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1)
“역사의 주어, 하나님이”
창 1:1
1장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00:00-05:00)
교회론 강해 끝나고 기도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성도들에게 어떤 말씀을 나누는 것이 유익할까 생각하다가 창세기 강해를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누구와 의논을 한 것은 아니고, 순서상으로 창세기 강해가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여러분들 표정이 '주님 오실 때까지 이거 끝나겠나~' (웃음)
창세기가 50장까지 있어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죠. 1장부터 11장까지를 인류의 원역사라고 하고, 12장 아브라함이 나오는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를 구속사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앞 부분이 구속사에 속하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다 구속사에 관한 책인데 두 부분으로 나뉘는 거예요. 01:02
우선 11장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11장까지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인류를 왜 만드셨고, 어떻게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고, 구속이 되었고 회복이 되는가를 그대로 담아내는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그래서 본인이 사망하지 않는 한 빠지지 마시고 잘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서론시간입니다. 오늘도 3부까지 하다보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하다가 끝났어요. 그만큼 창세기에 본격 들어가기에 앞서 기본적인 이해에 대해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신앙관이 달라집니다. 인생관도 달라집니다. 관점을 프레임(Frame)이라고 하죠. 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기한게 사람은 결국 자기 틀 이상을 못 봐요. 어쩔 수가 없어요.
그림을 하나 볼까요? 02:35 (+그림) 이게 달입니까, 토성입니까, 목성입니까? 어떻게 알았어요? 이 위치와 높이에서 지구를 이렇게 본 적이 있나요? 지금 여러분이 한 대답은 학습된 대답이지 경험적인 대답이 아니지요?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조금만 높이 올라가서 땅을 봐도 참 새롭고 경이롭습니다. 인간 사는게 저거 밖에 안되는데, 저기서 그렇게 아웅다웅 싸우고 다투고 붙잡고 헐뜯고 그랬을까. 이런 새로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 정도 높이에서 지구를 보면 종교적 경험같은 경이로움이 생긴다고 해요. 같은 이야기를 서울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최인철 박사가 프레임이라는 강의를 하면서 했어요. 그 분이 사용한 그림입니다. 지구예요. 지구를 이렇게 보면 저기에는 국경도 안 보이고 검은 사람, 흰 사람도 안 보이고,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도 안 보여요. 높이 올라가 볼 수록 그 대상은 본질이 드러나기 시작해요. 의미가 드러나기 시작해요. 그런데 여기 앉아있는 분들 중에는 지구를 저렇게 본 사람이 없을 가능성이 높죠? 몇 사람 있을 수도 있겠죠. 우주선을 타고 지구 대기권을 벗어나면 지구가 저렇게 보였을 거예요. 그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가 종교적 체험을 갖는 정도의 신비한 경이로움이 있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끼리 모임을 결성하고 책을 하나 썼습니다. 그 책 이름이 <The Overview Effect>라는 책이예요. 제가 읽지는 않았지만 최인철 박사가 인용한 부분을 제가 다시 인용해보면 이런 글귀가 있어요.
(05:00-10:00)
큰 그림을 한 번 보고 나면 이제는 더 이상 그 전과 같은 삶의 방식으로 살 수가 없더라.
사물을 다른 위치에서만 봐도 인생에 그런 변화가 일어나요. 우리가 늘 신앙인으로 성경을 대하고 읽고 살지만, 창세기를 그 중에서도 특별히 오늘 우리가 다룰 1장 1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뿐만 아니라 모든 인생관이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거예요. 프레임이 달라지는 겁니다. 오늘 그런 새로운 경이로움이 창세기 강해를 듣는 가운데 여러분 신앙 속에 경천동지할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걸 흔들림이라고 하죠. 견고하게 믿고 의지했던 것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는 거예요. 인생에 한 두 번쯤 그런 경험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창세기는 그런 점에서 굉장히 위험한 책이 될 수도 있어요.
창세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창세기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 해요. 우리 한글 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 천지는 사실상 두 단어죠. 하늘과 땅 - 창조하시니라. 다섯 묶음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원래 언어인 -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쓰여있죠 - 원문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07:09 (+원문)
(웃음) 암호같죠? 신학생들도 거의 그리는 수준으로 배워요. 헬라어는 조금 덜한데 히브리어는 너무 어려워요. 글자 밑에 점이 붙어있죠? 모음입니다. 원래 히브리어에는 모음이 없어요. 후대 학자들이 읽기 편하도록 모음을 만들어서 갖다 붙인 겁니다. 원래는 저 점이 다 없어야 해요. 히브리어는 자음밖에 없습니다. 읽는 순서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습니다. 우리 글이나 영어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거랑은 다르죠. 거꾸로예요.
저걸 그대로 읽으면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베헤트 하아레츠.가 됩니다. 우리가 그래도 기독교인인데 성경의 첫 글자 첫 문장 정도는 한번 읽어보는 경험을 갖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같이 따라서 읽어보십시다. 베레쉬트 (베레쉬트) 바라 (바라) 엘로힘 (엘로힘) 에트 (에트) 하샤마임 (하샤마임) 베에트(베에트) 하아레츠 (하아레츠)
모두 일곱 단어로 되어 있어요. 28개의 글자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건 상식으로 알고 있으면 됩니다. 첫 글자 베레쉬트. 태초에. 창세기라는 책의 이름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베레쉬트를 헬라어로 하면 게네시스 영어로는 Genesis. 자동차 이름이 아닙니다. 그걸 딴 것인지는 몰라도 시작의 책이다 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여기에서 '시작의 책'이라는 이름을 따 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책이 시작되는 첫 글자를 책 제목으로 삼는 경우가 왕왕 있어요. 책 이름은 이 정도로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두 번째로 성경을 읽을 때는 기본적인 세 가지 개념이 있어요. 1) 독자의 시각. 저와 여러분을 얘기할 수 있겠죠. 우리가 독자로 성경을 읽어요.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읽느냐가 중요하겠죠? 그 독자가 2) 텍스트, 본문을 읽어요. 그런데 본문이 아무리 강조해도 중요하지만 본문만 집중만 하게 되면 문자주의에 빠질 수가 있어요. 본문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이 저자의 의도 입니다. 저자가 이 단어를 채택하고 이 문장을 썼을 때 무슨 이유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썼느냐를 아는 것은 본문을 아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어쩌면 본문보다 더 중요할 때가 많아요.
창세기 저자는 누구일까요? 하나님이라는 사람이 있고, 모세라는 사람도 있어요. 둘 다 맞아요. 정확히 표현하면 저자는 하나님이시고 기록자가 모세입니다. 모세가 기록자라고 해서 타이피스트가 받아 찍듯이 기록했다는 말은 아니에요 하나님이 성령의 영감을 통해서 성경을 기록할 때는 물론 저자는 하나님, 성령님이시지만 기록자는 그 사람의 손 만을 이용해 기계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성품, 출신 배경, 학식의 유무, 인성, 이성의 이해력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종합되어서 유기적인 영감을 받은 겁니다.
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세는 이 책을 언제 썼는가? 모세는 창세기 시절보다는 한참 뒤에 사람이에요. 이것이 이 책의 의도와 저자의 목적을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설명이 됩니다. 여기까지는 어려운 것이 없죠? 네. 앞으로 어려울 일이 많아요. (웃음) 그러니까 집중해서 들으셔야 합니다. 모세는 이 책을 어디서 언제 기록했는가를 알면 이 책의 목적과 의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모세는 어디에서 자랐습니까? 나일강에 던져지고 목욕을 하러 나왔던 바로의 딸이 모세를 건져 양자 삼습니다. 모세는 궁궐에서 40년을 살아요. 일단 이 기간 동안에 창세기를 쓴 건 아닙니다. 애굽에 살던 모세의 청년 시절에 기록했다 볼 수 없어요. 그리고 그는 사실상 살인자가 되어서 광야에서 40년을 돌아다니게 됩니다. 그 기간도 아니에요. 그리고 80세가 되던 때 가시떨기 불꽃 가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지요. 그리고 등 떠밀리듯 이스라엘 공동체를 애굽에서 구출해내는 지도자로 세워집니다. 14:31
그리고 4백년동안 4대를 애굽의 노예로 살던 히브리 공동체를 끌어내서 출애굽시켜요. 그리고 나서 본인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나안 목전에서 죽습니다. 최소한 광야 40년간 이 책이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15:01 정확한 학설입니다. 그러면 그 40년 중에서도 어느 시기냐?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시내산 아래에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2년 남짓 머물렀던 기간이있어요. 그 때 모세는 시내산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경험하고 십계명을 받고 하나님과 깊은 교감을 하는 경험을 합니다. 모든 학자들이 일치된 견해로 이 때를 창세기가 기록된 때로 봅니다. 모세가 시내산 아래에서 백성들과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이 책을 받아 적지 않았겠는가. 그 기간 외에는 기록할 수 있었던 시기가 없어요.
지금 이 책을 썼던 시기는 시내산 아래 이스라엘 공동체가 광야 생활 중에 머물렀던 기간이에요. 그런데 이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이에요. 애굽은 대제국이고 화려한 문명을 자랑하던 나라입니다. 거기에서 지배적이었던 삶의 가치는 철저하게 물질숭배와 우상숭배예요. 히브리 노예들은 거기에서 비록 고달픈 몸이었으나 그 문명을 세포 하나하나에 젖어 들도록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애굽의 문명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요. 애굽의 가치에 물들어 있는 거죠. 그런데 그들이 어느 날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 모세를 따라서 얼결에 따라 나온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의 실현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출해냅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 산 밑에 200만 가까운 사람들이 운집해 있어요. 상상을 해보세요. 이 백성들의 상태는 어떨까요? 홍해를 건너고 나서 제일 먼저 터트린 불만이 뭔지 아세요? 철저하게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떡을 내라. 빵을 내라. 물을 내라. 심지어는 광야에서 죽어도 묻힐 매장지가 없다는 소리를 합니다. 이것이 그대로 모세에게 들리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으로 자리잡기 시작해요. 이런 백성들의 들끓는 불만과 불신앙을 무엇으로 잠재울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의 지도력으로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모세 한 사람의 지도력으로 2백만에 가까운 사람들의 불평불만불신앙을 어떻게 잠재우고 지도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성령으로 책을 받아 적게 하십니다. 그것이 창세기고 모세오경이에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 권의 책을 ‘토라’라고 합니다. 성경 전체가 토라가 아니에요. 모세의 글이라고도 하죠. 이스라엘의 신앙의 굉장히 중요한 기초요 뿌리가 됩니다. 즉, 이런 때에 이 책이 쓰여졌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 때에.
그러면 우리 마음 속에 또 한 가지 벗겨야 할 증언이 있어요. 목사님 알겠는데 그게 오늘을 사는 우리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이 배경을 오늘을 사는 여러분들에게 말씀의 bridge를 통해 적용을 해봅시다. 여러분이 가끔 저에게 적용 좀 해달라고 하는데, 오늘 합시다! 지금 우리나라 상황은 5천년 역사 중에 가장 풍요한 시대를 맞았지만 가장 혹독한 정신적
20:01 빈곤을 겪고 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지 130년이 지났어요.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의 짧은 기간 동안 가장 신앙이 좋았고 정숙했고 정결했던 시대가 언제인지 아세요? 일제 강점기와 625 직후입니다. 그 때 가장 이 땅의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좋았어요. 지금만큼의 숫자는 안 되었을지언정 그 때 가장 신앙이 좋았어요. 고난의 풀뿌리를 먹으면서 초근목피에 온 백성이 주릴 때 가장 신앙이 좋았어요. 그런데 지금 보세요. 홍해시대도 지나가고 광야시대도 지나갔어요. 이제는 일제를 경험하고 625라는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세대도 다 지나갔어요. 그리고 5천년 역사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혁신 속도 1위라고 하는 나라가 됐어요. 가장 풍요한 시대를 살고 있기도 하죠. 그런데 우리의 이성, 인성, 철학 이런 인문학적인 소양에 대해서는 가장 빈곤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사기 2장의 말씀처럼 홍해시대도 지나가고 광야시대도 지나가고 다른 세대가 일어났으니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해서 행하신 것도 알지 못하였더라. 지금이 딱 그런 시대입니다. 4백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는 가운데 그들은 여호와의 언약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애굽의 물질만능주의와 우상숭배에 매몰되어서 다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던져진 현실은 광야라는 매우 메마르고 척박한 현장이에요. 그들의 생각 속에서 비교할 것이 애굽의 화려한 문명밖에 없어요. 이 때 이 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어쩌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창세기의 말씀은 성경 중에 우리가 다시 들어야 하고 열려야 할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창세기를 접근해봤으면 좋겠어요.
여기까지가 서론이라면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1절 같이 읽어볼까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러분, 이 한 절만 가만히 우리 마음에 담고 눈을 감고 묵상을 하면, 모든 인생의 헝클어진 문제가 여기서 다 실마리가 열립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세상의 기원을 말하고자 하는 책도 아닙니다. 지구가 몇 년 됐는지 고고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책도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하나님의 구원사를 선포하는 책이지 설명하지 않아요. 이 책은 창조론이냐 아니냐를 가늠하는 책도 아닙니다. 예수님도 마가복음 13장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막 13:19)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예수님도 창조론자예요. 이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을
25:01 예수님도 스스로 동의하고 말씀하고 계세요. 뿐만 아닙니다. 제가 지금 컵을 들었죠. 여기에는 누구도 저 컵이 어떻게 생겼을까? 우연히 생겼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있어요? 없죠. 이 컵이 어떻게 우연히 생깁니까. 누구나 그렇게 얘기할 겁니다. 그거야 만든 사람이 있겠지. 그런 단순한 상식이 이 천지 오묘한 질서를 보면서는 무신론자가 나올까요. 그건 영이 죽어서 그래요. 나무 끝에 달린 풀 잎사귀의 변하는 색을 보면서 그 질서를 보면서 거기에 우주보다 더 넓은 하나님의 경의가 담겨있어요. 어떻게 우연히 생겨요. 어떻게? 말이 안 되는 얘기죠. 성경은 그런 창조론의 시비를 가리자는 책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요? 아까 본 히브리어를 다시 띄워 주세요 (+) 26:20
오른쪽부터 읽으면 첫 글자가 베레쉬트입니다. 이 글자는 사실상 베/레쉬트 이렇게 두 글자로 끊어읽어야 합니다. 베는 원래 벳, 집이라는 의미도 되면서 동시에 전치사입니다. 다른 단어와 결합될 때는 전치사가 됩니다. ~에, ~으로, ~을 통해서. 레쉬트라는 단어와 붙어있어요. 레쉬트라는 말은 첫 것, 처음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에 관련된 성경 구절을 제가 몇 개 읽어드리겠습니다.
레위기
(레 23: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 그 땅의 수확물을 거둘 때에 너희 수확물의 첫 열매.
여기에 첫 열매가 레쉬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골로새서 1장
(골 1:16-18)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 - 여기서 머리가 첫 것이라는 뜻입니다. 레쉬트입니다. 그가 근본이시요. 이것도 레쉬트입니다. 만물의 으뜸. 여럿 중에 최고라는 것이죠. 그 말은 시작이시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성경의 모든 용례로 종합해서 볼 때 이 레쉬트라는 말은 시작, 첫 것, 전부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설명되는 단어입니다. 베레쉬트. 성경의 첫 단어예요. 이 말을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이 이야기를 골로새서 1장 16절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30:00
골로새서 1장 16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창세기 1장 1절 속에 이미 모든 세상의 역사와 시작이 그리스도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요. 그 말이 "태초에" 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때문에. 이것이 베레쉬트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사야 선지자가 기막히게 설명했어요.
이사야 46:10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언제부터 베레쉬트. 태초에. 무엇을 알리며? 그 태초에 이미 종말을 담고 있었다는 거예요. 종말을 보였다는 얘기입니다. 시작은 그리스도예요. 종말도 그리스도예요. 이걸 계시록에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알파는 헬라어의 첫 글자에요. 오메가는 헬라어의 마지막 글자입니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말하자면 종말은 구원보다 앞서요. 그 말은 구원이라는 것은 시간 속에 펼쳐내는 과정이에요. 그런데 이미 창세기 1장 1절 속에 하나님은 종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가 누구로부터 시작되어서 누구로부터 끝이나는가.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어서 그리스도로 끝날 것이다.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 구원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미 보이고 계시죠. 창세기 1장 1절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 때문에. 전부 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장에 태초라는 말과 창세기 1장의 태초라는 말의 시간적인 개념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합니다.
요한복음 1장의 태초에. 는 시작 시간이 없는, 말 그대로 영원한 시간을 얘기합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태초는 in the beginning 시작이 있는 태초를 이야기 합니다. 이 주석과 해석이 맞아요. 그러나 이 것을 영적인 의미로 환치시켜서 다시 설명할 때, 이 태초라는 베레쉬트라는 말 속에는 그리스도의 그림이 감춰 있는 거예요. 그 얘기를 골로새서에서 1:16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외우세요!.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것이 태초라는 말 속에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에요.
이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서 46장을 통해 이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시초에 종말을 보이셨다. 온 인류의 시작과 끝은 그리스도입니다. 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두 번째 단어를 볼까요?
태초에 누가? 하나님이.
엘로힘. 하나님이.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눈높이에서 보기 시작할 때 인생의 방식과 목적이 달라질 수 밖에 없어요. 이 대표적인 인물이 요셉입니다. 요셉은
35:00 이 땅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갔었지만 그 때만해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기근이 오고 양식을 구하러 온 형들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 입에서 처음으로 나왔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아세요?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어가 됐어요. 오늘 말씀의 제목이 뭐죠? 역사의 주어. 하나님이.
내 입에서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어가 되어 터져나올 때까지 길고 긴 시간이 걸려요. 이 문제만 해결이 되면 저 높은 대기권을 벗어나 지구를 봤던 사람들의 고백처럼 우리는 지난 삶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게 됩니다. 아, 하나님이 하신 일이셨구나.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어가 될 때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주시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강해를 듣는 가운데, 여러분 속에 그런 삶과 인생에 대한 새로운 경이로움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 일어나십니다. 찬송가 79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