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35)
하나님의깊은 손길
창26:1-15
1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2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3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6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7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8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9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10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11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12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5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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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창세기 26장을 좀 마치도록 하겠는데요. 우리 사진 하나를 좀 볼까요? 운동화를 신었고 흙이 묻었어요. 누구 신발인지 혹시 아십니까? 영화 좋아하는 분들은 퍼뜩 오래 전기억이, 예 맞습니다. 이 신발은 그림 하나를 더 볼까요? 예,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는 톰 헹크스의 신발이죠. 얼굴을 한번 보여 주세요. 이분 아시죠? 또 개인적으로도 참 좋아하는 배우인데 아까 그 신발을 한번 더 비춰 주세요.어느 영화 평론가가 94년도에 이 영화가 나왔으니까 벌써 20년이 훨씬 넘었네요. 그때 한 1,2년후에 저도 이 영화를 한 두어 차례 본 것 같아요. 영화가 워낙 길죠?140분짜리니까 두 시간 반 가까운 길이의 영화인데 영화의 칼라가 굉장히 좀 보수적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영화 내용을 얘기하려는 건 아니고 영화 평론가의 바뀐 시각에 대해서 말씀을 좀 드릴까 합니다. 자기가 이 영화를 처음 볼 때는 저 신발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답니다. 저운동화가 아이큐 75짜리의 운동화의 상징이구나. 저 운동화를보면서 아이큐 75를 생각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 영화를얼마 전에 재개봉 했다면서요. 20여년 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흙 묻은 운동화의 의미가 다시 살아오더라는 거죠. 불편한 다리와 또 정상적이지 못한 몸을 가지고, 약간지적인 능력도 떨어지는 상태에서 그가 사회적인 냉대와 편견 속에 얼마나 힘들고 외롭고 고달프게 살았을까? 저운동화가 그것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이 영화 평론가가 적은 글의 바뀐 시각이에요. 흙 묻은 운동화는 영화가 처음 나올 때 94년도의 그림이나 재개봉되었을 때의 그림이나 똑같은 신발이고 똑 같은 흙 묻는 운동화죠. 그런데 뭐가 바뀌죠? 의미가 달라지고 시각이 바뀌는 거에요. 우리는 그걸 보통 일반적으로성장이라고도 할 수 있고 변화라고도 할 수 있고 조금 긍정적인 표현으로는 성숙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10대에 만난하나님, 20대에 만난 하나님, 30대에 만난 하나님, 50대에 만난 하나님이 다 달라요. 어떻습니까? 여러분? 정말 달라요. 저는우리 성도들과 청년들이 성경을 깊이 묵상해 가면서 그런 저 밑바닥까지 하나님의 마음의 밑바닥까지 맞닿는 고민이 또 희열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우리가 신앙인으로써 반듯이 붙잡아야 될 가치입니다. 오늘은우선 첫 번째 이상한 것이 뭐냐 하면 본문에 구성된 스토리가 어쩌면 누구 스토리와 매우 흡사합니까? 그렇죠. 자기 아버지 적의 스토리와 판박이에요. 똑같아요. 아버지의 거짓말이 이삭의 거짓말이었어요. 이삭의 연약함에 아브라함의연약함이 보여져요. 넘어져요. 실수하는 거에요. 이것은 성경 기자가 왜 반복되는 사건을 거푸 기록했을까 하는 의도를 알아야 해요. 항상 성경은 기록된 팩트를 넘어 뭘 봐야 한다고 했죠? 하나님의마음, 하나님의 표정을 만나야 해요. 매일 똑같이 넘어지는거짓말, 똑 같은 실수, 똑 같은 인간의 치부를 반복케 하셨고그걸 왜 성경 기자는 오늘 독자에게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인가? 저는 여기서 거두절미하고 하나를 봅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지난 한 주 전,또는 한달 전 이곳에 엎드려 하나님 앞에 온갖 언어를 다 동원해서 다짐하고 각오하고 사무치게 부르짖던 기도의 제목들을 떠올려 보면여전히 그 일은 계속 반복되었고 또 그 제목을 들고 나와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우리의 모습을 금요일 밤마다 겪어요. 어떻습니까? 그게 인간이에요. 그래서우리는 지난 주 주일날 설교의 제목이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라고 기억은 하시죠? 네, 기억을 하셔야 됩니다. 그 온전함의 의미가 뭐예요? Perfect가 온전한 게 아니에요. 물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지는우리를 하나님 앞에 perfect하게 세우는 거에요. 그런데성경에서 말하는 온전함은 적어도 그것만을 말하는 건 아니에요. 온전함이란 아버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방향성을말합니다. 다시요, 성경적 개념에서 온전함이란 내가 완전히구비되고 갖춘 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진짜 온전함이라는 것은 연약하지만 부족하지만 못났지만 또 찌질해서 넘어졌지만 여전히 오늘도 나는 그분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 놀라야 해요. 내 삶을 돌아보면진작에 하나님 앞에 떨어져 나가도 100번 떨어져 나갔을 존재인데 여전히 그 앞에 머물러 있어요. 저는 그게 은혜고 기적이라고 믿습니다. 온전함은 뭔가를 온전히 갖춘게 아니라 그래도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이것을 점검하는 거에요. 할렐루야! 그 하나님은 한번도 골백번 수천 번 우리가 떠났다 돌아와도 우리를 고개 돌리시거나 팔을 안 벌리신 적이 없어요. 자 여기 반복되는 아버지의 실수든, 아들의 실수를 우리가 보면서이게 인간이구나 만나는 거죠. 자 이제 성경을 좀 보도록 합시다. 5절을보시면 알 듯 모를 듯한 기록이 있죠. 5절만 보시겠습니다. 시작
5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어떠세요? 5절에 이 아브라함에 대한 아주 훈훈한 미담이 선뜻 동의가 되십니까? 동의가되세요? 뭐라고 되어 있어요?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이 말이 무슨 이야기 뒤에 나오는지 잘 보세요. 이삭의 넘어짐과거짓말과 실수 속에 연약함이 드러나면서 나오는 문장이라는 걸 놓쳐선 안 돼요. 그건 뭐 이런 뜻일까요? 네 아버지 때문에 이삭 너 봐준다 뭐 그런 개념일까요? 구원도, 신앙도 그런 건 없어요. 아버지가 성실하면 아들을 그냥 봐주는 겁니까?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 이가 시립니까? 그런 건 아니잖아요. 자, 이 5절이 갖는의미가 사실 중요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까지의 적어도 아브라함은 법도를 지킨 적도 없고 계명과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순종한 적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몇 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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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 본 바와 같이 창세기 22장에서 그는 아들 독자라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의 제단에 약속대로 바치려 했던 그 순정을 확인하게 되죠. 그게 뭘까요?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이삭 네가 비록 지금 거짓말에 넘어지고 약함에 네 치부가 드러났지만 그 실수는 그 거짓말은 너희 아버지가 했던거짓말이요, 실수요, 악행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내가 고치고 만들어서 모리아 산 어느 한 산에 모습으로 빚어놓은 것처럼 네 인생을 여전히그렇게 끌고 갈 것이다. 이것을 누구의 예를 통해서? 누구의샘플을 통해서 확약시키는 겁니까? 아브라함의 샘플과 아브라함의 모델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이삭에게 확인을시키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이 드러난 이삭의 약함 추함 실수 이 모든 것들을 아브라함의 예증을 들어서너는 이 실수에 네 거짓말에 네 추함에 속이 아프고 네 스스로에 대해서 좌절이 크겠지만 걱정하지 마라, 네인생을 네 아버지를 만들 듯 그렇게 끌고 갈 것이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로 만들어갈 것이다. 그것을 5절에 수사적 표현으로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겁니다. 자, 그러고 나서 이제 우리는 한 가지 분석을 좀 할 필요가 있어요. 분석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메시지와 이삭의 메시지가 달라요. 어떻게다르냐 하면 일단 아브라함을 다루시는 방법과 이삭을 다루시는 방법이 하나님의 시각이 달라요. 어떻게다른가? 아브라함은 결국 애굽으로 내려 갑니까? 안 내려갑니까? 내려가죠. 그런데 이삭은 내려 가도록 합니까? 허락하지 않습니까? 허락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두 사람이 갖는 하나님 쪽 시각에서의 오늘 독자들을 향한 메시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아브라함은 허락하셨어요. 애굽으로 기근을 피해 아무 고민 없이 내려가는 것을 허락했어요. 허락 했는데 누가 혼이 났죠? 애굽의 왕이 혼이 나요. 그럼으로써 이 세계의 가장 강한 왕인 바로가 혼이 남으로써 아브라함에게 눈금 하나를 그려 주죠. 그 눈금이 뭡니까? 아브라함의 신앙 인식 속에 어쨌든 내 생에 속에개입해 오기 시작하시면서 내 일생에 동행하고 계신 이 하나님은 누구보다 센 분이구나? 이 세상의 군주인바로보다 센 분이구나. 하나님에 대해서 눈금을 하나 갖게 된 겁니다.이 인식은 앞으로 아브라함의 신앙에 기초를 놓는 굉장히 중요한 신앙 가치가 됩니다. 왜? 이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세계 만민이 복을 받아야 해요. 너를 통해서네 몸에 날 후사를 통해서 세계 만민의 복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인생의 메시지가 걸려있었어요. 그런데 왜 이삭에게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걸 허락 안 하죠?오늘 본문에 보면 허락 안 하죠? 왜 막습니까? 이제이삭에게 걸린 메시지가 다르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하나님이 주는 것으로만 살아야 한다는뜻입니다. 다시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누가 주는 것으로만살아야 해요? 하나님이 주는 것으로만 살아야 해요. 그래서이삭이 여기서 전업을 하게 되죠. 어쩔 수 없이. 원래 목축업자아닙니까? 그런데 농사를 짓습니다. 몇 배를 얻게 되죠? 100배. 이게 다 그 시대와 정황에 따라 다루시는 다른 방법들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 만큼이나 인생을 다루시는 방법이 자유롭습니다. 믿으십니까? 그래서 간증을 듣거나 간증을 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해야 해요. 그게원리가 될 수 있고 획일적 사고에 고착될 수 있는 빌미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간증을 듣더라도 새겨들으셔야 해요. 아, 저 분에게는 하나님이 저렇게 은혜를주셨구나. 똑같이 나도 좀, 그러지 마세요. 나한테는 하나님이 다르게 역사하실 수가 얼마든지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달라요. 두 사람의 얽힌 메시지가 다르기 때문에. 자, 그런데 성경을 이제 보십시다. 6절을 볼까요?
6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7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이것까지 어쩌면 누구를 그렇게 닮았어요? 네, 아버지 아브라함과 일치하게 닮았습니다. 12절을 좀 보십시다.
12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아주 중요한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여기 보면 100배나 얻었다 그랬죠. 자, 그러면 이 100배에대해서 공부 좀 하십시다. 100배라고 하면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것 같죠. 그런데 여러분 혹시 이삭이 그 앞에 그 전에 하던지, 그 앞에 앞에하던지 농사지었다는 말 들어 보셨어요? 방금 말씀 드린 대로 이삭은 목축업자였어요. 그런데 뭘 기준으로 100배나 얻었다는 말일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 표현은 말하자면 문학적 표현입니다. 수치적 개념이아니고. 자, 그런데 12절을보시면 이런 단어가 있습니다. 이삭이그 땅에서 뭐 하여 그랬어요? 네, 원문에는 농사가아니고 그냥 fact 동작을 그대로 썼죠. 원문에는 이렇게되어 있습니다. 자라. 이 말은 농사하여 라는 말보다는 사실 씨를 뿌렸다 이 뜻이에요. 뿌리고자라. 자라가 무슨 뜻이라고요? 씨를뿌리다. 이걸 이제 한글 번역에는 의역을 한 것 같아요. 농사하여그랬어요. 그 다음에 뿌리다 반대말은 뭘까요? 거두다. 그 해에 백 배나 어떻게 했고? 얻었고. 사실 얻었고 라는 말은 마차. 히브리 말인데 마차. 자라와 마차 사이. 자라는 무슨 뜻이라고요? 뿌리다. 그 다음에 마차는 뿌린 것이 열매가 되어서 주인과 어떻게된 거에요? 농사꾼과 만남이 이뤄지겠죠. 만나는, 열매를 만나는 거에요. 자라와 마차. 이걸 얼마나 수확했다고요? 백 배.백 배라는 것은 많다 그 뜻입니다. 수치적인 개념이 아니고. 자 그러면 이 과정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런 생각 혹시 안 해보셨어요? 복을 어차피 하나님이 주셨다면 몇 가지 그 두세 개 번역 성경을 읽어드릴 테니 들어보십시오. 공동 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을 했어요.
이삭은 그 땅에 씨를 뿌려, 여긴 뿌려 라고 번역을 제대로 했습니다. 그 해에 수확을 백 배나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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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께서는 이렇듯 복을 내리셔서 그러니까누가 복을 주신 겁니까? 하나님이. 공동 번역이에요. 바른 성경이라고 있어요. 이 성경도 아주 좋은 성경입니다.
이삭이 그 땅에 파종하여 씨를 뿌렸다는 말이죠. 그해에 백 배를 수확하였으며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으니
표준 새번역 성경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삭이 그 땅에서 여긴농사, 의역을 했어요 농사를 지어서그 해에 백 배의 수확을 거두어 들였다 주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자,결과적으로 우리는 세 결론에 봉착하게 됩니다. 첫째는 뿌렸고, 둘째는 그 열매를 거두었어요. 그리고 셋째는 누가 주신 복이라고요? 하나님이 주신 복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복의 정의에 대해서새로운 시각을 열 필요가 있다는 거죠. 하나님이 결국 이삭으로 하여금 거부가 되게 하셨는데 13절에 이런 힌트 하나가 있습니다.
13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어떻게거부가 되죠? 마침내 마침내라는 것은 즉각적으로 되는 겁니까? 서서히 천천히 되는 겁니까? 네, 서서히. 그런데 그 복을 누가 주신 거라고요? 하나님이 주신 거라고요. 자, 여기복의 새로운 정의가 감춰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려면 농사 같은 뿌리고, 자 뿌리기만 하면 열매는 저절로 거두어지는 게 농사입니까? 농사가쉬운 겁니까? 여러분 우리 입에 그 밥 한 알 들어오기까지의 그 과정과 시간을 자세히 분석을 해보면어마어마한 과정이 녹아져 있어요. 우리 표현은 그냥 농사 지어 먹고 살았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만아니에요. 거기에는 일조량이 제대로 맞춰져야 하고 물이 제 시간에 대어져야 하고 가라지가 없어야 하고벌레가 먹지 말아야 하고, 이걸 다 겪어내고 감당하려면 농부의 삶은 어떤 삶이어야 맞을까요? 잠 못 이루는 밤이 수없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 과정이 겪어지고지나가야 마침내 뭐가 된 다고요? 하나님의 복을 만나게 된다고요. 그러니까여러분, 우리가 복에 대해서 잘못된 정의가 뭐냐 하면 과정은 생략한 채 도깨비 방망이 식으로 뚝딱 어느날 갑자기 얻어지는 그게 복이고 은혜인 줄 안단 말이에요. 아니에요.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공부한 대로 점수가 잘 나온 게 복이에요. 공부도 안 했는데 그 전날까지당구장 가서 탱자 탱자 놀다가 잠을 잤는데 꿈에 막 나가라 나가라 다 나가라 답안지가 다 보여요. 그대로적었더니 100점이 나왔다?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역사하지않으시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재앙입니다. 어떻게 그게복이 되요? 그런데 우리가 기독교의 복을 사뭇 지금까지는 거꾸로 가리킨 듯한 경향이 없지 않아 있어요. 잘못된 가르침이죠. 내가 노동을 해서, 땀을 흘려서 그 대가를 얻는 것은 내 공로, 내 은혜가 아니에요. 누구의 복이라고요? 하나님의 복이에요. 아침에 해가 뜨면 눈이 저절로 떠지는 것도 복이에요. 밤만 되면졸음이 곤두박질 치는 것도 은혜에요. 여러분 불면증에 시달려 봤나요?저는 불면증이 조금 있어요. 힘들어요. 잠은안 오고, 그 다음에 무수한 과정들이 벌어져요. 잠은 안오고. 제때 잠을 자는 것은 복이에요. 상식적인 게 얼마나소중한 것인지 몰라요. 이번 투표할 때도 상식을 존중하세요. 상식적이지않은 건 위험해요. 굉장히 위험해요. 오늘 성경은 그냥 뿌리고거두었다는 표현만 담겨 있지만 어떻게 뿌리고 거둠 속의 과정을 생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그것을뭐라고 하셨죠? 복이라고 하셨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하셨어요. 이말은 뒤집어 얘기하면 서론에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는 그 애달고 사무치고 간절한 과정 속에서 누구를 향해서 찾아가는 싸움입니까? 아버지를 향하여 찾아가는 싸움이에요. 여러분 여기 잠깐 접어 두시고우리 고린도 후서 5장을 열어 볼까요? 1절서부터 저하고교독하죠.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잠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자,여기 반복되는 독특한 단어 하나가 눈에 띕니다. 탄식이란 단어입니다. 탄식하다. 자, 우리가보통 탄식에 대한 정의나 이미지를 어떻게 갖고 있습니까? 부정적으로 갖고 있죠? 그래서 이 탄식이라는 개념이 은근히 우리 신앙 정서에 물들여 져서 기독교의 이해까지도 망가뜨리는 경우들이 있어요. 세상에 의지할 게 뭐 있냐? 세상에 소망이 뭐 있냐? 일명 맞는 말인데 사실은 온전한 말이 안 되죠. 우리가 기독교를믿는 이유는 이 세상 소망도 없고 그냥 이것 저것 다 꼴 보기 싫으니까 빨리 주님 오셨으면 좋겠다 그건 도피성이나 회피라는 거지 사랑이라 그러지않아요. 여기서 말하는 탄식은 정확한 정의가 상사병을 얘기하는 거에요.상사병. 상사병 한번 앓아 보신적 있나요? 젊은이들이상사병 한번 앓아보지 못하면 어떻게 청춘을 논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세상꼴 보기 싫어서 예수 믿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에 소망이 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게 아니에요. 그분을 어느 날 만난 이후로 그분만 기다려지는 삶을 살수 밖에 없는 겁니다.그걸 여기서는 바울이 뭐로 표현했다고요? 탄식이라고 표현했어요. 하나님은 그래서 종종 우리들에게 왕창 은혜를 누리게도 하시지마는 다 거둬 가시기도 해요. 그럼으로써 이 시계추처럼 극과 극을 왔다 갔다 겪는 가운데 우리의 모든 지향점을 계속 누구에게로 향하게 하는거죠? 하나님께로만 향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그분에 대한 탄식이 더 짙어가게 만드는 거죠. 그래서 봄날도 분홍색마냥 화려하고 대단하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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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장하는 가을의 쓸쓸한 색깔을 어느인생이 흉내 낼 수 있겠어요? 그 가을의 깊이. 아무도 흉내내지못하는 겁니다. 우리 신자들에게 들춰져야 될 표정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향한 깊은 그리움을 더 새겨가는 삶을 얘기하는 거에요. 여러분 그런 마음으로 금요일 오시죠? 아닙니까? 청춘들은 대답이 없어요.사실 탄식이라는 것은 그런 점점 깊어져 가는 주님을 향한 그리움을 얘기하는 거에요. 그래서바울이 자기의 죽음을 아버지 집으로 이제는 간다 라는 표현으로 설명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것은 도피성 개념이나 회피의 개념으로 접근해서는 신앙이 잘못될 수 있어요. 그래서 시련이 많고 갑작스럽게충격을 겪은 성도들에게 이단들이 달려들기 좋은 거에요. 힘들죠? 세상낙이 없죠? 이리로 오세요. 여기 십자가 뽕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저는 그런 사람 많이 봤어요. 이단들은 항상 그렇게 깊은 절망에 충격에 놓여있던 사람에게 접근을 해요. 그래서도피시키고 싶은 심정을 촉발시킵니다. 금방 빠집니다. 맞아. 이 세상 낙이 없어. 그래서 이상한 데로 전세금 빼가지고 애들 학교다 그만 두게 하고 그냥 그 집단으로 들어가는 거에요. 거기 들어가면 일단 먹고 사는 문제 걱정 없고, 생각 복잡하게 하지 않아도 되고 좋거든요. 약 먹은 것 마냥. 위험하죠. 정상적인 기독교는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어요. 피하라 하지 않습니다. 자, 이제성경을 보십시다. 다시 창세기 26장으로 가서 하나님이 이삭을어떻게 다뤄 가시는가를 뜻밖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14절
14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사람이 그를 뭐하여? 시기하여
여러분 본질이 세상 사람들의 시기의대상인 것 아세요? 그게 여러분 삶의 본질입니다. 세상의왕들은 세상의 주인들은 예수쟁이들을 본성적으로 시기하고 싫어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내려진 조치가15절
15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17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참,이런 본문 읽으면 속이 상해요. 왜 그러냐 따지지도 한번 못하고. 반항 한번 못하고 바보처럼 그냥 스르르 연기 사라지듯 떠밀려서 그냥 자기 거처를 옮겨 버립니다. 안 싸워요. 여러분 싸우지 마세요.싸움은 크리스천의 본질이 아니에요. 지는 게 맞아요. 우리가싸운다는 것은 뭐냐 하면 그들이 갖고 있는 가치와 동의 하에 싸우는 거에요. 그래서 싸우는 거에요. 가치가 똑같기 때문에. 그런데 가치가 삶의 근거가 다른 사람은 안싸워요. 쟤하고 나하고 기초가 다르고 근본이 다른데 싸움의 대상이 될 수가 없죠. 그래서 안 싸우는 거에요. 그런데 물러날 때도 사실은 겸손하게 물러나야해요. 아휴, 그래 그래.이러면 약 오르죠. 그런데 꼭 그렇게 초 치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요. 그렇게 싸우면 차라리 싸우는 게 나아요. 그러려면. 그렇게 물러나지 말고 항상 예수님처럼 우린 당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것이예수님의 남은 고난에 우리의 삶을 채우는 방식입니다. 어떻게 싸워요?우리가? 여기 목사님들 뒤에 많이 앉아 계시는데 진짜 운동들 할 때보면 저것들이 목산가? 할 정도로 성질들이 있어요. 그런데 못 싸우죠. 목사들은. 맞으면 맞았지. 그런데이것이 우리 신자들의 숙명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싸워요? 그런데한번 안 믿어지면 실험적으로 여러분들이 안 싸우고 한번 당해 보세요. 저는 당하는 게 믿음이라고 봐요. 그 결과를 누구에게 맞기는 결단입니까? 맞습니다. 그 결과를 시퍼렇게 살아계신 하나님께 맡기는 결단이에요. 그래서우리는 정말 싸울 수가 없어요. 이삭이 물러납니다. 그리고옮긴 데가 어디냐 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18절을 제가 좀 읽을게요.
18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 팠던 우물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을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자,이제 그랄에서 떠밀려 아버지가 우물 팠던 곳으로 옮겨 갑니다. 그런데 그 우물에는 이미블레셋 사람들이 메워 놓은 쓰레기 더미가 가득 채워져 있었어요. 마틴 로이드 존스라는 궁중 의사이자, 지금까지 영어권에서 그만한 강해자가 나오지 않죠. 그분이 쓴 책에보니까 이 대목에서 이런 주석을 설명을 달아 놨어요. 현대 시대야 말로 이 우물을 다시 파야 한다. 이 우물은 누구 때 팠던 겁니까? 아브라함 아버지 때 팠던 우물이에요. 그런데 그 사이에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그 우물에 온갖 쓰레기로 샘 줄기가 막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우물은 아무도 걸러 먹을 수 없는 죽은 우물이 되고 말았어요. 그런데놀랍게도 아들이 그 우물을 다시 파서 거기서 샘터를 일으켜냅니다. 로이드 존스가 이 말을 어느 시점에서하는가 하면 복음의 회복이라는 설명에서 이 대목을 인용을 해요. 어쩌면 지금 이 시대는 우리 선배들,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일사각오로 하나님 앞에 선혈이 흐르는 복음 하나만 붙잡고 신앙생활을 단순 담백하게 해냈던그 시절로 사실은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새벽을 일으키고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고 어떤 복잡한 신앙 생활이아니라 우리 선배들이 담백하게 붙들고 있었던 오직 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복음을 우리가 다시한번 회복해 내야 할 책임이 있어요. 종교 500주년이라는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죠. 더 중요한 것은 마틴 루터가 왜 종교 개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는가? 교회 안에 비본질적인 수많은 제도가 들어오고 의식이 들어오고 부속문화가 들어오면서 교회는 우상 단지를 섬기는단체와 다름이 없는 상황으로 매관 매직하고 넘어가고 말았어요. 루터는 종교 개혁을 일으켜야 되겠다고생각한 사람이 아니에요. 루터는 한 가지 밖에는 생각이 없었어요. 이건아니다. 그래서 그는 성당 문 앞에다 95개 조항, 그 시대에 잘못된 비틀린 문화와 가치를, 교회 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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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하면서 질의서를 시대를 향하여 던집니다. 그리고 그가 얻고자 했던 시대의 답은 하나였어요. 다시 성경의 원형으로돌아가자. 이삭이 위기와 환란을 만날 때 그를 살려줬던 게 뭐죠? 아버지가팠던 우물을 다시 파는 거에요. 블레셋의 쓰레기들을 거둬내는 겁니다.이것이 어쩌면 우리 한국 교회와 이 시대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는 도전일지도 몰라요. 얼마나교회 안에 지금 블레셋의 쓰레기들이 가득 차있습니까? 왜 교회가 이 시대의 쓰레기 매립장이 되어야 합니까? 그래선 안되잖아요? 다시 말씀대로,이것이 왜 식상한 소리가 되어야 됩니까? 가장 중요한 현실적인 소리로 일어나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난주인가요?여러분들에게 그런 말씀을 드렸죠. 뭐가 현실이냐? 하나님이현실이 되어야 해요. 믿습니까? 예수가 여러분들의 현실이되어야 해요. 오늘 이삭은 타향살이 속에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서 그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거부가 되도록까지 일궈 놓았던 모든 것들을 다 빼앗깁니다. 그 당시 부의 개념은 두 가지에요. 땅과 물입니다. 떠나라 하니 땅 빼앗긴 거죠. 샘터를 뺏깁니다. 다 뺏긴 거죠.하나님은 백 배를 주시기도 하고 또 이렇게 어느 날 싹 거둬 가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앙의위대함이라는 것은 있던 게 없어졌다가 다시 회복되는 게 신앙의 위대함이 아니에요. 신앙의 위대함이라는것은 그 과정을 통해서 그것과 상관없이 주님이 함께 하심이 복이구나를 눈 열어 확인하게 되는 거죠. 그게신앙인의 위대함이에요. 믿습니까? 성경을 이제 마저 결론을보십시다. 창세기 26장 29절28절부터 읽습니다.
28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음으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가게 하였음이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을 자니라
예,그를 내치고 빼앗았던 장본인들이 찾아와서 화친을 청하고 누구를 고백하죠? 이삭 당신 대단해그랬던 가요? 아니죠.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던 고백은 너는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누가 드러납니까? 누가 드러나요? 하나님이 드러나요. 우린 이걸 영광이라고 하죠. 믿습니까? 결국 이삭의 인생 속에 하나님이 드러나요. 그 과정 속에는 빼앗긴 적도 있었고, 백 배를 주신 적도 있었지만결국은 하나님이 드러나요. 오늘 이런 간절한 기도가 우리 모든 삼일의 사랑하는 성도들 가슴 속에 꼭꼭 새겨지고 박혀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부르짖는 눈 떠지는 복된 밤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찬양 하나 하십시다. 예수 피를 힘 입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