 자막 없어요. 빨리 찾으세요.28장 열어놓으시고 저를 보세요. 여러분, 28장은야곱이 이제 드디어 형을 속이고 아버지 속인 대가로 지금 집안이 폭풍 전야에요. 그래서 엄마가 이러다가한 날 한 시에 두 아들을 잃겠구나 생각을 해서 사랑하는 아들 야곱에게 봇짐을 하나 싸게 합니다. 그리고등을 밀어서 형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저 외삼촌 댁에 좀 갔다 와라. 떠나 보내요. 처음으로 집이라는 안전한 둥지를 떠나는 겁니다. 한참 길을 걷다가한 밤을 만나요. 찬 이슬을 맞으며 산 어느 중턱에서 돌을 베개하고 누웠는데 하늘을 보니 별이 총총박히고 그 별을 헤면서 그가 잠이 들어요. 성경에 등장한 최초의 노숙자가 되는 거죠. 그런데 원래 히브리 법에 가장 중요한 법 중의 하나가 나그네 환대법이라는 게 있어서 절대 나그네들이 노숙을하면 안돼요. 노숙을 하면 그 마음의 수치입니다. 체면 문화때문에 또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 과부, 고아, 나그네는돌아 보도록 돼있어요. 그런데 여기 지금 왠걸 야곱은 그마저도 상황이 안돼서 노숙을 한다는 것은 이세상에 처절하게 혼자란 얘기에요. 누구도 그를 돌보거나 함께 하지 않고 있단 얘기에요. 완전히 세상으로부터 등돌림을 당한 야곱,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그런 운명의 시간을 붙들고, 여기가 끝인가 보오 그런 마음으로 이 예배를 찾은 분이 혹 있을 수 있어요. 길도 없고 답도 없고, 내가 처한 상황이 설득도 해석도 이해도 안될 때 마치 야곱은 그런 밤을 만난 거죠. 누구도 맞아주지 않는 밤.온 세상이 눈을 돌린 밤, 그 때 그 때 철저히 홀로라고 생각한 그 밤에 하나님이 드디어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야곱의 인생 속에 찾아오십니다. 그러면서 이런 얘길 하십니다 .10절 시작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여러분 앞을 보세요. 꿈을꾸는데 꿈에 사닥다리가 보여요. 사닥다리가 서있어요. 그런데여쭤 봅니다. 사닥다리는 뭐 하는데 쓰는 겁니까? 뭐 하는데쓰는 거에요?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요. 인간은 늘 올라가는데쓴다고 대답해요 .그런데 여기 지금 사닥다리는 올라가려고 놓여져 있습니까? 내려가려고 놓여져 있습니까? 예,누가? 하나님의 사자가, 은혜로 지금 이 사닥다리를타고 고독한 밤을 만난 야곱의 인생 속에 찾아 오시는 사건이에요. 그러면서 이런 얘길 해요.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어! 지금이거 어디서 본 본문하고 똑같죠? 바로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이 더 큰 일을 보리라 말씀하시면서 하셨던내용과 일치하는 내용이 여기서 인용을 한 겁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누구 얘기를 하고싶은 거에요? 야곱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에요. 야곱의이야기. 그럼 야곱은 여기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을 하는가를 알아야 해요. 성경을 볼까요? 1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자, 여러분 15절은 굉장히 중요합니다.15절은 내가 너와 어떻게 해요? 함께 있고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그리고 끝에는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에요?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대요. 자,그럼 이상하잖아요? 어떤 의문이 드냐 하면 아니, 어차피함께 해주시고 지키시고 돌보시고 하시면서 이 땅에 결국은 돌아오게 하겠다면
(40:01-44:47)
더 좋은 건 뭐죠? 안 떠나 보내는 게 젤 좋잖아요. 그렇잖아요. 아예 이 먼 먼 외롭고 무서운 길을 안 떠나게 하면 더 좋잖아요. 군대안 갔다 오면 더 좋잖아요. 왜 갔다 오게 해요? 여러분, 야곱이 이렇게 해서 20년이 걸립니다. 돌아오는 데, 여기로 돌아오는데 20년이걸려요. 20년 동안 이제 군대말로 뺑뺑이를 돈 거죠. 군대에서제일 심한 벌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경험한 것으로는 선착순입니다. 100m 전방 앞에 전봇대까지 돌아오는데 선착순 다섯 명, 끝까지뛰게 해요. 엄청난 벌이죠. 그런데 나중에 허파가 입에 나와요. 나중에. 그런데 그게 겪을 때는 벌인 줄 알았는데 그거 4주 하고 나면 다리가 튼튼해지고, 심장이 두 개 달린 사나이가 돼요. 자, 왜 돌아오게 할까요? 야곱은이 속에 이중적인 의미가 감춰져 있습니다. 돌아오게 해야 그의 인생 속에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하나님과 deal을 하고자 하는 그 간사함이 뽑혀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결정적인 밤이 언제에요? 돌아오던 길에 악착같이 마지막 끝을 붙잡고 놓지 않자 환도 뼈를 쳐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날이 밝으며 떠나려 하자 그제서야 이게 무슨 뜻인 줄 야곱이 알아먹고 하나님 도포 자락을붙들고 외마디 비명이 뭐예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자, 이 고백으로 넘어오는데 20년걸려요. 사람이 얼마나 독종인지 아십니까? 이 고백으로 넘어오는데20년이 걸렸어요. 여러분,이거에요. 그래서 돌아오게 하는 겁니다. 이것은하나님이 택한 하나님의 백성인 야곱 속에 참 이스라엘이 되기까지 돌리는 거에요. 군대 말로 뺑뺑이를돌리는 거에요. 그래서 그 안에 계속 수많은 불순물들을 뽑아내는 겁니다. 이것 뽑아내면 또 이게 생기고 이것 뽑아내면 또 이게 생기고. 그런데인간이 고집스러움만큼 하나님도 고집이 장난 아니에요. 그 고집의 별명이 영원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우리는 지가 기껏 욕심 부려봐야 7~80 부리는 거에요. 요즘은 90까지부린다고 그래요. 위험한 노후죠. 여러분, 결국 나다나엘을 향해서 참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참 이스라엘 만듭니까? 안 만듭니까? 이스라엘 만들잖아요.그리고 그 안에 간사한 것을 뽑아내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신다는 거에요? 네가 나를 메시아로 만났다고 해서 다 된 줄 아느냐? 그것보다 더큰 일을 보리라. 우리의 눈물 속에 함께 해주시고 고단한 여정 속에 함께 해주시고, 우리의 슬픔 속에 함께 해주시고 내가 끝까지 내 인생의 추적자가 되겠다. 이선언을 하고 들어가시는 겁니다. 믿습니까? 오늘도 이 말씀과이 약속이 길이 보이지 않는 여러분들의 또 한 주간의 삶 속에도 철저한, 선명한 약속의 말씀으로 새로워지기를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다 일어나십시다. 주는 완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