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43)
엘엘로헬 이스라엘?
창33:1-10
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 여종들과그들의 자식들은앞에 두고 레아와그의 자식들은다음에 두고 라헬과요셉은 뒤에 두고
3 자기는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4 에서가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5 에서가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6 그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7 레아도그의 자식들과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8 에서가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입으려 함이니이다
9 에서가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네게 두라
10 야곱이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00:00-10:00)
전체 본문이 10절까지 인데 20절까지 살피면서 오늘 이 사건이 갖는 야곱의 인생 속의 메시지가 뭔가를 한번 보도록 하죠. 자 우선 보시면 저 쪽에서는 사백 명의 개인 군대를 끌고 에서가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규모상으로 볼 때 절대 이 사백 명 군대라는 표현은야곱과 전쟁을 위해 오는 길이지 용서나 화해나 환영을 위해 오는 길은 절대 아니에요. 그런데 결론은에서가 야곱을 보자 마자 어떻게 하죠? 서로 목을 어긋맞고 모든 걸 풀어낸 채 그냥 웁니다. 사실 화해는 그걸로 끝났어요. 자 그런데 이 화해에 이르기까지 한20년이 걸렸는데 무엇이 이 화해의 원인이 됐을까요? 야곱이특별히 선물을 드리기 전입니다. 또 야곱이 저쪽에서 에서가 오는 걸 보고, 형 잠깐 내가 다 잘못했어 그랬다든지 어떤 사전의 언급이나 제스처가 없어요.그리고 에서가 먼저 동생을 향해 달려왔어요. 분명 에서는 오다가 뭔가 급격한 심경의 변화를겪은 거에요. 그 원인이 뭘까를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야곱은너무너무 두려움 속에서 지금 형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방금 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얍복 강을 건너서 격렬한 어떤 사람과의 씨름 끝에 다리가 절어요. 에서가 뭘 봤을 까요? 저기서 동생이 20년 만에 눈에 들어오는데 한 눈에 봐도 알겠어요. 야곱인걸. 그런데 그 동생의 다리가 어떻게 되어있어요? 절뚝 거리며 와요. 그것을 보는 순간 형 마음이 어떨까요? 마치 그 승리한 개선 장군마냥찬란한 모습으로 야곱이 저쪽에서 오고 있었다면 문제가 좀 달라졌을 거에요. 20년 만에 점점 다가오는동생의 모습은 남의 집 살이 했으니 행색이 뻔하죠. 게다가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고 절고 있어요. 여기서 에서의 마음이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아무리 잘못을 했더라도. 사실 그 이면에는 이미 그 마음을 누가 돌려 놓으신 겁니까? 하나님이돌려 놓으신 거에요. 하나님은 이미 창세기 31장 32장을 걸쳐서 야곱을 향해 고향 땅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돌아가라고 귀향 명령을 내리실 때 하나님은 명령만 내리시는하나님이 아니세요. 하나님은 명령 내리신 다음에 대안도 주세요. 형에서가 중무장을 하고 오든, 어떤 모양을 하고 오든 그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아무리 복수를 위해서 중무장을 했더라도 하나님이 에서의 마음 하나 바꾸면 끝이에요. 그런데 그 전날 밤 브니엘의 아침을 맞기 전에 야곱의 환도 뼈를 심판하심으로써 그의 한 쪽 다리가 접니다. 그리고 그 초라한 모습으로 저쪽에서 동생이 오고 있는데, 에서의마음이 갑자기 많은 사연들이 봇물 터지듯 터지면서 먼저 달려가서 목을 어긋맞고 웁니다. 이 울음으로끝난 거에요. 사실은. 여기에 주인공은 야곱이에요. 이 거부 에서는 사실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집니다. 야곱은 이 형에게마음을 풀려고 두 떼를 나누어서 많이 준비했어요. 물질로 어떡하든 지난 원한의 보상을 좀 해드리려고그랬더니 에서가 그 야곱이 의도를 알아 채고는 됐다 넣어둬라 그래요. 얼마나 그 준비가 무색합니까? 인간의 준비를 에서가 한방에 무력화 시키는 거에요. 야곱은 이걸로어떻게 마음 좀 풀어 보려고 형님 받으시죠. 그런데 에서가 딱 한 마디 해요. 됐다, 나한테도 넉넉하다. 그냥넣어 둬라. 형답게. 자기는 가슴이 쪼그라들어서 마음이 바짝바짝 타서 이거라도 좀 어떻게 해볼까 하고 웅크리고 준비했었던 것이 인간의 수단이 준비된 게 얼마나 부끄럽고 무기력해졌나 말이에요. 이게 뭐에요?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이름이 바뀌죠.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어요. 그런데 아직도 야곱의 태도와 행동속에는 야곱스러움이 남아 있어요. 야곱스러움이. 야곱은 성도의, 아담의 또 하나의 원형적 그림이에요. 이게 우리란 말이에요. 야곱은 제 3자의 나쁜 놈이 아니고 거기 지금 내 모습이 반영되어나타나는 거에요. 거기 송태근의 모습이 있고 여러분들의 모습이 있는 거에요. 그 모습을 조금 더 적나라하게 보겠습니다. 1절을 보시면
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자식들을 어떻게 나누는지 잘 보세요.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 여종들과그들의 자식들은앞에 여종들이 둘 있었죠? 레아의 여종, 라헬의 여종. 그여종들이 낳은 자식들 그룹은 맨 앞에 배치를 해요. 그 다음에 원치 않은 부인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두 번째 줄에. 그리고 라헬과 요셉은 누굽니까? 가장 눈에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여인과 그의 아들들. 이 라헬과 요셉은 제일 뒤에 둬요. 아직도 야곱은 계속 뭘 부려요? 이 머리를 굴리고 있어요. 꾀를 부리는 거에요. 이름이 바뀌고 나서도 아직도 형을 아니 가나안을향하는 이 길목에 인간의 수단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걸 우린 여기서 만납니다. 3분대가 나뉘어 있습니다. 제일 앞에 두 여종과 그의 자식들. 그리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요셉입니다. 요셉을라헬이 낳은 자식이죠. 자, 이제 3절을 보실까요?
3 자기는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자, 이게 얍복강을 건널 때와 달라진 모습입니다. 얍복강을 건널 때는자기가 제일 뒤에 서있었어요. 그러니까 사람이 한꺼번에는 안 바뀌는데 조금씩은 바뀌어요. 지금 어쨌든 이 3분대로 나뉘어진 제일 앞에 야곱이 있어요. 형하고 일단 화해를 해야 하니까. 저지른 건 자기니까. 두 종과 아들들에게 너희들이 좀 화해해라 이럴 순 없는 거잖아요. 이것도엄밀한 의미에서 어쩔 수없이 앞에 선 거에요. 그래도 야곱 같은 간교한 기질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많이바뀐 거죠. 얍복강 건널 때는 자기 맨 뒤에 있었어요. 그나마도안 건너고 혼자 있었어요. 그러다가 그날 밤에 희한한 씨름을 겪게 되었죠. 그리고 나서 야곱의 행동을 잘 보세요. 3절
자기는 그들의 앞에 나아가되 몸을일곱 번 땅에
(10:01-20:00)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자,여러분 여기 자기 몸을 몇 번 땅에 굽혀요? 일곱 번 땅에 굽혀요. 이것은 사실 어디 풍습인가 하면 가나안 풍습입니다. 이제 오늘 전체줄거리에서 야곱이 이미 가나안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는 힌트들이 하나씩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걸 우리는한글로 전부 뭉뚱그려 버리니까 눈에 잘 안 들어오죠. 어떤 행동과 어떤 언어가 어떤 표현이 고대 근동지역의 가나안 문화의 표현과 관습들인가를 들춰드릴 테니 그때 가서 확인을 합시다. 어쨌든 첫 번째 드러난것이 뭐냐 하면 몸을 굽혀서 일곱 번 절하는 것은 가나안 지역에서 주종 관계를 맺을 때 정확하게 이 행위를 합니다. 주종 관계를 맺을 때. 그러면 그 말이 무슨 말이 되죠? 야곱은 지금 누구의 종으로 서겠다는 거에요? 목숨만 부지 된다면에서의 종으로도 평생 살겠다 그 뜻이에요. 지금 그 고백을 형님에게 하는 겁니다. 화해 차원에서. 아마도 이것은 진심이었을 것 같아요. 자 그런데 4절을 좀 볼까요?
4 에서가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 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이행동은 화해의 문학 양식에 자주 등장하는 히브리적 표현이에요. 목을 어긋 맞는다는 말은. 이 화해는 에서의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화해였어요. 제가 성경을 읽다가요즘 자주 그런 생각이 들던데, 예를 들어서 여러분 홍해가 갈라졌다,요단강이 갈라졌다 그러면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 책에서 읽던 동화 읽는 느낌이 듭니까? 아니면진짜? 이런 느낌이 듭니까? 아마도 전자의 느낌이 더 많을거에요. 왜? 요즘 청년들 쓰는 표현 중에, 실화야? 이런 표현 많이 써요. 실화죠. 실화는 우리에게 뭘 주죠? 실화와 꾸민 얘기. 우리가 제일 코 웃음 치면서 보는 영화가SF영화에요. 그 가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영화를 보니까 우주선이 날라와서 63빌딩 같은걸 집어서 옮기더라고요. 그런 영화 보면 웃죠. 그런데 그런 영화보다 더한 게 뭐냐 하면 홍해가 갈라지는 거에요. 홍해가. 그런데 여러분 그 기사를 읽으면서 웃으면서 읽어요? 어떻게 읽어요? 실화라니까요. 성경의 예수님의 이야기가 실화에요. 실화. 예수는 역사다 라는 영화가 있어요. 지금 하고 있을 거에요. 여러분,실화는 왜 의미가 있는가 하면 그 신화는 우리에게 진짜 충격과 공포와 감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실화는그런데 SF식의 영화를 보면 뭐 대단한 CG를 통해서 만들었다는걸 뻔히 알기 때문에 별로 감동이 없어요. CG 잘 처리했네 그러고 보니 누가 우와 하면서 봐요. 그런데 성경의 모든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님의 스토리는 실화라니까요. 이얘길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이제 동해 선교 가서도 우리 청년들에게 이런 얘길 했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보고를 할래? 간증을 할래? 어제 저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들었던 예화가 뭐냐 하면 열두 정탐꾼이있어요. 열 정탐꾼은 그 땅에 들어가서 똑 같은 현장, 똑같은 상황을 보고 와서 뭘 했어요? 보고를 했어요. 보고. 리포트를 했다고요. 갔더니 중무장한 그들을 보니 우리는 메뚜기 같고, 그 땅은 어떠어떠 하고, 그냥 본 대로 보고만 했어요. 그런데 결국 40년 뒤에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갈렙과 여호수아는보고를 넘어서 간증을 했단 말이에요. 그 땅은 하나님이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맞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그 땅은 아무리 장대한 민족이 살지라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맞는데 우리 땅이넉넉히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고 왔습니다. 이건뭐에요? 보고에요? 간증이에요. 간증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 스토리가 만들어진다는 게 간증이에요. 결국성경의 이야기는 우리가 그냥 문자로 취급하면 문자로 읽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성경 한 절 한절이내 안에 생생하게 꿈틀거리듯 살아 들어오고 그것이 내 삶 속에서 믿어지고 그 믿음을 통해서 역사가 일어나고 이건 보고가 아니라, 문자가 아니라, 간증이 되는 거죠.자, 여러분 이제 성경을 잘 보십시다. 몇 절을보시냐 하면 4절을 다시 보세요.
4 에서가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 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5 에서가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그제서야이제 에서가 이 사람들이 아내들이요, 밧단아람에서 얻은 자식들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6절을 제가 읽을게요.
6 그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7 레아도그의 자식들과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8 에서가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입으려 함이니이다
자, 여기서 내 주께라는 말은 에서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야곱이 에서에게도 뭘 입기를 원하고 있죠? 은혜를 입기 원하는 거죠.아주 안정빵으로 하자는 거에요. 하나님만 의지해가지곤 불안해. 무슨 소린지 알겠어요? 이것이 뭐죠? 이것이 오늘 33장의 들출 때마다 나타나는 야곱스러움이에요. 하나님도 고백하고 하나님도 믿어요. 안 믿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의지해요. 그리고 뭐도? 인간적인수단도 간구를 하는 거에요. 당신께 내가 은혜 입기를 원합니다. 에서의마음은 이 선물 받기 전에 풀어졌습니까? 받은 후에 풀어졌습니까? 이미이거 알지도 못하는 전에 풀어진 거에요. 그 화해와 그 눈물은 사실 하나님이 시킨 화해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좀 보십시다. 9절
9 에서가이르되 내 동생아 얼마나친절하고 따뜻한 표현입니까?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네게 두라
됐다. 넣어 두라. 나에게도 그 이상의 넉넉함이 있다 이 얘기에요. 그러니까 이 야곱의 오랜 세월 동안 머리를 굴려서 만들어 놓았던 잔꾀가 얼마나 무력하게 돼버리고 말았어요? 그리고 이제 성경을 좀 볼까요? 10절
10 야곱이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받으소서 그리고 이제 기가 막힌 얘기를 합니다. 여기서부터 다같이 시작
내가 형님의 얼굴을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20:02-30:00)
네,내가 형님의 얼굴을 봤는데 누구 얼굴을 본 것 같아요? 뭔가 오버랩 되는 사건이 연상되지않습니까? 이 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 야곱은 어떤 사람과 밤새 씨름을 하고 나서 그 지명이 브니엘이됐어요 아침을 맞으면서. 브니엘의 이름 뜻이 뭔가요? 내가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자기 중심적인 적용의 귀재입니다. 이게 뭔 소린지 알겠어요? 자기 중심적 적용의 귀재에요. 그러니까 야곱의 종교 세계는 아직도 그 핵심이 나 입니다. 나. 자아에요. 하나님이 야곱과 얼굴을 대면하여 선 것은 어떤 의미에서야곱과 얼굴을 대면했습니까? 더 이상 너는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다시 말해서 이제는 너는 내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나를 중심으로 나를 주인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선언이고천명이에요. 그리고 네 인생 속에 이제 내가 주인이 되어 네 인생 속에 개입하겠다 이 뜻이에요. 그런데 야곱은 에서의 얼굴에 갖다 대고 하나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 왜? 지금 에서의 마음이 싹 풀어졌거든. 그러면 에서의 얼굴을 넘어 사실은누구의 얼굴을 봤어야 옳았어요? 하나님의 얼굴을 봤어야 옳았지요. 하나님은훗날 야곱을 그렇게 만들어요. 결국은. 이게 시대적 언어플레이에요. 하나님은 결국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듭니다. 우리가어떻게 하나님을 이용해 먹고 적용해 먹을 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개인의 인생을 통해 묵묵히 가지 치고 나가세요. 자 그 다음 절을 우리가 확인해 볼까요? 11절
11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결국은 누구한테 안깁니까? 형 에서한테 안겨요. 그래야 안심이 되거든요. 그래야. 자기만큼이나 인간을 못 믿어요. 그래야 안심이 되겠기에 강권하여 선물을 에서의 품에 갖다 안깁니다. 에서는할 수없이 받아요. 자 그런데 12절을 잘 보세요.
12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13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 청하건데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동행 하겠다는 겁니까? 안 하겠다는 겁니까? 안 하겠다는 거에요. 말을 어떻게 했냐면 우리 애들은 아직 어리고 짐승들은 새끼를 가지고 있습니다.길이 험하면 그것들이 죽거나 병이 날 수 있으니까 저는 형님 뒤를 따라서 천천히 세일로 가겠습니다.그랬어요. 세일은 당시 에서의 거주지에요. 그런데야곱이 이 말은 거짓말이었어요. 세겜으로 갔어요. 세 자만같아요. 이거 아세요? 하나님은 벧엘 비슷한 데도 원치 않고, 벧엘 가까운 곳도 원치 않아요. 벧엘을 원했어요. 하나님은 항상 정확한 의도를 성도에게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늘우리는 벧엘 비슷한 곳, 벧엘 근처 이거 좋아해요. 이게누구의 속셈이고 속성인가 하면 바로의 속성이에요. 하나님께 예배하러 광야로 가겠다고 하니까 멀리 갈것 없다. 여기서 해라. 예배면 다 같은 거 아니냐? 바로가 했던 얘기죠. 야곱은 핑계를 대고 아직도 그 마음에 에서에대한 불안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에서는 순수하게, 어떨땐 세상 사람이 더 순수해요. 보호하자는 목적에서, 이 거친광야에서 동생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나와 같이 가자. 이 자녀들을 데리고 내가 보호해 주마, 내가 군대 데려왔으니 같이 가자. 해서 제안을 했더니 됐습니다. 나 천천히 갈 테니까, 천천히 세일에 도착하겠습니다. 이렇게 된 거에요. 자, 14절을읽어 볼게요.
14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이게 야곱이 했던 거짓말이에요. 계속 그는 야곱스러움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어요 이제 16절을 보실까요?
16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17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숙곳이라 부르더라
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자,여러분 야곱이 처음에는 성경을 잘 보세요. 17절
야곱이 숙곳에 이르러숙곳이 우릿간이라는 뜻이에요. 자기를위하여 집을 짓고 첫째는 누구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지었어요. 두 번째는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어요. 그래서 그 땅 이름이뭐가 됐죠? 숙곳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곱의 총 인생을딱 한 문장으로 정리했는데 밧단아람에서부터 어떻게 가나안으로 돌아왔어요? 평안히. 누가 인도하신 걸음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신 걸음이었죠. 그런데 하나님은 원래 야곱을 평안히 돌아오게 약속하셨고 계획하셨어요. 그런데누가 혼자 널 뛴 겁니까? 누가 혼자 중간에? 야곱이. 야곱이 혼자 겁 먹었다가 혼자 움츠려 들었다가 혼자 두 떼 나눴다가 세 떼 나눴다가 밤에 막 잠도 못 자고, 이것을 ‘혼자 부루스’ 라고하는 거에요. 혼자 난리를 치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에도그런 사람 있어요. 제가 보니까. 혼자 난리 부루스를 치는사람, 하나님의 이 궁극적인 큰 약속을 못 보고. 평안히가나안 땅에 돌아왔더라. 이게 원래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에요. 그런데이 돌아오는 여정에 야곱은 혼자 생쑈를 한 거에요. 잠 못 자고, 밤새주판 놔가지고 세 떼로 나눌까? 두 떼가 낫나? 이러면서혼자 환장을 한 거죠. 그런데 이 사람 보세요. 성경을 잘보세요. 18절
18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 장막친 밭을 어떻게 했습니까? 샀어요. 밭을 샀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거기 살겠다는 뜻이에요. 이게 진짜 의도에요. 여긴 벧엘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제 다음 주에 만날 현장이지만 야곱의일생에 피눈물 나는 일들을 겪게 되죠. 세일이라는 지역은 그 언어 자체가 재미있는 언어 플레이를 갖고있는데 짐을 지고 떠날 곳이란 뜻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장막을 치고 살 목적으로 그 밭을 삽니다. 그리고는 그 이름을 이렇게 부릅니다.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자 이제 우리는 이 종교적 언어에 많이 속아요.
(30:01-38:59)
야곱이 제단을 쌓았다, 하나님을 불렀다 하니까 이것이 마치 아주 야곱이 돌아온 것에 대한 큰 영광을 돌리고 감사한 것처럼 홀딱 속습니다. 왜? 늘 우리도 야곱 같거든요. 그래서속아요. 자 이 언어는 정확히 얘기해서, 가나안의 종교인들이, 가나안 사람들이 종교적 행사를 할 때 쓰던 패턴의 서두에요.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는건. 엘 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이란 뜻이죠? 엘로헤 라는 말은 이때는 아직 이스라엘이란 국가가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어요. 그럼 여기 이스라엘은 누굴 가리키는 거에요? 야곱을 가리키는 거에요. 야곱의 이름이 지난 장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이스라엘로 바뀌었잖아요. 그럼 엘 엘로헤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자길가리키는 거에요. 나를 언제든지 도와주시는 하나님. 이것이가나안 사람들이 종교 행사를 할 때 앞에 늘 통상적으로 쓰던 종교 용어인데 제가 불러 드릴께요. 그들은늘 종교 예식을 할 때 이래요. 내가말하는 것을 반듯이 들어 주시는 나의 신이여, 내가 말한 것을 모두 들어주시는 나의 신이여, 내가 바라는 것을 모두 들어 주시는 나의 신이여. 내가 필요한 것을들어 주시는 나의 신들이요.
엘로헤 라는 것은 신들에 대한 복수개념이에요. 언제나 엘 하면 우리는 하나님이지만 이 엘 이라는 말이 우리만 쓰는 표현이 아니었거든요. 이미 가나안에도 그들의 신을 뭐라고 불렀어요? 엘 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니까 야곱은 희미하게, 어렴풋이 들어와 있는 하나님이라는 신에대해서 이제 천천히 의식화 되고 눈이 열어져 가는 단계에요. 그는 이름이 바뀐 상황에서도 아직 그의신앙의 내용은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었어요. 자기가 주인이었어요. 뭐로알 수 있냐 하면 두 가지가 없어요. 이 엘이 하나님에 대한 칭호였다면 반듯이 두 가지가 있어야 하는데나님의 주권이 고백되어야 하고 그리고 거룩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제단 쌓는 야곱의 실질적인벧엘 사건 이후로 이 제단을 쌓는 행위 속에서 야곱은 어떤 그런 표현이 소개되지 않습니다. 거룩해졌다든지아니면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통치를 고백했다던지 어떤 언급도 없어요. 아직도 이스라엘 속의 야곱스러움이지독하게 옹골차게 녹아진 거에요. 그래서 이 표현들을 여러분들이 야곱의 어떤 신앙적 행위로 이해해서는안돼요. 이것이 절대 신앙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 다음 장에 바로 들통이 나요. 한 군데만 볼까요? 자 딸이 기가 막힌 일을 겪었어요. 그랬더니 야곱이 그 아들들의 복수극을 보고 나서 34장 30절에 보세요.
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브리스 조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이게 무슨 노랜가 하면 바로 나나나송이에요. 애기들 키울 때 제일 애기들이 많이 하는 말이 뭐에요? 나, 나. 나 줘. 내 꺼. 아주 유아적인. 지금 야곱은 이런 말을 하면 안되죠. 누가 지금 몹쓸 짓을 당해 왔어요? 자기 외동딸 디나가 그 넘지말아야 될 땅 세겜에서 경을 칠 일을 겪고 나서 친 오라비들이 복수극을 벌였어요. 그 소식을 듣고 누굴걱정해야 옳아요? 딸을 걱정해야 옳지 않아요? 그런데 나와, 내게, 나, 이게 무려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일곱 번 등장해요. 완전하게 자기 세계에 빠져 있는, 일곱 수가 여기 등장합니다. 이게 야곱이에요. 그게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에요. 오늘 이 영성 집회가 그런 예배가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믿습니까? 다시 한번 오늘 이 밤에우리 기도 속에 아직도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옹골차게 녹아져 있는 야곱스러움을 털어내는 밤. 그래서돌아보면 에서는 결국 뭐에요? 이것은 시청각 자료에 불과해요. 누구를고쳐내기 위한? 야곱을 고쳐 내기 위한. 그리고 이 다음에는별로 에서가 등장하지도 않아요. 큰 거부 하나가 살짝 나타났다가 야곱의 진 면목을 드러냈다가 바로 사라져요. 그냥.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사소한 문제서부터 큰문제에 이르기까지 사실은 누구를 고치는 하나님의 재료들입니까? 나를 고치는 하나님의 재료들이에요. 어떤 일들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되는 일은 없어요. 그래서 더 안심이돼요. 그래서. 그렇지 않아요? 어떤 일들도 그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든, 나에게 아픈 일이든어떤 일들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되어지는 일이 없기에 다행이죠. 그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그러면 답은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께 달려들어가기만 하면 그 문제는 끝나는 거에요. 언제 그런 문제 있었지? 하고 지나가게 되어 있어요. 결국 하나님은 우리 인생 주변에 여러 가지 폭탄을 설치하고 지뢰를 놔서 막 조마조마, 아슬아슬, 전전긍긍, 식은땀 흘리게 만들어서 하나님만 집중하도록 만드는 거에요. 오늘 기도하다가 여러분 머리에, 뇌리에 걸려 드는 사람 다섯 손가락으로도 모자를 거에요. 그럼 발가락까지헤아려 가지고, 아 이 사람들이 나 때문에 고생하는 구나, 나때문에 그렇게 술을 퍼먹고 나를 괴롭혔구나. 몸에도 맞지 않는 술을 먹고 얼마나 고생했을까? 그게 자식의 문제든, 남편의 문제든, 부모의 문제든 우리는 그게 나를 하나님이 빚어가는 과정에서 설치한 하나님의 재료들이라는 걸 기억하십시오. 에서 뭐 여기 손도 못 대고 지나가잖아요. 지나가요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믿습니까? 오늘도우리의 운명과 우리의 처음과 나중이 그분의 손에 있음을 기억하여 다시 한번 우리 속의 지독한 야곱스러움이 뽑혀지는 정결한 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양 하나 합시다. 모든 상황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