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서 강해(04)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라
욜2: 28-32
1.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4.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5.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00:00-10:00)
오늘은 요엘서 마지막 부분을 읽었는데 사실 18절부터 내용을 봐야해요. 그래서 18절부터 간단간단하게 본 후에 28절부터 집중적으로 생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
자 여러분, 여기실 것이라는 표현은 미래형으로 썼습니까? 과거형으로 썼습니까? 여기실 것이다 라는 미래형 속에는 어떤 조건이 있단 말이에요. 뭐뭐하면 이렇게 해 줄 것이다 이 뜻이에요. 사실은. 그럼 무엇이 전제되어야 할까요? 회개. 회개하면,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 그런데 여기실 그 문장 곁에 숫자로 2라고 붙어 있어요. 2. 밑에 보면 '히브리 말에는 과거사를 썼음'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건 원래 이렇게 읽어야 해요.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 과거사로 써야 해요. 이게 원문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미래형으로 썼어요. 미래형으로 썼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회개하면 불쌍히 여겨줄게. 긍휼을 베풀어 줄게 이 뜻이에요. 이 말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에요. 순리적으로는. 그런데 원문은 무슨 형으로 썼다고요? 과거형으로 썼어요. 자 그럼 이게 무슨 뜻이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이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우리에게 회개가 가능해졌다 그 말이에요. 이해가 되요? 전자가 미래형이 근본적인 말씀입니까? 과거형이 근본적인 말씀입니까? 과거형입니다. 우리가 이해했고 우리가 배워왔던 구원관도 사실은 과거형이 맞습니다. 우리 알잖아요. 저부터 내 안에는 갱신의 능력이나 자정 능력이 없다는 것,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한 존재임을 알잖아요. 우리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마저도 사실은 그 근거가 어디서부터 출발합니까?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결과에요. 불쌍히 여기심의 결과라고요. 그래서 여러분 13절을 한번 볼까요?
1.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바로 우리의 회개도 하나님의 선제적 긍휼이 있었기에 그 구원 받은 은혜로 회개라는 반응이 나오는 거라고요.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자비가 기초된 은혜에요. 자, 그러면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떤 회복을 약속하시는가? 첫째 19절.
1.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말미암아 흡족하리라
1장, 2장 상반 절까지는 완전히 황폐화되어 재앙과 심판이 예고되었고 제사장들이 제사를 멈췄어요. 전제와 소제를 드려야 하는데 농사가 되야 예물을 가져올 것 아녜요. 그런데 그것이 다 회복이 될 것이다. 농사와 파종과 자연계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어요. 두 번째 회복에 대한 약속은 20절입니다. 같이 봅시다. 시작
1.
내가 북쪽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리니 그 앞의 부대는 동해로, 그 뒤의 부대는 서해로 들어갈 것이라 상한 냄새가 일어나고 악취가 오르리니 이는 큰 일을 행하였음이니라 하시리라
아멘. 자 여러분, 두 번째는 북쪽 군대, 하나님께 이 백성들의 우상 숭배의 죄를 처벌하시기 위해서 북쪽 군대가 밀려 들어와 심판과 싹 쓸어갈 것을 예고하셨어요. 그런데 그것을 치워 버리겠다. 그 군대의 공격을 메마른 땅으로 던져 버리겠다. 그래서 너희들을 재난을 주고 공격하려 했던 모든 것들을 썩은 냄새가 나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까 군사적인 물리적 위협도 하나님이 회복을 약속하셨어요. 또 21절을 볼까요?
1.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음이로다
이 큰 일은 구원을 얘기합니다. 언제나 구원을 설명할 때는 하나님의 큰 일이라고 수사어를 표현합니다. 큰 일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얘기하는 거에요. 자 그러면 이쯤 머물러 서서 우리가 생각해 볼게 하나 있어요. 과연 예수를 믿고 산다는 문제가 재난을 면하고, 고난을 피하고, 환난의 고비를 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의 전부냐? 기독교가 그것만으로 위안이 되야 할까요? 우리가 믿는 복음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그저 위급할 때 빌어서 잘못을 용서받고 그 재난을 모면하고 환란을 피하고 인생의 고비를 넘어가고 모면하는 그것이 기독교인의 특권이어야만 할까요? 그러면 기독교가 너무 가난한 거죠. 너무 비참한 거죠. 여느 종교의 신앙과 뭐가 다르겠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제 오늘은 우리가 그 너머 그렇다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서 우리가 신앙인으로 이 광야와 같은, 주 밖에는 바라 볼 것이 없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게 의미가 던져지고 보람이 있다는 얘길까? 오늘 그 얘기를 좀 요엘서를 통해 만나보게 될 건데 23절을 보십시다.
(10:01-20:00)
중요하니까 함께 읽도록 하십시다. 다같이 시작.
1.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우리 신명기서 한 절을 더 볼까요? 11장에 보시면 비슷한 얘기가 이미 오래 전에 선지자들에 특별히 모세의 글을 통해 예시되었었어요. 제가 읽겠습니다.
1.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2.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무슨 비? 이른 비, 늦은 비를 어떤 때에?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자, 여기 신명기 11장에 보니까 여기에도 이른 비가 나오고 늦은 비가 나오고 또 적당한 때에 내리는 비라고 소개를 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하게 주신다. 적당한 때에 주신다 다 맞는 표현이에요.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이렇게 소개되어 있죠. 23절을 보세요.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어떻게 주시리니?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자, 여기서 이제 이 비가 뭔가에 대해서 좀 새로운 관점으로 이해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른 비 라고 할 때는 히브리 말에 무슨 말을 쓰냐 하면 한번 참고로 따라 하면 좋겠어요. 하무레. 다시요. 하무레. 이른 비. 여기에서 하를 빼고 뒤에 무레 하면 이게 무슨 뜻이 되냐 하면 교사, 스승, 가르침 이 뜻이 돼요. 사실 요엘 선지자의 어떤 메시지를 담은 wordplay에요. 그리고 그 뒤에 적당한 비. 이 적당하다 할 때는 대충, 대강 이런 개념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적당한 때의 ‘적당함’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얘기해요. 하나님의 의로움이라는 것은 바르고 정확한 것을 얘기에요. 그게 하나님의 공평하심이에요. 의. 그러면 무레, 하무레. 교사, 스승, 가르침이에요. 그 다음에 ‘적당한’은 ‘하나님의 의’를 얘기하는 거에요. 이걸 연결 시켜서 조어를 해보면 뭐가 됩니까? 의의 교사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른 비는 뭐에요? 의의 교사에요. 의의 교사. 그러면 의의 교사가 있었나? 성경에? 지금 의의 교사를 내리시겠다는 거에요. 우리 요한복음 16장을 한번 볼까요? 같이 읽습니다.
1.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초등학교 아이들 앉혀놓고 수학 같은 거 가르쳐 보면 화도 나고 애들이 감당을 못하잖아요 그런 애들한테 미분, 적분을 들이대면 감당을 못해요.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우리 12절을 다시 볼까요?
1.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얼마나 깜깜했으면, 예수님이 이 깜깜이들 앉혀 놓고 가르치는데 못 알아먹어요.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 지러 죽으러 가시는데 누가 크냐? 길거리에서 자리 다툼하고 앉았고. 그러니 그 답답함이 얼마나 컸겠어요? 그런데 그 다음 절을 볼까요? 그러나 누가 오시면? 옳지.
1.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할렐루야! 그러니까 성경의 의의 교사는 누구를 가리키는 거에요? 성령님을 가리키는 거에요. 성령님이 성경에서 말하는 이른 비에요. 의의 교사. 그래서 성령님은 오셔서 우리에게 어떤 파워를 갖게 하고 투시의 은사를 갖게 하고. 내년 이 맘 때쯤 귀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거 가르쳐 주시는 분이 아니에요. 성령님의 오로지 일관된 초점과 관심은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진리를 우리에게 열어서 깨우쳐 주시고 가르쳐 주시는 분이에요. 그래서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의 성품답게 다른 이를 드러내고 겸손한 스타일로 바뀌는 겁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한국 교회는 성령 충만 받았다 하면 무서워. 일단. 눈빛이 형광 빛이 되고 겁이 나요. 자꾸 뭐 봤다 그러고. 뭘 봐. 보기는. 자꾸 보인다 그러고. 이런 사람들 보면 참 답이 안 나와요. 답이. 성령님의 역할은 오셔서 첫 번째 진리를 열어 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주가 시인할 자가 없느니라. 그가 오셔서 하는 일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열어주시는 거에요. 믿습니까? 자, 다시 오늘 요엘서를 보십시다. 그럼 늦은 비는 뭐에요? 자, 물어봅시다. 이른 비는 몇 월에 오는 비가 이른 비에요? 유대에서. 이른 비는 10월에서 11월까지 입니다. 우리 농사 시간 개념하고 완전 반대에요. 이때 이른 비는 파종을 한 다음에, 씨를 뿌린 다음에 그 씨가 흙이 보들보들해져서 땅 밑에까지 착근해서 바람이 좀 불어도 흔들리지 않게끔 유지시켜 주는 비가 이른 비에요. 성령님의 역할이 그 역할이란 말이에요. 오셔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그러면 이제 무슨 비가 남았나요? 늦은 비는 봄비에요. 유대인들이 이때 거둬요. 그래서 늦은 비는 결실을 재촉하는 비에요. 그러면 그때 열매가 맺어집니다. 열매. 그래서 이 늦은 비는 누구를 가리키는 건가 하면 incarnation하셔서 예수님이 오시어 부활의 무슨 열매가 되셨죠? 첫 열매가 되신 거에요. 그러니까 이른 비는 성령님을 말하는 것이고, 이 성령님은 오셔서 이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이 땅에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어 우리를 구속하실 그 구속의 완성을 이루기까지 성령님이 이 역할을 도와주시는 거에요. 믿습니까? 이른 비와 늦은 비에 대해 헷갈리면 안돼요. 그러면 그 늦은 비와 이른 비를 주시는데 28절로 건너뜁니다.
1.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누구에게 부어줘요? 만민에게
자, 여러분, 만민에게 라는 말에도 풋노트가 붙어있어요. 원래 원문에는 어떤 단어로
(20:01-30:00)
쓰여져야 옳은가 하면 ‘모든 육체’란 뜻입니다. 이 원문 그대로 직역을 했어야 하는데 ‘모든 육체’라는 말이 이 뜻을 드러내는데 굉장히 선명한 개념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그냥 ‘만민이’ 이래 버렸어요. 좀 번역이 아쉬워요. 그렇다고 오역은 아니나 진의를 드러내는 데는 좀 아쉬움이 있어요. 왜냐하면 ‘모든 육체’ 라고 할 때는 뭐의 반대 개념으로써의 ‘모든 육체’인가 하면, ‘영적인 것’의 반대 개념으로써 육체 입니다. 자, 창세기 1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타락을 해요. 그래서 에덴에서 쫓겨나는데 에덴 어느 쪽으로 쫓겨나죠? 동쪽. 동쪽으로 쫓겨나요. 그래서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 때 지성소로 들어오기 위해서 입구를 어느 쪽에 만들죠? 동쪽에 만들어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회복하기 위해서 이들이 제사장들이 동쪽 문으로 들어와야 해요. 에덴의 회복을 여기서 약속하고 있는 거죠. 그렇게 인류는 쫓겨나요. 동쪽으로. 그래서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창세기 6장이 이런 말씀이 있어요.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누가 좋아하는? 자기들이 좋아하는. 다음 절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뭐가 되었다 그랬어요? 육신이 됨이라
하나님과 반대되는 개념에 그냥 물질 덩어리들이 되었다 그 말이에요.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면 고깃덩어리에 불과해요. 주 떠나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주님 떠나가시면 우린 아무것도 아니에요. 먼지 덩어리에요. 오물 덩어리에요. 육체가 되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회복을 위해서 오늘 요엘 선지자를 통해 내가 그 죽은 육체에 만민이 아니라, 육체에 이 진리를 수납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그 모든 육체에 뭘 부어주겠다는 거에요? 내 영을 부어주겠다는 거에요. 여기서 내 영은 누구를 가리켰다고요? 오셔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성령님을 가리키는 거에요. 할렐루야! 그러면 성경을 또 보십시다. 28절
1.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자, 여기 지금 몇 종류의 단위의 사람이 등장했나요? 너희 자녀들, 늙은이, 젊은이, 남종, 여종 에게 부어주겠대요.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게 있어요. 두 가지를 조심해야 되는데 늙은이는 뭘 가리키는 거냐? 또 종은 어떤 범주를 가리키는 거냐? 여기에 일일이 해석을 달 필요가 없어요. 이건 전체적으로 봐야 해요. 여기서 말하고 싶은 진짜 의도는, 진의는 뭐냐 하면 여기에 강조점이 있는 거에요. 남녀 차별, 빈부 격차, 상하 차별 없이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을 어떡하겠다는 거에요? 이렇게 구별과 차별 없이 보내주시겠다는 걸 강조하는 거에요. 이렇게 단위를 구분하여 열거한 의도는 이상을 보고, 꿈을 꾸고 장래 일을 말할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고 참여하게 된다 그 뜻이에요.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무슨 투시의 은사를 받아가지고 어디 땅을 사면 대박이 될 거요. 교회를 기독교를 우상, 점쟁이 굿 하듯 그렇게 생각하면 안돼요. 이것은 이 영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만들고 하나님의 종말적 그림에 우리를 참여시킨다는 얘기를 이렇게 하는 거에요. 자,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여기서 같이 생각해 볼 과제가 하나 남아요. 이렇게 하나님이 영이 임했어요.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게 그럼 꿈일까? 이게 과연 그걸 말하고 싶은 걸까요? 우리 사도행전 2장을 보십시다.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이것이 최초로 성령이 공동체에 임한 그림이에요. 그리고 보세요. 다같이 시작.
1.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성령님이 놀랍게도 공동체에 임했지만 각 사람에게도 임했어요. 그리고 놀라운 교통이 이루어집니다. 각 나라 언어로 알아듣게 만들고 말해도 알아듣게 만들어요. 성령의 교통하심 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축도할 때, 지금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이 해도 틀린 거에요. 반듯이 성령을 통해서 축도를 할 때는 성령의 교통하심이 들어가야 합니다. 성령의 koinonia. 그게 교회 공동체의 중요한 특징이에요. 그러면 이렇게 이 땅에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새로 살아난 하나님의 백성들의 첫 교회 초대교회 공동체가 과연 뭘 했는가 봐야겠죠? 사도행전 6장을 보세요.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헬라파 유대인들은 이방 땅에서 태어난 유대인들을 말하는 거에요. diaspora라죠.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자기네 쪽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자꾸 제외돼요. 자꾸 그 구제에서 상대적으로 제외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히브리파 사람들을 순수 유대 본토인들을 원망한 거에요. 그래서 초대 교회는 첫 조직이 생깁니다. 집사 조직이 생겨요. 그리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을 전무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초대 교회가 성령 공동체가 최초로 한 일이 뭐에요? 긍휼 사업이에요. 과부들을 돕고 구제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이런 문제가 다 생겼습니다. 그리고 우리 10장으로 한번 넘어가 볼까요?
1.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뭐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여기 네 기도와 그랬는데 사실은 ‘네 경건과 구제’ 라 그래요. 그 말이 맞아요. 가장 경건한 삶의 실질적 태도는 구제입니다. 강남 스타일 하는데, 스타일 있죠. 부정하지 않아요. 그러면 삼일 교회 스타일은 무슨 스타일이 되어야 할까요? 선교 스타일? 긍휼 스타일이 되어야 해요. 이게 우리의
(30:01-37:37)
본성이 되고 DNA가 되어야 해요. 31절을 볼까요? 다같이 시작.
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하나님이 뭘 기억하셨다 그래요?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제가 요엘서를 준비하면서 이 대목에서 좀 멈춰 섰었어요. 왜 그랬는가 하면 우리가 맨날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야 한다, 영광을 돌려야 된다. 말은 종교적인 온갖 표현을 다 동원해서 하는데 과연 그 실체냐 뭐냐 그 말이에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의 마음에 교회가 계속 좇아 가는 거에요. 믿습니까? 그것이 우리 개개인의 스타일이 되어야 하고 우리 교회의 스타일이 되어야 해요. 제가 그 몇 년 전부터인지 모르지만 한 분씩 두 분씩, 한 4,5년 된 것 같네요. 우리 교회로 새벽에 서울역 가까이 계신 분들이 무작정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분들을 우리가 문을 닫아 걸거나 금하게 할 수 없다, 교회가. 해서 이분들을 맞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수가 늘어났어요. 처음에는 빵을 드렸어요. 우유와 함께. 그런데 이분들의 내장이 빵과 우유로 해결되는 내장이 아녔어요. 밥을 드려야 해요. 그래서 이걸 어떡하나 어떡하나 하다가 좀 우리가 힘들지만 이분들께 따뜻한 아침 밥을 드리자 해서 아침 밥을 대접하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찬이 좋아서 그런지 몰라도 하여간 폭발적으로 오시는 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걸 참된 부흥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그러니 이제 상대적으로 우리 청년들이 갈 자리가 없어진 거에요. 식당을 그분들이 식사 후에도 앉아서 커피도 마시고 하니까. 그래서 시간을 구분을 한 겁니다. 먼저 그분들 대접을 해드리고 빠져 나가면 성도와 청년들이 먹는 걸로.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진 거죠. 그래서 이걸 어떡하나 하다가, 코로나가 터지니까 급식소 같은 데가 다 문을 닫았어요. 그래서 올 데가 교회밖에 없는 거에요. 그래서 빵을 드리다가 컵밥을 드리다가 지금도 2,300분씩 새벽마다 공급을 받으세요. 빵만 드려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소예배실에 이분들 모셔놓고 많을 때는 150에서 200명 가까이 우선 간단하게 성경을 읽고 쉽게 성경을 풀어 주세요. 교역자님들이. 그리고 인생의 깊은 고뇌와 상담이 필요한 분들을 위해 권사님들이 상담을 해주세요. 이분들이 가장 큰 문제는 주거 문제에요. 거처가 없으니까 이 생활이 종지부를 찍지 못하는 거에요. 그래서 작년 부터인가 재작년 부터인가 길 건너에 고시텔을 여러 채 임대를 해서 지금 한 십여 가정을 거기에 머물면서 좀 자립을 하실 수 있도록, 거기 몇 분은 벌써 임대 아파트를 얻어 독립을 해서 나가기도 하고. 또 그분들이 작년 같은 경우 통영 선교를 같이 따라 갔어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은혜가 있었습니다. 자 여러분, 물론 그분들과 함께 하는 일이 그렇게 여러 가지가 복잡하고 쉬운 일이 아니에요. 얼마 전에는 용산에 모녀가 한 10년째 노숙을 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어요. 우리 담당 목사님이 자기 차를 가지고 가서 그 두 분을 모셔다가 고시텔에 모셔 놓고, 여러분들이 헌금한 재정을 생활비가 되도록 조금이지만 도와 드리고 그분들이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듣고 보니까 많은 인생의 아픈 사연들을 가진 분들이에요. 예수님이 뭐라 하셨어요? 내가 옥에 갇혔을 때 너희가 돌아보았고 내가 벗었을 때 너희가 입혀 주었고, 내가 굶주렸을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다. 그런데 정작 의인들은 뭐라고 반응을 했죠? 언제 예. 경상도 말로, 언제 예. 그러니까 자기들은 그걸 의식을 했단 말이에요? 못했단 말이에요? 의식을 못하고 했단 얘기에요. 여러분 이게 중요한 건데 의식을 못하고 했단 얘기는 무슨 말이 됩니까? 그러니까 본성으로 했다는 얘기에요. 어떤 본성? 육체적 본성이 아니라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본성으로 했다는 얘기에요. 이게 우리 스타일이어야 해요. 냄새 좀 나면 어때요? 예수님 냄새지. 냄새 좀 나면 어때요? 다 그럴 바엔 우리 단체로 비염 환자가 됩시다. 뭐 따지고 보면 그렇게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나도 얼마나 더러운지 몰라요. 자학적 설교인데, 이런 설교 다 안 하는데 저는 샤워하고 나서도 갈아입기 귀찮아서 그냥 뒤집어 입어요. 내가 이런 설교까진 안 하려 했어요. 뭐 뒤집어 보면 그렇게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런 교회가 불가능할까요? 가난한 자와 부자가. 빈한 자와 곤고한 자가, 낮은 자와 높은 자가 구분 없이 막힌 담을 헐고 함께 한 주를 노래하고 경배하고 예배할 수 있는 교회가 된다면. 거기에 주님의 시선이 머물지 않을까요? 그런 교회, 여러분들이 이룰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 일어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