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서 강해(02)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인가?(2)
욜1: 13-20
1.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2.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3.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4.
먹을 것이 우리 눈 앞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5.
씨가 흙덩이 아래에서 썩어졌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음이로다
6.
가축이 울부짖고 소 떼가 소란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 떼도 피곤하도다
7.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목장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들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8.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00:00-10:00)
오늘은 요엘서 두 번째 시간인데요. C.S 루이스가 이런 얘길 해요. 기독교는 낭패와 절망에서부터 시작한다. 주님의 죽음은 죽음으로 마무리 되지 않고 나흘 만에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 약속의 소망을 온 인류에게 허락하셨듯이 기독교는 낭패와 절망에서부터 시작한다. 여러분도 그 사실을 믿습니까? 오늘 요엘서 두 번째 시간인데 서론 격으로 오늘 내용은 이런 내용으로 전개가 되고 또 1장 마무리 부분에서 그런 내용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오늘 가장 중요한 중심 주제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다. 그런데 그 날은 오늘 마지막 19절을 보니까 이런 대목이 있죠.
1.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목장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들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2.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몇 가지 단어를 걸러 보면 이렇게 정리가 돼요. 불이 목장을 살랐어요. 또 나무를 살랐어요. 짐승도 갈하여 헐떡거려요. 그리고 시내도 말랐고 불이 불에 타버렸습니다. 얼핏 이 대목만 보면 무슨 엄청난 화재가 났었나 그렇게 보여지는데 그 얘긴 아니고 조금 문예적 표현입니다. 그 이유는 본문을 강해해 나가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할게요. 그리고 세 번째 내용이 이 땅은 아무것도 열매 맺을 수 없으니까 음식과 열매와 곡식이 끊어지니 자연스럽게 뭐가 중단됐을까요? 백성들에게 소출이 없어진 거에요. 한두명이 아니고 온 시대 사람들이. 그러니까 재단에 드릴 재물조차 말라버린 겁니다. 뭐가 중단이 되죠? 제사가 끊어져요. 제사가 끊어지니까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복으로 흥겨워하고 즐거워하던 교제 속에 하나님의 경이를 경험하던 그 예배의 즐거움도 끊어지는 거에요. 오늘 내용은 주로 그런 흐름으로 소개가 될 건데. 시대도 우울한데 왜 하필 요엘서냐? 요엘서 전체가 사실은 그런 어둡고 두렵고 무시무시한 내용이 담겨있지만 이 속에 유심히 보면 하나님께서 몇 가지 조각 그림을 감춰 놓으셨어요. 오늘도 결국은 우리가 그 보일 듯 말듯한 하나님의 내비쳐진 마음을 붙들고 다시 한번 소망을 갖자는 것이 이 본문의 참 의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을 딱히 달리 잡지 않고 그냥 계속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인가 하는 큰 주제로 순서대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을 한번 볼까요?
1.
제사장들아 첫 번째 대상이 누구죠? 제사장들이에요. 지도자들이죠.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굵은 베로 동이다. 이 베로 동이다 라는 하가르 라는 말은 예레미야서 4장 8절을 같이 읽어 보십시다. 시작
2.
이로 말미암아 너희는 굵은 베를 두르고 애곡하라 이는 여호와의 맹렬한 노가 아직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이 굵은 베로 동이다 할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극한 슬픔 가운데 애통을 표현할 때의 태도에요. 그리고 이제 본문을 또 보십시다.
슬피 어떡하라? 울지어다 이 울지어다 하는 말은 사파트 라는 말인데 이사야 32장 11절을 볼까요?
1.
너희 안일한 여자들아 떨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자들아 당황할지어다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베로 허리를 동일지어다
베로 허리를 동이라 그러는데 옷을 벗으라 그랬어요. 몸을 드러내라 그랬어요. 이 무슨 언발란스 한 말인가 하면 이런 뜻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깊은 애통이 벌어진 상황 속에서 두 가지 태도를 취했습니다. 첫째는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대로 베로 전신을 동여요. 그런데 가슴팍 쪽만 드러냅니다. 그리고 맨 살을 쳐요. 참회와 회개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퍼포먼스 하는 거에요. 그래서 맨 살을 가슴을 칩니다. 어쩌면 우리네 정서와 굉장히 행동이 유사하죠. 저도 아주 오래 전에 어느 집사님, 안수 집사님이셨는데 그냥 퇴직하면서 회사에서 선물로 준 종합 검진표를 가지고 아내와 함께 검진 갔다가 아주 건강한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돌아온 거에요. 이제 퇴직해서 편하게 지내려고 야무진 꿈도 계획도 갖고 있었는데 얼마나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겠어요. 주일에 입원을 해서 제가 월요일 새벽에 면회를 갔더니 환자 손을 이렇게 다 침대에 묶어놨어요. 그래서 놀라가지고 아내 되는 분에게 왜 이렇게 했냐 하니, 고개를 돌리시면서 말도 마세요. 목사님, 가슴 좀 보세요. 환자복 사이로 가슴팍이 맨 살이 드러났는데 여기가 다 멍이 들었어요. 시커멓게.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어제 수술을 위해서, 말기니까, 딱 입원을 해가지고 환자복으로 환복을 딱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그때야 확 현실감이 들어오더래요. 긴가 민가 하다가, 어 이게 뭐지? 이게 뭐지? 하다가. 그러면서 주마등같이 지나온 험난했던 자기의 생애를 반추해 보니까 딱 한 문장으로 정의되는데 밤새 손으로 자기 가슴팍을 뼈가 부러지도록 치면서 헛살았어, 헛살았어, 헛살았어. 그래서 손을 묶어놓은 거에요. 하도 그래가지고. 집사님도 한 숨도 못 자고. 유대인들이 베옷을 여미고 가슴을 드러내고, 이게 가슴팍을 치는 행동이에요. 극한 슬픔을 표현하는 행동이에요. 지금 뭔가 요엘 선지자가 소개하는 이 시대의 그림이 그래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지난 주에도 여러분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렸을 텐데, 이 정도 심판을 얘기하고 이 정도 회개를 촉구했다면 어떤 죄목에 대한 나열이 있어야 될 텐데 일체 개인적인 죄의 항목이 소개되어 있지 않아요. 기록이 없어요. 그러면 이 시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죄를 안 지었다는 말은 더더욱 아닐 텐데. 그 개인적인 죄의 항목을 일일이 지적하는 것보다 더 엄청나게
(10:01-20:00)
중요한 명령이 이 속에 우선적이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기록을 한 겁니다. 그런 차원으로 오늘 본문을 보자고요. 몇 절을 보시냐 하면 13절 중반인데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지어다 이 말은 여기 와서 자라는 말이 아니고 성전에서 자라 그 말이 아니고, 성전에서 집중적으로 시간을 보내라 그 말이에요. 집중적으로 성전에서 시간을 보내라. 그리고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소제와 전제는 전부 곡식으로 열매가 있어야 드려지는 제사인데 이걸 못 드리게 됐어요. 왜 못 드리게 됐죠? 소출이 없는데 뭐로 드려요. 음식이 끊어진 거에요. 소출이 끊어진 거에요. 그러니까 자연히 뭐도 끊어집니까? 예배도 끊어진 거에요. 제단의 제물 드림도 끊어진 겁니다. 신명기 12장을 볼까요? 제가 읽겠습니다.
1.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2.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3.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고의 경이로움과 기쁨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하나님 앞에 표현하면서 성전에서 그 제사를 드리는 가운데 주시는 공동체의 기쁨. 우리가 지금 그걸 잃어버리고 살잖아요. 그게 최고의 복으로 알고 있단 말이에요. 소출이 끊어지니 음식이 끊어지고 제단에 드릴 제물이 끊어져요. 제사가 끊어지고 제사가 끊어지니 성전에서 공동체가 경험했던 하나님의 기쁨의 경이로움을 경험하지 못하는 그것도 끊어진 거에요. 즐거움과 희락과 웃음 소리가 멈춰진 거에요. 오늘날 세계 교회의 정황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똑 같은 상황입니다. 제가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요즘 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야, 어쩌면 이 요엘 선지자의 글은 이 시대의 정황과 이렇게 닮아 있을까? 그런데 여기 여러분들이 놓쳐서는 안 되는, 유심히 들여다 봐야 될 다른 요엘 선지자의 표현이 하나 있어요. 13절을 다시 보세요.
1.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어요. 요엘 선지자가 하나님을 무슨 하나님? 내 하나님이라 그랬어요. 그런데 후렴구에 가서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여기서는 내 하나님이에요? 누구의 하나님이에요? 너희의 하나님. 지금 누구보고 하는 얘기죠? 제사장들. 자 화면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요엘 선지자의 언어 표현을 빌리자면 내 하나님이 따로 있고 제사장들의 하나님이 따로 있단 말입니까? 어차피 한 하나님일 텐데 이렇게 다른 표현을 썼을까? 왜 내 하나님이라고 했다가 후렴구에 제사장들에게 뭔가를 강조할 때는 너희 하나님이라고 했을까요? 여기에는 요엘 선지자의 입장에서의 제사장들에 대한 깊은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있는 겁니다.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제사장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직무를 강조하는 겁니다. 요엘은 제사장이 아니죠. 요엘은 여기에서 뭐로 사실상 등장하냐 하면 선지자로 등장을 해요. 선지자로. 그는 제이적 용어가 익숙한 걸로 봐서 제사장일 수도 있는데 요엘은 이 시대 그에게 맡겨진 본연의 직무는 선지자에요. 그래서 내 하나님과 너희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나는 내가 할 역할이 있다. 이 시대에. 그런데 너희 하나님. 너희에게 직무를 주신, 무슨 직무죠? 제사장의 직무를 주신. 지난 주 제가 첫 번째 서론 겸 요엘서의 말씀을 나누면서 여기의 제사장은 신약식, 오늘 식으로 해석을 하자면 우리 모든 성도를 포함한 얘기라고 말씀 드렸어요. 베드로 사도가 분명히 구약의 제사장의 의미를 어떻게 확대 재해석 했죠? 왕 같은 제사장들아. 너희는 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 그러니까 요엘 선지자는 이 아픈 경고를 전해야 되는 선지자의 역할을 내 하나님께로부터 맡았지만 너희 하나님, 제사장의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무슨 직무를 주셨다는 뜻입니까? 제사장. 제사장은 뭐 하는 사람이에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섬김과 시대의 예배를 가르치고 집례하고 책임 맡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너희 하나님 이렇게 표현한 거에요. 자 그런데 14절을 한번 보세요.
1.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자, 13절은 간단히 얘기해서 회개와 애통을 강조했어요. 울지어다. 그런데 어느 정도 울음이 필요한가 하면 베옷을 동이고 가슴을 칠 정도의 회개가 필요한 거에요. 그런데 여기에 방금 말씀 드린 것처럼 개개인적인 어떤 심판과 멸망 당해야 될 내용이 지적되어 있질 않습니다. 그리고 14절에 뭘 강조하죠? 공동체의 제의적 회개를 강조해요. 지난 주 표현했던 언어죠? 잘 보세요.
1.
너희는 금식일 원래는 히브리 말을 보면 카도쉬. 거룩한 날이란 뜻입니다.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처음에는 제사장으로 시작했다가 이 회개의 촉구가 어느 영역까지 지금 확대되어 가고 있습니까? 모든 주민들, 장로들과 모든 백성들까지 모여서 회개하라는 거에요. 이것을 지난 주에는 공동체의 제의적 회개라고 말씀 드렸어요. 아무리 이스라엘이 타락을 해도 거짓 마음으로, 마음이 없는 제물이라도 형식적인 예배는 드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요엘이 이 메시지를 선포하던 시대는 그 형식마저 무너진 겁니다. 그 형식마저 깨져 버린 겁니다. 여러분, 형식이 깨지면 뭐죠? 내용을 담을 수가 없어요.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천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를 유량하며 전 세계에 디아스포라가 되어 뿔뿔이 흩어져 살았지만 그 민족이 기적처럼 190년대 초에 저 팔레스타인 땅에 나라를 건설할 수
(20:01-30:00)
있었던 이 경이로운 역사적 사건은 왜 가능했는가 많은 역사학자들의 연구와 평가가 있지 않습니까? 뭐에요? 종교적 전통이에요. 그리고 토라에요. 그리고 그들의 절기 문화에요. 그건 뭘 얘기합니까? 어느 시대, 어느 자손, 어디에 살든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전통과 형식을 목숨처럼 붙들었기에 내용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 공동체의 제의적 예배의 행위마저도 중단되고 끊어지고 멈춰진 참 노답의 시대였어요. 답이 없던 시대였어요. 그리고 성경을 한번 볼까요?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이제는 그 회개를 촉구하는데 어떤 방식의 회개를 촉구하시냐 하면 먼저 공동체의 제의적 회개를 촉구하는 거에요. 중요한 동사를 씁니다. 날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고,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요즘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마는 참 조심스런 표현이긴 한데 언제까지 교회가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물론 방역을 해야 되는데 이렇게 획일적으로 그어대는 기준에 따라서 예배를 중단해야만 하는가? 성도의 교제가 중심인 만남을 멈춰야만 하는가? 좀 고민스러워요. 혼란스러워요. 지금 목회자들이 옳게 하고 있는가 하는 두려운 생각도 들고요. 오늘 또 저녁에 발표를 하겠죠. 그런데 제 마음 속에는 발표는 어떻게 하든 이제 우리 교회 방침에 따라서 이제는 뭔가 성도들에게 기준을 함께 해야 되겠다는 각오는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섣불리 지금 예배 시간이기 때문에 말씀은 드릴 수 없지만 그 동안 참 우리가 자유롭게 선교 다니고 함께 빼곡히 들어앉아 예배하던 과거의 예배 장면을 보면 꿈 같아요. 언제 우리가 저랬었나? 꿈 같아요. 진짜.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날을 소망하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 만나는 걸 아주 즐거워하세요. 왜 그런지 아세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시편에 기록 된 얘기에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리고 하나님도 삼위 하나님은 늘 교재 가운데 계십니다. 늘 함께 하는 걸 굉장히 기뻐하세요. 성도는 기본적으로 함께 해야 해요. 그리고 함께함 속에서 주시는 격려와 기쁨과 감사와 배움과 교훈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자, 우리가 15절을 보십시다.
1.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자, 이제 가장 중요한 본문에 우리가 이르렀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슬프다 그 날이여 가 한번 나왔는데 70인역에는 이 말이 세 번씩 나와요. 슬프다 그 날이여, 슬프다 그 날이여, 슬프다 그 날이여. 애통의 초절정을 소개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여호와의 날이 어쨌대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그랬어요. 자, 이 부분이 여호와의 날이 중요한 주제이긴 한데 여기서 오늘 초점은 가까웠다는 게 무슨 뜻일까? 첫째는 이 가까웠다는 말은 불현듯 갑자기 저항할 수 없는 시간. 예수님도 자신의 오심을 어떻게 소개했죠? 도적이 옴 같이 어느 날 갑자기. 이는 분명 시간의 문제인데 그 시간이 어떤 시간인가 하면 어느 날 갑자기, 불현듯 저항할 수 없는 시간이에요. 주님은 그렇게 오신다는 거죠. 그런데 여호와의 날이 그렇게 오신답니다. 그리고 그 날이 가까웠대요. 그런데 여기 가까웠다는 말에 또 한 측면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어요. 여러분 살면서 이런 얘기 많이 들어보셨죠. 아주 소름 돋고 끔직하고 정말 머리를 흔들고 눈을 감아 버리고 싶은 어떤 보도나 사건을 보면 우리 피차 뭐라 그럽니까? 말세야. 정말 종말이 가까웠나 보다 그런 얘길 해요. 그러면 그건 지금 느끼는 겁니까? 지금 안 느끼고 느낄 겁니까? 지금 느끼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 느낌을 지금 느낀다는 거에요. 그럼 지금 끼는 그것이 뭐에요? 이미 여호와의 날이 들어와 있는 거에요. 그 조짐이 이미 들어와 있는 거에요.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우리가 어느 한 방향의 하늘에 노을이 지면, 구름이 끼면 아 비가 오겠구나 알듯이 우리가 시대를 보면 알잖아요. 아, 저런 상태로 봐서 이게 정말 다됐구나. 쟤 다 됐구나 느껴요. 이게 현재 느끼는 거 아녜요. 그런데 아직 어떤 팩트적인 사건은 오지 않았지만 현재 느낌으로서 이미 그 날은 와 있는 거에요. 그래서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는 뜻은 시간적인 물리적인 의미도 있지만 이건 현재성을 얘기합니다. 예수님이, 창조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순간부터 성경은 종말이라고 규정하고 있어요. 종말이에요. 그때부터. 이것이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종말입니다. 종말은 지금 진행되고 있어요. 지금이 여호와의 날이에요. 자 그러면 이 여호와의 날을 성경에서는 어떻게 소개하는가? 자, 16절을 보세요. 15절을 마저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여기 멸망이라는 말은 원문에 보면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는데 멸망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쇼드에요. 쇼드. 그런데 그 뒤에 전능자 라는 말이 나와요. 전능자. 전능자 라는 말이 샤다이. 뭐와 비슷하죠? 쇼드와 비슷한 음을 가지고 있어요. 이것을 보통 워드 플레이라고 합니다. 말 놀이. 일부러 쇼드와 샤다이를 연결시켜 문장을 만듦으로써 이 멸망의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기억케 하도록 강조하는 거에요. 쇼드와 샤다이. 성경을 잘 보세요. 멸망 그 다음에 뭐라 그랬죠?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이 심판의 주도자와 주권자는 누구시란 말입니까? 샤다이. 쇼드의 주권자는 샤다이.
(40:01-50:00)
이걸 강조하는 거에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 그리고 그 날은 16절
1.
먹을 것이 우리 눈 앞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여기 동의 반복어가 나오죠. 끊어지다. 이건 언약에서 끊어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사실상. 언약에 관련된 표현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이 백성들의 시각에서는 끊어진 것처럼 여겨지고 느껴지는 거에요. 하나님이 어디 있어? 하나님이 계시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하나 제압 못하셔?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어? 그 소리를 수없이 듣고 이 시간들이 길어지고 반복되다 보니까 백성들의 마음 속에도 정말 그런가? 교회는 필요 없는 건가?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는데. 그럴 수 밖에 없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요. 성경을 보세요.
1.
씨가 흙덩이 아래에서 썩어졌고 이런 것이 시간이 오래 됐다는 말이에요. 창고가 비었고 당연하죠. 창고를 쓰지 않으니 곳간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곡식이 시들었어요. 이건 한달 만에 일어난 일입니까? 두 달 만에 일어난 말입니까? 오래됐다는 말입니까? 이 모든 묘사는 이 재앙의 기간이 오래됐다는 말이에요. 한두 달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지금 6개월이 넘어가고 계절이 세 번 바뀌었어요. 성경을 또 보십시다. 18절
2.
가축이 울부짖고 소 떼가 소란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 떼도 피곤하도다
아니 사람 먹을 것도 없는데 짐승 먹을 건 있겠어요? 그런데 참 놀라운 얘길 합니다. 19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1.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목장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들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이 표현은 사실상 열왕기상 18장에서 가지고 온 표현입니다.
1.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게 무슨 얘길까요? 지금 이 백성들이 뭔가 하나님을 떠나 있어요. 엉뚱한데 간구하고 엉뚱한데 구원을 구하고 있어요. 이 시대는 지금 3년 6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비가 오지 않던 시대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유례없는 끔찍한 시대였어요. 집집마다 오늘은 네 아이를 내놓아라 내일은 우리 아이를 잡자. 성경에 나오는 끔찍한 인육이 양식이 되는 그런 시대였어요. 다음 절을 볼까요?
1.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2.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요엘 시대가 맞았던 시대와 방불한 엘리야의 시대에요. 이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보면 지금 하나님께서 이 나라의 우상 숭배에 대한 분노로 노기가 가득하여 3년 6개월 동안을 하늘을 닫아 온 땅이 거북이 등 짝마냥 쩍쩍 갈라지고 모든 것이 불에 사르듯 다 타 없어졌는데 그 말은 불이 났다는 의미보다는 비 정상적인 팔레스타인의 태양이 대지를 오랜 세월 뜨겁게 달구니까 다 타버리죠. 다 불살라져 버리죠. 그런대도 850명의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백성들은 참되신 하늘을 닫고 열 수 있는 여호와를 찾지 않고 그 우상 숭배의 대상인 바알을 좇았어요. 가나안의 신들을 좇았어요. 그 비통한 심장으로 엘리야가 기도했던 내용이에요. 지금 그러면 요엘 선지자는 왜 하필 이 시대에 엘리야 시대의 패턴을 차용하여 성경을 기록했을까요? 이유는 명약관화합니다. 이 시대도 엘리야 시대와 똑같았단 얘기에요. 이런 재앙의 시간이 재앙의 상황이 지속 반복 오래됨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마땅히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될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하여 우상에 그들의 생명과 안위와 먹거리를 구하고 있었어요. 엘리야 시대나 이 시대나 아니 오늘날의 시대나 다르지 않아요. 우리는 이 코로나 19라는 비상한 시대를 맞으면서 교회가 스스로 먼저 분리하고 배제하고 남 탓하고 이런 일들을 먼저 했어요. 마땅합니다. 주님. 이 모든 시대적 재앙은 우리의 죄악입니다. 우리가 베옷을 동이고 가슴을 치며 자복합니다. 이런 회개와 공동체적 통회 자복이 일어나도 시원치 않았을 상황인데 딱하게도 우리는 먼저 그러지 못했어요. 자 그러면 20절을 한번 볼까요?
1.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말 못하는 미물도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 구원을 호소해요. 헐떡거려요. 이것은 중요한 문예적 표현인데 이런 말 가끔 하죠. 사람이 정말 구실을 못하면 뭐만도 못한 놈? 네, 똑 같은 고발이에요. 사실은. 짐승도 창조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지 않느냐? 여호와께 돌아오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아 하나님의 자비로 돌아오라. 그래서 요엘서는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결론을 만나자면 첫째, 여호와의 날은 두려움과 심판의 언어로 가득하죠? 요엘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의 분노의 마음이 가득해요. 그런데 그 이면을 살포시 엿보라고요. 여기 우리 형제 자매들이 앉아 계신데 나랑 아무 상관없는 이성이 다른 이성을 만나면 화가 나고 잠을 못 자고 그래요? 나랑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데 누굴 만나든 아무 상관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이미지와 모든 언어를 다 동원해서 하나님의 분노를 드러내셨어요. 두렵고 심판의 날임을 강조했어요. 그러면 그 이면에 무슨 마음을 살포시 드러내고 싶으신 걸까요? 나 너희 없이는 못 사는데, 나 너밖에 모르는데 너 왜 한눈 파니? 제발 좀 돌아와라. 내게로 돌아오라. 이 하나님의 지침 없는, 끊임없는 우리를 향하신 헤세드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이 이 극렬한 분노의 언어 속에 감춰져 있는 거에요.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그 마음을 보지 못하면 성경 헛 읽는 거죠. 아니 나랑 아무 상관없는데 누굴 만나든 무슨 상관이에요. 거기에 열 내고 불 낼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내 사랑하는 자니까 내 자녀이니까
(40:01-42:21)
아무한테나 절하고 아무한테나 먹거리를 구하는 것은 견디지 못하시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이것이 두려움과 심판의 언어로 가득한 여호와의 날의 감추어진, 슬쩍 일부러 내비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이 시대와 우리를 향한 마음이라는 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요엘 선지자는 공동체의 제의적 회개를 촉구합니다. 우리가 너무 자유롭게 바쁘면 못 드리고 또 시간 남으면 드리고. 예배는 바쁘면 못 드리고 시간 남으면 드리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부르신 그 현장이 내 예배의 자리이고 예배의 처소가 되어야 해요. 이게 무너졌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것은 누구 한 사람에게만 지적하는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제의적 회개를 요엘서는 촉구하고 있는 거에요. 마지막 세 번째 다같이 시작, 심판과 회개 후에는 회복이 있으면 그 회복은 예전보다 더 높고 새로운 회복이 될 것이다. 우리 모니터에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도 다같이 아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그분도 반듯이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돌리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회복의 날이 다가올 때 더 새롭고 더 견고한 회복으로 우리 모두를 한국 교회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새로이 이끄실 것을 확신합니다. 다 일어나십시다.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