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28)
최고의연주자
창20:1-12
1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2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데려갔더니
3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4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백성도 멸하시나이까
5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6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7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8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들려 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9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10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11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12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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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 20장 내용은 어디서 많이 본적이 있는데, 기억 안 나십니까? 어디서 봤죠? 창세기 12장에서 이 비슷한 실예를 한번 봤죠? 애굽에 내려갈 때 굉장히 유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역사는 반복되고한번 거짓말은 단번에 끝나는 법이 없어요. 계속해서 아브라함은 성도로 죄를 짓고 실수를 범하고 이웃을속이는 아주 패역한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자 그러면 이런 참 어처구니 없는, 아내를 사지에 몰아넣는 이런 아브라함의 행태를 성경은 왜 기록했고, 오늘우리는 이 곳에서 뭘 듣고 배워야 할 것인가. 단순히 아내를 사랑해라,귀하게 여겨라. 그건 꼭 이런 기사가 아니더라도 일류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래야마땅한 일 일 텐데, 꼭 그런 일반적인 결론을 위해서 여기 기록될 이유는 만무하단 말이에요. 우선 창세기 12장과 20장의내용은 패턴은 비슷한데 초점은 달라요. 창세기 12장에서애굽에 내려갈 때 아브람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거의 넘겼던 참, 불행한 사건은 누가 혼이 납니까? 바로가 혼이 나요. 애굽의 왕이 큰 일을 겪습니다. 그때는 초점이 하나님 자신에게 있었어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이것을아브라함에게 바로에게 선포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잘못은 사실 아브라함이 했지만 혼을 바로에게 냅니다. 그럼으로써아브라함에게도, 바로에게도 동시에 뭐 장기 판 용어로 얘기하면 양수겹장 식으로 이중적 메시지를 주는거에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아브라함의 인식 세계 속에는일단 눈금이 하나 굵게 그어졌습니다. 이제 막 그 때는 아브라함의 신앙으로 눈이 열어지던 때에요. 하나님에 대해서 인식 세계가 굉장히 명료하지 않을 때입니다. 간단히얘기하면 이게 진짜 하나님의 인도인가? 하나님이 하신 일인가? 왔다갔다 할 때에요. 그 일로 어쨌든 굵은 눈금 하나가 생겼는데 그 눈금이 뭡니까? 어쨌든 하나님은 누구보다 세신 분이다. 그렇죠. 바로보다 확실히 세신 분이다. 이 신앙의 눈금이 겨우 아브라함의신앙 세계 속에 한 단계 그어집니다. 그러면 오늘 이 사건은 왜 여기 아주 비슷한 케이스로 소개가 될까요? 여기에는 성도는 무엇인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말미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을 야단치는데 금하면서 그의 실수를 가로 막는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뭐로 소개하십니까? 선지자. 선지자로 소개를 해요. 그러니까오늘 이 사건의 초점은 12장과 패턴은 굉장히 비슷해 보이는데 가르치고자 하는 초점이 달라요. 12장은 누구를 드러내기 위한 메시지였다고요? 하나님이 누구신가. 그런데 20장에 와서는 누구를 소개하기 위한 메시지에요? 아브라함이지만 오늘 아브라함은 누구의 대표입니까? 믿음의 성도들의대표에요. r래서 성도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이것을 가르치는 겁니다.그런데 그러기에는 참 아브라함의 행동이 너무 비열해요. 정말 치사 찬란한데다가 뭐 이런인간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남자답지 않아요. 인간적으로도. 이런성경은 읽다가 그냥 확 지나가고 싶어요.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그것도한 번도 아니고 남자가 두 번씩이나. 그럼 우선 본문을 좇아서 차근차근 종합을 해서 이 사건의 실체를한번 만져 보자고요. 1절을 볼까요?
1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어디에 거주합니까? 그랄.
자, 앞을 잠깐 보실까요? 여기는 먹거리가 풍부한 곳입니다. 여기는 어디에 다가 말뚝을 박아도땅 값이 오르고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는 곳입니다. 가나안 들어가기 초입 부분이에요. 애굽 길목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쪽으로 이주를할 때 옮긴 행동의 기초, 근거가 뭘까? 자 11절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다.
11 아브라함이 이르되, 아비멜렉이 질책을 하니까. 너 왜 그러느냐왜 나한테 옴팡 씌울 뻔했느냐.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자, 저를 보세요. 그러면 이 땅의영적인 상태를 아브라함은 알고 갔다는 말입니까? 모르고 갔다는 말입니까? 알고 갔다는 말이에요. 우리 창세기 13장에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떠날 때도 그 땅의 패역함을 알고 갔어요? 모르고갔어요? 알고 갔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 같았던까닭에 옮겼습니다. 문제는 13장 13절에 뭐라고 소개하죠?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죄인이었더라. 롯도 알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알고 떠나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1차적인 삶의기초나 기준이 안되죠.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는 땅인걸 아브라함은 자기 입으로 고백합니다. 알고 갔다 그 말이에요. 그리고 어떤 인생의 두려움 때문에 그는아내를 다른 사람 손에 넘기는 위험에 던져 넣어지게 됩니다. 이게 선지자에요? 이게 성도에요? 그런데 우리가 그 평가 앞에 입을 닫을 수 밖에없는 것은 그 인정과 평가를 지금 누가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고 계세요. 그는 선지자라 손 대지 마라. 여러분 그 다음 성경을 보십시다. 2절
2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데려갔더니
3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이게 사실 번지수가 잘못 된 거 아니에요? 여러분상식적인 생각에 하나님이 현몽하려면 아비멜렉에게 하셔야 합니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야 합니까? 그렇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는 게 상식 아니에요? 그런데 엉뚱한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아비멜렉에 현몽까지 하셔서 어떤 지금 불행한 조짐을 막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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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겐 남편이 있다. 막으세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에 대해서 우리가 잘 모르겠어요. 사실은. 왜 이러실까? 자, 그런데조금 더 가보십시다. 4절
4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백성도 멸하시나이까
여러분, 그러면 윤리나 도덕적인 뭐하나님 신앙 이런 거 다 떠나서 윤리나 도덕적인 기준에서도 객관적으로 놓고 볼 때 누가 나아 보여요? 저는아비멜렉이 훨씬 나아 보이던데요. 여러분은 어때요? 아비멜렉이낫지 않아요? 의롭게 깨끗하고 확실하고. 그 하나님의 현몽하신메시지를 듣고서 그는 주저 없이 돌려 보내지 않습니까? 우리 이런 경우 많이 볼 거에요. 일터에서나 살아가는 관계 속에서. 어떤 때는 세상 사람이 예수 믿는사람보다 훨씬 나을 때 많죠. 그래요? 안 그래요? 네, 제가 뭐 얼추 길게 살지는 않았지만 살아오다 보면 예수 안믿어도 정말 nice한 사람 꽤 많아요. 여러분. 가정 생활도 건실하고 자녀들에게 더 균형 있게 교육적으로 잘 대하고. 그런데오히려 교회 목사, 직분자 이런 가정이나 또 그 사람들의 윤리 행태를 보면 더 괴물 같아요. 못된 인격에 신앙까지 들어가가지고 이게 말이 되나 모르겠는데. 남얘기 하는 게 아니고 제 얘기 하는 거에요. 제 얘기. 정말입니다. 더 괴물 같아요. 그리고 자기 소신을 신앙으로 우기고 합리화 시키고.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기겁을 하는 거에요. 예수 믿는 사람들을보면 끔찍하다 그러잖아요. 다시는 예수 믿는 사람 상종을 안 한다, 이런소리가 나오는 거죠. 살다 보면 예수 믿는 사람보다 세상 사람이 더 합리성이 있고 객관적이고 더 화끈하고할 때가 많아요.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셨나 봐요. 이 본문을오늘 종일 다니면서 묵상하다 보니까 이 부분이 참 이해가 안돼요. 아비멜렉이 훨씬 nice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더더군다나 아비멜렉에게 현몽까지 하셔서아브라함을 뭐라고 평가하시는가 하면 그는 선지자라. 선지자 라는 말이 히브리 말로 나비 라는 단어를 써요. 나비. 원래 나브 라는 말에서 어근이 나왔는데나비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불러냄을 입은 자, 구별된 자, 그말이에요. 그 말은 오늘 식으로 얘기하면 성도. 여기 선지자라는 말은 오늘 식으로 표현하면 그는 내 백성이다 그 말이에요. 어쩌면 이런 느낌까지 들지 않습니까? 이런 성경을 주욱 상식 선에서 읽어 봐도 하나님이 너무 무조건 편드는 것 같다 그런 마음이 들어오는데 무리는아니에요. 그런 마음이 들어오는데 가슴에서 뭉클하고 감사함과 눈물이 흘러요. 이런 무조건 편 드시는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사랑 없이 구원이 설명될 수 있을까? 어떠세요? 이런 하나님의 표정 없이 구원이 설명될 수 있던가요? 없어요. 우린 여기서 정리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을 견주어 봐도 여러분 생각대로 아비멜렉이 훨씬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편드시는 모습을 봐요. 누구를향한?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편드심의 그 흔적을 여기저기서 발견합니다.여러분 그런데 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지금 누가 낳아야 합니까? 이삭이 낳아야 돼요. 이삭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은 누구를 지금준비하시냐 하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메시아를 낳게 하십니다. 이엉킨 인간의 못난 역사 속에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과 긍휼 밖에는 설명이 안돼요. 이 얼마나못난 역사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못난 인간의 불순종과 초라한 모습과 역사를 우직하게 그냥 뚫어내시고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시간과 공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하나 단면을 썰어가시면서 보여 주시는 거에요.여기 아브라함은 누구의 샘플인가 하면 송태근의 샘플이고 우리의 샘플이에요. 우리가 이렇게비열해요. 야비하고, 치사하고. 자기 목숨이라면 자기 것이라면 자식도 팔 수 있는 게 우리 죄인이에요. 마누라도팔 수 있는 게 우리의 모습이더라고요. 보니까. 그 미국의아주 유명한 자렛이라는 음악가가 있어요. 이분이 독일에 초청을 받아서 유명한 쾰른 오페라 극장에서 피아노연주를 하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 때 75년도니까 꽤 오래전 이야기죠. 독일의 최연소 공연 기획자가 그 모든 기획을 했습니다.그 최연소 공연 기획자는 아주 명성이 당시만 해도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이제 오후에 공연이계획되어 있는데 그럼 그 날은 굉장히 분주하겠죠. 뭐 조명도 봐야 되겠고 홀도 점검해야겠고. 피아노 연주회니까 가장 중요한 게 뭐예요? 악기죠. 오전에 그 자렛이라는 미국의 음악가가 미리 좀 나와가지고 텅 빈 홀에 나와서 이제 극장 측에서 준비한 피아노를점검하는 겁니다. 당연히 악기가 제일 중요하니까. 그런데피아노가 홀에 비해서 너무 조그만 게 준비 된 거에요. 실수에요. 공연기획사의 실수에요. 그런데 거기서 끝난 게 아니라 뚜껑을 열어서 흰 건반 검은 건반을 오고 가면서 눌러보는데 자꾸 연주자가 고개를 이러 저리 갸우뚱거려요. 피아노가 너무 오래 되가지고 음이 하나 제대로나는 게 없어요. 게다가 고음 쪽 건반은 부직포가 낡아서 그런데 아무리 때려도 소리가 안 나요. 음악 하는 분들은 또 소리가 얼마나 민감해요. 특별히 연주의 악기는얼마나 생명 같은 존재에요? 결국 몇 십분 피아노 가지고 씨름을 하다가 꽝 닫으면서 이런 피아노로는도저히 연주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연주 못합니다. 다른피아노를 구해 주십시오. 그런데 갑자기 그 분의 요구에 맞는 피아노를 그 시간에
(20:01-28:00)
어디서 구합니까? 그날따라 비가 억수같이내리고 있습니다. 표는 다 팔렸는데. 그래서 연주자가 화가나서 밖으로 뛰어 나와요. 자동차 뒷좌석에서 분을 삭히려 씩씩거리고 있어요. 기획자 측에서는 난리가 난 거죠. 뭐 사방에 전화를 돌려도 피아노를당일 날 구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런데 사실 그런 대 음악가는 그런 피아노로 연주를 한다는 건 자기전 존재를 건 모험인데 되겠습니까? 안 되는 거죠. 그런데그 어린 공연 기획자가 차창 밖에 서서 분을 삭이고 있는 음악가, 연주자에게 손을 모아가면서 사정을합니다. 연주만은 취소하지 말아 주세요. 연주만은 취소하지말아 주세요. 이러고 또 몇 십분 실랑이를 벌였어요. 아니요, 나는 도저히 그 악기로 연주할 수 없어요. 한 시간 더 시간이 흐른다음에 창문이 내려 오더리 절대 명심해, 오직 너 때문이야. 너때문에 내가 오늘 연주회를 하겠다고. 시간이 거의 다 됐으니 올라 간 거죠. 그런데 그 악기로 어떻게 연주해요. 청중은 그 사정을 잘 모르죠. 그런데 무대 뒤에 설치하는 사람들, 준비하는 사람들은 다 지금 그긴박하고 긴장스런 상황을 다 알고 있는 겁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저 그지 같은 피아노로. 그런데 이 자렛이라는 음악가가 높은 음을 피해서 낮은 음으로만 낮은 음으로만 아주 안정감 있는 소리를 내면서으르렁 으르렁을 계속 반복을 하는 거에요. 낮은 음으로만. 그비 오는 밤에 그런데 이게 또 소리가 안 나요. 그러니까 그 소리가 안 나는 건반 사이사이를 눌러 가면서소리가 작으니까 또 이걸 큰 소리를 내기 위해서 건반에 거의 처박다시피 숙여 가면서 그런데 이 연주하는 모습이 청중들에게는 요즘 말로 소름이 돋는겁니다. 수많은 연주회를 다녀봤지만 저렇게 소름 돋는 연주는 처음 봤고 모습도 처음 봤고 오늘 이 밤에저 신비한 마력을 끄는 낮은 음의 피아노 연주는 최고입니다. 그러니까 최악의 상황에서 뭐가 나온 겁니까? 걸작이 나온 거에요. 실제 쾰른 오페라 극장이 개장한 이래 거기서녹음 된 cd가 최고의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실제 음악계에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 하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다 준비되어있고 그리고 아주 안전한 길로만 가서 최대의 결과를 내고 싶은 게 누구나 인지상정이에요. 그런데 청춘들이여, 장년들이여, 노년들이여 인생이 그렇게 됩니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엉망진창이 될 때가 있어요. 나의 두려움과 소심함과불신앙과 죄악과 연약함 때문에 이 아브라함처럼 정말 쪼다 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에요. 그런데하나님은 마치 연주자 같으세요. 최고의 연주자. 이 못난악기들을 하나님께서 다 아시기 때문에 최고의 연주를 여러분들의 인생을 통해서 만들어 내시는 거에요. 믿습니까? 그 하나님이 오늘 이 밤에도 여러분들의 한 숨, 눈물. 여러분들의 비명, 아우성 모든 것들을 다 들으시고 아실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면 돌파를 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되고 상면 돌파를 해야 합니다. 상면 돌파가 뭐에요? 위로 승부를 거는 겁니다. 이런 소리 처음 듣나요? 기도란 뭡니까? 정면 돌파가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 앞에 내 복잡한 문제를 그냥맞닥뜨리는 거에요. 어떤 아주 논리적인 스타일은 자기가 슬라이드 썰듯이 하나하나 풀어간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그렇게 안 돼요. 가다 보면 이게 또 엉켜요. 엉켜가지고, 여러분 이 세상 구조가 나나 탈탈 털면서 먼지 안 묻게잘 간다고 인생 살이가 그렇게만 되냔 말이에요. 옆에서 막 와서 박는데. 옆에서 막 들이 받는데 어떻게 나 혼자 직진한다고 인생길 그렇게 가십니까? 그리안 가져요. 그래서 우리는 결국 살만큼 살다 보면 답은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을 향하여 상면 돌파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체질을 아시고, 우리의 눈물도 아시고, 약함도 아시기에 어떤모습이라도 그분이 끌어 안고 그분 안에서 만져지면 비 오는 날 밤, 우르릉 소리의 최고의 연주가 울려퍼지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 하나님께 오늘이 밤에도 남김없이 쏟아내는 귀한 은혜와 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찬양 하나 하십시다. 시선. 내게로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