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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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요한복음은 딱 절반 지점에 이르렀죠. 오늘 요한복음 11장, 특별히나사로의 죽음의 현장 앞에 우리가 서게 되는데요. 요한복음 첫 부분부터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표적의 책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표적이 많이 등장을 했죠. 표적과 이적 또는 기적의 차이는 뭡니까? 표적은 이적과 기적을 담고있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지가 십자가를 향할 때 그것을 표적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십자가를 향하여 가는표지판 같은 의미다 라고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요한복음 이 전반부에는 모두 일곱 개의표적이 등장을 하는데 첫 번째 표적이 가나 땅에 있었던 혼인잔치 기억나시죠? 물이 변해서 뭐로 변했습니까? 포도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첫 번째 표적으로부터 이제오늘 나사로의 죽음과 그의 부활의 사건은 마지막 일곱 번째 표적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요한복음 전반부가마쳐지게 되는 거죠. 아마 다음 주까지 하면 11장이 끝날것 같습니다. 우선 그러면 나사로의 죽음이 왜 표적이고 이 속에 담아내고 싶은 성경적인 의미는 참 뜻이무엇일까 보도록 하겠습니다. 11장 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누굽니까? 이 병자가? 나사로라
자 여러분, 이 나사로를 병자라고표현하는 걸로 봐서 아직 나사로가 죽지 않았어요. 숨이 붙어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대해서 성경 기자는 유독 강조하는 몇 가지 수식어가 눈에 띕니다. 2절을 볼까요?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자, 앞을 잠깐 보실까요? 누이들이 집안에 오라버니가 죽어가는 긴급한 병에 걸리자 사람을 예수에게로 보냈어요. 그리고 이렇게 전갈을 담아 소식을 전합니다. 주님의 어떤 자가 병들었나이다?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여러분, 이런 표현이 사실은 성경에서 쉽지 않습니다. 얼마나 유별난 가족이었으면 이들 스스로가 자기 오라버니를 향해서 예수님에게 선생님의, 주님의 사랑하는 자가 지금 병이 들었습니다. 빨리 좀 와주십시오이렇게 긴급히 보낸 거겠죠. 자, 여기에 대한 반응을 보십시다. 4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무슨 병이 아니다?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무슨 수수께끼 같은 또는 암호 같은 말씀을 툭 내뱉으셨어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나사로의 병은 첫째 죽을 병이 아닙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나사로의 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고 특별히 그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면누굴 가리키는 걸까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거에요. 자신의영광을 위한 병입니다. 이렇게 무슨 수수께끼 같은, 암호같은 뜻 모를 말씀을 툭 내뱉으셨어요. 그래서 이 말이 뭔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모르는 것은 모르는 채로 지나갑시다. 5절.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무슨 말이 또 나오죠? 사랑하시더니
굉장히 사랑했던 가정 같아요. 이것을연거푸 요한이 놓치지 않고 두 번씩 소개합니다. 아주 특별한 가정 같아요.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며칠을 더 유하시고?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럼 이 5절과 6절이 앞뒤가 맞아요? 안 맞아요. 그런데우리 말 성경과는 다른 원문을 소개해 드릴게요. 5절과 6절에우리 말 성경에는 생략된 접속사가 있어요. 그런데 또는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가 생략이 되어있습니다. 자 그래서 그 생략된 접속사, ‘그러므로’ 를 삽입해서 여러분들이 직접 5절과 6절을 지금부터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그러므로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여러분, 접속사 없이 읽으니까 그냥 지나갈 수 있었던 문장인데 방금 생략되어버린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를 집어 넣어 읽으니까더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더 말이 안되죠. 생각을 해보세요. ‘사랑하시는 자,사랑하시더라’ 를 두 번에 걸쳐 강조한 인물과 가정인데 지금 그 오라비가 사경을 헤매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러므로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이렇게 쓰여진 거에요. 그러면 이런 어불성설이 어디 있어요? 단걸음에 달려가도 시원치 않을상황인데 마치 이런 느낌이 들지 않으세요? 어쩌면 아주 죽기를 기다린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으세요? 아, 저만 느꼈군요. 그런느낌이 들죠. 이렇게 시간을 다투는 위험한 병 중에 있는데 누가? 너무도사랑하는 자가, 그런데 어쩌자고 그러므로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셨다? 말이 안 되요. 그래서 이것은 이렇게 밖에 결론을 못 냅니다. 어쩌면, 조심스럽지만 그가 완전히 죽기를 기다린 것 같은 느낌이들어요. 결국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저의 생각이 그냥 생각이 아니라 현실로 드러나는 거에요. 독자의 생각이. 자 일단 이 의미를 나중에 좀더 드러내기로 하고 7절로 그냥 갑시다. 7절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 가시려 하나이까
앞을 보실까요? 예수님이 지금 한켠에서는 사랑하는 자가 다 죽어가고 있어요. 그런데 계시던 곳에 머물더니 이틀을 더 여기서 지체하신단말이에요. 너무 이쪽은 절박한데 이틀을 더 유하시더니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자 하냐 하면 제자들에게얘들아 우리 유대로 가자 그러니까 제자들이 그 유다의 상황을 성경 기자가 적기 좋게 밝혔어요. 선생님, 거기는 위험합니다. 방금도 돌멩이를 들어서 신성 모독 죄로 선생님을죽이려 했던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대 왜 또 거기를 가시려 합니까? 그러면 제자들의 말류가 중요한 게 아니고예수님이 거기로 가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거에요. 지금 거기로 가겠다는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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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러 가겠다는 뜻입니까? 나 죽으러가겠다 그 뜻이에요. 예, 사실은 지금부터 예수님은 본격적인십자가로 행로가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의 유다로 가자 라는 말은 그 속에 어떤 의미를 사실상 담아 내는가하면 나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 왔다. 나 이제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 간다. 자, 그러면 이게 무엇과 대비되어야 하냐 하면 한쪽에서는 사랑하는자가 죽어가고 있어요. 맞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쪽으로 가서그 사람을 살려내는 게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가서 어떡하겠다는 거에요? 죽겠다는 거에요. 그러면 병이 들어 죽어가는 나사로가 이 죽음을 향하고 있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죽음을 향해 가겠다는것과 중요한 상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눈치 채셔야 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내가 죽어야 너희가, 너희가 누구죠? 나사로, 사랑하는 자. 이사랑하는 자들이 살 수 있다 그 말이에요. 그러기 위해서 나는 왔고,이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나는 십자가로 향할 것이다. 여기에서 영광의 실체가 드러나요. 아까 유보했던 그 영광의 실체는 뭘까요? [영광의 실체는 하나님께서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구원의 사역을 십자가에 완성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이에요. 십자가의 대속의제물로 나사로를 살려 내시고, 아니 사랑하는 자, 우리를살려 내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영광의 실체요, 영광의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절묘한 대비를 위해서 머뭇거리시다가 계속 지금 이 쪽에서는 절박하게 죽음을 향해서 치닫고있어요. 사실은 이 나사로가 죽어가는 것은 정확하게 누구의 그림입니까?우리들의 그림이에요. 우리들은 이미 사망의 권세 밑에서 모두가 이 죽음의 신음 아래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보다는 사실상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정확하게 맞는 영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는 죽어가고있어요. 이것이 세상의 속성이고 세상의 생리에요. 그것을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고 이제 유대로 가자. 거기에는 돌팔매질과 예수님을 잡으려는 죽음의 무시무시한저항이 기다리고 있어요. 자, 그렇다면 딕 카슨이라는 분은이 장면을 가리켜서 아주 공격적이고 도전적인 표현을 하나 썼어요. 죽음을 쳐부수러 가자. 죽음과 맞서는 거에요. 죽음과 맞설 수 있고 죽음을 죽여 버릴 수있는, 죽음을 끝장낼 수 있는 분은 유일하게 누구이십니까? 예수그리스도, 그 분만이 이 죽음을,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는인류의 깊은 절망과 슬픔을 끝장낼 수 있는 거에요. 이 대비를 이 본문에서 시선을 놓쳐서는 안되겠죠.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성경을 좀 보십시다. 11절로 넘어가서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어떻게 되었도다? 잠 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이것도 무슨 암호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그런데제자들이 센스 없는 건 그 때나 지금이나 똑 같은 것 같아요. 이걸 잘못 알아들었어요. 어떻게 알아 들었나 하면 12절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다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이렇게 알아들었어요. 그러자 예수님은아주 친절하게 화도 안 내고, 버럭도 안 하시고 주석을 해주세요.13절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 지라
앞을 보실까요? 여기서 예수님의 단어표현과 제자들의 이해는 사뭇 달랐어요.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은 나사로가 지금 어떻게했다고 되어있죠? 죽었다고 돼있어요. 이때 이미 나사로는죽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정확히 아셨어요. 그러니까 아까상상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틀 동안 머뭇거리고 유대로 가자고 말씀하시는 어간에 예수님은 아셨어요. 그기간 동안 나사로는 물리적으로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 보니까 이렇게 돼있죠?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리고 14절 볼까요?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정확하게 예수님이 어떻게 결론을 내줍니까? 나사로가죽었다. 그런데 그 죽었다는 표현을 예수님은 잠들었다고 표현을 했을 뿐이에요. 자, 그러면 15절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죽을 때 그 죽음의현장을 얘기하는 거에요.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뭐 하게 하려 함이라? 믿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이말을 지금 제자들에게 하고 있어요. 제자들이 안 믿었나요? 게다가나사로나 마르다나 마리아 이 남매들은 아주 뒤에 보면 멋진 신앙 고백도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볼까요? 몇 절을 보시냐 하면 20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는 외향적인 성격이다 보니까 예수님이 거의 마음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뛰어 나갔어요. 그런데 마리아는 집에 그대로 앉아있습니다. 어떤글을 보니까 재미있는 해석을 해놓았더라고요. 삐쳤을 것이다. 그삐친 내용은 뻔하죠? 왜 우리가 절실할 때, 우리가 급할때, 우리가 애탈 때는 오지 않으시고 오빠가 지금 죽어서 장례 다 치렀는데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이 있단말입니까? 지체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원망의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전혀틀린 견해는 아닙니다. 충분히 그럴 개연성이 있어요. 그런데중요한 것은, 참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놀라워요. 우리의다급한 시간에 우리의 절실한 필요를 따라 그때 그때 움직여 주지 않으세요. 항상 돌아오시고, 지체해 주시고, 에둘러 시간을 걸리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뺑뺑 돌려요. 그래서 그때는 우리의 마음이 타는 듯하고왜 하나님은 나에게 꼭 이런 식으로 인생을 핸들 하시나 그랬는데 나중에 뚜껑이 다 열리고 일의 결말을 보면 소름 끼칠 정도의 신묘막측 한 하나님의1mm도 오차가 없는 하나님의 섬세한 계획과 하나님의 간섭을 결말에서 우리는 확인하게 되죠.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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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왜 하나님은 지금 빨리 안 오시지? 왜빨리 응답하지 않으시지? 이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뭘까요? 그래서요한복음 기자는 유명한 명제를 오늘 이 본문 속에 담아놓고 있습니다. 따라서 합니다. 너희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그 영광이라는 것은 내가원하는 대로 되어진 어떤 결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하고 계획한 대로 만들어지는 결말을 영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그걸 볼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그래서 필요한 게 아무것도 안 보이고 불확실하고 더딘 것 같을 때, 저와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신앙이 태도는 바로 믿음이라는 명제에요. 그런데이 마르다도 마리아도 믿음이 있었어요. 볼까요? 21절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의 신앙 속에는 예수님의 능력도 믿었고 그의 역사와 치료의 사실도 분명히믿었던 것을 사실인데 그를 어디에 가두어 놓죠? 그때 여기 계셨어야 하고 그때 주님이 이 일을 간섭해주셨어야 됩니다. 시공간에 묶어놔요. 시공간에 다가 묶어놔요. 그리고 이런 얘길 해요. 22절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여러분 마르다가 부활이 신앙이 있어요? 없어요? 있죠. 그런데 마르다의 부활 신앙은 종말적 신앙이에요. 부활? 믿죠. 있죠. 언제 일어날 일? 저 시간의 끝에,내 인생의 어느 끝 날에, 죽음 저 넘어 내게 부활이 일어날 것이고 이 역사가 마름하는날 종말의 끝에 이 부활은 일어날 것을 나도 압니다. 이 고백을 마르다가 해요. 그럼 부활 신앙이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마르다의 부활 신앙은종말적 부활 신앙이라고요. 뭐가 없었어요? 이 부활이 오늘이라는시간에 아무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어요. 오늘 이 성경 기자가 정말 드러내고 싶은 초점은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먼 훗날 천국에 갈 일을 담보해 놓고 보증서 받아놓은정도의 간단하고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정말 그 종말에 일어날 부활의 사건이 오늘 내가 살아가는 일터에서, 내가 살아내야 될 삶의현장에서 얼마나 능력이 되고 있는가? 부활의 현재성. 그래서오늘 설교의 제목이 뭡니까?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의 현재성. 그부활이 당장 오늘 그대에게 무슨 능력이 되고 있고 우리의 삶을 단박에 어떻게 엎을 수 있는가? 어떻게우리의 삶을 달라지게 할 수 있는가? 이것이 먼 훗날 내게 일어날 단면적 사건으로만, 종말적 시간의 관점으로만 이해되니까 이 부활의 은혜는 약속은 그냥 말 그대로 약속이에요. 오늘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이것이 마르다의한계로 인간의 한계요 마리아의 눈물의 본질이었어요. 성경을 또 봅시다.29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2절 시작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죽지 아니하였겠나이라 하더라.
이거 앞에서 누가 했던 고백과 똑같습니까? 언니가했던 고백과 똑같아요. 여전히 예수님의 이 부활의 권세를 어디에다가만 묶어 놨어요? 시공간에다가만 묶어놨어요. 그러자 33절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앞을 보실까요? 시신을 어디 두었느냐? 아닙니다. 그는 이미 죽어 있지만 그 죽어있는 시신을 시신으로 부른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인칭으로 부르세요. 그를 어디 두었느냐? 누구의 입장에서는 그는 죽지 않았어요. 나사로는 죽지 않았어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그리고 그 다음에 볼까요?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그 다음에 아주 중요한 대목이 등장을 하죠?35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성경에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는 몇 안 되는 장면 중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어요. 자,이 예수님의 눈물을 가지고 이제 학자들도 많은 해석이 있습니다. 여러 해석을 우리가 다생각할 이유는 없고 바로 여러분들에게 한번 생각을 물어 볼게요. 왜 우셨을 것 같아요? 조문의 눈물일까요? 유대인들의 관습처럼 누가 죽으면 곡을 해주죠? 그걸 조문의 눈물이라 하는데 그런 눈물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이사건 전체를 풀어내는 key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의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때 이 나사로의 사건이 오늘 나에게 뭘 암시하고 있는가가 명확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어요.여기 예수님의 눈물은 앞서 이미 다 소개가 됐습니다. 의미가. 성경 몇 절을 보시냐 하면 33절을 다시 보세요.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누가 울었어요? 마리아, 마르다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어떻게 여기시고?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자, 이것은 예수님의 모든 구원 행위의유일한 근거입니다. 예수님이 빈들에 수만 명의 백성들이 앉아있을 때 해는 저물고 먹을 것이 없을 때자기 찢어지는 살과 흘릴 피를 기억하게 하는 퍼포먼스를 오병이어의 역사를 통해서 기적을 베풀어 주셨어요. 이것도매우 중요한 표적 중의 하나입니다. 그 사건이 갖는 의미는 뭘까요? 거기에서민망히 여기사, 불쌍히 여기사.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죽음앞에 손 놓고 어찌할 수 없는 이 불쌍한 인생들이 맞이한 절망을 보시면서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완전한 사람이요, 완전한 신으로써 그 고통과 절망과 눈물을 예수님이 공감하시고 아파하셨다 그 말이에요. 여기에서 부활이 시작이 되고 여기에서 생명이 들어가고 여기에서 구원이 이뤄지는 거에요. 예수님의 눈물은 조문의 눈물도 아니고, 믿음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는인간에 대한 그런 비통의 눈물도 아니라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들의 절망스런 상태, 그것을누구로써 공감하신 거에요? 사람이 몸을 입은 예수님으로서 공감하신 거에요.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리고그 분은 이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로 이제 본격적으로 걸음을 옮기십니다.
(30:01-36:40)
눈물 흘리신 후에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36절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자가 나흘이 되었으매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무슨 냄새죠? 이 냄새는? 죽음의 냄새. 지금 이 세상은 사실 이 죽어가는 죽음의 냄새로 가득한세상이란 말이에요. 이 나사로는 또 누구가 아니라 바로 인생이 직면한 본질적인 상태를 얘기하는 거에요. 수 십억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촌에 수조명의 사람들이 오고 가고 오고 가지만 이 죽음이라는 거대한 권세밑에 그것을 해결할 인생은 아무도 없었어요. 이 때 예수님께서, 40절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이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뭐하게 하려 함이라? 믿게 하려 함이라.
부활도 믿었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고백도 했지만 이들의 믿음은 단면적인 믿음이었어요. 종합적이고 통속적이고 전체적인 믿음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부활은 단지 그들에게는 종말의 저 시간 끝에 벌어지는 일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빌립보서 3장을 볼까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랬어요. 바울이 쓴 글입니다 왜 부활의 권능입니까? 듀나미스 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것은 권력이란 뜻입니다. 이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3대 사조가 있었어요. 헬레니즘, 유다이즘 또 하나가 로마의 철학입니다. 로마의 선, 로마의 정의 그건 힘이에요. 그게 로마에 지배되어 있는 철학입니다. 힘이 선이고 힘이 정의에요. 그런데 그 힘의 모든 총아, 집중되어 있는 현장은 어디로부터 입니까? 황제의 보좌에요. 거기서 통치가 시작이 되고, 심판이 이뤄지고 모든 세상의 영광은 거기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만이참된 힘이 나와요. 바울이 그 시대의 이해를 차용해서 부활의 뭐라고 표현했어요? 권력. 이 권력이 누구에게 있다는 거에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그 부활의권능이, 부활의 권력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내야 할 우리에게 얼마나 위력을 갖게 하는가? 이 바울이 앞뒤 문맥을 통해 썼던 글 하나를 읽어 드리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라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할렐루야! 그의 인생을 과거의 그화려했던 이력과 지위와 거머쥐었던 모든 이 땅의 것들을 단박에 뒤집어 엎을 수 있었던 것은 부활의 권능을 발견하는 순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그 진리를 열어 보여지는 순간 모든 것들이 뭐로 여겨졌다고요? 해로 여겨지고 배설물로 여겨졌다고요. 그 중심 추가 어디 있었습니까? 부활의 권력에 있었어요. 세상은 조그마한 지위의 완장만 채워줘도 그 권세와 영향력이 대단합디다. 그런데만유의 주가 되시고 창조의 주가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리스도. 그 분의 부활의 권능을 우리에게약속하시고, 약속하신 것뿐만 아니라 허락하셨는데 그 부활의 권능이 오늘을 살아내는 내 삶에 아무 의미도없고 영향력도 없다면 부활이 문제입니까? 내가 문제입니까? 내가문제인 거죠. 남은 하반기 동안 사랑하는 우리 삼일 교회 청년들과 우리 청년들이 이 부활의 권력을 가지고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담대함과 용기와 믿음의 눈을 열어서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그 영광에 눈 떠 이 땅의 것에 주눅들지 않고 담대하고 한 걸음한 걸음 또 하반기를 이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 일어나십시다.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