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장]
36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요한복음 14장]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아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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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3장 끝부분과14장에 걸쳐서 제자들의 네 가지 질문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제자들의 질문부터 좀 살펴 볼까요? 첫 번째 제자, 베드로입니다. 36절을 볼까요? 베드로가묻죠?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 질문은 영화 제목으로도쓰여졌죠? 쿼바디스 도미네. 혹시 그 영화 기억하십니까? 아,오래 된 영화라 연식이 오래 되신 분만 기억하시네요. 아주 오래 된 영화인데 박해 받던그리스도인들. 네로 황제 시절의 배경을 한 영화입니다. 거기서베드로가 쿼바디스 도미네 라고 묻죠. 여기서 차용한 제목인데 주여, 어디로가시나이까? 그런데 예수님이 이제 대답을 하십니다. 잘 보세요.
36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여러분, 질문과 대답을 비교해 보면 사실 이게 대답이 아닙니다. 질문을 뭘물었어요? 목적지를 물었어요. 어디로 가십니까? 그런데 대답은 목적지를 말하지 않아요.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후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이건 대답이 아니죠. 두 번째 질문. 도마가 질문을 한 겁니다. 14장 5절을 한번 볼까요? 같이읽겠습니다.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네 도마의 질문은사실상 베드로의 질문을 이은 거죠.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우리가 그 길을 알 리가 없지 않습니까? 주님의 답변이 답변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말도 됩니다. 그런데 주님이 또 이런 대답을 하세요.
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것도 답이 아니에요.
그리고 세 번째질문입니다. 빌립이 질문을 해요. 8절을 볼까요?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제 빌립은 아버지를보여 달라요 그래요. 예수님은 또 뜻 모를 답변을 하십니다. 그런데답변이 아니에요. 예수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함께 있으되 너희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의사실 답인데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답은 상대방이 알아들어야 하는데 자꾸 제자들이 못알아들을 말씀만 하신단 말이에요. 마지막, 유다의 질문입니다. 유다가 아직도 앉아 있었나? 진즉 자리를 떠났는데. 그런데 유다가 있어요. 22절에 보니까. 가룟인 아닌 유다가, 그러니까 이 유다는 다른 유다에요. 동명이인이죠. 우리처럼 헷갈릴까 봐 친절하게도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이 질문의 요지는이렇습니다. 우리에게 펼쳐 보이시는 그런 능력과 기적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도 좀 드러내시지 왜 우리에게만그걸 가르치시고 말씀하십니까? 이렇게 질문을 한 거에요. 자, 이쯤 해서 우리가 점검을 좀 하겠습니다. 이 질문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공통 분모가 하나 있어요. 뭘 것 같습니까? 다시 한번remind 시켜 드릴 테니까 들어보세요. <어디로가십니까?> 베드로의 질문이에요. 도마는 <가는 길을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세번째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유다는좀 <세상에 선생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 주십시오>. 여러분, 질문을 자주 할 때는 정말 궁금해서 하는 경우가 있고 뭔가 불안해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지금 사실 제자들은 불안해요. 이 성경의 문맥에서 한 6개월 어간에 선생님이 자꾸 모일 때마다, 만날 때마다 뜻 모를 말씀을하시는 거에요. 내가 곧 고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그 후에는 내가 죽게 된다. 우리가 이러려고 이 분을 따라 나선 게 아닌데, 그리고 그 다음에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더 황당한 얘기를 자꾸하시는 거에요. 제자들은 매우 지금 당혹스럽고 불안한 거에요. 그래서이 사람, 저 사람 자꾸 질문을 쏟아내는 거에요. 어디 가시는거에요? 뭘 보여 달라 그러고. 그러면 이 제자들의 네 질문을한 제자들의 공통 분모가 뭘까요? 결론은 전부 현실적이고 현세적이고,보이는 것에 대한 질문이죠. 목적지를 물었고 보여 달라 그랬고 나타내 달라고 그래요. 여러분, c.s루이스라는 유명한 기독교 작가가 있죠. 이분이 『영광의 무게』라는 아주 유명한 책을 썼는데 그 책에 12페이지쯤부분에 보면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인용해서 읽어 드릴 테니 들어보십시다. 오늘 내용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발췌를 했습니다. 책의 내용을 조금여러분들이 이해하기 편하게 각색을 해서 읽어 드릴께요.
성경이 당당하게약속하는 보상. 그 엄청난 보상을 생각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의 갈망을 너무 강하기는커녕 오히려 너무약하다고 말씀하시는 듯 하다. 그리고 우리는 무한한 기쁨을 준다고 해도 여전히 술과 성적인 탐욕과 세상의쾌락에만 집착하는 냉담한 피조물들이다. 그러면서 이 문구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비유를 했단 말이죠. 마치 어느 사람에게 우리 이번 여름 휴가는 저 몰디브 멋진 해안에 럭셔리한 호텔에서 이 여름을 멋지게 보냅시다하고 제안을 했는데 몰디브가 뭔지, 럭셔리한 호텔이 뭔지 잘 모르는 저 빈민가의 골목 한 구석에 그냥철없는 아이들처럼 여전히 그 흙 구덩이 진흙으로 이겨서 모형의 피자나 파이를 과자를 만들어서 그것을 서로 나누면서 빼앗으면서 그냥 온갖 얼룩을다 묻혀가면서 골목 구석에서 여전히 놀고 있는 그 어린 아이들과 같다 그 말이에요. 누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경이로운 것을 약속해 놓으셨는데. 그걸 구태여 비교를 하자니까 몰디브가 나온 거에요. 루이스가 몰디브란 얘길 안 했어요. 제가 조금 각색을 했다고요.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인의 이 땅의 삶이 마치 그런 것처럼 살고 있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를 향해서 냉담한 피조물들이다. 여전히 땅의 것에만 집착하는. 물론 이 땅의 것이 필요하죠. 오늘 이야기의 초점은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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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릅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의 질문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여전히 현실 적이고, 현세적이고 보이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질문을 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거에요. 지금주님이 맞이할 그 엄청난 길의 의미에 대해서 전혀 이해가 없더라 그 말이에요. 그걸 이제 설명하고자하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14장을 한번 보십시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이 애길 왜 하셨을까요? 아무근심도 안 하는데 걱정하지마, 걱정하지 마 그럴까요? 아까말씀 드린 것처럼 제자들은 지금 마음 가득 먹장 구름이 일고 있어요.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거야? 선생님이 왜 자꾸 저런 말씀을 하실까? 가긴 또 어딜 가신다는 거야? 우리와 한판 로마 정부와 전쟁을 벌려서 새 나라를 만들어야 되지, 그래야우리도 한 자리씩 할 텐데 자꾸 죽는다고 얘기하고 왜 저러시는 거지? 이런 걱정이 밀려 들어오는 거에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자, 여기 내 아버지의 집, 거할 곳,거처 같은 개념인데 다르게 표현한 거에요. 지금부터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우리의 기본적인이해를 조금 엎어 버리고 우리가 조금 다른 시각으로 이해할 과제가 이 속에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마다그렇게 아주 부흥을 많이 안 하는 지금 시대인데 60년대 70년대한국 교회가 폭발적으로 일어날 때 이 부흥회는 그 성장에 일조를 했습니다. 그리고 가을마다 반듯이 부흥대성회라는 걸 했어요. 그것도 아쉬우면 1월 한 해 시작할때 부흥회를 하고, 여름에는 온 교회가 수련회 라는 이름으로 은혜 받는 자리를 그렇게 사모했습니다. 그러면 거기 강사님들을 모시고 집회를 하면 길게는 2주씩, 또 짧게는 금요일 새벽까지 이렇게 길게 집회를 하던 시대가 있었어요. 그부흥사 목사님들이 참 말씀을 재미있게 하십니다. 잊을 수 없는 몇 토막 스토리가 있어요. 그분들이 목소리가, 음성이 다 비슷해요. 아시죠? 이렇게 살면 천국 가서 다 면류관이 똑같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그렇게 살면 결국 천국 가서 개털 모자를 쓰게됩니다. 개털로 만든 모자. 그러나 하나님 앞에 항상 반듯하게예배 잘 드리고 헌금도 열심히 하고 그런 사람들은 금 면류관을 쓰게 됩니다. 그러면 이 권선징악 논리에익숙한 한국 사람들의 정서에는 이게 먹혔어요. 눈물 빼고 감동의 도가니탕이 되었어요. 마지막 날에. 이런 메시지가 사실 먹혔어요. 그리고 또 한 토막의 스토리가 뭔가 하면 교회들이 긴급하게 재정이 필요하거나 하면 꼭 목적형 부흥회를 해요. 그래서 이제 부흥회 마지막 날 헌금하는 순서를 반듯이 갖습니다. 뭐헌금 자체가 나쁜 건 아닌데. 여러분 헌금 쩨쩨하게 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천국 가셔도 판자집에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저축을 하듯하늘 나라에 저축을 많이 하면 하나님이 그걸 다 받아 두셨다가 맨션 아파트에 살게 됩니다. 그때는 좋은아파트의 대명사가 맨션 아파트였어요. 그걸 우리가 말 놀이를 해가지고 맨션 아파트가 뭐냐? 맨손으로 들어가도 살수 있는 아파트, 좋은 아파트, 이렇게 말장난을 하곤 했는데 이 논리가 먹혔단 말이에요. 그 때는. 그래서 우리가 아버지의 집, 거처 하면 퍼뜩 논리가 그쪽으로 자동으로돌아가요. 자, 물론 우리가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관점에서하나님과 함께 거할 처소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건 성경이 말하는 거니까 그건 분명한데 중요한 것은뭐냐 하면,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천국, 예수님이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는 의미가 있을까요? 의미가 없는 거에요.예를 들어서, 너 어디 가니? 우리 아버지 집가는데요? 그러면 아버지가 사시는 그 건물, 공간을 얘기하는걸까요? 아버지 자체를 얘기하는 걸까요? 그렇죠. 아버지 자체를 얘기하는 거죠. 아버지를 뵈러 가고 아버지와 사귐을위해 아버지에게로 간다는 얘기지, 그 얘길 어떻게 애기할 수도 있어요?아버지 집 가는대요? 그래도 알아 듣는단 말이에요. 그게공간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자 이 얘기를 시편 기자가 잘 얘기했어요. 23편 6절을 띄워 주세요.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반듯이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집에. 집에. 27편4절을 띄워 주세요.
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그것을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잘 보세요. 내가 평생에 한 가지를 구한단 말이에요.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집, 집이라는 말이 오이키아. 오늘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그 집의 개념과 같은 개념이에요. 오이키아. 그런데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뭘 바라보며? 그 집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아니에요.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어디에서? 집이 뭐로 지금 바뀌어 있죠? 성전으로 바뀌어 있어요. 그러면 성경 구약에서 누누이 성전이 등장을 하는데 이 성전의 진정한 실체가 신약으로 넘어와서 누구로 바뀝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성전이라고 얘기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여호와의집으로 간다거나 내 아버지 집으로 간다는 말은 공간적이고 처소적인 개념도 종말론적으로는 분명히 있지만, 우리가요한복음이라는 문맥에서 생각해 보면 이것은 관계적 개념이란 말이라고요. 자, 몇 주전서부터 세족식을 계속 강조했어요. 요한복음 13장 세족식으로 시작을 합니다. 세족식이라는 건 예수님이 겸손의 모델이되거나 윤리의 모델이 되기 위한 의미도 조금은 있지만 성경의 본질적 차원에서 세족식의 개념은 이제 당신을 환영합니다. 우리 가족과 동등한 가족으로 영접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들의 발을씻긴다는 것은 이제 당신은 이제 당신은 우리와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가족, 새로운 구성원이 되었다는 뜻이에요. 되었으면 어떻게 해야 해요? 이제 그 안에서 누리는 훈련을 해야 해요. 그 가족과 어떻게 함께거하는가? 지금 우리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써 제자 공동체는 오늘날 교회 공동체를 얘기할텐데, 이 교회가 지금 누구와 한 몸이 된 거에요? 그리스도와.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가족이 되고 한 공동체가 된 겁니다. 그러면내 아버지의 집. 거할 곳. 처소,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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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념은 오이키아, 즉 관계를 얘기한 거에요. 그러니까 이것을 정리한 글을 읽어드릴테니까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가장 본질적인 것은 삼위 하나님과 거처를 같이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7장 띄워 주세요. 3절다같이 시작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
무슨 얘기냐 하면거한다라는 말, 처소라는 말, 집이라는 말은 삼위 하나님안에서 누리는 교제, 복락 이것이 핵심이에요. 그러니까 우리에게이 땅에 그런 관계적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가? 그 뜻이에요. 자 여러분, 이건 예배 시간이니까 정직하게 대답하셔야 해요. 마음 속으로라도. 진짜 천국 가고 싶으세요? 그래도 1,2,3부 때는 뭐 구석에서 아멘 소리 한 마디씩은 나왔었어요. 진짜 천국 가고 싶으세요? 그런데 그 아멘 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정말 이 땅에 소망이 없어요. 아침에 태양이 뜨는 게 너무 싫어. 이 땅이 너무 징그러워서 아휴, 빨리 천국이나 가고 싶다. 이게 회피성 믿음, 도피성 믿음.천국은 여러분들의 도피성이긴 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관점에서, 이 땅이 너무 싫어서. 그런 측면의 아멘 도 있어요. 이해해요. 그런데 또 한 켠에는 어느 찬송가의 고백처럼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을까. 보세요. 생각만 해도 좋은데, 그 실체를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무슨 얘기냐 하면, 이 땅에서 사는데 여전히 눈물 바람이요, 여전히 폭풍우요, 매일 매일 고난은 있어요. 그런데도 삼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복락과 생명 안에 그런 것들이 감히 흔들 수 없는 평안을 경험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예수님이 이런 선언을 하세요.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는데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아니하니라. 세상이 주는 평안과 내가 주는 평안은 본질이 다르다 그 말이에요. 세상의 평화는 뭡니까? 아프던 사람이 병이 고쳐지면 평안해 져요. 돈 없던 사람이 해결되면 평안해져요. 일 없던 청년들이 일이 생기면기쁨이 와요. 그러나 그것은 구태여 복음이 약속하지 않아도 세상도 그런 평안은 줄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없더라도 내가 이 땅에 여전히 눈물 땀 흘리고 폭풍우과 비바람 치지만 삼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천국을 살 때, 야 죄 많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은총 안에 산다는 게 이런 기쁨일진데 내 본질적 본향의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그러니까 이 땅에 천국을 못 살면 본향에 대한 사모함이 있을 수가 없는 거에요. 제가 지난 주, 캄보디아를 다녀 왔어요. 청년들 가 있어서 격려도 할 겸 돌아보려고요. 요즘 매일 나갑니다. 내일 또 인도 쫓아 가야 해요. 우리 삼일 교회 목회는 완전 체력전입니다. 캄보디아를 가는데 프놈펜에 도착을 하면 비행기가 하루 한 편이에요. 그래서밤 열한 시 넘어요. 그 날은 사역을 못하고, 하루 밤 자고그 다음날 어딜 갔냐 하면 프놈펜에서 남쪽으로 좀 떨어진 지역인데 꼬끼똠이라는 지역을 방문을 했어요. 우리청년들이 가있어요. 캄보디아 말은 어려워 가지고 한 번 다녀와도 내가 무슨 동네를 다녀왔는지 표현을못하겠어요. 단어들이 어려워 가지고. 거기 가면 11년째 사역을 하는 여 선교사 두 분이 지금 하고 있어요. 그분들은꼭 가면 점심을 준비해 놓습니다. 앉아서 우리 청년들하고 점심을 같이 하는데, 두 선교사님 중에 한 분이 뜬금없는 얘길 해요. 목사님, 이분들이 이제 한 교회에서 청년으로 지내다가 신학교를 다니고 한 날, 한시에 같이 파송을 받은 대구 아가씨들입니다. 자매들이죠. 친자매간은 아닌데. 파송 하는 날 파송 장을 보고 자기들은 친구인 줄 알았는데 나이가 다르다는 걸 보고호적 정리를 다시 했대요. 그래서 한 사람은 언니가 되고 한 사람은 동생이 돼서 자매가 거기서 사역을하고 있는데 그 중에 동생뻘 되는 자매가 밥 먹다가 뜬금없이 이런 얘길 해요. 목사님 저는요, 11년째 하루도 후회 안 한 날이 없어요 그래. 나는 선교지 다니다그런 얘긴 처음 들어봐요. 전부 사명에 불타고 감동적인 얘긴 많이 들어왔는데. 어안이 없어서 벙쪄있는데 그런데 또 그러다가도 아이들의 그 까무잡잡한 피부 속에 반짝이는 눈망울을 보면 그후회가 또 눈 녹듯 사라진다는 거에요. 그렇게 매일 후회를 반복하고 11년째지금 두 자매가 이어 오는 거에요. 그래서 그 마음 한 켠에는 무슨 건수만 생겨라. 오늘이라도 내가 접고 이제 털고 난 돌아간다. 항상 배반 당하고늘 아침에 눈을 뜨면 눈물 바람이고, 구질구질하고 더럽고 힘들고 누추하고, 그런 환경 속에서. 두 자매가 생긴 건 깔끔해요. 그리고 이제 있는데 어느 날 그 유치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 건물 주인이 우리 한국 표현으로 말하면 방 빼라고하더래요. 너무 감사해서, 울고 싶은데 누가 뺨을 때린 거에요. 정리를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20년 동안 한번도 전화도 서로한 적이 없고 당연히 오고 간 적도 없는 친척 뻘 되는 장로님 한 분이 부산에 사시는 분인데, 이 분들은대구 살고. 그러니까 20년 왕래가 없었대요. 전화도 없고. 뜬금없이 전화를 한 거에요. 사연은 자기가 그 분이 장로님인데 평생 여유 있을 때마다 후에 선교 때 쓰려고 모아 두었던 헌금이 있었대요. 그게 어느 정도 차서 자기 아내한테 이제 쓸 때가 됐는데 어디에 쓸까 하다가 그 와이프가 우리 친척 중에 어느아가 캄보디아에서 어린이 사역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이왕 하려면 거기다 하시죠 그랬대요. 그래서수소문을 해가지고 20년 만에 전화를 한 거에요. 내가 이모아둔 돈을 너한테 좀 하고 싶다. 그래서 마음이 덜컹 한 거에요. 어떻게해야 하나? 그래서 그 헌금이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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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액수인데그 유치원으로 있는 건물에서 갔다 왔어요. 차로 3분 거리에요. 지근거리에 입구만 좁을 뿐이지 반듯한 편안한 땅이 하나 급하게 나온 거에요.그 부지를 사고 거기에 건물을 올릴 수 있는 액수를 이 장로님이 보내신 거에요. 그러면서이 분이 그것 때문에 감사한 게 아니라, 그것 때문에 은혜를 받았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캄보디아의 영혼도 사랑하시지만 나를 너무 사랑하시는 구나, 그래서그때부터 하나님께서 계속 자기 심령에다가 말씀해 주시는데 내가 너한테 특별히 바라는 게 없다, 너 그땅에서 나를 찬양하고 나를 경배하며 예배만 드려라. 그 음성을 계속 주신 다는 거에요. 자기가 여러 군데 선교지를 정하려고 돌아다니다가 이상하게 캄보디아 말이 논뚜렁, 밭뚜렁 그런 발음인데. 아무리 저는 수십 번을 다녀 와도 단어 하나를지금 몰라요. 그런데 그렇게 캄보디아 말이 탁탁 귀에 들어오고 걸리더래요. 왠지 모르겠다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선교사님, 그게 자매님이 이 땅을 그만큼 사랑하니까 그 소리가 들리는 거지, 그갓난쟁이 하고 엄마하고 대화하는 거 못 봤냐고, 어 그랬어~ 하고. 걔가 아무 소리도 안 했는데. 눈빛 보고도 대화가 되잖아요. 엄마하고 애기하고 소통이 되잖아요. 그러면서 이분들이 하나님이 정말자기들을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그 삼위 하나님 안의 기쁨을 발견한 거에요. 그 사건을 통해서. 여전히 배반이 있고, 눈물이 있고,험한 일이 없어진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이제 이분들이 선교사로 만들어져 가면서 그 삼위하나님 안에서 거쳐가 되어 천국을 누리는 거에요. 사진을 좀 볼까요?이 사진을 보면 제가 맨 앞에 있고 여기 두 선교사님이십니다. 제 오른쪽에 앉은 분이고저쪽에 앉으신 분이 언니 되신 선교사님이고. 또 지금 마크 친 뒤에 모세 형제 뒤에 있는 자매는 초등학교4학년 때, 이 선교사님을 만났는데 지금 캄보디아 장로 신학교에올해 5월에 졸업해서 이 유치원에 교사로 들어왔어요. 실질적인첫 열매인데 제가 그 첫 열매를 보면서 밥을 못 먹었어요. 눈물이 나가지고. 얼마나 감동스러운지. 10년 만에 첫 열매가 나온 거에요. 한 명. 선교가 그런 거에요. 그리고제가 프라이버시상 marking은 부탁 안 했지만 여기는 도망갔다가 돌아 온 자매도 여기 앉아 있어요. 그런걸 다 이 젊은 선교사님들이 가슴으로 부대끼면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요? 그런데 지쳐 가지고, 매일 후회하면서 이거 언제 그만두나, 언제 때려 치우나 그러고 있는데 그런 계기를 통해 삼위 하나님 안에 누리는 법, 그 안에 거하는 것이 무슨 기쁨인가를 이분들이 겪은 거에요. 사랑하는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떠나는 선교는 이번 주로 끝납니다. 더어려운 선교가 남았어요. 일상에서의 선교입니다. 일상의 선교는쉽다고 생각하는 분 없을 거에요. 여전히 꼬질 꼬질 한 현실이 우리 앞에 있고, 배반이 있고 속상함과 괴로움이 웅크리고 있는 현장이에요. 그 땅으로여러분들은 내일부터 당장 현실에 부딪히게 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현실에서 우리는 천국이라는 것은 저 멀리 종말론적으로 우리가 완성할 나라도 우리 앞에 분명히 있지만 오늘이라는현실 속에 삼위 하나님 안에 거처를 마련하는 천국을 누리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본질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사모될 수 없는 겁니다. 오늘 이 말씀이 한 주간 또 살아내는 여러분들 일상에 강력한 위로가 되고 말씀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축복합니다. 다 일어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