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25)
할례와 십자가
창17:1-14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언약이니라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00:00-10:00)
여러분 혹시 그 the mission 이라는오래된 영화 기억하시는 분 계세요? 저희 때는 학기말 고사 끝나고 학교에서 단체로 갔던 영화인데 그게종교 영화로 많이들 알고 계시는데, 가톨릭 배경이 나오기 때문에. 사실종교 영화는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박애주의를 그린 영화라고 보는 게 정확한 것 같아요. 저는 그 영화를 두 번 이상은 본 것 같아요. 한번은 폭포 때문에봤고 한번은 친구들과 모여 봤고 한 세 번 정도 본 것 같아요. 그리고 자주 반영해주죠. 워낙 대단한 영화에요. 그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그 영화에 나오는 유명한 음악 혹시 아세요? 가브리엘 신부가 과라니족의 위협 속에서 그들과 선교를 목적으로 화해하기 위해서 창 끝이 코앞에 있는대도 바들바들 떨면서 오보에를 연주하지요. 오보에. 기억 나세요? 그오보에를 연주하면서 흘러 나왔던 노래가 뭐냐 하면 넬라 판타지아 입니다. 그 영화 때문에 사실 그 영화의배경 음악이 되기도 했고 유명한 노래가 됐죠. 그 가사가 이렇게 돼요.가사를 보시면
나의 환상 속에서는 올바른 세상이 보입니다. 물론 번역을 한 거에요. 그 곳에서는 누구나 평화롭고 정직하게 살아갑니다.나는 영혼이 늘 자유롭기를 꿈꿉니다. 저기 떠다니는 구름처럼요. 영혼 깊이 인간애 가득한 부분. 유독 이 가사에서 인간애가 강조됩니다. 인간애. 나의 환상 속에서 난 밝은 세상이 보입니다. 그 곳에는 밤에도 어둡지 않습니다. 나는 영원히 늘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저기 떠다니는 구름처럼요. 나의 환상 속에서 따뜻한 바람이 붑니다. 그 바람은 친구처럼 도시로 불어 옵니다. 나는 영원히 늘 자유롭기를꿈꿉니다. 저기 떠다니는 구름처럼요. 영혼 깊이 인간애 가득한그 곳.
마지막 결론도 그 박애 정신을 강조합니다. 이노래 속에.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제 이런 질문을 해요. 이노래가 도대체 성가냐, 아니면 일반 노래냐. 뭐 아무려면어때요? 문제는 이 노래가 박애주의를 굉장히 강조하고 그 영화도 결국은 어떤 기독교 정신이나 가톨릭의실체를 전하기 위한 선교를 목적으로 한 영화라기 보다는 박애주의를 드러내고자 하는데 초점이 있다고 봐요. 그런데참 거기에서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특별히 또 우리 기독교의 입장에서 아이러니한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결국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의 전쟁에서 겪는 원시 부족의 슬픈 이야기인데 실제 있는 역사인데 마지막에는 포르투갈 군인들이 교회까지 쳐들어 옵니다. 그 때 이 가브리엘 신부가 맨 몸으로 교인들과 맞서죠. 그렇게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울부짖으면서 가브리엘 신부가 포르투갈 무자비한 군인들을 향해서 내뱉는 외마디가 있어요. 우리는인간이잖아. 인간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는 뜻이에요. 그래서우리는 다 속기 쉽습니다. 인간이 꽤 괜찮은 존재일거라고. 그렇지않습니다. 그 영화는 우리가 물론 기독교 시각에서 본 관점이긴 하지만 인간의 실체를 굉장히 오해시킬수 있는 영화입니다. 우린 인간이잖아. 인간이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니야, 이런 메시지에요. 이과수 폭포도 멋있지만사람들은 아주 그 대사를 굉장히 명 대사로 꼽습니다. 그런데 그것만큼 인간에 대해서 잘못 초점을 맞추고있는 대사도 저는 없다고 봐요. 왜일까요? 오늘 우리는 이17장에서 사실 구약의 갈보리를 봐요. 왜 그리스도께서 죽어야했는가? 인간이 그렇게 꽤 괜찮은 존재였다면 그리스도는 갈보리에 죽을 이유가 없죠. 창세기 17장은 우리가 이렇게 맨 정신으로 읽기에는 참 슬프디 슬픈, 깊은 하늘의 울음이 담긴 본문입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오늘 기도제목 겸 중요한 지점만 짚어 가면서 제목을 삼고자 합니다. 1절을 한번 볼까요? 이렇게 돼있습니다. 1절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팔십육 세 때 이스마엘을 낳았죠. 지난주. 십삼 년 만에 길고 긴 침묵을 깨시고 아브람에게 다가오신 사건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리고세 마디를 하세요. 이 세 마디를 오늘 기도할 분들은 잘 기억해야 합니다. 첫 번째가 뭐예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자, 저를 보세요. 여기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엘샤다이. 여러분들은 방금 히브리어를 하신 겁니다. 엘 샤다이. 이 엘 샤다이라는 말은 첫째는 이런 뜻입니다. 엘 샤다이 라는 말속에는 물론 우리 말로 번역하면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뜻이에요. powerful하다는 단순히 물리적인측면을 강조한 하나님에 대한 속성을 표현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여기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전인격적으로 우리 인생 속에 개입하시는 분인가를 이 단어만큼 잘 설명한 단어가 성경에는 없어요. 첫째는 이 단어는 하나님이 기르는 자라는 뜻입니다. 양육하신다. 부모가 아이를 낳죠. 그러면 낳는 걸로 부모의 책임을 다하는 건물론 아닙니다. 그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해요? 키워야 해요. 나는 낳았으니 내 책임 끝이다, 대문 밖에 탯줄 끊어진 아기를 내놓는부모는 없을 거에요. 기르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그 기르는 과정에 하나님의 계획대로 꼭 꼭 가득 채우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거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성하셨어요. 여러분들을 십자가의 보혈로 택하셨어요. 구원하셨어요. 구원하셨으면 그냥 자비하신 마음으로 여러분들을 건져냈다그 뜻이 아니고 그 구원 속에는 여러분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충만한 계획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우리를 양육한다는 말은 그 하나님의 계획이 빼곡하게 채워진다는 뜻이에요. 수많은 시간과 역사와 인간관계를 통해서 이 땅의 물질 세계의 부대낌을 통해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어떤 계획을 빼곡하게 채워가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슬픔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희열과 기쁨으로 다가올 수도있고 어떤 때는 깊은 상실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 수많은 인간이 겪어내야만 했던 희로애락이전부 누구의 채우심이에요?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채우심이에요. 우리를 양육하신 하나님의 그 계획이 그러한눈물 진 계곡을 지나게 만들고 넓은 꽃밭이 만발한 벌판을 경험하게 만들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 인생의 시간 속에 채워 나가는 분이세요. 그리고 세 번째 이 전능하신 엘 샤다이라는 말 속에는 이런 뜻이 있어요.
(10:01-20:00)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엘샤다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소개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속에서 우리에게 뭘 주시는 의미가있다고요? 능력을 주시는 의미가 있다고요. 이게 뭘까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 그러면 굉장히 한쪽으로만 생각하는 고정 된 편견이 있어요. 그래서 람보식 어떤 능력을 기대하죠. 그렇지 않아요. 바울도 빌립보서에서 증언해 내기를 감옥에서 유명한 남긴 성경 구절이 하나 있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걸 할 수 있다. 그 말은 무슨 맥락 속에 한 겁니까? 감옥에서빈궁에도 처하고 고난에도 처하고 묶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수 있다, 그 얘길 하는 겁니다.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해하고 기대하는 그런 편견의 개념이 아니에요. 매우 심오하고도 복합적인 개념입니다. 자, 엘 샤다이라는 말은 첫 째 뭐 하시는 하나님? 기르시는 하나님. 두 번째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채워가시는 하나님. 그리고마지막에는 뭘 주시는 하나님?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에요. 이엘 샤다이의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런데 이 얘기를 하게 된 타이밍이에요. 지금 이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언제 하신 겁니까? 타이밍이 지금어때요? 절묘하죠. 아브람이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기다리지 못하고 뭔가 이대로 있다가는 자기 집 대도 끊기겠고 하나님의 계획에도 차질이 있겠다는 무슨 생각을 했다고요? 기특한 생각을 했다고요. 그래서 기다리지 못한 거에요. 그래서 칼빈은 신앙은 무슨 싸움이라고요? 기다림의 싸움이라고 그랬어요. 기다림의 싸움. 그런데 우리가 왜 못 기다릴까요?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 문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문제가 흔들릴 때 우리는 못 기다리는 거에요. 정말 복음의 역사야 말로 기다림의 싸움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리라 약속한 것도 온 인류의 기다리는 싸움이었어요. 그리고갈라디아 4장 4절에 바울이 뭐라 그랬죠? 때가 어떡하매? 그 차매 라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충만이라는 뜻이에요. 채워지매. 하나님의시간이 채워지매. 이 시간을 기다리는 거에요. 바로 그것에실패했어요. 아브람이. 그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긴 침묵을깨고 들어오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이게 첫 마디에요.
그리고 두 번째, 내 앞에서 뭐 하라? 내 앞에서 뭐라 그랬어요? 내 앞에서 행하여. 행하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한다는말이 무슨 말일까요? 이 말은 누구 앞에서? 누구 앞에서? 잘 보세요. 이 포지션을 잘 보세요. 내가 늘 누구 앞에 있어야 해요? 아이들이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들이누구 앞에 있을 때 안전하죠? 부모 앞에 있을 때 안전해요. 부모뒤에 쳐지면 이게 사고가 나도 몰라요. 그리고 사고가 나죠. 사고가납니다. 그래서 항상 지혜로운 부모는 아이를 앞에 둬요. 이말은 내 앞에서 행하라는 말은 내 앞에서 걸어가라 그 뜻이에요. 그러니까 누구의 시선을 떠나지 말라는겁니까? 예, 하나님의 시선을 떠나지 말며 하나님의 시선앞에 있어라 그 뜻이에요 .애들 언제 사고 치죠? 시선에서벗어날 때, 항상 딴 짓하고 있어요. 그래서 조금 머릴 쓰는애들은 늘 교실 책상 자리 잡는 거 보면 기둥 뒤쪽에. 선생님의 시선이 자기 쪽으로 안 보이는데 요런데책상 틀어 박아 놓고 엉뚱한 책을 보거나 딴 짓을 해요. 이 정확한 개념은 위치 문제입니다. 너는 항상 내 앞에서 걸어가라. 그리고 세 번째, 뭐 하라고요? 온전 하라. 자온전할 수 있는 사람? 저 밖에 손 든 사람이 없네요. 예, 저는 온전 할 수 있어요. 야, 송목사 이제 갈 데까지 갔구나. 어떻게 온전할 수 있을까요? 온전한것은 Perfect 개념이 아니에요. 성경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은 우리가 약하면 약한 대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게 완전해 지는 거에요. 둘째 아들이 언제 완전해 지죠? 아버지 집에 들어갈 때 완전해지잖아요. 그 아버지의 것이 다 자기의 것이 되는 소유 개념뿐 아니라 그제서야 아버지와 관계가 회복이 돼요. 온전이라는 개념은 행위적인, 율법적인 그런 perfect하라는 개념이 아니에요. 못나면 못난 대로, 약하면 약한 대로. 그게 온전해지는 거에요. 여기서 행하여 완전 하라는 말은 perfect 하란 말이 아니에요. 그럴 수 없어요. 어떤 인생이든지.아브람이 약함 많은 사람 아니에요. 그럼 그가 온전해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 안에 묶이면돼요. 그런데 잔꾀를 가지고 자기 수단으로 엉뚱한 짓을 지금 해놨어요.그런데 그 앞서 16장 앞서 15장에서 하나님과아브람 사이에 뭐가 있었어요? 계약이 있었어요. 고기를 쪼개놓고횃불을 지나가게 하죠. 이 말은 무슨 뜻이라고요? 이 약속을어기면 너든지 나든지 깨는 사람이 죽는다. 법대로 하면 누가 죽어야 하죠? 아브람이 죽어야 해요. 그래서 아브람은 죽어야 해요. 어떻게 죽입니까? 자 죽이는 방법을 한번 보십시다. 어떻게 죽이는가? 성경을 보시면 몇 절을 보시냐 하면 7절을 보세요. 9절부터 읽겠습니다.
9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언약 지켜야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너희 중 남자는 다 뭐를 받으라고요? 자 앞을 보세요. 할례를 명합니다. 이게 죽이는 거에요. 할례는 아시는 대로 어린 아이들 포경 수술 같은 비슷한 의식이에요. 남자의생식기 끝을 자르는 거에요. 상징적인 메시지입니다. 남자의생식기 끝을 자름으로써 무슨 메시지를 거기 담는가 하면 너는 이제 육체적으로 끝났다. 죽었다 그 뜻이에요. 죽는 겁니다. 그게. 그리고나서 다시 후손을 약속해요. 아브라함은 죽은 몸이에요. 이히브리 기자도 죽은 몸 같은데서 이건 나이가 많은 데서 낳았다는 뜻이 아니에요. 할례 받고 낳은 아들누굽니까? 이삭이에요. 잘 보세요. 성경 어디에도 이삭을 아브람의 자손이라고 하지 않아요. 약속의 자손이라고해요. 왜? 그 이삭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거에요. 여러분 할례는 우리 신앙의 기초에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이것이 오실 그리스도가 약속을 어기고 죽을 수밖에 없는죄인들을 위해서 대신 죽는다는 메시지가 우리 몸의 흔적으로 남는 거에요. 자 그래서 우리가 성경 한몇 구절만 읽어 드릴 테니까 들으십시오. 로마서 2장입니다
(20:01-30:00)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오. 표면적 유대인이라는 것은 몸에 할례의 흔적이 있는 사람.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어디에 하라고요? 마음에 할지니영에 있고 율법의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그리고 빌립보서 3장 3절입니다.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곧 할례파라
한절만 더 읽겠습니다. 골로새서 2장입니다.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여기서 그리스도의 할례가 뭐예요? 십자가에죽으신 거에요. 육의 몸을 벗는 게 뭐예요? 죽는 걸 얘기하는거에요. 그러니까 할례라는 말은 죽었다 그 뜻이에요. 아브람은육체적으로 죽었어요. 그리고 나서 이삭을 주신 거에요. 그런데이삭을 주는 과정에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웃어요. 자, 그웃음의 의미를 볼까요? 15절을 보세요. 15절부터 17절까지 석 절을 전체가 합독 합니다. 시작
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 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네, 이것을 아브라함이 온전히 받아들였습니까? 안 받아들였습니까? 안 받아들였어요. 인간은 그렇게 설득하고 설득이 되고 괜찮아지는 존재가 절대 아니에요. 제가한 구절 읽어 드릴께요. 18절 잘 보세요.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지금 이스마엘 몇 살이에요? 열세 살. 이스마엘이나 잘 키울게요. 이게 아주 지독한 인간의 근성입니다. 인간이 박애주의를 논할 만큼 괜찮은 존재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이유가 없어요. 자 그런데 여기 재미있는 게 하나 있죠. 이 자손을 약속하기 전에하나님이 드디어 아브라함의 이름을 개명합니다. 그 아내 이름까지. 원래아브라함이 아니죠. 뭐예요? 아브람. 사래. 그런데 아브람이 뭐가 돼요?아브라함이 돼요. 사래가 뭐가 돼요? 사라가돼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아브람이라는 말은 그 당시 고대어로존귀한 자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뭐로 바꾸냐 하면 많은 자손의 아버지, 열국의 아비. 많은 자손의 아비로 바꿔요. 그 아내도 그러면 부부니까 한 몸이니까 이름이 달라져야 지요. 사래는왕비 또는 공주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뭐가 되죠? 사라. 일본 말로 접시. 방금 일본에서 와서 그래요. 그런데 이 사라 라는 이름은 열국의 어미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생각을해보세요. 이게 얼마나 웃겨요. 지금 아브라함에게는 자손이있어요? 없어요? 누가 또 있다 그래요? 없죠.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약속한 그 자손이 지금 낳았어요? 안 낳았어요? 안 낳았어요. 이름은뭐예요? 열국의 아버지에요. 그럼 보세요. 지금 자손은 하나도 없는데 사람들이 이름을 부를 때 많은 자손의 아버님, 이게얼만 웃겨요. 이걸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해학이라고 해요. 하나님의해학적 경영이라고 해요. 비슷한 인물이 또 하나 있었죠? 시몬. 시몬이 무슨 뜻입니까? 옛날 이름이에요. 베드로의 옛 이름이에요. 그런데 그 시몬이라는 말은 어디서나 쉽게들을 수 있는 흔한 이름이에요. 그냥 평범한 이름이에요. 그런데예수님이 요한 복음에서 시몬을 보자마자, 그 형제 안드레가 데리러 왔죠. 보자 마자 네가 장차 뭐라 하리라? 게바. 게바는 번역하면 반석이라. 베드로란 뜻이에요. 페트로스. 반석이란 말이에요. 그런데보세요. 이 시몬이 얼마나 변덕이 죽 끓고 업다운이 심한 사람이에요?화도 잘 내고 또 충동심도 강하고. 흔들거리는 인생이에요.베드로 자체가. 그런 베드로를 사람들이 부를 때마다 반석아~ 얼마나 웃겨요. 웃었죠? 지금우리가 그렇거든요. 우리 이름이 뭐에요? 성도. 성도란 뜻이 무슨 뜻입니까? 거룩할 성에 도. 무리 도 자 아니에요. 거룩한 무리. 거룩한 신부. 뜨끔거리고 쑤시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셨어요. 그러면 이 속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첫 마디가 뭐였다고요? 세마디를 하셨죠.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행하여 뭐 하라? 완전하라. 이 말은 간단히 얘기해서 내가시작했으니 네 인생은 내가 끝낸다. 이 하나님의 자기 선언이 이 첫 절에 담겨져 있는 겁니다. 이제 그 과정을 아브라함을 불러서 하나 하나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설득 하든 안 하든 그 그림을 단계적으로보여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믿어요? 안 믿어요? 안 믿는 겁니다. 안 믿어요. 그냥이스마엘이나 잘 키우겠습니다. 무슨 여기서 믿음의 조상다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나요. 그런데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아브라함을 다른 아브라함을 만나요. 그렇죠? 아마 천국에서는 여러분들이 그럴 겁니다. 천국에서. 그런 나 자신을 만날 거에요. 돌아보니까 그것이 전부 어린 양의공로였다는 것을 보게 됐어요. 그래서 요한 계시록 천상의 예배 가운데 장로들이 자기 머리에 폼 잡고쓰던 면류관을 벗어서 어린 양의 보좌 앞에 던지지 않습니까? 이게 내 공로가 아니었고 내 노력과 내땀과 내 눈물과 내 헌신과 내 결단도 아니었군요. 그리스도께서 하셨군요. 하나님이 하셨군요.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 그분의 우리를 향하신 열심, 하나님의 끈질긴 설득. 설득이라는 말도 사실은 적합하지 않죠. 하나님의 우격다짐. 우격다짐의 사랑. 못 말리시는 사랑. 호세아의 사랑. 호세아의 사랑. 바람난부인을 찾아가 다시 집으로 데려 가고 살아야 되는 비련의 선지자. 그것이 예수의 마음 속에 담아져 있던우리를 향한 사랑의 힌트였어요. 힌트. 여러분 마지막으로한 군데를 보십시다. 24절
24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몇 세입니까? 구십구 세였고
25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26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27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온 집안이 할례를 받고 은혜를 입습니다. 자, 결국 이 할례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사건을 암시하는 구약의 아이콘이었어요. 십자가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이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십자가의예수 그리스도의
(30:01-31:33)
죽음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에요. 사랑하는성도 여러분, 결국 신앙이 성숙하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말은 뒤집어 얘기하면 매일 매일 그 십자가 앞으로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날마다 가까이 가는 싸움이에요. 우리가 뭔가를 이루고 성취하고 뭔가를 업적을 내놓고열매를 내는 그 싸움의 경쟁이 아닙니다. 결국 그 십자가 끝에 우리가 떠밀어져서 은혜였구나 하나님의설득하심의 결과였구나 이것을 마지막에 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작업하심이에요. 믿습니까?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수많은 문제를 이 17장에 대입시켜서결국은 그 모든 문제가 눈물 짓는 사연이건 곤욕스런 길고 길었던 문제이던 십자가 앞에 해석함을 받는 큰 은혜와 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찬양 하나 하겠습니다. 모든 능력과 모든 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