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 (01)
“혼돈, 공허, 흑암”
창 1:2-5
1장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00:00-05:00)
창세기 강해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까지 서론이 될 수 있어요.
지난 시간에는 창세기의 기록된 목적, 그리고 모세가 어느 시점에서 기록했는지, 400년 동안 애굽의 문명 속에서 우상 숭배와 물질 문화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은혜로 광야로 인도해내죠. 그들이 만난 현실은 광야입니다. 애굽의 문명과 비교할 수 밖에 없겠죠. 게다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야훼에 대한 신앙은 희미해진 것을 넘어서 잊혀져 가던 때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황당한 현장을 마주하고 있어요. 잠시 시내산에 머무를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모세 오경을 기록하게 합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라는 책입니다. 이 책의 기록의 목적은 첫째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인간을 왜 구원하였고 인간이 처해진 상황은 얼마나 절망적인가, 그들이 들어가 점령하고 누려야 하는 가나안은 왜 하나님의 약속일 수 밖에 없는가.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오경을 기록케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난 시간에 창세기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다룬 중요한 서론이었어요.
오늘 우리가 창세기를 접근할 때, 여러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죠. 지난 시간에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짧은 첫 문장 속에 성경의 결론이 담아져 있다.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이라는 말 속에 이미 우리의 구속은 누구로부터 끝이 날 수 밖에 없고 시작될 수 밖에 없는가. 레쉬트라는 첫 열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결론으로 담고 있다는 거죠. 그런 시각에서 우리는 과학적인 논리나 사변학적인 논리로 책을 접근할 것이 아니라, 이 책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구원이 왜 인간에게 필요한지 설명하기 위한 관점을 담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본문을 보시면
2 땅이
성경에서 땅이라고 얘기할 때는 상징하는 것이 있어요. 이 문장뿐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창조의 기사는 사실 하나님의 구원을 암시하는 메시지가 감춰져 있을 때가 굉장히 많아요. 땅, 혹은 밭, 이것은 사람을 이야기 합니다. 혹은 사람의 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밭에 씨를 뿌리러 나갔는데 어떤 밭에서는 열매가 맺어지고 어떤 밭에서는 열매가 맺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씨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밭에 초점이 있어요. 밭은 인간의 마음을 얘기합니다. 땅이라고 하면 사람의 존재가 무엇인가를 이만큼 잘 설명하는 물질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를 사실상 땅에서 흙에서 취하십니다. 아담이라는 말은 흙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여기 "땅이"라고 시작할 때는, 천지창조의 포커스가 땅에 있는 것이지 우주 천지의 기원이 어떻게 시작되고, 오로라, 갤럭시의 거리가 어떻게 되고 이런 것을 설명하기 위한 의도가 있는 책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05:00-10:00)
땅에 창조의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성경기자는 그 땅의 첫 번째 모습을 세 단어로 묘사합니다. 첫째, 땅이 혼돈하고, 두 번째로는 공허하며, 세 번째로는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이 세 가지로 설명한 부분을 다음과 같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단어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고, 두 번째로는 이 세 가지 단어가 성경 전체에서 암시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겠습니다.
혼돈이라는 말은 어떤 형태가 갖추어지기 전이라는 뜻이에요. Form이 만들어지기 전이다라는 뜻이죠. 그렇다면 그 형태가 갖추어지기 전의 상태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아닌가? 그렇지 않죠. 1절에 이미 전제가 뭐였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창조의 기사가 가장 중요한 전제입니다. 그런데 그 처음의 모습은 '혼돈'이었어요. 여기서 혼돈이라 함은 무질서 이런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형태가 만들어 지기 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공간은 텅 비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공허입니다. 텅 비어있는 상태. 뒤집어 얘기하면 그곳에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하는 거죠. 세 번째로는 흑암이라고 합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말을 봅시다. 깊다라는 말은 계시록 20장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3 무저갱에 던져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여기에 무저갱이 나와요. 깊음이라는 뜻입니다. 무저갱이라는 말은 장소보다는 상태를 얘기하는 거예요. 끝 모를 깊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개념을 그대로 도입해보면 흑암이 어느 정도 깊냐 하면 깊이를 알 수 없는 끝없는 흑암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첫 번째 땅의 모습을 세 가지로 묘사했어요.
성경 전체에서 이 혼돈, 공허, 흑암이 나오는 창세기 기사를 언제 인용하는지 두 군데 찾아보겠습니다.
예레미야 4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매
혼돈, 공허, 흑암. 이것이 창세기에 나온 최초의 땅의 모습이에요.
예레미야가 이 이야기를 언제 하느냐.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공동체가 영적으로 완전히 바닥에 던져질 때. 하나님을 떠나고 배역하고 타락이 있을 때의 상태를 혼돈, 공허, 빛이 없는 흑암의 상태로 묘사합니다.
그 결과 25절.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그런 땅에서 사람이 살 수 없죠. 초목이 없다보니까 공중에 새들도 사라져버려요. 깃들 곳이 없으니까. 정확히 창세기 때의 모습이에요. 무언가 채워지고 틀이 잡히고 만들어지기 전에 태고의 땅의 모습이 그래요. 혼돈, 공허, 흑암 그런데 신약뿐 아니라 구약 전체에서 이런 상태를
(10:00-15:00)
영적으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타락해있을 때. 창세기의 이런 그림 속에서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무엇을 일깨워 주기 원하셨는가 하면, 인간이 지금 어떤 상태인가. 하나님을 떠났던 인류가 어떤 상태인가를 이런 물질적인 상태의 모습을 통해 암시하고 메시지를 담아주고 계신 겁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의 영. 엘로힘이 복수로 되어 있어요. 영은 성령님을 얘기합니다. 우리가 가끔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 무언인가 하면 창조는 성부 하나님만 하신 줄 알아요. 아닙니다. 창조는 삼위하나님이 같이 하신 합작품이에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셨어요. 여기에 특별히 하나님의 영, 로하으, 푸르마, 성령님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을 하세요. 운행하다. 운행하다라는 말에 대해 문자적으로, 영적으로 무슨 뜻인지 두 단계로 설명을 드릴게요
문자적으로, '운행하시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알을 품다는 뜻입니다 새가 알을 품다. 저는 젊은 시절에 새 가게에서 1년 정도 일을 해본 적이 있어요. 새들이 알을 낳으면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정성스럽게 정해진 기간 동안 알을 품어요. 그 기간이 지나면 껍질을 깨고 새끼들이 새로운 세계로 나오게 됩니다. 부화가 되면 둥지를 만들어서 새끼들에게 먹이를 날라주면서 키워요. 어느 정도 어미새가 계획한 기간이 지나면 갑자기 보금자리를 흩어버립니다. 그러면 아기 새들이 죽는다고 난리를 치고 갑자기 천길 낭떠러지 같은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는 거예요. 아직 어리니까 날개짓도 어설퍼요. 생존본능에 의해서 푸드덕거리고 난리가 납니다. 땅바닥에 부딪히기 직전에 어미새가 쏜 살 같이 날아서 넓은 날개를 펴고 새끼들을 다 받아냅니다. 그리고는 창공을 향해서 올라가요. 날개에 태워진 새끼들은 어휴 살았다 죽을 뻔 했네 싶은거죠.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올라가면 또 떨어트려요. 그러면 새끼들은 또 난리가 나죠. 이걸 몇 차례씩 반복해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하늘을 휙휙 날 수 있는 멋진 새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도 이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명기 32장
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5:00-20:00)
이스라엘 백성의 패역함을 견디시고 참으시면서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광야를 건너게 하셨는가.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위에서 보는 거죠. 그리고 곤두박질 칠 즈음에 쏜살같이 날아와 새끼를 받습니다.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하늘의 제왕인 독수리처럼 되기까지 이 모든 과정을 양육이라고 합니다. 사람도 열 달을 배에 품어요. 그리고 태어나면 제일 더디게 자라는 것이 인간 같아요. 사람에게도 그런 과정이 필요한 겁니다. 알에서 품는 과정에서부터 오늘 본문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핵심가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 하시니라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드러나는 거예요.
여기에서 하나 정리하고 들어갈 것이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데 딱하다 싶어서 구원해줄게 이런 구원이 아닌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 우리는 구원을 재창조라고 하죠. 특히 여기 소개된 하나님 창조의 핵심 정신과 가치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딱해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하시는 거예요. 그 사랑이 십자가 위에 확증되었다라고 로마서가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확증되었느니라. 창조의 역사도 결국 그 출발이, 삼위 하나님이 계시다가 우리 심심한데 한번 사람이나 만들어 볼까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에요. 우리를 사랑하셔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만드셨고, 구원의 그림을 창조의 그림에 이렇게 감춰놓으신 겁니다.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신 거예요. 구원의 선제적 가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창조의 가장 중요한 가치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의 중요한 identity가 되어야 해요. 그래서 성도는 적어도 이 사랑을 알고 경험한 자라면, 자기 생명과 자기 존재에 대해서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의외로 예수 믿는 분들 가운데 뜻밖에도 자존감이 낮은 분들이 많아요. 우리만큼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왜? 내 근거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세상을 만드셨어요. 우리를 가리켜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어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어요. 우리를 사랑하셔서 천지를 창조하셨어요. 그와 같이 아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그만큼 값을 지불해서 아까워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에요.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아들을 속량의 제물로 내어 놓으신 거예요. 이해가 됩니까?
저는 거꾸로 이해는 되는데 심정적으로 와 닿지는 않아요. 아니 어떻게 그렇게까지 그럴 수가 있을까. 이런 거죠. 집에 병들어 죽어가는 병아리를 살리기 위해서 내 아들을 삶아서 먹인 것과 같아요. 말이 되나요? 안되죠. 그런데 실제로 더 말이 안 되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아들과 병아리는 그래 봤자 피조물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렇게 속량하시면서 십자가에서 사랑을 확증해주셨다면,
(20:00-25:00)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존귀하고 사랑 받는 대상인 겁니까. 그랬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타락을 했어요. 포기하지 못하고 아들을 보내주신 거예요. 우리를 구속하고 다시 창조하시는 거예요. 그 재창조의 복음이 오늘 창조 기사 속에 빼곡히 감춰져 있는 겁니다. 창세기는 전부 복음이고,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처음에 빛을 만드셨어요. 그리고는 좋았더라고 표현하십니다.
좋았더라. 토브. 하나님의 적절함. 적당함과 적절함은 달라요. 적당한 것은 대충입니다. 적절하다는 것은 대충과 완전히 반대 개념입니다. 정확하게 합당하게 만드셨다는 겁니다. 이 세상을. 그것을 성경에서는 좋았더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시는가 하면, 1등하고 탁월함을 지향하도록 만들지 않으셨어요. 최고가 되라고 만들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설계하신 그 위치, 그 자리에 딱 맞도록 만드셨어요. 하나님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토브가 이것입니다. 이 개념을 정확히 설명하는 유명한 신약의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하나님의 선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의 토브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거예요. 우리는 그 전체 하나님의 그림을 보기까지 많은 과정이 필요하고 시간이 걸립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난제에 부딪힙니다. 오늘 본문 해석 중 가장 어려운 대목이에요. 빛의 정체입니다. 그러면 첫째 날 빛이 있으라 할 때의 빛이 무엇인가. 여러 학자들의 논문, 글을 내내 읽어봤는데 너무 견해가 다양해요. 읽다가 삼천포로 빠지다가 헷갈릴 지경에 왔어요. 대체적으로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어요. 첫째는 복음주의 학자들이 많이 채택하여 해석의 근거로 삼는 것인데, 이것을 태양으로 보지 않고, 태양이 만들어지기 전에, 해는 네 번째 날 등장하니까, 그 전에 어마어마한 에너지일 것이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니까 가능하겠죠. 그런데 그 해석을 따라서 성경을 풀어가다 보면 4절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여기에 걸려요. 지금까지 땅의 상태는 빛이 없고 어둠만 있었는데 빛이 있으라 하고 빛이 탄생하면서 빛과 어둠이 탄생한다 여기까지 좋아요.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이 해석이 설명이 어려운 거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라. 히브리인들에게 하루는 저녁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25:00-30:00)
하루가 끝이 나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빛이 있던 시간을 낯이라 하고 없는 시간을 밤이라 불렀다? 이걸 어떻게 해석할까요. 첫째날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태양이 아니라면 이게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또 한편에서는 이 빛을 태양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총신대학원의 우리 교단의 신학교죠, 구약을 가르치시는 김정우 박사님께서 이 첫째 날의 빛을 태양으로 해석합니다. 그 해석도 어디에 걸리는가 하면 네 번째 날의 광명체와 걸려요. 첫째 날의 빛을 태양으로 해석한다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이 부분 해석에 어려움이 없어요. 그런데 넷째날 14절
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8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첫째날 만든 것이 태양이 되면 그러면 넷째날 만든 건 뭐예요?
첫째날 만든 것은 태양이 맞고, 태양 없이 낮과 밤, 저녁 아침이 될 수 없죠. 둘째 셋째날 식물들의 존재도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첫째날의 빛을 태양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면, 그러면 넷째날의 내용은 뭘까요? 그 만들어진 첫째날의 태양을 중심으로 넷째날에 가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기능을 명령하셨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절기가 나누어지고, 태양을 중심으로 한 모든 질서가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게 되는 때가 넷째날이라다는 해석을 합니다. 그러면 넷째날의 설명과 해석에 충돌이 생기지 않아요. 문제는, 개인적으로 저는 후자의 해석을 채택합니다. 첫째날 빛을 태양으로 보는 거죠. 그리고 넷째날 내용을 하나님께서 해달별의 기능을 절기와 계절과 연을 나누시고 하는 모든 질서와 기능을 부여하신 것으로 받아들인 거죠. 이 가운데에서도 어떤 학자들의 이야기처럼 태양이전에 어마어마한 에너지라고 이해하시는 분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오늘 본문이 어떤 것을 채택해야 하느냐에 초점이 있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갤럭시의 빛이든 오로라의 빛이든 태양의 빛이든 성경에서 모든 빛이라는 전제에 어떤 해석과 설명을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고린도후서 4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30:00-35:00)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 창조 때 하나님의 역사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 그 모든 성경에 나타난 모든 빛의 질서를 그리스도로 묘사하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일어나는 순간 모든 어둠은 물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배자 가운데도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덮여 있는 인생들이 분명히 있어요. 선교를 가는 것도 그곳에 있는 어둠을 걷어내고 빛을 비추기 위해서 순종하는 행위인 거예요. 개인적으로 적용해도 일치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날은 어떨까요.
요한계시록 21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여기에서도 모든 빛의 존재를 그리스도로 묘사해요. 예수그리스도는 역사를 넘어서 온 인류에게 그 분만이 빛이 되시고 소망이 되시는 겁니다. 그것은 내 개인에게도 매우 중요한 선언이 되어야 해요.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운행의 핵심가치가 무엇이라고 했죠?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창조하셨고 사랑하셔서 우리를 다시 재창조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믿습니까? (아멘)
이 창조의 기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방법으로 구원하실 것인지 절절히 감춰놓고 있어요. 전부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성경 기사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도 보면 39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영생이란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기자의 진언이고 고백이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원래 영적으로 타락한 인류의 상태는 흑암과 공허와 혼돈의 상태입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어요. 그 하나님의 운행의 모든 동기는 사랑이에요. 그 사랑의 실체는 빛이라는 그리스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달에도 여러분들의 모든 인생과 삶에 하나님의 운행하심과 그리스도의 빛 되심이 어둠을 거둬내고 공허한 인생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시고, 새 날을 여는 하반기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 일어나십시다. 하나님은 너를 만드시는 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