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서 강해(01)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인가?
요엘 1:1-7
1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3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
4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5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6 다른 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수가 많으며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7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00:00-05:00)
할렐루야. 추석 잘 지내셨나요? 이번 추석은 많이들 고향에 못 내려가셨죠? 저도 목양실하고 집에만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추석의 가장 큰 화재는 테스 형, 나훈아의 콘서트가 아니었나 해요. 정치권에서도 이걸 가지고 갑론을박 말이 많던데 저는 그 콘서트를 좀 처음부터 끝까지 시간이 허락이 돼서 다 봤습니다. 몇 군데 아주 충격적이고 놀라운, 경이로운 장면들이 많았죠. 중간에 신곡이라고 소개를 하면서 느닷없이 테스 형이라는 노래를 부르길래 저는 처음에 잘 못 알아들었어요. 근데 그게 소크라테스를 끝에 줄인 말이더군요 그 노랫말을 유심히 봤더니 중간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 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밷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 형.’ 끊임없는 70중반의 노 가객이 담담히 지난 인생을 반추하면서 써내려 간 아주 진솔한 가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왜 그 가수는 느닷없이 소크라테스를 소환했을까? 소크라테스는 아시는 대로 예수님이 태어나기도 전인 B.C. 4,5세기 경의 인물이에요. 그런데 사실 뒤져보니까 이 노 가객만 역사의 어떤 변곡점에서 소크라테스를 소환한것만은 나이더라고요. 유명한 스티브 잡스 그분도 평소에 그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내가 한나절만 소크라테스와 함께 지낼 수 있다면 내 모든 IT기술을 다 줘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직접 남긴 글이나 저서가 딱히 없더라고요. 그가 남긴 말은 이제 변형이 돼서 돌아다니는데 그는 결국 철학자입니다. 철학자. 철학이 뭐에요? 결국 철학은 이 노랫말처럼 인생의 큰 담론에 대한 질문일수밖에 없어요. 철학은 끊임없는 질문이에요. 거기에 대한 가장 유일한 세상의 모든 정치경제문화에 대한 답은 결국 우리는 성경에서 그 답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린 두가지 사실을 믿습니다. 일반 역사이던 기독교 역사이던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렇죠 여러분들도? 또 하나는 그 하나님이 여전히 세상을, 하나님의 발등 상에 해당하는, 이 하나님의 보좌에 해당하는 세상을 통치하시고 경영하시고 모든 역사는 그 분께로 영광이 돌아갈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수많은 철학자들의 질문과 나아가서 이 모든 기독인들의 코로나19라는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질문의 답은 성경에서 찾을 수 밖에 없어요. 지금
(5:00-10:00)
지금 이 시대는 초강대국인 미국의 대통령까지 전염병에 걸려 입원을 하는 사태를 뉴스 너머 지켜보면서 우린 여기서 섣불리 재단하고 해석하고 분석하기 급급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커다란 하나의 이미지를 좀 볼 수 있어야 될 텐데 제가 오늘부터 이 요엘서 강해를 시작하게 된 나름 좀 이유가 있습니다. 매우 답답하더라고요. 성도들은 만날 수도 없고 모여서 뭔가를 할 수도 없고. 어느 날 책상 앞에 앉아있는데 그래도, 그래도 성도들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할 수 있는게 없잖아요. 그런데 정작 가장 강력하게, 가장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게 있더라고요. 그래 아무것도 할수 없을 때 이 때 밖에는 못하는 한가지가 있다, 기도하자.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해서 정말 요즘 교회들 마다 철야 안 하잖아요. 완전한 올 나잇 철야. 내가 작심하고 월요일서부터 금요일까지, 토요일 새벽까지 철야를 해야 되겠다 마음을 딱 먹고 월요일 밤 11시에 이 본당에 들어와서 새벽예배 마칠 때까지 꼬박 한 8시간을 본당에서 기도도 했다가 찬양도 했다고 졸기도 했다가 버텼어요. 이거라도 하자 그래서 기도하기 전에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어가는데 특별히 구약을, 소선지서를 집중적으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요엘서에서 그냥 탁 걸려버렸어요. 요엘서에서. 요엘서 2장 17절에 보면.
17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의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지어다
낭실과 제단 사이에 서서 울어라 그래요. 제사장들아 낭실과 제단 사이에 서서 울어라. 낭실과 제단 사이는 솔로몬 성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거기서 무시무시한 우상숭배가 벌어지던 현장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지금 이 시대는 이 시대의 제사장인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애통을 회복해야 되겠구나, 시대를 긍휼히 여기는 애통을 회복해야 되겠구나. 정말 앉으니까 눈물밖에 안 나와요. 청년들이 딱해서 눈물이 나고, 한국교회가 딱해서 눈물이 나고, 내 자신이 딱해서 눈물이 나고. 그래서 이번에 마태복음 잠시 휴식기간을 갖는 그 어간에 정말 이 시대를 함께 혼란스럽게 지금 끙끙거리고 걸어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공유해야 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다. 요엘서를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몇 차례에 걸쳐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부터, 오늘은 어차피 서론 격입니다. 요엘서를 우리가 말씀을 나누겠는데요. 요엘서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어요. 순서를 보면 소선지서에 해당하는데 여러분 소선지서 대선지서 하는 구분은 상식적으로 알고 계시죠? 분량 차이입니다. 큰 차이는 없고, 소선지서는 예언의 기록을 적게 감당하는 선지자들이고 대선지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이런 사람들이죠, 분량이 일단 많잖아요. 분량을 기록으로 대선지서, 소선지서 이렇게 구분을 하는데 책의 순서를 보면 호세아, 요엘, 아모스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호세아와 아모스가 동시대 인물이에요. 동시대를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요엘서가 끼어 있단 말이죠. 그리고 어떤 선지서든지 역사적 배경을 소개합니다.
(10:00-15:00)
어느 왕 때라든지, 주전 몇 년이라든지 이런 기록들을 통해서 그 시대의 배경이 어떠한지를 선지자들이 밝혀요 구체적으로. 그런데 이상하게 요엘서만은 그 시대적배경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냥 담백하게 1장 1절을 보니까 이렇게 시작을 단도직입적으로 해요.
1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 브두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확신하고 있다 그 뜻이에요. 브두엘. 하나님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아들을 주셨는데 아들의 이름은 요엘이에요. 요엘. 요엘이라는 이름은 중요하니까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니까 우리 성도님들 따라했으면 기억에도 좋을 꺼 같아요. 한번 따라서 하십시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다시 한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간사님들 요고 돌발 퀴즈 우리 조원들에게 내면 좋을 꺼 같아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왜 요엘서는 시대적 배경을 밝히지 않았을까? 반 게메렌이라는 유명한 세계적인 구약학 교수님이 계신데 그분의 저서를 참고하다 보니까 이런 얘기를 합니다. ‘배경을 밝히지 않을 때에는 이 요엘 선지자가 말하고 싶은 초점이 거기에 그렇게 중요성이 없다라는 뜻이다.’ 너무 상식적인데 그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연대적 배경이 여기선 그렇게 중요한 주제가 아니다 그 뜻입니다. 자 그러면 뭐가 중요하다는 말일까? 그래서 요엘서가 석 장에 걸친 짧은 책이지만 요엘서의 가장 중요한, 가장 큰 주제는 뭔가 하면 여호와의 날이라는 주제입니다. 오늘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인가? 가 말씀의 제목인데,요엘서의 가장 큰 주제는 여호와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날.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인가? 우리가 그 여호와의 날의 의미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소개를 하기로 하고 여호와의 날을 기준으로 성경은 어떻게 소개를 했나 한번 쫓아가 보시도록 하십시다. 자 여러분, 몇 절을 보시냐 하면 1장 15절을 보세요.
15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여호와의 날이 지금 어떻게 됐어요? 가까웠어요. 첫째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어요. 두번째, 2장 1절에 넘어가서.
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여전히 가까웠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했죠? 2절 시작.
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이 날은 어떤 날로 묘사되죠?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는데 두번째로 그 날은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뭔가 조짐이 불길합니까? 아니면 희망적입니까? 희망적이질 않죠? 여호와의 날은 어떤 심판을 지금 암시하고 있어요. 요엘서는 크게 두 덩어리로 구분이 됩니다. 첫째는 1장 1절서부터 정확하게 2장 17절 까지는 여호와의 날을 뭘로 설명하냐 하면 심판으로 소개를 해요. 심판. 그리고 두번째는 여호와의 날을 2장 18절서부터는. 18절 읽어볼까요 다같이.
18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
(15:00-20:00)
하나님의 자비의 시작을 암시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화면을 좀 봐주세요. 여호와의 날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두가지 그림을 안고 있습니다. 첫째는 1장 1절서부터 2장 17절까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해요. 심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날은 지금 가까웠고 그날은 캄캄할 것이며 어두운 구름이 덮어지는 날이 될 것이다. 그런데 2장 18절서부터는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겠답니다. 그래서 굉장히 희망적으로 3장전체가 마지막까지 끝이 나요. 그러니까 여호와의 날은 두가지 그림을 갖고 있다는 말이죠. 첫째는 하나님의 심판, 둘째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자 그런데 우리가 이 말을 듣다가 이런 생각을 가져야 되요. 그러면 중간에 무슨 연결고리가 있어야 될 꺼 아니냐?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 거는 우리가 잘못해서 심판하실 수 있는데 뜬금없이 맥락도 없이 갑자기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신다? 오늘 그 연결고리를 말하고자 하는게 요엘 선지자의 참 의도입니다. 그 부분을 우리가 좀 살펴보도록 할 텐데 아까 책의 순서를 설명 드렸죠? 첫번째 책이 뭐 였어요? 호세아 선지자가 쓴 호세아서였어요. 그런데 호세아의 글은 어떤 패턴을 갖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이 백성들과 언약을 맺었어요. 그런데 백성들의 일방적인 언약 파기로 이 언약은 깨졌습니다. 언약을 맺었는데 언약이 깨졌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이 풍부하신 분으로 소개되죠? 호세아 선지자의 전체 주제어가 헷세드입니다. 자비가 무궁 하셔서 이들을 사랑하시겠데요. 이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대요. 그런데 누군가가 이 죄값을 지불해야 되요. 그게 심판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의 세가지 엮어진 단어는 언약백성, 언약 파기,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의 흐름과는 달리 요엘서는 그 하나님의 심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심판할 것이다. 그런데 방금 말씀드린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 할것이다. 그런데 이 중간에 연결고리가 없단 말이에요. 그냥 가만히 있는데 구원을 하느냐 그 말이에요. 그러면 이제 그 연결고리를 찾아 오늘 본문이 되는 2절서부터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2절.
2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늙은 자들아, 늙은 자들은 말그대로 나이가 많은 사람일 수도 있는데 당시 지도자 그룹들이 다 나이가 많아서 위원회를 구성해서 나라를 경영하고 지도도하곤 했어요. 그래서 둘다 의미가 맞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또 지도자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뭐라고 시작하죠? 들으라. 들을지어다. 여러분 이 들을지어다 라는 말이 사실 어디 패턴인지 아십니까? 신명기 패턴이에요. 그래서 모든 선지자들의 글은 신명기라는 기초 책을 떠나서는 설명이 안되요. 그걸 신명기 신학이라고도 하고 신명기 사관이라고도 해요. 오늘 그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등장할 겁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이 말이 신명기의 주제이기도 하잖아요.
(20:00-25:00)
자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강조형이죠? 그리고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자, 노인들은, 늙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역사도 알고 오늘을 보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들의 경험치로 봐서 말하자면 너희들이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고 이 땅의 지도자 생활을 해오면서 앞으로 닥쳐질 이런 심판의 날을 본적이 있느냐 그 말이에요. 본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뭔가 지금 다가올 심판의 내용이 심상치 않아요. 그런 일을 전무후무하게 본 적이 없을 거다. 3절 다같이.
3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
몇 대에 걸쳐 말하도록 돼있습니까? 4대 .4대에걸쳐 말하도록 돼 있어요. 원래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말하라는 것은 역시 어디에서 주로 발견되는 주제 문구입니까? 신명기입니다. 신명기는 내가 너희 앞에 복과 저주를 두나니 그랬어요. 그래서 복을 얘기할 때 이렇게 이렇게 하면 이렇게 복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이렇게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언약적 축복이라고도 하고 언약적 저주라 그래요. 언약적 심판이라고도 말합니다. 근데 오늘은 언약적 축복으로 흐르고 있어요? 언약적 심판으로 흐르고 있어요? 후자 입니다. 불행하게도. 언약적 심판으로 흐르고 있어요. 언약적 심판. 이것이 오늘 요엘 선지자의 굉장히 중요한 문으로 말하면 입구입니다. 입구. 자 그런데 4절을 볼까요?
4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자 몇 마리의 회충이 등장합니까? 4마리. 4종류의 회충이 등장합니다. 자 이것을 학자들은 여러가지 해석을 합니다. 어떤 학자는 이것이 한 메뚜기의 성장과정을 설명한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저도 한때 그렇게 봤던 적이 있는데 이번에 보면서 그것이 조금 잘못된 시각이었다, 그것이 맞지 않는 시각이었다 라는 신학적 반성을 했습니다. 이유는 2장 25절을 보세요.
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자 여기 순서가 앞에 4절의 순서와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질 않아요. 그런 걸로 봐서 이것은 메뚜기의 성장과정 변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네 종류의 곤충을 각기 표현한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느치가 뭐고 황충이 뭐냐, 메뚜기가 뭐냐 이게 중요한 게 아니란 얘기에요.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4라는 숫자가 중요합니다. 이 4라는 숫자는 2장 25절에 보니까 군대로 묘사를 했죠? 군대들이 일어날것이다. 여러분 우리 신명기 28장을 한번 띄워 주실까요? 여기에 보면 이미 이 예언이 소개되어 있죠. 네가 많은 종자를, 이건 이제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조건부 언약적 심판을 신명기서에서 이미 예고 했던 거죠 모세의 글을 통해서.
38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뿌릴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
39 네가 포도원을 심고 가꿀지라도 벌레가 먹으므로 포도를 따지 못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며
다음절
40 네 모든 경내에 감람나무가 있을지라도 그 열매가 떨어지므로 그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41 네가 자녀를 낳을지라도 그들이 포로가 되므로 너와 함께 있지 못할 것이며
42 네 모든 나무와 토지 소산은 메뚜기가 먹을 것이며
네가 자녀를 낳을지라도 그들이 포로가 되므로. 뭔가 외부적인 세력에 의해서 붙잡혀 간다는 얘기죠.
(25:00-30:00)
네 모든 나무와 토지 소산은 누가 먹어요? 메뚜기. 이것은 침공하는 외부세력을 상징적으로 묘사했는데 오늘 요엘서에서는 이것을 각기 다른 모양으로 4종류의 해충을 소개했어요. 4라는 숫자는 무슨 수죠? 이것은 종결의 수요 세상의 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메뚜기가 뭐냐 황충이 뭐냐 가 중요한 게 아니고 4종류의 군대가 일어나서 장차 이 나라를 징벌할 것을 언약적 심판을 경고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왜 4냐? 세상의 수이기도 하지만 그 이후에 문명적으로는 4개의 제국이 일어납니다. 자 볼까요?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라고 불렸던 메데바사, 그 다음에 헬라, 마게도니야를 포함하죠? 그 다음에 로마입니다. 그러면 5대제국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고대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이 구분하는 방식과 기준이 다르더라고요. 민족과 국가별로 구분할 때는 5대 제국이 맞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광의적인 의미로 문명권으로 구분 할때는 4대제국입니다. 무엇과 무엇을 한 문명권으로 보냐 하면 앗수르와 바벨론을 사실상 한 문명권으로 봐요. 그래서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 메데바사, 헬라, 로마입니다. 이 4개의 역사 속의 실제 민족들이 일어나서 이 하나님의 언약적 관계를 깨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 이렇게 소개하고 있어요.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요엘서는 첫번째 덩어리가 심판에 대한 내용이에요.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어요. 우리가 요엘서를 유심히 읽다 보면 참 이상한 게 하나 있어요. 그 이상한 게 뭐냐 하면 이정도 심판을 예고할 때는 웬만한 선지서같은 경우에는 죄의 구체적인 항목이 지적되고 드러나요. 예를 들어서 우상숭배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이렇게 죄의 구체적인 개인적 개별적 항목들이 선지자들에 의해서 소개되고 쓰여지는데 요엘서에서는 이렇게 무시무시한 심판을 경고하면서도 일체 그런 기록이 없어요. 그리고 오히려 어떤 공동체적인 지적을 합니다. 성경을 잘 보십시오. 자 눈을 돌려서 5절을 볼까요?
5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자 여기서 우리가 조금 문맥적으로 오해가 쉬운데 취한다, 포도주를 마시는 걸로 소개 되는데, 이것은 꼭 방탕의 내용을 소개하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농작물을 황폐함, 비참한 결과를 강조하는 거에요. 그 당시 사람들은 다 일정 분량의 포도를 심고 포도주를 만들어서 제의 전이나 후에 먹곤 했기 때문에 그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강조점은 이제는 그렇게 즐길만한 포도주가 없다 그 말이에요. 다 쓸림을 당하고 다 황폐했기 때문에. 그러면서 5절에 이렇게 소개합니다.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우리말에는 이 울지어다 라는 말은 같은 단어로 번역했는데 히브리 말로 이 울지어다 울지어다 가 달라요. 앞의 말이 박하로 되어 있어요. 박하는 말 그대로 우는 거에요. 그냥 우는 거. 그러나 뒤에 울지어다, 얄라는 울부짖는 걸 얘기하는 거에요.
(30:00-35:00)
그러면 여러분 무슨 뜻이 됩니까? 울음의 강도가 일정 해요? 더 심해져요? 그렇죠? 박하에서 얄랄로 울음의 강도가 더 격렬해 지는 것을 여기서 암시하고 있는 거죠. 그 애통이 더 처절해 지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거죠. 박하에서 얄랄, 그런데 우리 성경에서는 똑같이 울지어다 로 번역을 했기 때문에 틀린 번역은 아닐 수 있으나 밋밋하다. 본문의 말하고자하는 의도를 좀 덜 드러냈다 이정도로 보면 좋을 꺼 같습니다. 자 그런데 6절을 볼까요? 시작.
6 다른 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수가 많으며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이것은 호세아 선지자에서도 표현되는 내용들일텐데 이것은 이방 민족들을 들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내용을 요엘 선지자가 소개하고 있는 거죠. 자 그러면 왜 요엘 선지자는 울라 그러면서 특정 개개인의 죄를 지적하거나 소개하지 않았을까요? 그것보다는 조금은 다른 곳에 초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른 초점이 뭐냐 하면 요엘 선지자가 사용하는 언어를 잘 보십시오. 13절서부터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13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제사장이 등장하죠? 너희 굵은 베로. 이것은 제사장들의 전형적인 의복입니다.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 수종드는 자들이 있어요.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또 굵은 베 옷. 밤새도록 누울지어다 그리고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서 드리지 못함이로다. 성전, 소제, 전제, 제사장. 그 다음에 또 이어서 14절 같이 읽어볼까요?
14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자 여기 보니까 성전 모으고, 성회를 소집하고 금식을 정하고 장소, 모임, 이런 표현들이 등장해요. 이것을 우리 협동 목사님이신 김이석 목사님이 강의중에 이런 독특한 표현을 쓰셨어요. 공동체 제의적인 회개운동. 다시요. 오늘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공동체 제의적인 회개운동이라는 용어를 쓰셨어요.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타락해도, 그래도 거짓 마음이래도 형식적인 예배는 드렸어요. 아무리 타락했어도. 그런데 오늘 요엘서는 더 끔찍한 얘기를 하는 거에요. 그 형식도 다 무너졌다 그 말이에요. 이제 그 형식마저도 안하더라 그 말이에요. 저는 이 요엘 선지자가 개개인의 미주알고주알 세부적인 죄를 지적하는 것 보다도 이게 더 섬뜩해요. 사실은. 우리가 온라인이라는 IT문명을 통해서 비대면 예배를 드린 지가 거반 1년이 가까워와요. 편하더라고요. 옷차림 신경쓸 필요도 없고, 그런데 오늘 구약 선지자 중에서 요엘서의 부르짖음은 그 형식마저도 이제는 무너진 상태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요엘 선지자가 개개인의 죄악은 둘째치고 그 무너진 공동체 제의적 회개가 먼저 이루어져야 된다 그 얘기를 강조하는 겁니다. 제단에 드리는 행위도 끝났고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 폼을 갖추는 것도 이제는 무너진 상태에요.
(35:00-40:00)
얼마나 끔찍해요? 요즘 이렇게 비대면 예배를 우리는 불가피하게 드려야 하지만 또 한 켠에 고민을 안고 있는 목회자로서 이러고 있는게 진짜 맞나 하는 자괴감이 있어요. 이러고 있는게 지금 맞나? 그래서 오는 12월에 선교 가기 전에 늘 특새 하지 않습니까? 이번 겨울 특새는 선교를 또 못 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기간 미루지 않고 그냥 정해진 시간에 하던 대로 하려고 해요. 여기 교역자만 앉는 상황이 오더라도 하던 대로 하려고 합니다. 이게 지금 다 무너졌어요. 그러니 가정에서 화면으로 예배를 드린다고는 하지만 또 집중할 수 있는 장점도 물론 있겠지만 비대면이다 보니까 함께하지 못하는 그 대면의 커뮤니케이션이, 펠로우쉽이 주는 그걸 경험하지 못하는 거에요. 성찬도 지금 봄에도 못했어요. 가을에도 이미 상황은 틀린 거 같아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됨을 확인하는 가장 교회의 표지 중의 하나인데 이제 그것 마저도 못하게 생겼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상황에 떠밀려 가야하는가? 이런 고민이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일단은 우리 삼일의 성도들은 다시 한번 10월을 기점으로, 분명히 하나님께서 회복을 하실 텐데 그때까지 우리가 이 코로나 19가 오기 전에 모든 신앙의 패턴을 잃어버리지 말고 하던 대로 하자. 하던 대로 하자. 예배도 신앙생활도 예물을 드리는 행위도 하던 대로 하자. 믿습니까? 여러분? 굉장히 중요합니다. 바로 이 공동체 제의적 회개를 요엘이 촉구하고 있는 거에요. 그렇게 진심으로 돌아오면, 사람이 그렇더라고요. ‘아 마음만 있으면 되지 뭐.’ 그렇게 안 되던데요? 그래도 형식을 갖출 때 내용이 담아져요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형식을 갖출 때 내용이 담아져요. 그래서 형식은 =또 하나의 내용이라는 것을 잊어버려선 안되요. 오늘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에게 돌아오겠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요엘 선지자가 새롭게 발견하고 말하고 싶은 패턴이 이거에요. 하나님은 심판하실 꺼에요. 잘못에 대해서. 그렇지만 이들이 공동체 제의적 회개를 통해서 참으로 돌아오면 하나님이 돌아오겠다는 거에요. 그런데 요 패턴이 아모스서로 그대로 넘어갑니다. 그 패턴을, 새로운 하나님의 회개의 첫번째 패턴을 위해서 요엘서가 호세아서와 아모스 사이에 얹어져 있는겁니다. 공동체 제의적 회개운동. 예배의 형식이 무너지고, 자유로움이라는 명분아래 우리가 진작에 갖추고 무너뜨리지 말아야 될 것들을 이미 놓치고 있는 건 무엇인지 한번 돌아보면서 팀은 팀별로 진은 진별로 조는 조별로 목장은 목장대로 다시 한번 이 푸르른 10월만큼이나 우리의 마음도 모든 의욕과 불신의 먹장구름을 걷어내고 테스 형 왜 그래 가 아니라, 테스가 답을 주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이 시대에 우리에게 뭘 설명하고 있는가? 공동체 제의적 회개운동에 다시 한번 박차를 가하는 하늘 높은 가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