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00:00-10:00)
자, 이제 오늘부터는 요한복음 본론으로 들어가는 첫시간입니다. 지난 주까지는 조금 딱딱하긴 했으나 우리가 서론 시간을 네 차례에 걸쳐 가졌죠. 자 오늘 본론 19절 첫 절인데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19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이 뭐했다고 돼있습니까? 증언이 이러하니라
그러고 보니까 본론의 첫 주제는 증언입니다. 여러분이 문단의 마지막 절을 한번 보면, 34절도 이렇게 끝이 납니다. 같이한번 읽죠. 시작
34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증언하였노라 하니라
네, ‘증언이 이러하니라’ 로 시작이 돼서 뭐로 끝이 났죠? ‘증언하였느니라’ 로 끝이 납니다. 이것은 증언이라는 주제를 말한다는 의미도 되지만 여기에 또 하나의 의미가 있어요. 증언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증언이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쉽게 얘기하면 메신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얘기에요. 그런 의미에서 증언을 강조하고 있는 거죠. 자, 그런데 오늘 여기보니까 유대인들이 종교 기득권층인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세례요한에게 보내어 라고 돼있어요. 보내어. 19절을 볼까요?
19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종교 기득권층들이죠. 이 사람들을 요한에게 어떻게 했다고돼있죠? 보내어.
이 사람들은 엄밀하게 종교 기득권층들인데 사람들이 즉 유대인들이 요한에게 보낸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요한도 사실은 어떤 사람입니까? 보냄을 받은 사람이에요. 자, 1장 6절을 한번확인해 보죠. 읽습니다. 다같이 시작,
6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네, 여기 겹쳐지는 공통의 주제가 있습니다. 요한도 어떤 사람이에요? ‘내가 갈게’ 하고 간 사람이 아니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요한은 누가보냈나요? 그렇죠. 하나님이 보내셨어요. 그런데 지금 요한과 맞닥뜨려 충돌 직전에 있는 이 종교 기득권층들은 누가 보냈어요? 유대인들이 보냈어요. 즉, 사람들이보냈어요. 이러게 되는 거죠. 사람들이 보낸 종교 기득권층과 하나님이 보내신 세례요한과 충돌이 일어나는데 재미있게도 이 충돌이 그냥 무력 충돌이 아니고 질문과 대화형식을 통해서 충돌이 일어납니다. 지금부터 그 대화 형식의 네 가지 질의를 통해서 세례요한이 네 가지 답변을 하는데 그 질의와 답변 속에서 오늘모든 의미가 다 담아진다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그럼 질문으로 들어가 보죠. 이들의 첫 번째 질문 19절 보십시다. 봅시다. 제가 읽습니다.
19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자, 저를 보세요. 첫번째 질문이 뭐죠?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 라고 물었어요.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질문을 제 자신에게 꽤 여러차례 했네요. 너는 누구냐? 어느 영화에 나오는 대화 같죠? 너는 누구냐? 그런데 이 질문에 담아진 함의가 굉장히 크고 많더라는데 또 한번 놀랐어요. 사실 종교 기득권층이 요한에게 물었던 이 질문 속에는 단순히 누군지 몰라서 물었던것만은 아니에요. 여기에는 그 종교적인, 정치적인, 시대적인 많은 함의가 녹아져 있는데 첫 번째가 뭐냐 하면 당연히 네 정체가 뭐냐? 이렇게 물은 거겠죠. 네 정체가 뭐냐? 이 말속에는 두 번째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네 배후가 누구냐?’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냐?’ 이런 뜻이에요. 자, 그런데 여러분들이 듣기에는 굉장히 평범하게 들릴 질문 같아 보이지만 여러분 사실 누군가가 여러분들에게 똑같은 이 질문을 했을 때 여러분 어떤 답변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럼 나는 어떤 답변을 가지고 있을까? ‘네 배후가 누구냐?’ 그리고 여기에는 2차적으로 이런 질문이 함께 있어요. ‘너 왜 시끄럽게 구느냐?’ 왜냐하면 지금 세례요한은 느닷없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해서 시대 앞에 일갈을 던지는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누가너희더러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느니라
여러분 이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말은 서론 시간에 충분히 말씀을 들렸어요. 도끼를 나무를 찍기 위해서 나무뿌리에다가 가늠하는 태도라 그랬어요. 도끼날을 찍기 위해서 먼저 이렇게 어디쯤 찍을까 가늠하는 태도. 자 그러면 이 태도는 사실상 임박한 심판에 대한 긴박성을 설명할 텐데 종교 기득권 입장에서는 생각을 해보세요. 그 자기까지 오르기에 얼마나 바들바들 떨면서 악착같이 붙들고 그 위치와 자리를 유지하는데 온 인생의 에너지를 모았을까요? 그런데 어느 날야인 같은 한 사람이 등장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런 소리를 퍼뜨리고 전하고 다니니까 안 그래도 허기가 가득한 이 세상에 백성들이 뒤숭숭한 거죠. 그 백성들의 흔들림은 곧 자기들의 이 철옹성 같은 캐슬을 흔드는 거예요. 쉽게 얘기하면.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기득권 종교 지도자들을 보내서 첫 번째 물었던 질문이 ‘너는 누구냐?’ 우리가 지금 하나님 편에서 사는 백성들의 입장에서 이 질문을 듣는다고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너는 누구냐?’ 다시 말해서 ‘네 정체가 뭐냐?’ ‘네 배후가 누구냐? 누가 시켜서 이 일을하는 것이냐?’ 나아가서는 ‘왜 시끄럽게 구느냐?’ 여기에는 조금 더 확대 발전을 시키면 이런 의미도 틀림없이 녹아져 있습니다.‘너만 가만 있으면 돼. 그냥 살던 대로 살자. 왜 시끄럽게 굴어?’ 이 의미도 충분히 유추할 수가 있어요. 왜 고요한 세상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거야? 너만 조용히 하면 돼. 자, 이것이 얼마나 현실적인 물음이어야 합니까? 과연 이 질문이 2천 년 전 자연인 한 사람에게만 묻는 질문으로 들려 집니까? 아니잖아요. 오늘도 우리 일상에서 현실에서 매일매일 내 폐부 깊이 찔러 들어오는 질문일 수가 있단 말이죠. ‘너는 누구냐?’ 자, 그 다음에는 답변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세례 요한은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을 하는가 성경을 좀 볼까요? 20절
20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자, 저를 보세요. 여기서 요한이
(10:01-20:00)
강조하고 싶은, 이 문법 자체가 강조하고 싶은, 그래서 우리가 설교 시간에 뭐 문법까지 알아야 하느냐? 네 사실알 필요 없어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이 문법을 우리말로 읽으면 어딜 강조하는지 안 보여서 그래요. 이 문법을 원문으로 들어가 보면 ‘나는 무엇 무엇이 아니다’ 라는데 강조점이 있어요. 그리스도를 설명하는데 강조점이 있는 게 아니고 ‘나는 무엇 무엇이 아니다’ 라는에고 라는 표현을 써요. 에고. 그리고 부정문을 썼죠. 아니다. 자, 세례요한은 그 사역의 시작을 자기 부정으로부터 시작을 해요. 나는 무엇 무엇이 아니다. 이게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여러분, 특별히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히 있거나 또 교회 오래 몸담아 충성한 사람들 가운데, 소위 리더 그룹이라 그러죠. 빠질 수 있는 오류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영적인 결함이라고 말하는데 자기를 지나치게 중요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함정에 빠지는 거예요. 아 누가 그럴까? 그렇게 떠밀려요. 자기를 지나치게 중요한 사람으로 떠밀릴 수가 있단 말이에요. 구약에도 보면 몇 사람 그런 인물이 도드라져서 기록이 돼있습니다. 우리가 주일 밤마다 열왕기상이라는 책을 강해를 하고 있는데 지금 몇 주에 걸쳐서 우리가 그 유명한 엘리야를 지금 만나고 있어요. 엘리야. 그런데 지금 엘리야가 어느 지점쯤 가있는가 하면 로뎀 나무 밑에서 드러누워 가지고 내 생명은 넉넉하오니 여기서이만 거두어 주시옵소서. 이게 얼마나 모순적인 행동인지 아세요? 사실 이세벨의 호령 앞에 죽이겠다 그러니까 도망을 갔어요. 도망은 살려고 도망가는 겁니까? 죽으려고 도망가는 겁니까? 살려고 도망가는 거 아니에요. 도망을 가서는 살려고 도망을 가서는 나무 밑에 누워가지고 하나님께 죽여 달라 그래요. 그 죽여 달라는 말은 엘리야의 본심이 아니에요. 사실은 그 말 속에는하나님에 대한 좀 항변이 담아져 있습니다. 내가 열심이 유별했는데, 열심이 유별했는데 왜 내 역사에 하나님 동의해 주지 않습니까? 왜 손들어 주지 않습니까? 어느새 이 사역의 방향과 방식도 자기 원대로 돼야 해요. 그건 누구보다 자기가 우선이라는 얘기에요? 하나님보다 우선이라는 얘기에요. 우리가 너무 자기가 주도적인 입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 보면 자기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자리로 떠밀려 인지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그 자리에 앉아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대신해서 앉아있는 거예요. 여러분이게 얼마나 무서운 현상인지 아세요? 이것이 소위 지도자나 리더 그룹들에 많이 생기는 함정입니다. 요한은 사역의 시작을 ‘나는 아니다’ 여기서부터 시작을 했어요. 그래서 헨리 나우엔 이라는 분이 항상 강조했던 게 뭐냐 하면, 지도자는 세 가지를 연습해야 한다. 작아지는 연습. 그게 저는 크게 태어나질 않았어요. 작아지는 연습. 여러분 졸릴 까봐 한 마디 한 거예요. 그 다음에 사라지는 연습. 슬그머니 사라지는 거예요. 자기가 한 일도 잊어버리고 사라지는 거예요. 이게 내가 한 일이라고 할 때는 간섭이 들어가고 주인이 되어가는 거죠. 그리고 희미해지는 연습. 그 사람 언제 있었나? 어디 갔다 왔니 너? 여러분 항상 하나님의 일을 앞장 세워져서 주도하는 자리에 떠밀려 있는 사람은 당연히 저를 포함해서이걸 조심해야 돼요. 예수님도 평생 자기를 부인한 상태에서 마지막까지 아버지의 뜻만을 드러내기 위해서십자가에 철저히 제물이 되어 주신 거 아니에요? 세례요한이 그렇게 일생을 살아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작이 ‘나는 아니라. ’믿습니까? 우리 한번 연습해 보십시다. ‘나는아니라’ 나는 아니라는 말은 남이 하면 안돼요. 스스로 해야해요. 자꾸 남한테 너는 아니다 하면 안돼요. 그것은 남이 할 얘기가 아니에요. 자기가 자기에게 할 얘기에요. 그 다음에 성경을 보십시다. 21절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이르되 나는 아니라
자 여러분 또 앞을 보세요. 이렇게 이제 두 번째 세번째 네 번째까지 대화가 이루어지는데 이 대화를 듣고 읽다 보면 좀 갑갑해요. 고구마 먹다가 얹힌 것같아요. 왜 그런지 아세요? 여러분 이 대화의 패턴이 어떻게가고 있어요? 전부 단답형이에요. 거기 갈 거야? 안 갈 거야? 나 이래저래 해서 못 가게 됐어요. 이러면 되는데 안 가. 이렇게 단답형으로 대화하는 부부들이나 유형의 사람들이 꼭 있어요. 마치 그런 느낌이 들지 않으세요? YES, NO밖에는 대답으로 꺼내 놓지 않아요. 그런데 세례 요한이 의도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세상이 이 단답형 유형의 대화 속에서 상대방이 자기들의 의도가 계속 뽀록이 나요. 들통이 나요. 이것은 세례 요한이 의도한 것 같지는 않아요. 그래서 앞으로 모든 남자들이 내가 이렇게 밖에 못하는 것은 나는 세례요한의 유형 때문이야 그러면 안돼요. 자, 여기 잘 보시면 그냥 아니라고만 대답을 해요. 그래서 세 번째 질문을합니다. 22절을 잘 보시면 자 엘리야도 아니래요. 21절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그것도 아니래요. 자, 22절 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22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자, 이 질문의 골자는 이렇습니다. 그러면 너는 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렇게 물은 겁니다. 그럼 너는 네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이렇게 물은 거예요 원점으로돌아간 거예요. 사실은 네 종류의 질문이라기보다는 네 번의 질문을 한 거예요. 답은 하나로 대답을 했죠. 그러면서 이 네 번째 질문에 이제 드디어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이 땅에 보내어진 인생의 사명과 소명, 역할에 대해서 아주 명징하게 소개를 합니다. 그것이 23절 이에요. 우리 23절만 다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시작
23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세례요한은 주로 이 역사 속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어디 살았죠? 광야에 쿰란 공동체 일원으로서 살았어요. 굴에서 주로 그들이 굴에서 쿰란 공통체의 일원으로서 뭘 했나요? 주로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공유하는 일을 했어요. 특별히 에세네파 일원들은 굉장히 구약 성경에 대해서 능통한 자들입니다.
(20:01-30:00)
모든 최소한의 삶을 다 절제하고 광야로 나아가서 그런 초경건주의적 생활을 했기 때문에 지금 세례요한이꺼내 놓은 이 23절의 답은 자기가 작위적으로 만들어 꺼내 놓은 답이 아니에요. 구약의 누구의 글을 인용했죠?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합니다. 23절을 제가 다시 한번 읽어드릴게요.
23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자기를 뭐로 표현했습니까? 광야에서 외치는 자라고도말하지 않고 sound, 소리에 불과하다. 소리라는 것은 내용입니까? 내용을 전달하는 방편입니까? 그렇죠. 내용을 전달하는 방법에 불과해요. 자기는 외치는 자라고도 소개를 하지 않고 외치는 자의 소리, 그래서 이 세례요한이 강조한 것은 이 소리에 담아진 메시지 이걸 더 강화시키는겁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요한이 여기서 인용한 이사야의 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주의 길을 곧게 하라 이게다 무슨 말일까? 이것을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사야 선지자와 그가 쓴 장대한 선지서인 이사야서를전부 이해를 해야 돼요. 제가 1분 만에 이사야서 전체 66장을 1분 만에 떼 드릴 테니까 잘 들으세요. 이사야 책은 굉장히 큰 책입니다. 그런데 어려울 것 없어요. 두 구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1장서부터 39장까지는 전부 무슨 얘긴가 하면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당할 심판과 패망과 고난과 징벌을 쫘악 써놨어요. 무시무시한 내용들로 39장까지 가득 차있어요 그리고 이제 나머지한 파트. 40장서부터는 66장 끝까지 전부 회복, 구원, 소망, 하나님의 인도, 전부 이 내용이에요. 자, 1분만에 다 떼 드렸죠? 1분도 안 걸렸어요. 그러면 회복을 말하기 시작하는 첫 장은 몇 장일까요? 40장입니다. 방금 말씀 드렸잖아요. 39장까지는 전부 무슨 내용이라고요? 심판에 관한 내용이에요. 그리고 회복과 구원에 관한 내용은 40장서부터입니다. 자, 지금부터 세례 요한이 인용한 그 회복의 첫 장, 40장 1절을 띄워주세요.
1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내 백성을 위로하라
자, 이 본문 자체가 이미 심판은 끝났다는 얘기에요. 그리고 이제 회복과 소망의 첫 장인 40장에서는 첫 절이 뭐예요?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리고이제 2절을 보십시다. 2절을 다 같이 시작
2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이 닿도록 말하며그것에게 외치라 그의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잘 보시면, 너희는 예루살렘에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이제 모든 포로 생활과 고난과 심판이 끝났다 그 말이에요. 복역의때가 끝났다. 그 죄악이 용서함을 받았다, 사함을 받았다. 그의 모든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이제 모든 용서가 끝나고 회복이 시작된다는 얘길 하는 거에요. 그리고바로 세례요한이 인용한 그 오늘 본문의 구절이 3절에서 등장을 합니다.3절을 띄워 주세요. 같이 한번 읽을까요? 시작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바로 요한이 인용한 이 구절입니다. 자, 그러면 이 본문을 그대로 띄워 두시고 다시 한 번 곰곰 하게 생각해 보십시다. 세례요한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심판을 위해서입니까? 회복을 위해서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회복이죠. 이 메시지 속에는 하나님이 구원과 회복이 담아져 있는 거예요. 자, 그러면 요한이 인용한 요한복음 1장 23절 말고 원본을 보고 얘기하자고요. 요한이 인용했던 원본. 그게 오늘 이사야 40장 3절 말씀인데 외치는 자의 여기도 뭐라고 돼있죠? 소리요, 소리요. 외치는 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담아진 내용, 메시지. 이르되 너희는 어디에서 자, 보통 광야라고 얘기할 때는 풀 한 포기 없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을 연상할 텐데, 적어도 여기에서 광야는 문학적 표현이에요. 여기서 말하는 광야는 이미 말발굽 아래, 심판 아래 모든 기능이 망가져 버리고 폐허가 되어버린 예루살렘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학적 인식 속에는 광야라는 표현이 등장할 때는 퍼뜩 머릿속에 동의어로 떠오르는 주제가 하나 있어요. 심판, 심판. 광야는 이 백성들이 심판 당한 결과물입니다. 심판 당한 결과로 지금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그들이 살던 옛 터는 전부 뭐처럼 돼있다는 얘길까요? 그렇죠. 광야처럼 돼있다는 얘기에요.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되어버렸어요. 그런데 그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되어버린 광야와 같은 옛 고터에서 하나님께서 뭘 예비하신대요? 여호와의 길, 보통 여호와의 길 하면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연상할 텐데 문맥상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얘기합니다. 어떤 일일까? 어떤 일일까? 여기서 예비하란 말도 우리보고 준비하란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어떤 구원의 방식을 기다려라 그 말이에요. 점점 더 모르겠어요.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이 뭔지, 그리고 우리가 이 폐허가 되어버린 심판과 저주 아래 놓여있었던 아무것도 없는 황무한 땅에서 뭘 기다려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하반절을 보자고요. 사막에서 사막이라는 것은 문학적으로 광야의 또 다른 표현이죠.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이 뭐죠? 대로. 대로라는 말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길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 건설된길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대로는 누구만이 왕래하고 출입할 수 있는 길인가 하면 King's road에요. 왕만이 출입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왕은 도대체 어떤 왕일까? 뒤에 붙어있는 문장으로 봐서 힌트가 하나 걸러져요. 대로를 어떻게 하라고 돼있죠? 평탄하게 하라. 평탄하게 하라. 이 말은 군사적 뉘앙스를 담아내는 표현입니다. 모든 방해되는 것들, 모든 거친 것들을 다 제압해내고 물리치고 승리를 거머쥔 우리의 왕 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과 고난과 저주 아래 있던 자기의 백성들을 찾아서, 회복해서 왕의 대로로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며 진입하시고 들어오신단 얘기에요. 그래서 시편 23편에 보면, 23편 마지막 절이 뭐로 끝납니까?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30:01-31:44)
거하리로다. 그리고 24편이 뭐로 시작이 됩니까? 문들아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우리주 하나님이시로다. 믿습니까?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대로는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길입니다. 이 길로 심판과 저주와 멸망 아래 광야처럼 되어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복하여 왕 중의 왕이신 이 도로로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며 들어올 때 모든 문들이 머리를 듭니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기 때문에. 믿습니까? 특별히 이 하나님의 승리의약속은 지금도 갖가지 눈물과 절망과 심판 같은 상황에 놓여있는 여러분들에게 깊은 소망의 말씀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약속의 말씀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2019년은 여러분들에게 왕의 행진을 통해서 그 분의 섭리를 통해서 모든 문들이 머리를 드는 은혜가 열어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다 일어나십시다. 문들아 머리 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